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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좌 -10 [전국비구니회관(법룡사)]
제2 방편품. 5. 불신은 법신이다
제3 제자품. 1. 사리불과 좌선 2. 목건련과 거사를 위한 설법
우리는 사실은 이런 육신을 가지고 인생의 가치와 보람이라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세속의 길은 그래요. 지금까지의 삶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불교의 길은 무엇인가? 불교의 길은... 이 육신이 모두라고 생각하고, 이 육신에 목을 매고 사는데 이 육신을 이렇게 본다면, 그렇다면 그 아닌 길. 다시 말해서 불교의 길은 무엇일까? 이런 뜻에서 佛身은 法身이다. 이러한 내용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육신. 이 허망한 肉身을 그대로 붙들고ㆍ거기에 애착하고ㆍ미련을 가지고 그것만 제일이라고 그렇게 매달려 있을 것이 아니라, 비록 그러한 몸이지만 그것을 밑천으로 해서, 그렇습니다. 그것을 밑천으로 해서 정말 천상에도 오를 수가 있고ㆍ부처도 될 수가 있고 얼마든지 아주 높이 올라 갈 수 있는 그 길이 있다. 아주 고귀한 삶의 길이 여기에 있다. 그것이 불교의 길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大乘의 佛身觀(대승불신관)이라고도 하지요.
5. 불신은 법신이다
諸仁者(제인자)여 此可患厭(차가환염)이라
當樂佛身(당요불신)이니 所以者何(소이자하)오
佛身者(불신자)는 卽法身也(즉법신야)라
從無量功德(종무량공덕)ㆍ智慧生(지혜생)이며
從戒(종계)ㆍ定(정)ㆍ慧(혜)ㆍ解脫(해탈)ㆍ
解脫知見生(해탈지견생)이며 從慈(종자)ㆍ悲(비)ㆍ喜(희)ㆍ
捨生(사생)이며 從布施(종보시)ㆍ持戒(지계)ㆍ忍辱(인욕)ㆍ
柔和(유화)와 勤行精進(근행정진)ㆍ禪定(선정)ㆍ解脫(해탈)
ㆍ三昧(삼매)와 多聞(다문)ㆍ智慧諸波羅蜜生(지혜제바라밀
생)이며 從方便生(종방편생)이며 從六通生(종육통생)이며
從三明生(종삼명생)이며 從三十七道品生(종삼십칠도품생)이며
從止觀生(종지관생)이며 從十力(종십력)ㆍ
四無所畏(사무소외)ㆍ十八不共法生(십팔불공법생)이며
從斷一切不善法(종단일체불선법)하고
集一切善法生(집일체선법생)이며 從眞實生(종진실생)이며
從不放逸生(종불방일생)이며
從如是無量淸淨法(종여시무량청정법)하야
生如來身(생여래신)하나니 諸仁者(제인자)여
欲得佛身(욕득불신)하야 斷一切衆生病者(단일체중생병자)인댄
當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당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하라하
니라 如是(여시)하야 長者維摩詰(장자유마힐)이
爲諸問疾者(위제문질자)하사 如應說法(여응설법)하야
令無數千人(영무수천인)으로
皆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개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케하니
라
諸仁者(제인자)여, 여러분이여 此可患厭(차가환염)이라. 이러한 육신은 참으로 우리가 患厭이라. 걱정거리고 싫증나는 그런 것인데,
참~ 그, 나이 좀 들고 병 좀 들고 해보면 이 육신이 참 정말 귀찮은 존재고ㆍ걸리적거리는 존재고ㆍ짐스러운 존재고ㆍ아 이루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지고 있을 수도 없고요.
전부 건강한 사람들은 잘 모를 겁니다. 아~ 이것 짐스러운 겁니다. 此可患厭이라. 當樂佛身(당요불신)이니, 마땅히 불신에다가 말하자면 관심을 돌려야 할 일이다. 불신을 좋아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까 관심사를 다른데 돌리는 겁니다.
저가 지금 7년째 아픈데요. 아프고 나서 훨씬 좋은 글을 많이 쓰고ㆍ좋은 법문하고ㆍ저에게는 훨씬, 어떤 불교적인 안목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사실은 덕을 크게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처님의 6년 고행과 맞먹는 것이다.’ 최소한도 제 인생에 있어서는 ‘아픈 것이 6년 고행하고 맞먹는다.’ 그 전에도 제 나름대로 정진하고ㆍ공부한다고 했었습니다. 한참 정진할 때 안 졸려고 못을 쳐놓고 목에다가 줄을 매가지고 거기다 줄을 걸어놓고 졸음을 쫓아보기도 하고, 나무토막을 칼날 같이 뾰쪽하게 깎아서 배에다가 버티고, 조금만 졸면 거기 찔려서 졸음을 쫓으려고 이렇게 해봤지만, 그것보다도 정말 심하게 아파보니까ㆍ아파보니까 그것이 더 큰 공부더라고요.
그런데 불법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아파야지, 관심이 없이 아프기만 하면 헛 아픈 겁니다. 우리는 타고난 죄인이니까 자나 깨나 “성불ㆍ성불” “불법ㆍ불법” 그것이 늘 관심사니까 아픈 것도 그러한 깨달음으로 그 어떤 깨달음의 도구로 활용이 된다고요. 그러면 아주 소득이 있습니다. 정말 큰 소득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을 쓰고 뭐 하는 것을 전부 진통제로 하는데, “아픈 사람이 왜 그런 것 하느냐?”고 “나는 진통제로 알고 한다.”그런 말을 많이 했습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까닭이 무엇이냐?
佛身者(불신자)는 卽法身也(즉법신야)라. 불신이라고 하는 것은 곧 법신이다. 진리의 몸입니다. 부처라고 하는 말이나 진리의 몸이라고 하는 말이나... 그런데 과연 이 육신을 버리고 과연 불신ㆍ법신이 있겠는가? 우리의 관심을 이렇게 돌려야 됩니다. 그러면 그 아픈 육신을 통해서 이와 같이 훌륭한, 정말 불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훌륭한 내용들을 내가 경험하게 되고ㆍ맛보게 되고ㆍ거기에 깊이 빠져들게 되고ㆍ그것이 결국은 나의 인격이 될 수 있다 하는 그런 형식입니다. 표현이...
그래서 예를 들어서 法身이라고 하는 것은 從無量功德(종무량공덕)ㆍ智慧生(지혜생)이며, 한량없는 공덕과 지혜로부터 생긴 것이다.
從戒(종계)ㆍ定(정)ㆍ慧(혜)ㆍ解脫(해탈)ㆍ解脫知見生(해탈지견생)이며, 계ㆍ정ㆍ혜ㆍ해탈ㆍ해탈지견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從慈(종자)ㆍ悲(비)ㆍ喜(희)ㆍ捨生(사생)이며, 자ㆍ비ㆍ희ㆍ사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從布施(종보시)ㆍ持戒(지계)ㆍ忍辱(인욕), 보시ㆍ지계ㆍ인욕ㆍ건정ㆍ지혜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柔和(유화)와 勤行精進(근행정진)ㆍ禪定(선정),ㆍ解脫(해탈)ㆍ三昧(삼매)와 多聞(다문), 다문, 중요합니다. 많이 듣고, 읽어야 됩니다. 智慧諸波羅蜜生(지혜제바라밀생)이며, 지혜등ㆍ모든 바라밀로 생기는 것이다.
從方便生(종방편생)이며, 또, 법신은 방편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從六通生(종육통생)이며, 육신통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從三明生(종삼명생)이며, 삼명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從三十七道品生(종삼십칠도품생)이며, 37조도품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從止觀生(종지관생)이며, 止觀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從十力(종십력)ㆍ四無所畏(사무소외)ㆍ十八不共法生(십팔불공법생)이며, 10력ㆍ4무소외ㆍ18불공법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從斷一切不善法(종단일체불선법)하고, 일체 불선법을 끊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이고 集一切善法生(집일체선법생)이며, 일체 선법을 모음으로부터 생기는 것이고 從眞實生(종진실생)이며, 진실로부터 생기는 것이고 從不放逸生(종불방일생)이다. 불방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從如是無量淸淨法(종여시무량청정법)하야, 이와 같이 한량없는 청정한 법으로부터 生如來身(생여래신)하나니, 여래신을 탄생시킨다.
諸仁者(제인자)여 欲得佛身(욕득불신)하야, 여러분이여, 불신을 얻고 싶은가? 斷一切衆生病者(단일체중생병자)인댄, 일체 중생의 병을 끊을진댄, 불신을 얻어서 일체 중생의 병을 끊고자 할진댄 當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당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하라하니라. 마땅히 보리심을 발해라. 如是(여시)하야 長者維摩詰(장자유마힐)이, 이와 같아서 장자 유마힐이 爲諸問疾者(위제문질자)하사, 問疾者. 여러 문병 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사람들에 맞추어 가지고 如應說法(여응설법)하야, 이와 같이 설법해서 令無數千人(영무수천인)으로 皆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개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케하니라. 무수천인으로 하여금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게 하였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마거사가 병이 들어 있고 그 병의 소재인 肉身. 육신에 대한 허망함을 이야기했고, “그 허망한 육신을 통해서 사실은 얼마나 큰 소득이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佛身이라고 하는 것을 체험했다. 나는 法身이라고 하는 것을 체험했다.” 결국은 바탕이 허망한 육신으로부터 불신도 법신도 그리고 여기에 나열된, 여기는 불교 총론이지요. 불교 총론입니다. 지금 이 짧은 한 편의 글이지만, 이 속에 뭐라고요? 佛身ㆍ法身을 떡 등장시켜놓고, 無量功德시에 戒ㆍ定ㆍ慧ㆍ解脫ㆍ解脫知見ㆍ慈ㆍ悲ㆍ喜ㆍ捨ㆍ布施ㆍ持戒ㆍ忍辱ㆍ柔和ㆍ勤行ㆍ精進ㆍ禪定ㆍ解脫ㆍ三昧ㆍ多聞ㆍ智慧. 그리고 方便ㆍ六神通ㆍ三明ㆍ三十七照道品ㆍ止觀ㆍ十力ㆍ四無所畏ㆍ十八不共法ㆍ一切不善法ㆍ一切善法. 이 모든 것들을 여기에 다 압축해 놨어요.
이것이, 이 짧은 한 편이 불교 총론입니다.
이 모든 불교적인 것이 내 몸 아픔으로 해서 비로소 맛보게 되었고, 그것이 나의 인생이 되었다 하는 그런 표현입니다. 참 아주 근사한 대목입니다. 그래서 우리 이 한 몸 가지고 세속의 길로 갈 수도 있고, 불교의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 이 육신이라고 하는 이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어떻게 할 것이냐? 이 재료를 가지고, 돼지 밥이 되게 할 수도 있고 개밥이 되게 할 수도 있지만, 정말 불신도 되게 할 수 있고 법신도 되게 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결국은 그래서 뭐라고요? 幻化空身이 卽法身(환화공신즉법신)이다. 영가 증도가에서 이런 말을 이렇게... 선불교에 오면 너저리하게 안 하지요. 문장이 아름답고 공부하는 데는 좋은 자료가 됩니다만, 그런 식으로 표현 안 합니다.
한 마디로 그냥 幻化空身이 卽法身이다. 이 육신. 허망한 이 육신 이대로가 법입니다. 육신 떠나고 따로 법신 없다 말입니다. 천하의 어떤 훌륭한 그런 불신을 증득한다 하더라도 육신을 바탕으로 해서 증득하는 것이지, 그 외에 달리 다른 것 없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리고 無明實性이 卽佛性(무명실성즉불성)이다. 그랬습니다. 번뇌 망상, 온갖 탐 진 치 삼독으로 부글부글 끊는 그 번뇌 망상 그것이 바로 법신이잖아요. 불성이잖아요. 정말그것은 손바닥의 앞과 뒤와 같은 것입니다. 그 무엇도 부정할 수가 없는 겁니다. 손바닥 앞을 깎아 내려 봐요. 아무리 깎아 내려 봐도 앞은 그대로 앞이 있어요.
그대로 둬야지 뒤가 좋다고, 아니 뒤가 나쁘다고 한번 뒤를 계속 깎아 봐요. 뒤는 계속 뒷자리에 있습니다. 육신은 항상 육신으로 있는 겁니다. 거기에서 바로 법신을 이해해야지, 육신 부정하고 결코 법신이 따로 없습니다. 손바닥 뒤 아무리 깎아 봐요. 뒤는 늘 뒤로 남아있는 겁니다. 천 번 만 번 깎아 내도 뒤는 항상 뒤입니다. 그럼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우리가 손바닥 앞을 봐야 되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드디어 소승에 편입한 그런 생각들을 배척하고ㆍ꾸짖고ㆍ통렬하게 비판하는 그런 내용들이 등장을 합니다.
弟子品(제자품). 십대제자의 근거라고 했지요?
“중도적 좌선” 이라. 이렇게 제가 표현을 해봤습니다. 사리불과 좌선. 사리불은 지난 시간에도 정말 면면히 감동되는 그런 제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維摩詰所說經(유마힐소설경)
第三 弟子品(제자품)
1. 사리불과 좌선
爾時(이시)에 長者維摩詰(장자유마힐)이
自念寢疾於牀(자념침질어상)하니 世尊(세존)의 大慈(대자)로
寧不垂愍(영불수민)인가하더니 佛知其意(불지기의)하시고
卽告舍利弗(즉고사리불)하사대
汝行詣維摩詰(여행예유마힐)하야 問疾(문질)하라
舍利弗(사리불)이 白佛言(백불언)하대 世尊(세존)이시여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이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憶念(억념)하니 我昔(아석)에
曾於林中(증어림중)에 宴坐樹下(연좌수하)러니 時(시)에
維摩詰(유마힐)이 來謂我言(내위아언)하되
唯舍利弗(유사리불)아 不必是坐(불필시좌)가
爲宴坐也(위연좌야)니라 夫宴坐者(부연좌자)는
不於三界(불어삼계)에 現身意(현신의)가 是爲宴坐(시위연좌)
며 不起滅定(불기멸정)하고 而現諸威儀(이현제위의)가
是爲宴坐(시위연좌)며 不捨道法(불사도법)하고
而現凡夫事(이현범부사)가 是爲宴坐(시위연좌)며
心不住內(심부주내)하고 亦不在外(역부재외)가
是爲宴坐(시위연좌)며 於諸見(어제견)에도 不動(부동)하고
而修行三十七道品(이수행삼십칠도품)이 是爲宴坐(시위연좌)며
不斷煩惱(부단번뇌)하고 而入涅槃(이입열반)이
是爲宴坐(시위연좌)니 若能如是坐者(약능여시좌자)라사
佛所印可(불소인가)니라 時我世尊(시아세존)이시여
聞是說語(문설시어)하고 默然而止(묵연이지)하야
不能加報(불능가보)니다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호이다
爾時(이시)에 長者維摩詰(장자유마힐)이 自念寢疾於牀(자념침질어상)하니, 그 때에 장자유마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四海無家病比丘(사해무가병비구), 사해에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병든 비구가 孤燈獨照破牀頭(고등독조파상두)라. 제가 치문에서 그것을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四海無家病比丘 孤燈獨照破牀頭라. 온 사방을 다 훑어 봐야 아는 사람 없어. 도반이라고 그래봐야 아프면 더 가까이 안 옵니다. 혹시 병이 옮을까 싶어서인지 더 가까이 안 온다고요. 신종플루도 아닌데 불러도 가까이 안 옵니다. 냄새 난다고... 孤燈獨照破牀頭라. 외로운 등불이 깨어진 침상머리만 깜빡깜빡 비추고 있는 겁니다. 아프니까 잠이 올 리가 있나요? 잠이 안 오니까 그 외로운 등불만 바라볼 수밖에 없지요. 아이고 참 그런, 여러분 그런 글 다 읽었지요? 아~ 얼마나 근사합니까? 이 분은 그런 처지는 아닙니다.
그런 처지는 아닌데, 寢疾於牀. 병으로써 牀에 누워 있었다. 그러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世尊(세존)의 大慈(대자)로 寧不垂愍(영불수민)인가하더니 ‘내가 이렇게 병들어서 누워있는데 세존께서는 큰 자비로써 어찌 그 연민심을 드리우지 않는가?’나를 불쌍히 생각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누구십니까? 그 생각 다 알지요. 佛知其意(불지기의)하시고, 부처님이 그 뜻을 잘 굽어 살피시고는 卽告舍利弗(즉고사리불)하사대, 곧 사리불에게 告해요. 사리불이 제자 중에 아주 왕이잖아요. 제일 첫째 제자니까요. 그래 사리불에게 고하사대, 汝行詣維摩詰(여행예유마힐)하야, 네가 저 유마힐에게 가서 問疾(문질)하라. 문병하라. 아마 나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자네가 나를 대신해서 가서 문병 좀 하고 오너라. 꽃이라도 한 송이 들고 가가지고...
舍利弗(사리불)이 白佛言(백불언)하대 世尊(세존)이시여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이니다. 저는 도저히 그 분에게 나아가서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왜냐하면 憶念(억념)하니, 기억해 보건대 ‘제가 정말 유마힐을 생각도 하기도 싫습니다. 아주 보통내기라야 말이지요.’이런 뜻입니다.
憶念하니, 기억해 보건대 我昔(아석)에 曾於林中(증어림중)에, 제가 옛날에 일찍이 숲속에서 宴坐樹下(연좌수하)러니, 宴坐.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숲속 나무 밑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時(시)에 維摩詰(유마힐)이 來謂我言(내위아언)하되, 그 때 유마힐이 저에게 와서 말씀하시기를,
唯舍利弗(유사리불)아, 여보시오 사리불이여, 唯하는 것은 “여보시요 ”하는 투입니다. 여보시요 사리불아 不必是坐(불필시좌)가 爲宴坐也(위연좌야)니라. 반드시 앉을 필요 없어, 좌선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 앉는 것을 좌선이라고 하느냐? 그것이 좌선이 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夫宴坐者(부연좌자)는, 대저 좌선이라고 하는 것은 = 宴坐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中道적 좌선입니다. 제대로 안목이 바로선 입장에서의 좌선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좌선 한 번 잠깐 하다가 유마힐 만나서 아주 된통 체면 깎이는 내용이지요.
대저 좌선이라고 하는 것은 不於三界(불어삼계)에 現身意(현신의)가 是爲宴坐(시위연좌)며, 삼계에서 몸과 뜻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이것이 좌선이다. 당신 그 좌선하는 폼 잡고 있는 그것, 좌선 아니야. 그것 좀 어디 숨기고 하면 안 되느냐? 이 말입니다. 어떤 수좌들 토굴에, 실컷 놀다가 저 밑에서 사람 올라오는 소리 들리면 얼른 방석 깔고 좌선하는 척 하고 있는 겁니다. 사리불은 그렇게는 아니 했을 텐데... 당신 그렇게 앉아서 좌선하는 척 하지마. 이 뜻입니다. 身意를 나타내지 않는 것이 좌선이다.
不起滅定(불기멸정)하고 而現諸威儀(이현제위의)가 是爲宴坐(시위연좌)며, 滅盡定(멸진정). 아주 깊은 선정에서 일어나지 아니 한 채, 온갖 위의를 나타내는 것. 이것이 좌선이다. 行ㆍ住ㆍ坐ㆍ臥(행주좌와), 어디 가서 설법을 하든지ㆍ노동을 하든지ㆍ무엇을 하든 걸어 다니든지ㆍ축구를 하든지ㆍ배구를 하든지 하되ㆍ정말 저 깊은 선정에 그대로 있는 채 그런 온갖 작용과 행위를 할 수 있는 이쯤 되어야 그것을 좌선이라고 한다. 앉는 것을 그렇게 고집하지 말라. 유치원생도 아니고 그것이 뭐냐? 아마 이런 소리가 사이사이 끼었을 겁니다.
不捨道法(불사도법)하고 而現凡夫事(이현범부사)가 是爲宴坐(시위연좌)며, 도법을 버리지 아니한 채 범부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 범부의 일을 다 해. 범부의 일을 다 하지만, 보통 중생들의 삶을 살아가지만, 도업의 원리, 도의 원리에 다 맞게 사는 것. 무엇을 하며 살든지 속인으로 살아도 좋아요. 속인이 어때서요? 범부로서 범부의 일을 다 하되, 道法에 입각해서 살면 이것이 좌선입니다.
心不住內(심부주내)하고 亦不在外(역부재외)가 是爲宴坐(시위연좌)며, 마음이 안에도 머물지 아니하고 밖에도 있지 아니한 것. 이것이 좌선이다.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그래 “중도적 좌선” 제가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於諸見(어제견)에도 不動(부동)하고 而修行三十七道品(이수행삼십칠도품)이 是爲宴坐(시위연좌)며, 제견에 부동하고 삼십칠도품을 닦는 것이, 이것이 좌선이다. 諸見이라고 하는 것은 온갖 소견인데, 특히 인도에는 여러 가지 소견을 가진 외도들이 또 바라문, 이런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데에 꼼짝도 하지 아니하고” 그런 말입니다. 그런 데에 움직이지 아니하고 불교적인 수행. 37조도품을 닦는 이것이 좌선이다.
不斷煩惱(부단번뇌)하고 而入涅槃(이입열반)이 是爲宴坐(시위연좌)니,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이것이 좌선이다. 야~ 이것 어려운 것이지요. 번뇌를 끊어야 열반에 든다고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야 돼. 이것이 중도입니다. 번뇌 끊어 버리면 지혜도 없습니다. 번뇌 끊어 버리면 지혜도 없어요. 지혜와 번뇌는 하나입니다.
손의 앞뒤와 같아요. 손의 앞뒤와 같습니다. 앞을 제거하면 뒤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건요? 차원이 다릅니다. 보통 일반불교하고 이 유마경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든다.” 아~ 이 말 한 마디만 해도 어딥니까? 번뇌 그대로 가져 계셔야 됩니다. 절대 번뇌 끊으려고 하거나 버리려고 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번뇌라고 하는 실체를 제대로 알면요? 이런 말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若能如是坐者(약능여시좌자)라사, 만약에 이와 같이 능히 앉아야 佛所印可(불소인가)니라. 부처님이 인가한다. 이런 말씀을 하십디다.
時我世尊(시아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그 때 제가 聞說是語(문설시어)하고, 이 말 설하는 것을 듣고는 默然而止(묵연이지)하야, 묵연히, 가만히 있었습니다. 꼼짝 못하고 저는 입 다물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됐었습니다. 아무런 대답도 못했습니다. 不能加報(불능가보)니다. 능히 아무런 대답도 못했습니다. 故我不任詣彼問疾(고아불임예피문질)호이다. 그러므로 저는 도저히 그분 에게 가서 문병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습니다.
목건련과 거사를 위한 설법. “법이란 무엇인가?” 라고 하는 내용인데, 여기는 또 아주 여러 가지로 법에 대한, 법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2. 목건련과 거사를 위한 설법
佛告大目健連(불고대목건련)하사대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하라
目連(목련)이 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이시여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이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憶念(억념)하니 我昔(아석)에
入毘耶離大城(입비야리대성)하야 於里巷中(어리항중)에
爲諸居士說法(위제거사설법)이러니 時(시)에 維摩詰(유마힐)이
來謂我言(내위아언)하되 唯大目連(유대목련)이여
爲白衣居士說法(위백의거사설법)인댄
不當如仁者所說(부당여인자소설)이니라
夫說法者(부설법자)는 當如法說(당여법설)이니
法無衆生(법무중생)이라 離衆生垢故(이중생구고)며
法無有我(법무유아)라 離我垢故(이아구고)며
法無壽命(법무수명)이라 離生死故(이생사고)며
法無有人(법무유인)이라 前後諸斷故(전후제단고)며
法常寂然(법상적연)이라 滅諸相故(멸제상고)며
法離於相(법리어상)이라 無所緣故(무소연고)며
法無名字(법무명자)라 言語斷故(언어단고)며
法無有說(법무유설)이라 離覺觀故(이각관고)며
法無形相(법무형상)이라 如虛空故(여허공고)며
法無戱論(법무희론)이라 畢竟空故(필경공고)며
法無我所(법무아소)라 離我所故(이아소고)며
法無分別(법무분별)이라 離諸識故(이제식고)며
法無有比(법무유비)라 無相待故(무상대고)며
法不屬因(법불속인)이라 不在緣故(부재연고)며
法同法性(법동법성)이라 入諸法故(입제법고)며
法隨於如(법수어여)라 無所隨故(무소수고)며
法住實際(법주실제)라 諸邊不動故(제변부동고)며
法無動搖(법무동요)라 不依六塵故(불의육진고)며
法無去來(법무거래)라 常不住故(상부주고)며
法順空隨無相(법순공수무상)하고 應無作(응무작)하며
法離好醜(법리호추)하고 法無增損(법무증손)하며
法無生滅(법무생멸)하고 法無所歸(법무소귀)하며
法過眼ㆍ耳ㆍ鼻ㆍ舌ㆍ身ㆍ心(법과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심)하고
法無高下(법무고하)하여 法(법)은 常住不動(상주부동)하고
法離一切觀行(법리일체관행)이니 唯大目連(유대목련)이여
法相如是(법상여시)어늘 豈可說乎(기가설호)아
夫說法者(부설법자)는 無說無示(무설무시)하고
其聽法者(기청법자)는 無聞無得(무문무득)이니
譬如幻士(비여환사)가 爲幻人說法(위환인설법)이라
當建是意(당건시의)하여 而爲說法(이위설법)이라야
當了衆生(당요중생)의 根有利鈍(근유이둔)하며
善於知見(선어지견)에 無所罣碍(무소가애)하며
以大悲心(이대비심)으로 讚於大乘(찬어대승)하고
念報佛恩(염보불은)하야
不斷三寶然後說法(부단삼보연후설법)이라하니
維摩詰(유마힐)이 說是法時(설시법시)에 八百居士(팔백거사)가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라
我無此辯(아무차변)일세 是故(시고)로
不任詣彼問疾(불임예피문질)이니다
佛告大目健連(불고대목건련)하사대 汝行詣維摩詰問疾(여행예유마힐문질)하라. 부처님은 대목건련에게, 그럼 그대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게. 目連(목련)이 白佛言(백불언)하되 世尊(세존)이시여 我不堪任詣彼問疾(아불감임예피문질)이니다. 세존이시여, 저도 그 분에게 가서 문병할 수가 없습니다. 所以者何(소이자하)오? 왜냐하면 憶念(억념)하니 我昔(아석)에 入毘耶離大城(입비야리대성)하야, 기억해보니 제가 옛날에 비야리 대성에 들어가서 於里巷中(어리항중)에 爲諸居士說法(위제거사설법)이러니, 마을 가운데서 설법을 하고 있었습니다.
時(시)에 維摩詰(유마힐)이 來謂我言(내위아언)하되, 그 때에 유마힐이 저에게 와서 말씀하시길, 唯大目連(유대목련)이여, 여보시오 대목련이여, 爲白衣居士說法(위백의거사설법)인댄, 백의거사를 위해서 설법하려고 할 것 같으면 不當如仁者所說(부당여인자소설)이니라. 마땅히 그대와 같이 말해선 안 된다. 사정없이 이렇게ㆍ조금도 지체 없이ㆍ어떤 여유도 없고요. 가차 없이 그렇게 비판하고ㆍ꾸짖고 그렇게 합니다. 이것이 참, 그래서 이것은 “대승 불교운동의 선언서다.” 제가 감히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이 대승 불교운동이 한참 일어날 무렵에 그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아주 획기적인, 불교역사에 아주ㆍ아주 획기적인 일입니다. 그것이 부처님 열반 한 500년경 됐거든요. 그래서 “5” 라는 숫자가 유독 많이 나옵니다. 앞에 “市중의 장자의 아들 500명” 그랬지요? 그리고 금강경에 보면 “제 오 500세” 해가지고 해탈견고ㆍ선정견고ㆍ다문견고ㆍ탑사견고ㆍ투쟁견고. 이렇게 해서 500년씩ㆍ500년씩 잘라서 연한을 정하는 것도요? 이것이 이유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법화경 같은 데는 500이라는 숫자가 아주 여러 번 나옵니다. 왜 500이냐? 바로 500년을 기점으로 해가지고, 佛滅(불멸) 500년을 기점으로 해가지고 불교를 완전히 뒤집어 버렸어요. 정말 교조주의ㆍ정말 권위주의ㆍ교단 중심의 타락한 성직자들의 어떤 갇힌 그런 불교에서 완전히 개방된, 대중과 함께하는 새로운 그런 불교로 탈바꿈 하게 되는 햇수. 그것이 500입니다. 그래서 여러 대승 경전에 500이라는 숫자를 많이 씁니다. 그래서 여기서 그 동안의 소승적 견해를 사정없이 비판하고ㆍ말하자면 꾸짖고 합니다.
그 때에 유마힐이 저에게 와서 말하기를, 어진이여 당신과 같이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 하면서 夫說法者(부설법자)는, 대저 설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랬어요. 當如法說(당여법설)이니, 마땅히 여법하게 설해야 된다.
法無衆生(법무중생)이라. 중생ㆍ중생ㆍ중생ㆍ하지만 법에는 중생이 없어. 왜냐? 본래로 사람ㆍ사람들은 離衆生垢故(이중생구고)며, 중생이라고 하는 중생 허물ㆍ중생이라고 하는 때를 다 떠나있어요. 궁극적 차원을 한번 들여다보세요. 늘 그 고려청자 같은 수억 짜리를, 기껏 근래에 만든 개 밥그릇 정도로 보지 말고, 정말 안목을 가지고 고려청자의 가치로 보란 말입니다. 그것 어디 개 밥그릇으로 쓸 수 있는 존재입니까? 중생ㆍ중생, 해서 중생이 무슨 업 덩어리ㆍ죄업 덩어리 해가지고 T V에 매일 그냥 참회한다고ㆍ참회한다고 그렇게 참회할 것이 아닙니다. 참회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왜 안목을 낮춰서 보느냐? 이 겁니다. 안목을 낮춰서 보느냐? 안목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인간이 본래 갖춰져 있는 정말 아주 숭고한 그 궁극적 차원을 들여다보면 法無衆生입니다. 법에는 중생이 없습니다. 중생은 허물을 다 떠났습니다. 목건련은 “아~ 중생은 죄업 많으며ㆍ하나님의 종이며ㆍ참회해야 돼ㆍ업장소멸 해야 돼.” 이런 소리만 했겠지요. 그러니까 딱하지요. 안목이 그것뿐이니까, 겉만 보니까요.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예컨대 고려청자를 고려청자로 보지 못하고 일개 개 밥그릇으로 보는 겁니다.
法無有我(법무유아)라 離我垢故(이아구고)다. 我라고 하는 것이 법에는 없어. 법에 무슨 我가 있습니까? 我라고 하는 허물과ㆍ我라고 하는 때와ㆍ我라고 하는 문제를 다 떠나 있는 故다.
法無壽命(법무수명)이라 離生死故(이생사고)다.
법에는 수명이 없다 생사를 떠나있는 연고다.
法無有人(법무유인)이라 前後諸斷故(전후제단고)다.
법에는 人이라고 하는 것이 없다 전후제가 끊어진 연고다.
法常寂然(법상적연)이라. 법은 항상 寂然하다. 그래서 滅諸相故(멸제상고)다. 온갖 현상들을 사실은 다 초월해 있는 자리다. 겉만 보면 모든 것이 차별하고, 끊임없이 變滅(변멸)하고 하지만, 사실은 궁극적 차원에서 보면, 이 역사적인 현상ㆍ역사적인 현실만 가지고 보면 전부 차별하는 모습뿐이지요. 그러나 거기서 조금 한 눈만 더 뜨고 들여다보면, 법에는 항상 寂然해요. 그래서 모든 相을 떠나있다.
法離於相(법리어상)이라, 無所緣故(무소연고)다.
법은 상을 떠났음이라 반연하는 바가 없는 연고다.
法無名字(법무명자)라 言語斷故(언어단고)다.
법에는 名字가 없다. 언어가 끊어진 연고다.
法無有說(법무유설)이라 離覺觀故(이각관고)다.
법에는 설할 것이 없다. 覺觀이 없는 연고다. 이것은 수행하는데 어떤 사물을 헤아리는 어떤 마음이 거치는 작용을, 또는 미세한 작용, 자세한 작용, 이런 것들을 覺觀이라고 그래요. 그런 것들을 다 떠난 연고다.
法無形相(법무형상)이라. 如虛空故(여허공고)다.
법에는 형상이 없다. 허공과 같은 연고다.
法無戱論(법무희론)이라 畢竟空故(필경공고)다.
법에는 戱論이 없다, 필경에는 공한 연고다.
法無我所(법무아소)라 離我所故(이아소고)다.
법에는 我所가 없다. 아소를 떠난 연고다.
法無分別(법무분별)이라 離諸識故(이제식고)다.
법에는 분별이 없다. 모든 인식을, 모든 識을 떠난 연고다.
法無有比(법무유비)라 無相待故(무상대고)다.
법에는 비교할 수가 없다. 서로 상대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法不屬因(법불속인)이라 不在緣故(부재연고)다.
법에는 因에 속하지도 아니 하고, 緣에 속하지도 아니한다.
因이 없다. 緣에 있지 아니한 까닭이다. 인이 없으면 연도 없는 것이지요.
法同法性(법동법성)이라. 법은 법성과 같은 것이다.
入諸法故(입제법고)라. 모든 법에 들어가는 연고다.
法隨於如(법수어여)라. 법은 隨於如라. 如라고 하는 것이, 如如함ㆍ眞如.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如를 따른다. 그래서 無所隨故(무소수고)다.
따르는 바가 없어. 진여의 자리에서는 따른다고 편의상 그렇게 표현하지만, 사실은 따를 것도 없습니다. 왜냐? 온통 如의 자리ㆍ진여의 자리니까 그렇습니다.
法住實際(법주실제)라. 법은 실제에 머문다.
諸邊不動故(제변부동고)다. 모든 변두리ㆍ모든 편협 된 그 곳에 움직이지 않는 연고다.
法無動搖(법무동요)라 不依六塵故(불의육진고)다.
법은 동요가 없다. 六塵에 의지하지 않는 연고다.
法無去來(법무거래)라 常不住故(상부주고)다.
법은 去來거래가 없다. 항상 머물지 않는 연고다.
法順空隨無相(법순공수무상)하고 應無作(응무작)하다.
법은 順空隨無相이라. 空을 따르고 無相을 따르고 응당히 지은바가 없다.
法離好醜(법리호추)다. 법은 好醜를 떠났다.
法無增損(법무증손)하다. 법은 增損이 없다. 증하거나 손해되는 것이 없다. 法無生滅(법무생멸)하다. 법은 生滅이 없다. 이유도 붙일 필요 없네요. 이제는 바로바로 없다고 나오지요?
法無所歸(법무소귀)하다. 법은 돌아가는 바가 없다.
法過眼ㆍ耳ㆍ鼻ㆍ舌ㆍ身ㆍ心(법과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심)하고,
법은 안 이 비 설 신 심을 지나가고,
法無高下(법무고하)며, 법은 高下가 없으며
法(법)은 常住不動(상주부동)하고,
法離一切觀行(법리일체관행)이니, 법은 일체 관행을 다 떠났다.
唯大目連(유대목련)이여, 여보시오 대목건련이여
法相如是(법상여시)어늘, 法相이 이와 같거늘 豈可說乎(기가설호)아?
어찌 가히 그것을 설하는가? 말하면 다 그르치는데 설할 수가 있겠는가?
夫說法者(부설법자)는, 대저 설법하는 사람은 無說無示(무설무시)하고,
설함도 없고 보임도 없고 其聽法者(기청법자)는, 법을 들은 사람은
無聞無得(무문무득)이니, 들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음이니,
아~ 참 근사하지요? 설법하는 사람은 說도 없고, 말 할 것도 없고, 말도 없어요. 보일 것도 없고, 보임도 없어요. 또 따라서 聽法者는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다. 관음보살 無說說(무설설), 南巡童子不聞聞(남순동자불문문). 바로 그 도리입니다.
譬如幻士(비여환사)가, 예를 들어서 마술하는 사람이 爲幻人說法(위환인설법)이라. 마술로 만들어 놓은 幻人을 위해서 설법하는 것과 같다.
當建是意(당건시의)하여, 마땅히 이러한 뜻을 세워서 而爲說法(이위설법)이라야, 설법을 하여야 當了衆生(당요중생)의 根有利鈍(근유이둔)하며, 마땅히 중생들의 근기에 利와鈍. 영리하고 둔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또 善於知見(선어지견)에, 지견을 잘 통달해서 無所罣碍(무소가애)하며, 걸리는 바가 없으며, 以大悲心(이대비심)으로 讚於大乘(찬어대승)하고, 대비심으로써 대승을 찬탄하고 念報佛恩(염보불은)하야,
부처님은혜 갚을 것을 생각해서 不斷三寶然後說法(부단삼보연후설법)이라하니, 삼보가 끊어지지 않게 한 연후에 설법해야 된다.
維摩詰(유마힐)이 說是法時(설시법시)에, 유마힐이 이러한 설법을 할 때에 八百居士(팔백거사)가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했더라.
我無此辯(아무차변)일세, 저는 이러한 변론이 없습니다.
是故(시고)로 不任詣彼問疾(불임예피문질)이니다. 그러므로 저는 도저히 그분에게 가서 문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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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佛身은 卽法身...幻化空身이 卽法身...無明實性이 卽佛性..釋대원성 님! 녹취달인이 올리신 유마경 공부 잘 하고 갑니다..수고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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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성님,고맙습니다._()()()_
제가 다시 좀 여유있게 유마경 볼 시간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_()()()_
덕분에 세세히 복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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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順空隨無相(법순공수무상)하고 應無作(응무작)하다. /법은 順空隨無相이라. 空을 따르고 無相을 따르고 응당히 지은바가 없다. 대원성 보살님, 멋진 유마경을 이렇게 공부할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므흣](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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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身者(불신자)는 卽法身也(즉법신야)라...釋대원성 보살님![!](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짱](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_44.gif)
![~](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고맙습니다._()()()_
不起滅定(불기멸정)하고 而現諸威儀(이현제위의)가 是爲宴坐(시위연좌)며,...釋대원성님,고맙습니다_()()()_
觀音菩薩 無說說, 南巡童子不聞聞...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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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한 육신 속에 불신도 법신도 온갖 불교 총론이 다 압축되어 있다.![달인](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0725/texticon109.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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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보살無說說, 南巡童子不聞聞. 설법하는 사람은 설함도 없고 보임도 없고 법을 들은 사람은 들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음이라. 대원성님 고맙습니다.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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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念報佛恩
나무아니타불 관세음보살 _()()()_
환영같은 허망한 육신이 그대로 법신이다...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굽신](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0724/texticon_81.gif)
)
幻化空身이 卽法身...... 不起滅定하고 而現諸威儀가, 心不住內하고 亦不在外가 是爲宴坐며...... _()()()_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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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당신은부처님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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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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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