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춘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삼가 고인의 천국행 ,
희락 꽃 만발 동산에 거하시길
간구드립니다.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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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애송시가 김춘수의 <꽃>이라고 합니다. 계간 <시인세계> 2004년 가을호에서 현역시인 246명을 대상으로 애송시를 조사한 결과 23명이 선정해 가장 애송하는 시로 꼽혔다는 것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은 세 가지 시적 소재가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꽃'이라는 지극히 자연 소재의 대표적 이미지라는 점과, 내가 불러주어야 '네'가 된다는 나와 너의 관계(I - thou)에서 고민하는 모습, 그리고 '몸짓'과 '눈짓'으로 방향을 가진 변화를 모색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불러주어야 꽃이 된다는 시상은 기독교적인 바이블의 창세기 이미지로서 아담이 만물의 각각의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과 그 어떤 맥락이 닿아보이는데가 있습니다.
오늘(11.29) 컴퓨터를 켜니 '김춘수 시인이 타계했다'는 뉴스 메신저가 윈도우 아래쪽에 떴습니다. 병상에서도 선행을 했다던 뉴스가 엇그제 같은데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뉴스를 접하니 고인의 마음 가운데 김춘수 시인의 이미지 시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했지만, 이제 고인은 저 세상 사람이라 불러 주었을 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시인 김춘수의 첫 시집인 <구름과 장미>에서 시인은 "구름은 감각으로 설명도 없이 나에게 부닥쳐왔지만 장미는 관념으로 왔다."고 스스로 해석했습니다. 김춘수에게서 '구름'은 설명이 없는 이미지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장미'는 온갖 관념적인 의미들이 부가되어 있는 존재로 나타나 있습니다.
초기의 김춘수의 시는 구름이 아니라 '장미'에 많은 감각적 의미를 부여하고 잇었습니다. 김춘수에게서 장미는 '유추의 상징적 도구'로서의 장미였습니다. 그러나 김춘수 시인은 그가 사숙(私淑)했던 릴케의 경향과 더불어 그 자신 형이상학적인 철학에서 사실적 감각을 상실하는 '허무함'에 도달하고 맙니다. 김춘수의 연작시 형태의 하나인 <타령조 (打令調) 8>의 첫 연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등골뼈와 등골뼈를 맞대고
당신과 내가 돌아누우면
아데넷사람 플라톤이 생각난다
김춘수의 대화적인 시적 구상은 '나와 너'의 상대성에 그 위치를 두고 끊임없이 '너'의 존재에 대하여 불렀다가(<꽃>에서) 다시 돌아누웠다가(<타령조8>에서) 끊임없는 단절과 회복 그리고 재단절의 과정에서 '허무함'의 과정을 밟습니다. 실제로 김춘수 시에서 허무함은 전통 선시나 하이쿠 등에서 보듯이 담담체로서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는 냉정함에 도달한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시인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序詩)>라는 작품 또한 시인으로서 시적 소재(그의 철학적 상대 이미지이기도 하다)에 대한 허무에서 다시 불러내려는 노력이 스며 있습니다. <꽃을 위한 서시(序詩)>의 후반부는 불러야 꽃이 되는 '꽃'이 '얼굴을 가리운 신부'로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얼굴은 가리운' 것으로 표현된 '신부'는 또 다른 불러야 꽃이 되는 피동적인 '꽃'의 다른 버젼입니다. 시인 김춘수의 이미지는 항상 불완전한 모습으로 '의미'를 완전히 붙일 수 없는 모호함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비유적 image를 버리고 image를 위한 image로써 詩를 일종의 순수한 상태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한 시인 김춘수의 시창작 구조의 변화는 사실적 이미지와 그에 대한 의미 부여의 제한적 한계에 부닥칩니다. 이미지 시에서 사물을 '뎃상화' 시킨 김춘수 시인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의 세계에 자연히 깊이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세잔이 사생(寫生)을 거쳐 추상에 이르렀던 과정을 확신하고, 詩로 이 과정을 대체 경험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진가가 사진을 찍거나 화가들이 사생을 한다고 해서 풍경을 그대로만 찍거나 그리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는 배경이나 중심 포인트에 대하여 앵글을 어떻게 잡느냐 어느 사물을 보다 부각시키는가에 따라 설명하지 않는 설명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여하지 않는 상태에서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것이 이미지 시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의미가 되도록 하는' 그래서 '의미를 말하지 않는' 구조적인 장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김춘수 시인 자신이 말한 표현을 보면 "나에게 있어 무의미란 무엇일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노력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무의미를 허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의미시는 관습이나 기성 관념의 입장에서 보면 '허무'가 된다. 허무는 일체의 의미를 거부한다. 그것은 이 세계를 의미 이전의 원점으로 돌리는 일이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허무'라는 것은 일인칭적 시인 자신만이 가치판단을 하게 될 때 '무의미'의 이미지는 '허무'에 도달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모든 1인칭 철학은 허무의 문을 통과하여 2인칭 3인칭 세계와의 불이(不二)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그 허무는 비로소 벗어버리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김춘수의 시 세계는 지극히 2인칭을 부르는 것 같으면서도 언제나 부르기 전에는 없거나(꽃의 경우) 불러도 '얼굴을 가린' 상대이며 '돌아누운 플라톤'으로서의 불완전한 2인칭입니다. 다시 말하여 김춘수는 끊임없는 자아에 대한 1인칭의 독백의 허무 속에서 '무의미의 시'를 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김춘수 시인이 도달한 '무의미'(의미를 부여하지 않는)의 시적 이미지의 도달은 대단히 강렬한 이미지 시의 경지를 보여주었으나 1인칭적 이미지 시의 한계에서 끝내 상대인 '너'에 대한 뚜렷한 '나'의 확대의미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허무'에 도달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꽃은 부르기도 전에 꽃으로 존재합니다. 이미 나 아닌 '너희'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꽃이 어떤 부차적인 이미지를 가지는가를 전달하는 것은 김춘수 시인이 말하는 '눈짓'의 교호에서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천국행하심을 간구합니다
(*출처 / 조선'오두방정 ' 참조)
2005.3.15.Tues.
아름다움

1922 경남 통영 출생
2004.11.29 (82세)별세
일본 니혼대학 3년 중퇴
경북대 교수
영남대문리대 학장
한국시인협회장
'꽃의 소녀'등 25권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