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 입문 - 3
대략 150년부터 신약성서의 경전 형성에 결정적인 시대가 시작된다. 유스티노 순교자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주일 집회 때 네 복음서를 봉독하고 이 복음서들을 사도들(또는 최소한 사도들과 직접 관련되는 사람들)의 작품으로 여기며 이 복음서들에 성서와 비슷한 권위를 부여하면서 인용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이 문헌들이 그토록 큰 권위를 지니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사도들에게서 유래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 때까지 내려온 전통과 일치하는 “주님”의 역사를 이야기한다는 점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곧 이어서 이 작품들이 사도들과 직접 관련된다는 사실이 강조되기에 이른다. 특히 같은 유형의 문헌들이 많아질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대부분 조잡한 모방이나 순전한 상상에 속하므로, 복음서들을 보호해야 할 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사실 150년 직후, 교회 안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규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자, 네 복음서를 모아 놓은 것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복음서들이 지니는 내적 자질과 “주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그 증언의 진실성 덕분에, 이미 모든 신도의 주의를 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관점을 지닌 이 네 복음서의 우월성이 너무나 명백하여 삽시간에 유사한 작품들을 모두 압도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170년경에는, 그 때까지 ‘카논(경전)’이라는 용어가 쓰이지는 않았지만, 네 복음서가 경전의 자리를 획득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은 개별적으로 경전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신약성서 경전이 있다는 생각이 교회 안에 확고히 자리잡았을 때, 서간의 선집 전체가 경전 안으로 받아들여졌음이 거의 확실하다. 이미 복음서들의 권위를 확정하는 요인이 된 사도성(使徒性)이라는 개념이, 점진적이며 우연한 방식으로 선집의 꼴을 갖추어 가며 2세기의 여러 교회에서 폭넓게 권위가 인정된 바오로의 문헌에서는 더욱 강력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성서의 새로운 경전에 관한 원칙이 생겨났음을, 그러나 그 원칙이 실제로 논의된 적은 한 번도 없음을 엿볼 수 있다. 경전은 일차적으로 교회 안에서 순식간에 보편화된 실재가 아니다. 나중에 구체적으로 어떤 문헌들이 경전에 포함되는지 상세히 밝혀야 할 때에 가서야 비로소 경전에 관한 신학적 숙고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움직임은 (160년에 사망한) 이단자 마르키온의 등장으로 촉진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 마르키온은 구약성서의 권위를 완전히 부정한다. 그럼으로써 자기 교회에 새로운 성서, 결과적으로 새로운 경전을 마련해야 하는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마르키온파(派)가 새로운 경전의 원칙을 퍼뜨리는 데에 일조를 한다. 그 원칙은 구약이 두 부분 곧 ‘율법과 예언서’로 구성되어 있듯이, 새 경전도 ‘복음서와 사도 문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2세기 말부터 새로운 성서 기준에 관한 생각이 교회 안에 굳게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먼저 어떤 문헌들이 새 경전에 들어가느냐 하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경전에 속하는 작품들의 최종 목록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들 사이의 관계가 발전하면서 교회는 하나라는 의식이 점점 커진다. 그에 따라 경전에 관한 의견의 일치도 서서히 이루어진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150년과 200년 사이에 사도행전이 점차 경전에 속하는 작품으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2세기 말, 리옹의 이레네오는 이 작품을 성서로, 또 사도들에 관한 루가의 증언으로 여겨 직접 인용한다. 사실 사도행전은 무엇보다도 셋째 복음서와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그 후속편을 이루기 때문에 경전으로 받아들여진다. 2세기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 ‘사도적 권위’라는 개념의 발달도 사도행전이 경전에 받아들여지는 데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 작품은 경전이 된 뒤에 곧바로 서간집 전체에 필요한 입문서로 간주된다. 3세기 초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발전의 결과를 총괄적으로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어디에서든지 네 복음서는 더 이상 논박되지 않고 확고 부동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래서 이 시대부터는 복음서 경전이 이미 종결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경전의 둘째 부분 곧 ‘사도 문헌’과 관련해서는, 성서로 인용되는 바오로의 열세 서간과 사도행전과 베드로의 첫째 편지를 도처에서 보게 된다. 요한의 첫째 편지와 관련해서도 어느 정도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진다. 최종적 경전이 이제 기본 형태 이상으로 꼴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불확실한 부분이 있다. 사실 한편에서는 이러한 일종의 내적 명료성 덕분에 온 교회에서 인정을 받는 작품들과 함께, 일부 교부들은 경전으로 인정하지만 다른 교부들은 유익한 문헌으로만 여기는 적지 않은 수의 ‘유동적’ 작품들도 보게 된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베드로의 둘째 편지, 야고보와 유다의 편지가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와 동시에, 이 시대에는 통상 거룩한 책으로, 곧 경전에 속하는 것으로 인용되던 작품들이 그러한 상태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경전에서 제외되는 경우도 있다. 「목자」라는 제목이 달린 헤르마스의 작품, 「디다케」, 「클레멘스의 첫째 편지」, 「바르나바스의 편지」, 「베드로의 묵시록」 등이 그러하다. 경전이 형성되어 가는 이 단계에서는 사도성(使徒性)의 기준이 상당히 보편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그래서 사도와 결부되지 못한 작품들은 조금씩, 그러다가 마침내는 모두 배제됨을 보게 된다. 3세기까지도 여전히 논의의 대상이 된 문헌들은, 바로 교회 여기저기에서 그 사도성과 관련하여 논쟁이 벌어진 것들이다. 논란이 가장 많았던 것이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묵시록이다. 서방 교회에서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동방 교회에서는 묵시록의 경전성(經典性)이 오랫동안 강경하게 부정되었다. 요한의 둘째 편지와 셋째 편지, 베드로의 둘째 편지, 유다의 편지도 서서히 밖에 인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전의 형성은 4세기에 끝나는데 전 과정을 세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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