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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200× 91매
광어와 도다리
安 輝
"송 선생님! 어제 먹은 도다리 말입니다."
"도다리요?"
"예, 그 도다리가 진짜 자연산 도다리 맞아요?"
5교시 오후 마지막 수업이 막 끝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교무실로 왔을 때, 국어과목을 가르치는 이 선생이 내 자리로 왔다. 어제저녁, 웬 바람이 불었는지 이 선생은 내게 소주나 한 잔 하자고 제의를 해왔고, 나는 그를 따라서 시장 통에 있는 생선회집엘 갔었다. 자연산 도다리가 좋은 게 있다고 한사코 유혹하는 횟집 여주인의 말에 결국 넘어가, 둘레가 한 아름은 될 것 같은 커다란 접시에 포 떠 담긴 그 놈을 안주로 놓고 둘이서 각 두 병씩 도합 네 병의 소주를 마셨다. 푸짐한 생선회 안주를 곁들여 마신 술이 넘친 듯 만 듯 알딸딸한 그 기분으로, 노래방에서 한 시간 남짓 트로트 뽕짝 디스코 섞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다가 흩어져 각자 집으로 갔었다.
이 선생이 내 자리로 와서 어제 우리가 먹은 도다리가 자연산 도다리가 맞는지를 물어온 데는 내 전공과목이 생물이라서 더욱 그랬던 것 같은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글쎄요. 횟집 주인이 자연산 도다리라고 했으니까, 자연산 아니었겠습니까?"
도시(都是), 생물이라는 과목이 도다리 감별하는 과목도 아니고 그래서 좀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내게 회 음식 맛을 알게 해준 사람이 바로 이 선생이기도 해서 별다른 유감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우리가 속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연산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쉽지 않은 점을 이용하여 양식 광어를 자연산 도다리로 팔아먹는 생선회집이 많다는 겁니다."
"아, 그래요?"
"오늘 제가 박 선생님한테 들은 이야기인데요, 그걸 그렇게 속여먹는 곳이 수두룩하다더군요."
박 선생은 체육과목 담당이다.
"박 선생님은 생선에 대해서 잘 아시나보죠?"
"고향이 동해 묵호라던가 거기라서 잘 안다대요."
"거기가 고향이라면 잘 아시겠네."
이 선생은 어제 먹은 회가 도다리가 아니었다는 의구심을 영 떨쳐버리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기 자리로 갔다. 이 선생은 왜 어제 먹은 도다리의 진위에 대해서 집착하는 걸까. 도다리라고 믿고 맛있게 잘 먹었으면 됐지,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 그 때, 교무실 전화벨이 울렸고, 수화기를 들었던 교감선생이 네, 노을여중학교 맞습니다만, 누구를 찾으시나요? 하고 되묻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교감선생은 '송 선생'하고 나를 부르고는 수화기를 치켜들었다. 내게 전화가 왔다는 신호였다.
"선생님이세요?"
"그렇습니다만, 누구... 신가요?"
여학생인 듯한 여자였는데, 울음기가 약간 고여 있는 목소리였다.
"저, 유미영이예요. 아시겠어요?"
"어, 미영이. 알다마다. 내가 널 왜 모르겠니?"
C여자고등학교 2학년, 탁구선수, 2년 전 우리 노을여중을 졸업한 학생....미영은 내가 중학교 1학년과 2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아이였다.
"선생님. 제가 좀 뵙고 싶거든요. 저 지금 학교 앞에 와 있어요."
"그래? 그럼 교무실로 들어오지 않고서?"
"아뇨. 제가 교문 바로 안쪽에 있는 등나무 밑으로 갈게요."
"그래? ..... . 그럼 그렇게 하렴. 내 금방 나갈 테니까."
웬 일일까. 미영은 불우한 환경임에도 재주가 많은 아이였다. 글짓기를 잘 했고, 운동능력도 뛰어났다. 탁구선수 출신인 박 선생의 부임으로 노을여중은 탁구부가 활성화된 학교였다. 미영은 나의 적극적인 권유와 박 선생의 지도에 의해 탁구선수가 됐다. 그것은 아주 잘 된 일이었다. 2학년 때 전국대회에서 입상을 하면서 장학금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다행스럽고 좋은 일이었다.
등나무 아래에 있는 벤치에 먼저 와서 다소곳이 앉아있던 미영은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중학교 때보다 키가 많이 자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제법 처녀티가 나도록 성숙해 보였다. 아이는 교복차림이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래, 미영이로구나. 그간 잘 지냈어?"
"네."
"참, 네 어머닌 안녕하시냐?"
"네."
그러나 미영은 웃고 있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컁컁한 얼굴에 수심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선 아이를 의자에 다시 앉히고 내가 물었다.
"너, 무슨 일이 있는가보구나."
그러자, 미영은 정색을 했다.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어요."
그러면서도 아이의 눈엔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아닌데? 아니야. 너 분명 무슨 일이 있어."
미영은 도리질까지 쳐가며 다시 아니라고, 아무 일도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나를 찾아왔니?"
"........ ."
"무슨 일이 있으니까, 날 찾아온 거 아냐?"
"아니에요. 그냥 선생님이 뵙고 싶어서 왔어요."
그러는 아이는 여전히 솟아오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 아이가 왜 이러나?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혹시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미영의 어머니는 농아(청각장애인)였다. 아버지라는 사람은 미영이가 어릴 때 집을 나가버려서 어머니가 빌딩청소부 일로 아이를 키웠다. 어려운 살림살이였음에도, 악착같이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는 어머니였다.
아무래도 미영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분명한데, 아이는 통 말을 하고 싶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그쳐 묻는 일이 오히려 고통일 거였다. 이럴 때 아이들은 좀 기다려줘야 한다.
"요즘 운동은 잘 되니?"
사실 박 선생을 통해서 미영이 중학교시절 만큼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대회에 꼬박꼬박 나가기는 하는 모양이었으나,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아이의 얼굴에서 초췌함을 걷어내려고 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미영은 음울하고 초라한 눈빛을 바꾸지 못하고, 자꾸만 눈물이 고여 오는 눈을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이의 표정과 몸짓에는 형언키 어려운 두려움이 잔뜩 배어 있었다.
미영은 대답대신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는 황당한 심사에 빠지고 있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아이는 한참 동안 앞으로 허리를 숙여 얼굴을 파묻고 그렇게 흐느껴 울었다. 아이의 몸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한동안을 그러던 미영은 갑자기 눈물을 훔치며 일어났다.
"죄송해요, 선생님."
"아니다. 그런데, 왜 그러니?"
"아니에요. 저 그만 갈게요. 다시 연락드릴게요. 정말 죄송해요."
그러면서 미영은 내가 미처 붙잡을 사이도 없이 교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무슨 일인가.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벤치에 앉아 잠시 난감한 생각에 잠겼던 나는 교무실로 돌아왔다. 대체 무슨 일인가.
* *
"박 선생님! 광어하고 도다리 구분하는 방법 좀 가르쳐 주시죠."
아침수업을 앞두고 둘러앉아 몇몇 선생들끼리 커피타임을 갖는 것은 꽤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젯밤의 소주파티로 적잖이 피곤했는데도 불구하고, 간밤엔 잠을 설쳤다. 오후에 학교에 찾아와 말없이 눈물만 쏟고 돌아간 미영의 일도 잠자리를 심란하게 한 또 한 가지 이유였다. 커피타임을 시작하자마자 이 선생은 박 선생을 붙들고 늘어졌다. 도다리에 관한 이 선생의 의문은 참으로 끈질기다.
"좌광우도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좌광우도?"
"횟감의 눈과 입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을 때, 눈이 왼쪽으로 몰려 있으면 광어, 오른 쪽으로 몰려 있으면 도다리라는 얘기죠."
"아하. 그럼 자연산과 양식은 어떻게 가려내나요?"
"자연산 광어나 도다리는 뒤집어 보면 대개 배가 하얗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어서 그저 붉은 빛이나, 벌겋게 멍든 부분만 없으면 색깔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빨이 가지런한 놈일수록 양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생존을 위한 풍파를 겪다보니 자연산은 거의가 이빨이 불규칙하죠."
이번엔 내가 궁금증을 보태어 물었다.
"생선회집에서 속여서 팔기도 한다면서요? 어떻게 속이나요?"
박 선생은 입가에 씩 웃음을 띠었다.
"자연산 도다리라고 하고서 양식 광어를 내놓는 것이 가장 고전적인 수법이죠. 자연산 도다리의 뼈에다가 광어회의 살점들을 장식하여 내놓기도 하고, 관광지에는 아예 뼈를 내놓지 않는 곳도 많지요."
"매운탕 나올 때 알게 되지 않나요?"
"그건 간단합니다. 매운탕 속 고기의 머리 부분을 으깨어버려서 눈이 어떻게 달려 있는지 모르게 하죠. 대개의 경우,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그걸 구별해내는 손님은 많지 않습니다. 거의 없다고 봐야죠."
이 선생은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좌광우도라 이 말이지. 박 선생 덕분에 이제 양식 광어를 자연산 도다리로 알고 사먹는 멍청한 짓은 안 해도 되겠네. 하핫...... ."
아침 커피타임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수업이 많이 들어있는 날이었다. 오전에 세 시간, 오후에 둘 그렇게 다섯 시간이나 목을 혹사해야 되는 날이었다. 이런 날은 부담이 워낙 커서 아침부터 긴장감이 느껴지곤 했다.
3교시 수업을 마치고 났을 때였다. 교무실로 막 들어서는데, 박 선생이 내게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송 선생님. 유미영이 소식 들었습니까?"
"예? 유미영이요? 무슨 일인데요?"
그러면서, 나는 그 아이 바로 어제 나한테 왔다 갔는데요, 그렇게 말하려다가 무슨 일이 났는지가 더 궁금하여 내 말을 뒤로 미뤘다. 안 그래도 어제의 일 때문에 꽤 신경이 쓰이는 판이기도 했다.
"글쎄 그 아이가 간밤에 음독을 했다지 뭡니까?"
"네에? 음독이요?"
소름이 끼치도록 큰 놀라움이 일어나 내 심장에다가 북채를 휘둘러 두드리는 듯 쿵쿵 흥분을 일으켰다. 아뿔싸, 어제의 일이 예삿일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어떻게 됐나요? 죽지는 않았나요?"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는군요. 제 엄마가 발견을 해서 시립병원 응급실로 부랴부랴 옮겼는데,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대요."
왜 그랬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왜 그랬답니까?"
박 선생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글쎄요. 뚜렷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군요. 그 아이가 올 들어 컨디션이 갑자기 뚝 떨어져서 시합성적이 안 좋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선수들이 그렇다고 다 자살합니까? 운동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슬럼프는 있는 건데..... ."
무슨 일일까? 한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아이라, 나 역시 그 아이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이따가 수업 끝나고 병원에 함께 가보시렵니까?"
박 선생이 먼저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가 어제 학교로 나를 찾아왔었다는 이야기는 끝내 하지 않았다. 음독을 계획하고 있는 아이가 찾아온 일을 무심히 넘겼던 내게도 어쨌든 허물이 있다싶은 가책이 슬며시 내 마음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런데, 5교시 수업이 막 끝나고 교무실에 돌아왔을 때, 등기우편물 한 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신인은 유미영이었다. 또박 한 그 아이의 글씨가 편지지 위에 빼곡하게 모여 있었다.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털어놓을 것인가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아니, 어쩌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끝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결국 선생님께는 고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아까 낮에 직접 말씀을 드리려고 학교엘 찾아간 건데, 막상 선생님 얼굴을 뵈니까, 눈물만 났어요.
지금껏 살아오면서 저는 선생님에게 가장 따뜻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제 앞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모습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거예요.
전 사실, 지난 이틀 동안 경찰서엘 불려갔었어요. '구원의 전화'에서 일하시는 최 간사님이 나서서 고발해주신 내용에 대해서 고발인조사인가 뭔가를 한다고 경찰서에서 불렀거든요. 그런데, 경찰 아저씨들의 조사는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어요. 절차상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정말 너무 한다 싶을 정도로 꼬치꼬치 캐묻더군요.
저는 사실 불쌍한 우리 엄마 때문에도 죽지는 않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경찰 아저씨들의 조사를 받으면서 저는 죽음밖에 길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 장소는 어디였냐? 몇 번을 했냐? 기분은 어땠냐? ......... . 자기들은 그게 자신들이 맡은 일일 따름인지는 몰라도, 마치 경찰 아저씨들은 그런 조사를 즐기는 것 같았어요. 조사를 받으면서, 저는 차라리 죽자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지난 겨울방학 때, 저는 저희 학교 체육선생님한테 이상한 짓을 당했습니다. 눈이 하얗게 내린 정월 어느 날 밤이었는데요. 선생님이 특별히 할 얘기가 있으니까, 체육관으로 나오라고 하더군요. 더러 선수들이 선생님과 상담을 하는 적도 있어서 저는 아무런 의심 없이 체육관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다짜고짜 저의 옷을 벗기고는 이상한 짓을 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반항했어요. 하지만, 유도선수 출신인 선생님의 힘에는 감당을 할 수가 없었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고, 온 몸은 멍이 든 것처럼 아프기만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운동도 잘 되지 않았고, 머리가 자꾸 아파 왔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체육선생님을 피했어요. 훈련은 주로 코치선생님이 시키니까, 하루에 한두 번 정도 얼굴을 보게 되는 때에도 가능한 저는 체육선생님의 눈길을 피했어요.
그런데, 지난여름 저는 코치선생님에게 또다시 당하고 말았습니다. 서울로 원정시합을 갔을 때였어요. 같은 모텔이긴 해도 제게 배정된 방이 따로 뚝 떨어져 있어서 이상하다 했더니, 그 날 밤늦게 갑자기 찾아온 코치선생님이 제게 지난겨울 체육선생님이 한 것과 똑같은 짓을 했습니다. 술을 많이 먹었더군요.
선생님. 전 아직 어리잖아요? 뉴스에서나 가끔 보던 그런 일이 제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저는 아직도 믿지 못하겠어요. 왜 선생님들이 제게 그런 짓을 했을까요?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됐어요. 운동도 되지 않고, 그저 잡념만 가득할 뿐이었어요. 사람이 무서웠어요. 죽고 싶은 생각만 자꾸 들었어요. 그래서 몇 번을 망설인 끝에 '구원의 전화'에 전화를 했습니다. 거기에서 자원봉사로 일하시는 최 간사님이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면서 고발장을 써서 경찰서에 접수시키셨어요. 저는 그 분이 하라는 대로 그 고발장이라는 서류에다가 이름을 적고 지장을 찍어드렸습니다.
경찰서에 어제 처음 불려간 저는 떨리는 가슴을 누르면서 묻는 대로 모두 사실대로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체육선생님과, 코치선생님이 둘 다 혐의인가 뭔가를 전면부인한대나 어쩐대나....하여간 자기들은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한 대요. 그래서 좀 더 구체적인 조서가 필요하다고 세세하게 묻기 시작하더군요. 저는 형사아저씨들의 질문을 받으면서 오직 죽어야겠다는 생각만을 했습니다.
저는 아직 어려요. 어린 제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어요. 저의 어머니가 불쌍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살고 싶었는데, 이젠 어쩔 수가 없어요.
하지만, 선생님이 저의 억울함을 꼭 밝혀 주시지 않아도 되요. 다만 누군가에게 진실을 말하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됐어요. 선생님. 정말 고마웠어요. 안녕히 계세요.
미영의 편지는 그렇게 끝이 났다. 아마도 감정에 북받쳐서 그랬을 터였다. 달필로 시작된 글은 끝 부분에 가서는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악필이 되어 있었다. 글을 쓰다가 여러 번 중단했던 느낌도 들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서 한동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런! 이런 일이라니!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는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 적지 않으나, 미영의 편지 속에 들어있는 그런 사건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도랑물을 흙물지게 한다고, 제자를 상대로 저지르는 이런 흉악한 범죄는 정말 드문 일이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이야기이지만, 선생이 제자를 유괴 살해했던 사건 같은 것은 정말 세계의 사건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일일 것이었다. 시간이 한참 흘렀는데도 나는 석고상처럼 그렇게 멍하니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 *
"일단 위세척은 잘 되었습니다. 장기에 이미 흡수된 유독 물질의 양이 문제인데, 지금 상태로 보아서는 괜찮을 것 같기는 합니다."
중환자실 앞에서 만난 인턴인 듯한 젊은 의사는 괜찮을 거라는 말을 여러 번 써가면서 미영의 상태를 설명했다. 미영의 어머니가 초췌한 모습으로 중환자실 앞 복도 의자에 앉아서 연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미영이가 졸업할 때 졸업식장에서 잠깐 본 이후로 처음이었으니, 1년하고도 7개월쯤 되는 세월이었다. 미영의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미영이 당했던 끔찍한 일을 아직 모르는 상황이긴 했어도, 멀쩡하던 딸이 갑자기 음독을 하게 된 일만 놓고도 기절을 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욱이 세상에 하나 뿐인 자식이라면, 어머니가 살아가는 유일한 희망일 게 분명한데.......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영의 행위를 힐난할 수가 없었다. 그런 정황을 모르는 박 선생은 그저 혀를 끌끌 차면서 미영을 비난하는 말을 쏟아놓았다.
"나쁜 녀석! 뭐 때문에 불쌍한 엄마를 버려두고 먼저 가려고 해?"
나는 박 선생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수업이 끝나고, 약속한대로 교장선생에게 아이의 음독사실을 말씀을 드리고 병원까지 함께 온 참이었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나는 망연한 상태였다. 미영을 만나면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어볼 참이었다. 그런데, 중환자실에 있는 미영은 일단 정해진 시간 이외에는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박 선생을 끌다시피 하고서 나는 병원 벤치로 나왔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박 선생님. 미영이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라니요? 그게 뭡니까?"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것은 긴 한숨처럼 내 가슴에 씁쓸한 기분을 가득 고이게 했다.
"미영이가 다니는 C여고 탁구담당 체육선생님 잘 아십니까?"
내 질문이 뜻밖이라는 듯, 박 선생은 뜨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잘 알지요. 유도를 전공한 젊은 선생인데, 마땅한 선생이 없어서 그 선생이 탁구부를 책임지고 있지요."
"탁구선수들을 가르치는 코치도 아시나요?"
"잘 알죠. 국가대표는 아니었어도 국내에서는 꽤 알아주는 선수였죠."
"그래요? 그 두 사람 때문에 미영이는 죽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예? 그게 무슨....얘기인가요?"
나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미영의 편지봉투를 꺼냈다. 그리고는 내용물을 끄집어내어 박 선생에게 내밀었다.
"이거 한 번 읽어보시죠."
박 선생은 매우 궁금한 눈빛으로 편지지를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점차 굳어져 갔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이런?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럴 수가!"
박 선생은 전율마저 담긴 흥분한 얼굴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러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럴 수가'를 연발했다.
"송 선생님. 이게 사실일까요? 미영이의 편지가."
"전 사실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래요? 제가 알기로는 C고등학교 체육선생하고 코치 둘 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런가요? 저야 뭐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그렇지만, 목숨까지 끊으려고 한 미영이의 얘기인데, 안 믿을 수가 없군요."
"그건 그러네요. 죽기로 작정한 아이가 유서 삼아 쓴 편지이니..... ."
우리 두 사람은 잠시 말을 끊었다. 제법 가을 냄새가 나는 바람이 건듯 불어와 머리칼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창피스러운 일이군요. 체육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얼굴 들고 다닐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사건이네요."
"선생이라는 이름 모두를 더럽히는 일이지요."
"교육자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런 일은 쉬쉬 묻어두려고 할 게 분명한데.... 하여간 큰일이군요."
"솔직히 말해서, 교육자의 권위 그런 것보다는 동업자의식이랄까, 뭐 그런 것 때문에 더 감추려고 하는 것 아닐까요?"
"맞아요. 그런 측면도 있는 셈이지요."
그 사이에 박 선생은 들고 있던 편지지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 편지를 접어서 봉투에 다시 넣으면서 말했다.
"이 편지가 그 꼴뚜기 같은 엉터리 선생들의 죄를 밝히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아마,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휴대폰으로 114에 전화를 걸어 '구원의 전화'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리고는 그 곳으로 전화를 걸어 최 간사라는 사람을 찾았다.
* *
"도대체 경찰이라는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입니까? 그 어린 아이를 불러다 놓고, 그것도 피해자에게 무슨 취조를 한 거죠?"
'구원의 전화'라는 아크릴 간판이 붙은 사무실은 생각보다 허술했다. 잘 해야 열댓 평 남짓 될 만한 2층 사무실에 칸막이 책걸상과 전화기 몇 대 놓고, 남자 하나 여자 셋 그렇게 네 명이앉아서 전화를 받으며 일지(日誌) 같은 것에다가 기록을 하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인 최 간사라는 사람은 삼십 대 말쯤의 금테안경을 낀, 제법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여성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우리가 교사들만 아니었다면, 학교 선생이라는 작자들이 어린 학생을 상대로 성폭행이나 자행하고, 말세야 말세....그렇게 말하고도 남을 분위기로, 일단 무심한 수사행위로 미영이에게 충격을 준 경찰관들을 몰아 때리는 소리부터 늘어놓았다. 그러면서도 한 쪽 구석에 놓여 진 낡은 응접세트의 의자를 권했다.
"미영이 중학교 때 은사님들이시라고요?"
"예. 아까 전화로 말씀드린 대로 그렇습니다."
최 간사는 사무실에서 나이가 어리게 생긴 여자에게 주스라도 좀 내오라고 시킨 다음 다시 미영이 얘기로 돌아갔다.
"미영이 그 아이 제가 상담을 해보니까 너무 착하더라고요. 말 못하는 제 어머니 생각하는 마음도 끔찍하구요.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사고를 치고 병원에 실려 갈 줄은 몰랐어요. 무엇보다도 당사자인 본인이 단단히 마음먹어야 일을 풀어낼 텐데.... ."
아무래도 이 여자는 말이 많은 편인가 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두어도 서론 본론 결론 그렇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모두 중얼거려대는 그런 사람.
"같은 교직에 몸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박 선생이 먼저 고개를 숙여가며 사과의 말을 했다. 최 간사는 같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선생님들이라고 다 그러신가요? 아주 특별한 경우에나 그런 건데, 이런 일로 모든 선생님들이 비난받아서는 안 되지요."
최 간사는 유연했다. 많은 사람을 상대로 상담을 해온 결과일 것이다.
"사실은, 미영이가 어제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아무래도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내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요?"
"네. 오후 두시가 좀 넘어서인데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요. 학교에 찾아와서 울컥 울기만 하다가 도망치듯 가버렸어요."
"답답해서 찾아간 모양인데, 말을 못했군요."
"워낙 가정환경이 좋지 않은 편이라, 고달파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오늘 보니까 이렇게 일이 터지고 말았네요."
그러면서 나는 주머니에서 미영의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오늘 오후에 저에게 이런 편지가 배달됐습니다. 우편으로 왔더군요. 아마도 어제 저녁에 부친 모양입니다."
최 간사는 내가 건네준 편지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누군가가 주스 잔들을 들고 와서 응접세트 탁자에 내려놓았다. 편지를 읽는 최 간사의 표정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선생님께 유언을 남기고자 했군요. 미영이가 그래도 가장 믿고 존경한 분이 선생님이었던 모양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어려운 처지였음에도 아이가 늘 차분하고 재능이 많았지요. 그래서 정도 많이 갔습니다. 어제 제게 왔을 때 좀 더 적극적으로 살펴보았어야 하는 건데, 제가 큰 실수를 한 것 같군요."
"아닙니다. 미영이가 선생님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선생님께서야 어떻게 그렇게 큰일을 당한 줄 아셨겠습니까?"
"이 편지가 혹여 경찰 수사에 도움이 될까 해서 가져왔습니다."
최 간사의 눈이 안경너머에서 반짝 빛나고 있었다.
"암요. 도움이 될 겁니다. 정말 잘 가지고 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오전에 병원에 가보긴 했습니다만, 미영이가 괜찮아야 할 텐데.... ."
박 선생이 대답 삼아 말을 받았다.
"저희들도 좀 전에 거기서 왔는데, 중환자실 담당의사 말씀이 괜찮을 거라더군요."
"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워낙 중대한 사건이어서였을 것이다. '구원의 전화' 사무실 사람들은 일손을 놓고 돌아앉아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간간이 전화벨소리가 들려왔고, 네 구원의 전홥니다, 전화 잘 하셨습니다, 하고 나직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응답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기왕에 선생님들께서 오셨으니까, 좀 여쭈어볼게요."
최 간사는 진지한 눈빛을 지으면서 정색을 했다.
"무슨 말씀이신 지 해보시죠."
"사실 저희 단체에서도 이번 사건을 놓고 논란이 많습니다. 아직 전모가 드러난 것은 아닙니다만, 제 개인적으로는 크게 사회문제화해야 한다는 쪽입니다. 그런데, 우리 이사님들 중에는 교육계 전체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들어서 반대를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선생님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기실 처음 미영의 편지를 받아 읽었을 땐 이성을 가누기가 어려울 만큼 분노가 먼저 치솟았었다. 그 다음에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마음만 들었을 뿐이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나아가 사회문제화가 바람직할지 어떨 지에 관한 것 따위는 생각조차 해볼 경황이 없었다. 최 간사는 어떤 대답을 원하는가. 박 선생 역시 답변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그냥 솔직해지기로 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희들로서는 드릴 말씀이 없군요.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그러자, 최 간사는 금세 미안해하는 낯빛이 되었다.
"아휴, 이거 죄송합니다. 제가 선생님들께 무리한 질문을 드렸군요. 곤란한 입장이시라는 걸 미처 못 헤아렸네요."
한동안 우리는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다. 나는 탁자 위에 있던 잔을 들어 마셨다. 냉기가 풀려 미지근해진 오렌지 주스였다. 이 일이 사회적 문제가 되어 커진다면, 미영이에게는 피해가 없을까. 스스로 당한 끔찍한 고통도 견디기 어려워 자살을 기도한 아이가 아니던가. 모든 게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면 미영은 과연 그것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새삼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최 간사의 말대로라면, 이 사람들은 혹시 사회적 문제나 교육적 영향에만 신경을 쓸 뿐이고, 아이의 입장에 대한 배려가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가슴이 답답해져오고 있었다.
잠시 끊어졌던 대화를 이은 것은 또다시 최 간사였다. 그녀는 미영이를 조사했다는 경찰 얘기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경찰들 말이죠. 우리에게 연락도 없이 미영이를 불러다 조사하면서 아이에게 무슨 소리를 한 거죠? 이 편지로 봐서는 아이의 수치심을 몹시 자극하고 자존심을 짓밟은 모양인데, 이를 어쩌죠? 아이가 깨어나 봐야 알겠지만,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군요."
사실, 최 간사가 하는 말에 대해서 나는 응대할 말이 없었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서 경찰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미영이가 몹시 힘들었던 것은 알겠는데,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알 만한 내용이 있지 않았다. 나 같은 사람과는 좀 다르게 최 간사는 다분히 감정적인 판단을 앞세우고 있었고, 공격적인 정서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만 일어서기로 했다. 응접세트에서 몸을 일으키면서 나는 최 간사를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아까 질문 주셨던 사건의 사회문제화에 대해서 특별히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결정이든 그 결정이 아이에게 미칠 영향을 가장 먼저 헤아려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참고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
병원에서 허용하는 하루 단 두 차례 중환자실 면회 중 저녁면회시간은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미영의 어머니는 잠시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나와 박 선생은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박 선생은 속이 상하고 마음이 편치 않아서였던지, 복도 끝에 있는 흡연실로 가 몇 달 전부터 끊었다는 담배를 뻑뻑 피워 물고 있었다. 아무래도 미영이를 보아야겠다며 다시 병원으로 오자고 앞장 선 것은 박 선생이었다. 내가 미영이를 아꼈던 것 못지않게 박 선생 역시 미영이의 재능을 살려서 좋은 탁구선수로 길러낸 소중한 정을 간직하고 있을 거였다.
미영이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사건의 시말(始末)을 뛰어넘어 앞으로 아이가 살아갈 일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인생이란 것이 그렇게, 아무리 본인의 뜻대로 되는 것보다는 안 되는 일이 더 많은 낮은 확률의 게임이라고 할지라도, 어느 날 갑자기 닥친 불행으로 도리 없이 꺾어야 할 꿈은 서럽기만 할 터였다. 하물며 한 번 피워보지도 못한 어린 아이가 단순한 교통사고도 아니고, 못된 어른들에 의해 인생 밭이 마구 파헤쳐졌을 때의 고통이란 얼마나 클 것인가.
생각해봐야 갑갑하기만 했다. 긴 한숨이 사념의 줄기에 다리를 놓았다. 다리 저 편에 C고등학교 체육선생이라는 사람, 탁구코치라는 사람이 희미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또 어떤 족속들인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자리. 그 자리가 도대체 어떤 자리인데, 피어나지도 못한 한 꽃봉오리를 그렇게 마구 짓밟을 수 있는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또다시 한숨이 이어졌다.
어느새 미영의 어머니가 와 있었다. 딸아이의 자살소동 앞에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수화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으나, 나나 박 선생은 수화를 몰랐다. 내가 수첩을 꺼내어서 필담(筆談)을 시도했다.
그 동안 미영이가 어땠나요?
연초부터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자주 아팠어요.
뭐라고 특별히 한 말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그냥 힘들어했어요.
어디가 아프다고 그러던가요?
자주 머리가 아프다고 했고, 지난여름부터는 배가 아프다고 했어요. 더러 토하기도 했는데, 병원에 가자고 해도 말을 안 들었어요.
............ .
한동안 필답이 이어졌는데, 미영이 어머니는 딸이 당한 일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자니, 아이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극한상황으로 몰려간 미영의 꾸역꾸역 타들어 갔을 속내가 못내 안타까워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면회하실 분들 세면대에서 손 씻고, 정해진 신발로 바꿔 신고 들어오세요. 면회시간은 10분입니다."
굳게 잠겨있던 중환자실 문이 딸깍 열리면서 머리에 초록색 두건을 쓰고, 벗은 마스크의 한 쪽 끈을 귀에 건 간호사가 나와서 소리를 질렀다. 어느 새 와 있었던지, 스무 명 남짓한 환자가족들이 차례로 줄을 섰다.
미영은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퉁퉁 부은 눈을 깜빡거리며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머리맡에는 종류가 다른 링거액 팩이 두 개나 걸려 있었다.
"미영아, 나야. 선생님이야. 괜찮니?"
아이는 많이 놀란 표정이었다. 나와 박 선생을 발견한 미영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런 딸의 모습을 바라보는 미영 어머니의 눈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미영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어머니는 손짓으로 선생님들에게 인사를 하라고 시키는 것 같았다.
"선생님, 죄송해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 미영은 조그만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니다, 괜찮다. 우리에게 미안해할 것 없다."
그렇게 말한 것은 박 선생이었다. 아직은 작기만 한 이 아이에게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리고 지금 나는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 것인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미영아. 우선 살아야 한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선 살아야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단다. 부디 어머니를 생각하려므나. 어머니는 오직 너 하나만을 믿고 사시는데, 네가 잘못돼서는 안 되지 않겠니?"
그렇다. 한 번 자살을 실행했던 사람은 두 번째 시도를 할 가능성이 높고, 두 번씩이나 그랬던 사람은 거의 세 번 이상 실행한다...그런 연구결과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미영은 말이 없었다. 아이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는 또다시 서러운 감정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았다.
"미영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길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않으면, 사람에게는 언제나 길이 있단다."
박 선생이 링거주사가 꽂힌 미영의 왼손을 살짝 만지고 있었다. 아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선생님, 죄송해요.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괜찮아요."
몸만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마음도 괜찮다는 말이길 나는 간절히 바랬다. '절대금식'이라고 붙여진 병상 머리맡의 팻말 때문에, 아이에게 음료수 한 모금 주지 못하는 미영 어머니의 얼굴에 안타까운 모정이 가득 묻어 있었다.
미영아, 힘내라. 그런 말을 마지막으로 박 선생과 나는 중환자실을 나오고, 연신 허리를 굽히면서 필경 감사하다는 뜻이 담겨있을 미영 어머니의 수화를 뒤로한 채 병원을 나왔다.
병원 문을 나서면서 나는 박 선생의 팔을 붙잡았다.
"박 선생님. 그냥 집에 가기가 좀 그런데, 어디 가서 소주나 한 잔 합시다."
"글쎄, 그럴까요? 사실 나도 기분이 좀 그러네요."
기다렸다는 듯이, 박 선생은 맞장구를 쳤다.
"우리 거기 갑시다, 시장통 생선회집."
"네?"
"우리 거기 가서, 횟집 주인이 양식 광어를 자연산 도다리로 속여 파는지 어떻게 하는지 오늘은 밝혀봅시다."
"........ ?"
"항생제를 뒤집어쓰고 큰다는 이놈들 양식 광어를, 사이비 자연산 도다리들을 확 때려잡읍시다."
아마도 그러면서 나는 몹시도 심각한 결의를 얼굴에 떠올렸던 모양이었다. 아까, 아침까지만 해도 광어냐 도다리냐 그 문제를 놓고 집념을 끊지 않던 이 선생과의 대화를 무심한 듯 지켜보던 내가, 느닷없이 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모습을 박 선생은 의아스런 눈길로 바라보면서 뒤따르고 있었다. 내 가슴속에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얼음처럼 차갑고 쓸쓸한 구멍 하나를 만들기 시작했다. 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