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사랑의 향기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이사벨라
거장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의 작가 및 그림읽기
(1883~1955)
백색(白色)속에 찌든 서민(庶民)의 감정
몽마니의 지붕들
모리스 위트릴로는 몽마르트르에서 태어나 몽마르트르에서 자랐고 몽마르트르를 그리다가 죽었다. 그리고 몽마르트르에 묻혔다. 말하자면 순종 몽마르트르의 화가이다. 어쩌다가 세상에 태어난 사생아인 그는 슬픔과 고독이란 처절한 아픔을 이겨 내지 못하고 14세부터 술을 마셨다.
그리고 18세 때에는 알콜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 신세를 지는 숙명적인 주정뱅이가 된다. 이 그림은 그의 23세 때 작품인데 비록 붓 놀림이 딱딱하여 유니크한 맛은 적으나 비교적 견고한 구성, 색채의 발랄한 콘트라스트에 신경을 쓴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외광 처리 등 인상파 풍의 묘법이 산견(散見)되는 위트릴로의 초기를 아는 데 중요한 작품이다.
생 드니 운하
'술집에 가면 틀림없이 위트릴로를 만날 수 있었다. 카운터 옆에 서 있거나 그렇잖으면 벌써 고주망태가 되어 문밖의 시궁창에 드러누워 가끔 "샹"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사람들은 매정하게도 그를 쫓아냈고 그는 쓰러져서 신음하며, 또 울었다.' 위트릴로 평전을 쓴 칼코의 묘사인데, 이런 주정뱅이가 언제 어떻게 그림을 그렸을까?
한 번 묻고 싶은 심정이다. 이 그림은 '백의 시대'가 개막될 무렵의 작품인데, 전면의 탁한 수로와 후면의 흐린 하늘, 그리고 우뚝 솟아 있는 굴뚝, 오랜 세월 풍광과 먼지에 찌든 회색 벽돌이 희미한 외광을 받아 아주 고요하게 빛나고 있다. 필촉이 놀라울 정도로 화면에 정착되고 색채의 배합 또한 긴밀하게 서로 반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르이이 역
여러 갈래의 레일, 우뚝 솟은 전주 등이 널따란 벌판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그려져 있다. 1908년은 인상파 풍(風)의 묘법에서 '백의 시대'로 이행하는 전환 기였는데 터치, 색채, 구도 등이 세련미는 적으나 소박하고 건강한 맛이 있어 호감이 간다.
위트릴로의 40 대 이후와 많은 작품들에 등장하는 교묘히 다듬어진 길이나, 수목, 건물에서 느껴지는 무력감은 찾아볼 수 없고 소박하게 정직한 묘사가 전 화면을 지배하고 있다. 위트릴로는 이때 이미 그림 엽서를 보고 제작하는 타성이 있었는데 이 그림은 현장을 스케치한 작품이며, 전경과 후경의 어색한 대조도 그의 눈에 비친 실상을 그대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생 피에르 공원에서 본 파리 풍경
1907년에 접어들면서 위트릴로의 화면에는 흰색이 눈에 띄게 등장한다. 이른바 '백의 시대'가 이때부터 서서히 시작된다. 이 작품은 1908년, 위트릴로가 28세 때 그린 것인데 높은 곳에서 부감한 시가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흰색으로 그려져 있다. 환각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흰색은 이해에 이르러 현저하게 많아진다.
그리고 이 흰색 시대는 1914년까지 계속되어 그의 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 시기를 형성한다. 화면 전경의 앙상한 나무와 흰 벽이 어울려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표출시키고 이 서정은 전 화면에 시정(詩情)이 넘쳐흐르게 한다. 터치가 부드러워 졌을 뿐만 아니라 밀어라도 속삭이는 듯한 밀착감을 자아내고 있다.
생 드니의 대성당
로댕이 '프랑스 정신의 정화'라고 경탄한 고딕 교회이다. 생 드니 대성당은 1144년에 세워진 프랑스 최초의 고딕 양식 건물 중의 하나이다. 경건한 감동이 화면을 지배한다. 오랜 세월 동안 풍광에 마모된 느낌을 짙게 풍기는 검푸름 벽면, 직선적인 구성, 회색으로 뒤덮인 하늘이 '성스러운 곳'이란 이미지를 더해 주고 있다.
위트릴로 초기의 특색이었던 두꺼운 덧칠이 눈에 띄며 이러한 덧칠이 중후한 감을 가중시킨 효과로 나타나 있다. 생드니의 성당에는 역대 프랑스 국왕의 묘소가 있고 동시에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순교한 성 디오니우스가 매장된 곳이다. 고딕 양식에 공명한 위트릴로가 정성을 들여 그린 기념비 적인 작품이다.
코탱의 골목
'백의 시대'의 위트릴로 작품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는 그림이다. 건물, 돌계단, 가느다란 좁은 길 등이 모두 직선으로 그려져 정연한 구도를 느끼게 하고, 인상적인 흰 벽면들이 통일되어 안정감을 부여했다. 집집마다의 창엔 덧문이 닫혀져 이 백의 세계를 한층 정적(靜寂)하게 한다.
돌계단을 오르는 4, 5명의 인적, 그리고 그 상단에 보이는 푸른 나무와 노란 꽃이 광물적인 화면에 식물적인 싱싱한 맛을 환기시켜 주고 있다. 고수(孤愁)-견디기 어려운 위트릴로의 아픔이 이렇게 쓸쓸한 골목길의 정경을 그리게 한 영감이었는지도 모른다. 깊고 외로운 시정이 물씬 풍기는 애절한 시심마저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몽마르트르 풍경
위트릴로는 몽마르트르의 풍경을 수백 점 그렸다. 이 그림은 그의 백의 시대 때의 것이며, 몽마르트르의 풍경 중에서 뛰어난 작품에 속한다. 몽마르트르 술집에서 그의 고동이 숨쉬고 몽마르트르 거리에는 그의 체취가 담겨져 있다. 예의 땀에 찌든 벽, 직선으로 구축된 건물,
납색 하늘이 그의 체취를 물씬하게 풍기는데 원경으로 이어지는 납색 하늘이 너무도 서정적이다. 이 근처를 몽스니 거리라고 부르며, 이 근처에 위트릴로가 살았던 코르토가가 있다. 광각(廣角)렌즈를 사용한 듯한 조망이 수평선적 구도를 살리고, 화면 좌우의 푸른 수목들과 절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위트릴로 풍경 가운데서 아름다움의 정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랑 망토 교회
위트릴로는 남작(濫作)에 가깝도록 다작을 했다. 그의 유화만도 3천 점을 헤아릴 수 있다. 이러한 다작 속에서 교회를 그린 그림은 비율로 따져서 높은 편이 못 되는데 <불랑 망토 교회>와 <샤티용 쉬르 센 교회> 및 <도 이유 교회>, <노트르담>, <생 드니의 대성당>은 위트릴로란 이름과 함께 잊을 수 없는 교회 작품이다.
이 그림에도 경건한 조형미를 풍기는 교회당 건물, 예의 흰 벽, 벽과 교회 건물 사이의 우거진 수목이 인상 적인데 반해 화면 분위기가 너무나 조용하고 애상적이다. 1938년 모친이 사망하자 그는 거의 광적인 신앙심으로 하루에도 여러 번씩 기도실에 들어가 눈물의 참회를 하는데 이는 젊었을 때의 방종에 대한 회의와 자책이며, 그의 본질을 나타낸 진실한 모습이 기도하다.
생 마르리트 교회
<두유 마을의 교회>와 함께 위트릴로의 서민성이 표출된 작품이다. 교회 즉 '신의 집'에 끌리는 그의 무의식적이면서도 어쩔 수 없는 갈망은 그를 기도를 올리기 위해서만 찾아 드는 보잘 것 없는 교회까지도 주저 없이 그리는 습성으로 변환시켰다. 오히려 이러한 교회 그림에 가장 위트릴로적인 분위기가 충만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 화면에서 풍기는 정숙감과 경건한 뉘앙스는 건물의 초라한 겉모양과는 정반대의 짙은 농도와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 두유 마을의 교회>에서 느끼는 양괴감은 적지만 서정시적인 아름다움과 선에 의해 형성된 포름의 특질이 종각에 매달린 까만 종처럼, 무한한 공감대를 명쾌하게 형성한 위트릴로의 수작 중의 하나이다.
코르시카 섬의 교회
'백의 시대'에 그린 작품 가운데서는 색다른 소재다. 화면 중심부를 점령한 교회의 조형미, 그 주위를 둘러 싼 아름다운 경관이 일품이다. 위트릴로는 이 시기에 많은 교회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시각에 들어온 풍경이 과장 없이 묘사되어 있고 특히 나무 등에서 인상파 풍의 솜씨가 조금씩 엿보이기도 한다.
위트릴로의 예술은 이 무렵에 일부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되는데 반면에 알콜 중독 현상은 점점 심해져 갔다. 그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애인은 위트릴로를 코르시카 섬으로 데리고 갔다. 밝은 빛과 맑은 색채 속에 그의 마음도 트이고, 따라서 화면도 건강하고 다채롭다. 오랜만에 가슴을 펴고 그린 심상화(心象畵)이며, 그의 마음이 투영된 작품이다.
두유 마을의 교회
위트릴로가 그린 많은 교회 작품 중에서 뛰어난 작품이다. 짙은 납색 하늘 아래 우뚝 선 교회, 웅장하지는 않지만 중량감이 있고 어떠한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양괴감이 화면에 가득 차 있다. 한없이 깊은 흰색과 그 흰색 속에서 튀어나온 약간의 황색과 녹색이 미묘하게 융합되어 태산같이 과묵한 이미지를 낳고 있다.
그는 교회를 그리는 자체를 신앙의 표백이나 기도의 연장으로 생각했다. 교회를 이렇게까지 깊숙하고 풍요하게, 침묵의 정취로써 포착한 작품이 다른 화가의 그림에는 없는 것으로 기억된다. 위트릴로의 청정한 내적 생명과 화가로서의 무르익은 솜씨가 훌륭하게 합일한 작품이다. 두유 마을에 있는 이 교회는 무명의 교회이다. 여기서도 위트릴로의 서민성을 읽을 수 있다.
라팽 아질
라팽 아질은 민첩한 토끼라는 뜻이다. 사크레 쾨르의 뒤쪽이 되는 생 방상 거리의 한 모퉁이에 위치한 유명한 카페인데 풍경 화가인 앙드레 질이 그린 '토끼 간 판'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부서진 창 문, 깨어진 유리창, 얼룩진 벽 등이 위트릴로 특유의 체취를 풍겨 주고 아름다운 나무숲에 둘러싸인 건물만이 농회색 하늘 아래 화창한 여름철을 시사 해주고 있다.
이 카페에는 피카소, 브라크, 그리스 등이 자주 얼굴을 나타내 한때는 인상파들의 카페 게르브와 대적인 존재였으나, 이 화면에서는 그러한 흥청거림은 거의 없고 조용한 시골집처럼 보인다. 위트릴로란 이름과 몽마르트르를 사랑하는 노스탈지와 그밖에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다.
미미 팽송의 집
몽스니 거리는 위트릴로의 생활과 예술의 고향이며, 미미 팽송은 바로 몽스니 거리에 있는 그의 단골집이다. 이 장소, 이 구도를 그의 화집에서 여러 점 보았는데, 이 화면에 나오는 거리와 건물과 굴뚝은 그가 술에 취했을 때 중얼거린 즉 대화의 상대였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위트릴로에게 이 거리를 그리도록 요구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순진한 그는 이러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림을 양산하기에 이르렀다. 섬세한 시정과 은밀한 고독감이 숨쉬고 위트릴로 특유의 긴장감과 짜릿한 맛이 감돌며 흰색의 풍요로움과 밀도 짙은 애수가 강렬하게 공감하는 작품이다.
파리의 골목
<코르테 거리>와 비슷한 이미지를 풍기는 그림인데 가로수가 보이지 않아 광물적인 경질(硬質)의 이미지가 강조된 쓸쓸한 거리이다. 흰색이 지닌 복잡한 환각성을 빌어 위트릴로의 한스런 심상을 표백한 듯한 이 그림에서 그가 흰색에 바친 애정과 정열이 얼마나 강렬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평생을 몽마르트르에 바친 그의 정념은 바로 흰색에의 끝없는 사랑이라 고도 말할 수 있다. 위트릴로는 자기 팔레트의 백색 물감 속에 모래나 석회를 섞어 넣음으로써 그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돌벽이나 집들의 피사드의 질감에 접근하려고 했는데, 사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대해 보면 그의 흰색은 비바람에 바래고 손때와 땀에 절은 독특한 흰색임을 알 수 있다. 위트릴로의 흰색은 인간미가 넘치는 흰색이요 독특한 냄새를 풍기고 호흡하는 흰색이다.
아스니에르 마을의 거리
위트릴로는 시슬리의 작품을 좋아했고 시슬리의 작풍 (作風)을 본뜨려고 노력한 게 사실이다. '나도 시슬리 처럼 그릴 수 있을까?'는 그가 24세 때 고백한 말인 데, 아스니에르 마을의 거리에서 시슬리의 정지된 상태에 가까운 조용하고 차분한 뉘앙스를 찾아볼 수 있다.
<코탱의 골목>에서 보여 준 직선에 의한 구성을 이 그림에서도 기도했는데 직선에 의한 구성은 위트릴로의 '백의 시대'를 특징 지운 묘법의 하나이기도 하다. 대기를 축축이 머금은 하늘과 길, 일체의 소음이 사라진 한낮의 거리, 긴박 감 마저 느낄 수 있는 대낮의 시정(詩情)이 그의 환 각적인 흰색에 의해 더욱 돋보이는 작품이다.
몽마르트르 생 피에르 교회
생 마그리트 교회가 '백의 시대' 때의 작품인데 비해 <생 피에르 교회>는 '다색 시대'의 작품이다. 위트릴로는 이 그림 외에도 생 피에르 교회를 그린 <생 피에르 교회와 사크레쿠르>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세밀한 필치에 산뜻하고 깨끗하며 평면적이긴 하지만 서민적인 정감이 부족한 게 흠이다.
생 피에르 교회는 파리의 수많은 교회 중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교회이며 1938년에는 그의 모친 발라동의 장례식이 거행된 곳이기도 하다. 위트릴로가 이 그림을 제작할 때는 어느 정도 대중화되었고, 동시에 그의 생활에도 여유가 생겼으며, 반면에 알콜에 빠지는 등의 행동 거지를 감시 받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노트르담
위트릴로의 변화를 실감있게 관조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는 1913년의 개인전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일약 대중화된다. 이때까지 그림 1점에 2프랑 하던 것이 수 백 프랑으로 오르고, 술집에서도 그를 천대하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파리 화단의 인기 작가가 된 셈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와 때를 같이하여 '백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다색 시대'로 접어든다.
그의 화면에는 밝음과 다채로움이 등장하고 정신적인 긴장감이 완만 해져 간다. 부드럽고 선명하며 평면적이기는 하나 끊고 맺는 박진감이 사라져 갔다. <노트르담>은 이와 같은 변화의 과정을 볼 수 있는 좋은 본보기 작품이다. 위트릴로적인 분위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 같은 그림이다.
로뱅송의 선술집
위트릴로의 36세 때 작품인데 화면 전체가 밝고 아름다우며 특히 그의 그림에서 보기 힘든 선명한 녹색의 향연을 표출시킨 것이 이색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해 르프톨 화랑이 리보드 콜렉션 작품으로 위트릴로의 개인전을 가져 대성공을 거두자 일약 유명해지고 그림 값도 올라가 그를 재평가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그런데 이 그림은 이러한 우쭐한 기분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고요와 평정은 대상에 대한 그의 마음속의 대화라기보다 표피적인 관찰 즉 시각 체험에 의한 대상의 재현으로 보여지며 이러한 경향은 이 시기의 그의 예술에 이미 하나의 양식으로 굳혀져 갔다. 위트릴로의 다른 세계로의 이행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피에르풍 성
화면 상단에 가득 찬 당당한 성과 그 밑에 있는 기숙사 같은 건물의 석회색 벽이 멋진 대비를 이루고, 성 밑에 있는 무성한 수목들은 이 두 가지 요소를 연결하는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다. 다채로운 색채 또한 개성과 톤을 갖고 결합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도와 색깔의 대비는 그가 '백의 시대' 때 즐겨 쓴 일종의 '위트릴로 양식'이다.
드높은 하늘을 꿰뚫는 높은 성의 망루는 위트릴로가 꿈꾸고 지향한 마음의 고향이었을 것이다. 저주받은 화가, 매만 맞고 사는 화가였던 그가 그림 엽서를 보고 그린 작품이지만 이 작품 속에는 그의 숨결과 체취와 순정이 담겨져 있다. 여기에 그려진 꽉 닫힌 창문처럼 그의 마음의 문도 닫혔는데 이 문을 누가 열어 줄 수 있을까? 이 문을 열어 준 것은 그림이었고 이 안타까움 속에서 위트릴로의 예술은 찬란한 빛을 발휘했다.
프티 팔레
작품이라기보다 프티 팔레란 건물의 웅장함을 선전하기 위한 관광엽서를 대하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회색에 가까운 흰색으로 처리된 건물에서, 숙달한 가벼운 터치에서, 앙상한 나무에서, 작게 그린 인물에서 위트릴로 특유의 분위기를 직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그림을 제작한 1922년에 그는 폴 기욤 화랑에 '백의 시대' 때 작품을 주축으로 35점을 전시했는데 깜짝 놀랄 정도의 호평을 받았다. 명성도 높아지고 돈도 생긴 위트릴로는 전처럼 술집에서 천대받지도 않고 술에 취해 거리에 쓰러져서 자지도 않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이 그림은 누군가의 주문에 의해 그림 엽서를 보고 제작한 것이다.
몽마르트르 라셀가
엉덩이가 큰 육감적인 여인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위트릴로의 이전 그림에서는 별로 볼 수 없었던 인물이 그의 그림에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이상하게도 정면에서 묘사한 인물이 거의 없다. 대개가 뒷모습뿐이다. 전해인 1921년 6월에 그는 어머니 발라동과 함께 웨일 화랑에서 2인전을 열어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엉덩이가 큰 여인들은 이 무렵부터 나타났다. 아주 명랑하고 건강한 일종의 풍속 묘사처럼 보이는 이 그림에서 여인들의 등장 이외에도 화면이 평명화(平明化) 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알콜로 절인 그의 심신에서 이렇게 명쾌하고도 논리적인 구축성을 지닌 화면이 나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몽스니 거리에 있는 베르노의 창고
<메스크 마을>과 장소는 다르지만 사진의 조리개를 약간 달리해서 찍은 사진 작품 같은 그림이다. 베르노의 창고 앞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예의 엉덩이가 큰 여인도 끼어 있는데 '백의 시대' 때 작품과는 달리 풍경 속에 작가 자신이 용해되어 있는 게 아니라 풍경 자체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평범하게 묘사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도 위트릴로 특유의 소박한 면이 엿보인 것은 다행한 일이다. 주변의 분위기가 스산하고 너저분한데도 불구하고 청징한 색채들을 서로 어울리게 하여 일상적인 건강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한 작품이다.
메크스 마을
1920년 이전에 그린 위트릴로 작품의 주제는 첫째가 자기 자신이고, 둘째가 자기의 꿈이며, 셋째가 자신과 거리와의 대화였다. 이들 주제는 지난날의 풍경 화가들이 즐겨 그린 기념될 만한 대상과는 대조적으로 대체로 그림이 될 수 없는 쓸쓸한 뒷골목이나, 좁은 돌계단, 술집, 언덕길이었다.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에 그린 그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주위의 인간 세계에서 구할 수 없었던 것을 이들 조촐한 풍경에서 발견해 냈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켰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지난날의 거리와의 대화가 사라지고 대신 다채로운 색채와 인물이 등장되어 있다. 서울의 판자촌을 연상시키는 서민들의 나들이를 사진 작품으로 보는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道化師 찰리 메이어
위트릴로로서는 보기 드문 인물화인데 초상이라기보다는 희화(戱畵)에 가까운 외잡스러운 맛을 풍기는 작품이다. 피에로로 분장한 모델이 갖고 있는 성격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색채가 소박하지도 않으며, 세련미도 없는 치졸함을 면치 못했고 또한 위트릴로 답지 않은게 특색이다.
노화한 치열(齒列)의 묘사, 큰 눈, 붉은 수염과 눈썹, 벌렁코, 빈정대는 듯한 표정의 강조는 그리기를 강요당하는 당시의 자신에 대한 빈정댐으로 비유될 수 있다. 위트릴로는 멀리서 본 엉덩이가 큰 여인을 제외하고는 1939년에 그린 아내의 초상화 3점, 1920년에 그린 스케치 풍의 친구 초상화와 이 그림 등 인물화는 모두 5점만을 그렸을 뿐이다.
깃발이 있는 정물
쟌다르크 거리
백설의 표피(表皮)를 뚫고 튀어나온 색채는 적설(積 雪)이 지니고 있는 수분과 윤기 때문에 한층 아름답고 선명해 보인다. 위트릴로는 눈 풍경을 이전에도 그렸지만 47세가 되던 1930년경부터 갑작스럽게 많아진다. 눈에 덮인 쟌다르크 거리는 정말 그림처럼 아름답다. 어떻게 보면 관광용 그림 같기도 하고 예술 사진 작품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곱다는 것 외에 회화적인 깊이를 왜 느끼지 못할까? 이 시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위트릴로에게 이러한 종류의 그림만을 주문했고 불행하게도 그는 주저 없이 이런 그림을 그려 주었다.
꽃병
위트릴로의 흔치 않은 정물화 중의 하나인데 구도, 필 촉, 색채 배합 등이 어설프다. 생명력도 뉘앙스도 없는 꽃의 선려한 환상에 불과한 느낌이다. 주문에 의해 마지못해 그린 것인지, 집안을 장식하기 위해 파한(破 閑)삼아 제작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40 대에 들어서면서 요즘 말로 운수 대통한 위트릴로는 50대에 접어들자 잘 꾸며진 방안에서 그림 엽서를 바탕으로 풍경화를 제작했다. 몽마르트르의 골목길을 곤드레가 되어 헤매는 일도 없고 바깥출입조차 별로 하지 않는 안방 화가로 변신했는데, 그의 이 때 이후의 그림을 '송장이 그린 죽은 그림'이라고 혹평하는 인사도 있다. 1935년 52세 때 부유한 미망인 루시 포웰과 결혼한 이후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눈 덮인 라팽 아질
농회색 하늘 아래 아름다운 수목에 싸인 여름철의 라팽 아질을 그린지 26년이 지난 후에 그린 눈에 덮인 라팽 아질의 모습이다. 구도, 화면 구성, 건물의 주변, 점묘로 된 인물까지도 두 그림은 똑 같은데, 단 하나 다른 것은 계절이다. 위트릴로는 이 그림을 제작하기 전해인 1935년에 루시와 결혼했고 런던에서 '백의 시대전'을 열어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해, 즉 이 작품을 완성시킨 해에는 화상 페트리데스와 독점 계약을 체결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여유 있는 시기였다. 26년 전의 그림에서 그의 땀내와 술내와 체취를 느낄 수 있다면, 이 그림에는 그의 아련한 추억만이 남아 있는 듯하다.
샤스텔루 성
구도나 전경으로서의 인물의 배치가 위트릴로의 상투 적인 수법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신선한 지방색이 나타나 있어 지루한 반복을 어느 정도 해소시키는 청량제가 되고 있다. 여러 번 언급된 이야기지만 화면에 활력은 없으나, 그의 마음 있는 선천적인 순진함이 조금은 남아 있는 것 같다.
전경의 인물을 자그마하게 그린 것도 호감이 가며, 하늘의 깊이에도 위트릴로의 특색과 장점이 되살아난 듯한데 이는 새로운 소재가 지닌 색다른 풍경과 특성 대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화면의 중앙을 수평으로 가로지른 건물의 웅장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포와시 거리
1942년 위트릴로 59세 때의 작품이다. 사람들은 위트릴로와 모딜리아니를 '저주받은 화가'라고 부른다. 술과 방탕이 극한에 이르렀던 '백의 시대'를 지나, 만년 에 이르러서의 거의 광적인 신앙심 등은 어쩌면 몽마르트르를 사랑한 위트릴로의 숙명이기도 하다. 다작, 남작, 똑같은 모티브의 반복, 똑같은 색채등등...
그의 작품을 해석하기란 여간 지루한 작업이 아니다. 미술 평론가들은 그의 50대 이후의 작품을 무기력하고 혼이 빠진 그림이라고 혹평하며, 숫제 작품으로 취급하는 것조차 기피한다. 이러한 선입견이 아니더라도 이 그림을 보면 어딘지 맥이 빠진 듯하다. 그리고 그리다 만 미완성의 작품 같은 느낌도 든다. 생기나 활기가 전혀 없는 공허한 그림이고 공허한 거리이다.
팔레트
여유 있고 편안한 생활이 계속되자 친지들도 많이 바뀌었고 접촉하는 인물들도 다양해졌다. 위트릴로는 페트리데스를 알게 되면서 이러한 팔레트를 이용한 작품을 몇 점 그렸는데 작품으로서의 우열보다 물감을 덧칠해서 두둑해진 팔레트의 바탕을 살린 묘법이 제법 인상적이다.
이 팔레트 사인 위에 '우정을 담아 폴 페트리데스에게'라는 글귀가 씌어 있는 것으로 보아 페트리데스가 시키는 대로 그린 그림이라는 설도 있다. 물감을 두껍게 칠한 재질감에 비하면 화면이 전체적으로 힘이 없어 보이는 데 그런 가운데서도 우거진 숲, 인물 묘사, 건물 등은 위트릴로 특유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시키는 대로... 는 이 때의 그에겐 거의 체질화된 습성이었다 한다.
양복점에 다니기도하고 써어커스의 댄서가 되기도 하며 카바레를 출입하다가 화가들의 모델이 되었다. 그녀는 나중에 화가로 성공하지만 교양없고 방종하며, 노상 위트릴로를 잊고 그녀 자신의 본능에 몸을 맡기기도 하였다. 따라서 위트릴로는 고독에서 오는 어머니를 찾는 마음이 더 강했을 것이다.
병원에서 대중요법으로 그에게 과해진 회화제작이 계기가 되어, 독학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를 술로부터 떼어놓기 위해서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데생과 회화수업을 시키게 되고 이로서 위트릴로가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작품은 자기 주변의 풍경화에 그쳤으며, 그림엽서에서 베낀 것도 많았다.
그런데 이 시기의 작품은 석고와 집착제를 혼합하여 사용하는데 회색과 장미색으로 반사된 설경, 크림빛을 띤 흰색벽 등을 그린다. 그의 백색시기는 1915년경까지 지속되며 그가 늘 헤매고 다니는 몽마르트의 구석구석을 그렸으며 엘리포르나 옥타브 미로와 같은 미술 평론가로부터 극찬을 받는다.
집집마다 엷은 때가 묻은 희끄무레한 벽, 어둠침침한 파장(罷場)의 거리, 인적이 없는 거리, 쇠살문이 닫혀 있는 호텔, 교회 등 시정이 풍부한 그림을 그렸다. 1907∼14년의 이 <백색시대>야말로 모리스 위트릴로의 창조력이 절정에 이른 시대이다. 음주벽은 여전하였으나 걸작품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그려졌다. 그 뒤 <색채시대>가 이어져 광택이 나는 색채를 썼는데 특히 녹색을 강조하였다.
921년 어머니 수잔발라동과 2인전을 열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동시에 쇠퇴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말년의 25년 동안 건강이 회복되었고 명예까지 얻어 35년에는 수집가인 미망인과 결혼하여 생활도 안정되었으나 그의 작품에서 이전의 긴장도는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