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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호텔과 에펠탑 야경, 그리고 호텔 벨라지오의 분수쇼
라스베가스는 북쪽으로 SHEEP RANGE, 남쪽 MCCULLOUGH RANGE, 서쪽으로 SPRING MTS.이 둘러쳐져 동쪽의 미드(MEAD)호수, 서북쪽의 인디언 스프링스로 연결되는 골짜기이다. 지명도 라스베가스 계곡(Las Vegas Valley)이다. 18세기 후반까지 네바다와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미국 중서부는 New Spain이란 이름의 스페인 영토였지만 스페인이 쇠퇴하면서 멕시코령으로 바뀌었다가 1848년 중서부의 광대한 땅을 멕시코로부터 할양받아 미국령에 편입됐다. 때문에 라스베가스엔 스페인식 이름 처럼 많은 스페인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라스베가스는 1830년에서, 골드러시가 본격화되기 직전인 1848년까지 ‘Vegas’로 불리다가 후에 스페인말로 목초지(meadows)를 뜻하는 ‘Las Vegas’로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스페인 상인들은 ‘Rafael Rivera’란 인물이 라스베가스 벨리에 첫발을 디딘 뒤 풍부한 수원(水源)이 발견되자 이를 기화로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시에라 산맥의 남단을 돌아 LA로 가는 Spanish Trail을 단축시킬 수 있었고 라스베가스는 발전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당시 척박한 사막의 오아시스 역할을 톡톡히 한 것. 1844년 3월 John C Fremont가 육로정찰에 나섰다 라스베가스 스프링스에 캠프를 차렸고 솔트레이크의 몰몬교도들은 솔트레이크시티와 로스엔젤레스 사이의 우편로를 지키기 위해 1855년 라스베가스에 아도비성을 쌓는 등 도시로의 발전이 계속된다. 그러나, 현대적인 도시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04년 솔트레이크시티~라스베가스~로스엔젤레스를 잇는 Union Pacific Railroad가 연결되면서 부터였다. 이때부터 계곡의 텐트촌이 살롱과 가게로 변모하고 급속한 성장의 길로 접어든다. 오늘날 라스베가스는 세계적인 도박의 천국이지만 당시에는 한때나마 도박이 엄격하게 법으로 금지됐다. 1910년 엄격한 ‘반 도박법’이 주의회를 통과해 효력이 발생했기 때문인데 술값내기를 위한 동전던지기 조차 금지됐다. 네바다 state journal은 이 사건을 “stilled forever is the click of the roulette wheel, the rattle of dice and swash of cards”라고 보도했다. 도박꾼들은 재빨리 지하 도박장을 개설했고 단골손님들은 패스워드를 통해 입장하는 방법으로 도박은 계속 성행했다고 한다. 법의 효력은 3주도 지속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도박이 불법화된 지 21년이 지난 1931년. Phil Tobin이란 북 네바다 목장 경영자가 공교육에 필요한 세금을 올릴 목적으로 합법화 법안을 제출했다. 네바다주는 대공황 시기에 음성적으로 성행하던 도박을 합법화하고 1931년 후버댐 건설사업을 통한 공공일자리 창출, 서부로의 철도개발 등의 정책을 동원해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났던 유일한 주였다. 도박세 수익은 현재 네바다주 일반회계의 43%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주 재정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본격적인 리조트로의 변신은 2차 세계대전 후 호텔사업가 Tommy Hull이 지금의 Sahara호텔 건너편 빈 땅에 Rancho vegas hotel casino를 건립하면서 시작됐고 수 많은 호텔카지노가 명멸했지만 초기에 지어진 호텔 가운데 'Flamingo'만이 지금도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라스베가스 스트립 시저스팰리스 바로 건너편 핑크색 건물. 플라밍고는 1940년대 meyer lansky란 범죄조직에서 활동했던 조직폭력배 Benjamin Bugsy Siegel이 건립했고 주인이 계속 바뀌다가 1993년 호텔그룹 힐튼이 인수해 건물을 헐고 새로 지었다. 이름도 플라밍고 힐튼으로 바뀌었다. Bugsy는 캘리포니아 비벌리힐스 애인의 집에 있다가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아 숨지는데 벤자민 벅시 시겔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벅시’란 영화로 각색됐다.
라스베가스의 또다른 명물호텔 무랑루즈(moulin rouge)는 주인이 헤비급 챔피언인 Joe Louis였다. 무랑루즈는 주인도 외관도 여러번 바뀐 끝에 1992년 '히스토릭 사이트'가 됐다. 루이스는 테마호텔 시저스 팰리스의 주인으로 살아남았다. 세계 유수의 대도시나 거대 리조트에 위치한 호텔들은 하나같이 수 많은 방을 고객들로 채우기 위해 고민을 거듭한다. 오늘날 가장 잘 나가는 라스베가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라스베가스와 네바다주는 1959년 1600000만 스퀘어 피트 규모로 세계 최대 컨벤션 센터를 건립해 고객들을 유치했다. 초기 라스베가스에는 무엇이든 (NO)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네바다주에 접어들면 일단 고속도로에 제한속도가 없고 도박세도 주세도 없었다. 그리고 결혼허가를 받기 위해 대기하는 기간이 없는 것도 다른 주와의 차이점이다. 하지만, ‘노 주세’와 ‘노 결혼 대기기간’ 두 가지만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을 뿐 나머지는 시대 추세에 따라 모두 사라지거나 고쳐졌다.
단순히 사막 중간의 오아시스에 불과했던 라스베가스는 20세기를 지나면서 60억 지구인들누구라도 쉬어 가고 싶어하는 새로운 개념의 오아시스로 진화했다. 그랜드 캐년과 데스벨리 같은 관광포인트들과 가까운 이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쇼와 서커스, 뮤지컬 등 놀이의 소재들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한 것이 발전의 밑천이 됐다. 관광 자원이 빈약해 질적으로 비약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 관광, 라스베가스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도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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