(7 번) 용어하도에서 황제가 섭정시 치우의 형제 81인이 있었는데 짐승의 몸으로 사람의 말을 썼으며 머리는 동이고 이마는 철이며 모래를 먹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오병을 양성하고 무기를 만들어 천하를 진동케하고 무도하게 만민을 살해하였다. (龍魚河圖云黃帝攝政有蚩尤兄弟八十人 獸身人語銅頭鐵額 食沙造五兵仗刀戟大弩威振天下 誅殺無道萬民) (용어하도운황제섭정유치우형제팔십인 수신인어동두철액 식사조오병장도극대노위진천하 주살무도만민)
네티즌 여러분 믿기지 않겠지만 윗내용은 중국정사에 기록된 치우천자에 대한 생생한 기록입니다 어느나라도 자기민족의 시조(헌원)를 논하면서 이민족의 수장(치우천자)에 대해서 이렇게 공포심에 질린 표현을 할 수는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두려움의 대상이었길래 이렇게 기록을 하였을까요 이분이 우리민족 단군왕검이전 400여년전 구리시대 14대 치우천자의 역사입니다 반드시 복원하여야 합니다
(사마천의 사기 본기 권1-4)
▒ 해설
(9 번)
황람의 말을 인용하여 치우의 묘는 동평군수장현함향성안에 있으며 높이는 7길이고 10월에 백성들이 제사지내는데 붉은 기운이 비단같이 솟아 올라사람들이 "치우기"라고 부른다. (皇覽曰蚩尤冢吊平郡壽張縣闞鄕城中高七丈民常十月祀之 有赤旗出如匹縫帛民名爲蚩尤旗) (황람왈치우총재동평군수장현감향성중고칠장민상십월사지 유적기출여필봉백민명위치우기)
또한 그 부인의 묘가 산양군 거야현에 있다 또는 어깨와 팔무덤이 산양군 거야현에 있다 (肩臂冢在山陽郡鉅野縣)(견비총재산양군거야현)
-> 논의의 여지가 있는 부분임
치우가 탁록전에서 싸워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는데 어찌 어깨와 팔의 무덤이 있을수 있는가 ? 치우천자와 어깨와 견줄수 있는 사람은 부인뿐이다 최근 치우천자의 부인이름이 밝혀졌다 (추후 공개예정) (오재성 설)
(10 번) 치우가 난을 일으켜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으므로 탁록의 들에서 치우와 싸웠다. (蚩尤作亂不用帝命於是黃帝乃徵師諸侯與蚩尤戰於涿鹿之野) (치우작란불용제명어시황제내징사제후여치우전어탁록지야)
(지도 해설)
- 동평 : 치우천자의 무덤이 있는 곳 - 거야 : 치우천자 부인 "견비"의 무덤이 있는 곳 (어깨/팔의 무덤 ?) - 수구 : 제후국 소전의 아들 "헌원"이 태어난 곳 - 탁록 : 치우천자에 반기를 들어 쫒겨다니다 "탁록"에서 최종적으로 황제가 패함 - 황릉 : 고원지대 척박한 땅 장안 인근으로 달아나 끝끝내 "헌원"이 태어난 옥토 산동성 고향으로 돌아 오지 못하고 "황릉"에 묻힘(위치가 조금 아래로 내려가야함/정정예정)
▒ 운영자 부언
곰곰히 생각해 본다. 황제는 왜 자기가 태어난곳에서 묻히지 못하고 그 머나먼 장안북쪽 황릉에 가서 묻혔을까 ?
한단고기의 기록을 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 제후의 아들인 헌원이 치우천자에 반역을 도모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징벌, 황제는 태행산맥 서쪽으로 쫒겨나 지나족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 아닌가 ?
상식적으로 쉽게 생각해도 풀리는 부분 아닌가 ?
이것이 왜 신화인가 ? 동평군 수장현에 있는 치우천자의 무덤과 그 유적지를 뜻있는 분들이 피나는 노력을 하여 직접발굴하였고 바로 이홈페이지에 공개하였다
이토록 자랑스런 우리 역사를 죽어도 아니라고 부정하는 저 오만과 가식에 가득찬 매국식민도제식조폭학자들은 도대체 어느나라의 사람인가 ?
(구리국 치우천자의 기록이 아직도 허구라 믿는가 ?)
중국 정사 기록의 원칙은 "나의 것은 과장하여 쓰되, 남의 것은 축소하여 기록한다" 이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두려움의 존재로 여기어 졌으면 중국 최고의 정사 제일 앞부분에 이렇게 많은 부분을 기록하였을까 ?
사기에는 헌원이 이긴 것으로 되어있으나 한단고기에는 분명 70여회의 전쟁에서 헌원이 단한번도 이긴적이 없는 것으로 기록 되어있다
더구나 뒤편에서는 헌원은 제후의 아들이라고 정사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
누구것을 따를 것인가 ? 중국정사에 있고 우리 기록에도 있다 그것이 야사라 하여 보지도 않고 부정하는 태도는 중국정사도 제대로 보지못한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한단고기의 일부 기록)
자오지(정사에서는 치우천자로 표현)한웅이 나셨는데, 귀신같은 용맹이 뛰어났으니 동두철액을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천하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그를 치우천왕이라고 불렀으니 치우란 속된 말로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을 가진다
(중략)
황제헌원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의 벌판으로 나아가서 "황제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을 보내 서쪽으로 제곡고신을 쳐 공을 세우게 하더라.
(맺음말)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하면서 B.C 2700년대 중국민족의 시조 황제헌원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 동시대 유명인이었던 "구리"의 치우천자를 비교론법으로 기술하고 있다.
우리의 사서에도 있고 중국의 사서에도 있는 공통부분이다. 왜 믿지도 않고 연구도 않고 거짓이라고만 하는 걸까 ?
치우천자와 황제헌원의 사연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천손민족 "구리"의 치우천자께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 제후국의 소전의 아들이었던 황제헌원이 반란을 일으키자 치우천자가 탁록에서 징벌을 하였다
이에 황제헌원은 매일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소를 옮겨다녔으며 70여회의 전쟁에서 한번도 싸워 이겨보지 못하고 결국 태행산맥 서쪽으로 고산지대 척박한 땅으로 도망을 가 중화민족의 시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