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항쟁 관련 백조일손지묘를 보고 시간이 참으로 애매한것이 숙소로 가자니 좀 이르고 그렇다고 어딘가 새로운 답사지로 가자니 시간이 부족하고...해서 이중섭 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제주에 뜬금없이 이중섭 미술관이라니...했는데, 6.25시절 제주도로 피난와서 1년여동안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가 머물던 집이 아직 그대로 있고 그집에 집주인이 커다란 개와 다 큰 딸과 그렇게 살고 있었다.
이중섭 거리
이중섭이 거주했던 거주지.
이 작은 방에서 4명이 살았다고 한다. 사진에 보이는 방의 크기가 방의 전부이다.
현재의 집주인이 이곳에 살고 있다.
이중섭 미술관
불운한 시대의 천재화가로 일컬어지는 대향 이중섭화백이 서귀포시에 거주하면서 서귀포의 아름다운 풍광과 넉넉한 이 고장 인심을 소재로 하여 서귀포의 환상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짧은 기간 그의 서귀포 체류는 그 후 대향 이중섭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느낄 수가 있다.
이중섭과 서귀포 <오광수>
1·4후퇴 때 원산을 떠난 이중섭과 그 가족은 잠시 부산에 머문 후 제주 서귀포에 도착한다. 제주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대단히 주요한 시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길 떠나는 가족>이라는 작품 속에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나는 이중섭 가족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소달구지 위에 여인과 두 아이가 꽃을 뿌리고 비둘기를 날리며 앞에서 소를 모는 남정네는 감격에 겨워 고개를 제끼고 하늘을 향하고 있다. 하늘에는 한 가닥 구름이 서기처럼 그려져 있다. 소를 모는 남정네는 작가 자신이고 소달구지 위에 있는 여인과 두 아이는 부인과 두 아들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가족이라는 모티브는 이중섭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한다. 그렇긴 하지만 이처럼 가족의 흥겨운 한 순간을 포착한 작품은 <길 떠나는 가족> 외에 따로 없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잠깐 어디를 향해 가는 경우도 있지만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은 거처를 옮기는 이주를 나타낸다. 정든 고향을 버리고 가는 슬픈 이주가 태반이지만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은 즐거운 소풍놀이라도 가듯 흥에 겨운 이주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들이 향해가고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지상의 낙원으로서의 따뜻한 남쪽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주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있어 지상의 유토피아로서의 공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미술관 안에서 유일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해놓은 작품 "황소"
"고반또, 로꾸반또, 큐반또... " 이것은 일본어로 "5번과, 6번과, 9번과..."란 말이다. 베에토오벤의 교향곡 '5, 6, 9번'을 모두 다 틀어 달라는 이중섭의 주문이었던 것이다. 동경의 그 무렵은 아직 대형 음악다방이 생기기 전이었다. 조그마한 신쥬쿠(新宿) 다방에서 우리들은 음악을 들으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중섭과 나는 평양 종로보통학교 같은 반 친구. 동경문화학원(文化學院)미술과 동창. 1951년 부산 피난 때는 종군화가단(從軍畵家團)에 같이 있었고, 1956년 서울 적십자병원(赤十字病院)에서 연고자 없는 시신으로 그를 발견하기까지 나는 줄곧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의 한사람이었다.
이중섭은 연고자 없이 시체실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때는 바로 그런 시기였다. 그나마 그 어려운 시기에 애써 그를 돕던 이들은 김광균(金光均), 구상(具常), 박고석(朴古石), 한묵(韓默), 황염수(黃廉秀) 등이다.
문총(文總)과 미협(美協)에 알렸다. 그를 아끼는 몇몇 친구들과 조카 이영진, 이종사촌 이광석 변호사와 우리들은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하고, 한줌의 가루로 만들어 일부는 산에 뿌리고, 일부는 미야리에 묻었다. 후에 차근호(車根鎬)가 조각비를 세웠다.
일찍이 그의 역량은 미술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으나 동란 전까지는 아직 '유능한 화가'라는 단계를 넘고 있지 않았다. 전쟁이란 '리얼리티'의 단련을 거치면서 그의 예술이 정신적인 것으로 되어갔다고 보여진다. 어쩌면 이것은 '현실성'이 작품에 미치는 작용에 대한 좋은 대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설이 될지 모르나 이중섭은 일본에 보낸 처자를 찾아 동경을 방문한 적이 있다.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동경에 머물 차비를 대었을 것이지만(그의 부인이 일본인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미련없이 전장(戰場)인 한국으로 돌아왔다. 비자를 얻을 수 있는 사무능력의 부족도 있겠으나 그는 그곳에 머물 의사도 없었던 것이다. 형제가 총칼을 들고 싸우는 마당에, 내 어찌 일본에 도피할 수 있으랴. 나는 여기에 그의 지사적(志士的) 민족정신과 문화의식 같은 것을 느낀다.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에게 남덕(南德)이란 한국 이름을 지어 사모관대(紗帽冠帶)하고 쪽도리 쓰고 결혼식을 올리는 예는 당시로서는 희귀한 일이며 요즘 말로는 일종의 '해프닝'이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문화학원 시절, 학생들의 주말파티에서 그 낭낭한 음성으로 "사자수 흐르는 물에,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는가"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비상한 용기의 소유자였다. (일본 아이들의 이해는 아랑곳없이 말이다.)
내가 그에게서 배운 유일한 노래도 "오! 크리스마스 트리"를 닮은 행진곡 풍의 "소나무" 노래였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변함이 없는 그 빛, 비오고 바람 불어도 그 기상 변치 않으니, 소나무야 소나무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아무렇게나 걸쳐입은 인력거꾼의 합삐(웃도리)를 닮은 그의 반코트 주머니에는 언제나 여기저기 골동상에서 모아진듯한 도자(陶磁)의 파편으로 가득해 있었다. 조선 연적과 목각 부스러기, 그는 미친 사람처럼 우리 전통에 열중했다. 피카소나 루오를 닮은 그의 화면은 우리의 장인정신의 터득으로 해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의 강직한 선이나 전면성(前面性)은 고구려의 강서(江西)고분, 대묘(大墓)의 '청룡(靑龍)과 백호(白虎)'와 통하는 것이 있다. 내가 본 남면의 주작도(朱雀圖)는 역광으로, 외광으로 인한 퇴색을 차단한 상태에서, 선명한 버밀리언(주홍색)으로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영원히 지하 현실(玄室)에 묻혀 있어야 했을 고구려 벽화와 이중섭의 극한 상황 속에서의 전시(展示)를 의식하지 않는 그 제작태도는 무언가 일맥 통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그의 선과 전면성과 더불어. 예술이 대형화하고 어떤 의미로 상업화하는 오늘의 싯점에서 이중섭 예술이 갖는 이러한 순수성과 정신성은 하나의 반작용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포름(形態)'이란 각도에서 볼 때 거의 한세기에 걸친 추상적 전개-특히 비형상(非形象)과 오브제(物體)를 넘어, 인스털레이션(設置)의 막다른 길에 도달한 세계 현대미술의 전개에 과연 무엇을 첨가할 수 있을까. 아이로니칼하게도 문학수나 이중섭의 형상(形象)의 세계는 일본 추상미술을 주동한 자유미술협회(自由美術協會)사람들에 의하여 인정되었다. 문학수는 북한에서 사라졌고, 이중섭은 남한에서 오늘의 신화를 이루었다.
"고반또, 로꾸반또, 큐반또"
중섭의 에너지는 지금도 우리 가슴에 풀리지 않는 한 '신화'로 다가오고 있다.
이중섭 미술관을 둘러본후 저녁을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던차 제주도에 가면 늘 저녁을 먹으러 들렸던 오분작뚝배기가 맛있는 "삼보식당" 이곳에서의 거리가 얼마인가 확인해보니...차로 5분거리...
횡재했다...이번엔 못가보는구나 하고 포기했었는데 같은 서귀포 권역이다 보니 여기가 바로 거긴게라...해서 삼보식당으로 고고~~
요즘은 오분작이가 안잡힌다고 한다. 오분작은 전복처럼 양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쉽게도 오분작 뚝배기는 먹지 못했고,
전복뚝배기에 생선구이로 만족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