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 대박해 때 숨어서 지킨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앙촌
1866년 병인박해와 1871년 신미양요 때 신자들이 피난처를 찾아 헤매던 중 산간벽지인 이곳이 관헌들의 눈을 피하기에 알맞은 곳이라 신자들을 모아 한 촌락을 이루었다. 일부는 화전을 일구고, 일부는 토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며 20년을 지내다가 1888년 6월 20일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 신부로 르메르(Le Merre, 1858~1928, 루수) 신부가 부임하여 춘천, 화천, 양구, 홍천, 원주, 양평 등 12개 군을 관할하였으며, 당시 신자 수는 약 2,000명이었고 초가집 20여 칸을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일설에는 이곳 풍수원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용인에서 신태보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여 40여 명의 신자들이 8일 동안 피난처를 찾아 헤매다가 정착한 교우촌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나 다블뤼 주교의 기록에 의하면 신태보가 신자들을 이끌고 강원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고만 되어 있고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이 없으므로 향후 본격적인 고증을 요하는 곳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특징은 첫째, 성직자의 도움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창설했고 둘째, 학문 연구에서 출발한 것이 종교와 신앙으로 발전했으며 셋째, 신앙이 교우들에게 뿌리 내리면서 성직자를 영입하려 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강원도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도 역시 같은 양태로 이루어지게 되며,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풍수원 성당이다.
1896년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정규하( 鄭圭夏, 1863~1943,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현재의 성당을 중국인 기술자들과 함께 1905년에 착공해서 1907년에 준공했고 2년 뒤인 1909년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이 성당은 신자들이 직접 벽돌을 굽고 아름드리 나무를 해 오는 등 건축 소재를 스스로 조달했는데, 그 열성은 가히 오늘날 신자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1888년 6월 20일 본당이 설립되어 풍수원에 세워진 현재의 성당은 한국인 신부가 지은 첫 번째 성당이고, 한국에서 네 번째로 지어진 것이다. 더욱이 지난 1982년에는 강원도에 의해 지방 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역사적 유물이기도 하다. 한편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닌 것으로 알려진 성체 현양 대회가 매년 열리는데 제1회 성체 대회가 1920년에 실시된 이래 6·25 전쟁으로 빠진 3년간을 제외하고는 매년 열려 왔다. 풍수원은 오랜 역사만큼 30여 명이 넘는 사제를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로서도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곳이라 할 수 있다.
현재 풍수원 성당 성역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대지 78만평에 바이블파크동산 6만 8천평을 조성하려는 성역화 사업은 2005년 말까지 공사를 마감할 예정으로 되어 있다
■ 순교자
◆ 순교자 신태보 베드로 (1768?∼1839년) <하느님의 종 124위>
경기도의 용인 근처에서 태어난 신태보 베드로는 1795년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신자가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끝난 뒤, 베드로는 용인에 거주하던 순교자의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조선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관심을 갖고 이를 위한 경비를 마련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생활하다가 경상도 상주의 잣골에 정착하여 은둔 생활을 하였다.
1827년 전라도에서 정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12년 동안을 전주 옥에서 생활하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난 5월 29일(음력 4월 17일) 전주 장터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 가량이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