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적 안목의 전문성 구축 필요
김준기 _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미술계에서 일을 시작한 지 13년째다. 미술전문지 기자로 가나아트에 입사한 것이 1997년의 일이다. 그동안 미술계는 참 많이 변했다. 미술계가 변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한국사회가 변했다. 나는 그 극심한 변동의 과정에서 30대 청년기를 보내면서 미술계의 다양한 직업군을 경험했다. 미술전문지 기자, 갤러리 전시기획자, 건축물미술장식품 컨설턴트, 사립미술관 큐레이터, 비엔날레 전시팀장, 공공미술 프로젝트 매니저, 독립큐레이터, 그리고 공공미술관 큐레이터에 이르기까지.
앞일도 마찬가지겠지만 지나온 길에도 많은 위기와 기회, 좌절과 희망이 교차했다. 미술관 큐레이터가 되기 전까지 나는 미술제도의 호명 체계에 있어 다소간 애매한 입지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신입기자에서 미술관 큐레이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을 거치면서도 내가 꼭 이루고 싶었던 일은 가치 지향이 뚜렷한 전시를 기획하고 글을 쓰는 일이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나름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원칙으로 삼은 것은 역시 예술로서 세상을 사는 삶, 특히 예술생산을 매개하는 지식노동자로서의 삶에 관한 소명의식을 키우는 것이었다.
기자를 사회 첫 경험으로 삼은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미학과 미술사, 그리고 예술학 등의 기초학문을 접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글쓰기로 처신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기자 신분을 벗어난 이후, ‘미술평론가’라는 직함을 쓸 수 없어 ‘예술학’이라는 대학 전공이름을 쓰기도 했다. 박사과정에서 예술학을 전공하고, 석남미술상 젊은이론가상을 수상하면서 미술평론가라는 직함을 쓰기 시작했다. 비평 영역의 진입장벽에 대해 나름의 자기 검열을 통과한 과정을 생각하면 이렇게 평론가 연하는 자신이 멋쩍기도 하다. 학력자본도 쌓이고 이른바 수상제도를 통해 인정 시스템 속에 들어갔으니 평론가일 수 있다고 여겼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심중의 심지로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평론가 연하는 게 아니라 좋은 생각을 가다듬고 현장으로 뛰어들어 실천하는 일이다. 평론가를 자임하거나 호출 당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이라는 가치경쟁의 장에서 어떤 입장으로 유의미한 실천을 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미술에 관해 공부하고 글 쓰고 기획하는 나의 삶에 대해서 고정적이고 단일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해 보인다.
가나아트센터 전시기획자 시절,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전시에 매달렸다. 이응노, 박생광, 권진규 등의 대가 전시에서부터《동강별곡》과 같은 기획전에 이르기까지 그 짧은 기간 동안 나는 전시기획자로서의 삶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 일이 지속되지는 않았다.
2001년 여름, 나는 성곡미술관 별관에서 독립전시를 기획했다. 윤상진 큐레이터가 외부기획안을 연결시킨 이 전시는 《건너간다》라는 제목으로 1990년대를 지나오면서 지난 시대의 정신을 계승한 386세대 작가들을 조망해보는 것이었다. 당시의 나는 가나아트 기자 겸 가나아트센터 전시기획자로 일하다가 잡지 폐간 이후에 환경조형물 컨설팅 일을 하는 팀에 속해 있었던 고로 전시를 기획할 일이 없었다. 1998년부터 99년까지의 짧지만 굵직했던 전시기획 이후 2000년 한 해 침묵해야 했다. 그 침묵이 두려워 여름휴가와 사비를 바쳤다. 어려운 여건이었지만 전시기획자로서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독립기획을 한 것이다. 전시에 대한 평가도 엇갈려서 현장미술의 정신을 재발견하려는 기획의도를 긍정하는 리뷰도 있었고, 퇴행적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었지만, 언론과 미술계의 관심은 전시기획자로서의 길을 걷게 한 불씨였다.
글쓰기를 전제로 한 전시기획 이력은 오늘날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나의 밑거름이다. 기자나 특정 전시공간의 기획자로서 주어진 일이 아닌 독자적인 활동은 힘겹지만 보람 있는 일이었다. 월드컵 직후 쌈지스페이스에서 연《로컬컵》, 카페시월에서의《대통령 選巨前》《A4반전》등의 전시기획으로 나는 시사기획자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사립미술관에서 2년 재직 후에 부산비엔날레와 공공미술추진위원회의 프로젝트 매니저 경험은 미술계에 대한 나의 안목을 넓혀주었다. 2006년 말에 전시기획자 최금수와 공동기획한 《아시아의 지금》전은 동아시아 전체로 눈을 돌릴 기회를 주었다. 세계화와 지역성이라는 주제를 풀어내기 위해 베이징에서 싱가포르까지 여러 도시를 돌면서 나는 조금씩 나름의 화두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대추리 현장미술은 새로운 에너지를 주었다. 대추리 아카이브를 진행하면서 비로소 제도와 비제도, 주류와 비주류, 전시장과 현장, 관념과 실재 사이에 선 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미술관 체계적 직제 분화 미흡
2007년 가을 이후 지난 2년간 나에게는 '학예연구사'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그것도 지방계약직 ‘나’급이라는 급수가 매겨진 계약직 공무원 신분이다. 큐레이터는 보물창고를 가진 큰 집의 일꾼이다. 특히 그 보물창고에 있는 물건들에 관해 아는 게 많은 지식노동자이다. 근대 이전의 큐레이터들은 권력자를 섬겼지만, 근대 이후의 큐레이터들은 이른바 공화주의에 입각해서 공공을 섬기는 일꾼들이다.
그러나 한국 뮤지움 100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미술 관련 뮤지움에서 종사하는 전문 지식인으로서의 큐레이터의 지위와 역할은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아직 지자체가 설립한 미술관을 갖지 못한 도시가 허다하고, 기존의 미술관들도 컬렉션의 수나 양으로 보아 갈 길이 멀다.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큐레이터의 역할 또한 초보적인 수준이다. 그만큼 미술관 종사자로서의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쌓일 시간적 거리가 부족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체계적인 직제 분화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관의 업무는 전시기획뿐만 아니라 작품 수집, 보존수복, 교육, 자료 등 다양한 분야로 세분화 한다. 직제 분화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학예직 인원 확보가 충분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 직제의 거의 모든 분야를 두루 섭렵해야 하는 초기 증상은 축적된 역량 강화와는 거리가 먼 만능인 학예연구사를 양산한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안팎의 인식으로 인해 조금씩 해결의 기미가 보이고 있다. 일례로 내가 몸 담고 있는 미술관도 올해 들어 학예연구실을 전시교육과 소장품 두 분야로 나누고 인력을 보강했다.
그러나 앞길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은 것 같다. 경기도미술관에 이어서 국립현대미술관도 법인화를 예고하고 있어 안정적인 재원조달 등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공공미술관뿐만 아니라 사립미술관들의 열악한 조건도 미술관문화의 정착과 큐레이터라는 직군의 전문화 과정에 있어서 큰 숙제이다. 사립미술관은 공공미술관이 채우지 못하는 풀뿌리 수준의 미술관 문화를 활성화하는 초석이다. 어려운 여건에서 미술관을 꾸리느라 여러 가지 부침이 있기는 하지만, 몇몇 사립미술관들의 고군분투가 돋보인다. 특히 간송미술관의 체계적인 소장품 수집과 깊이 있는 학예연구 역량은 한국을 대표할 만한 사례로 손꼽힌다. 하지만 이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사립미술관 큐레이터란 ‘환상 속의 그대’일 수밖에 없다.
근대와 탈근대가 공존하는 미술관 문화
큐레이터라는 직군은 순발력과 진중함을 동시에 요한다. 물론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기는 쉽지 않다. 어느 것에 비중을 두느냐 하는 것도 각자의 체질과 지향에 따라 다르다. 새로운 담론과 동시대성을 좇아 치열한 예술담론의 현장에 뛰어드는 것이 전자의 가치라면, 과거를 정리해서 동시대의 길을 밝히는 연구자의 길이 후자에 가깝다. 근대성에 입각한 미술관 모델이라면 당연히 후자의 역사성을 우선시해야 하지만, 탈근대적 개념의 새로운 미술관 모델에 따르자면 전자의 동시대성을 앞세울 수 있다.
바야흐로 분화에서 통합으로 이행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체계적인 전문 영역의 분화를 전제하지 않은 채 탈근대적 통합을 꿈꾸는 망상은 금물이다. 역사성과 동시대성, 근대성과 탈근대성이 공존하는 지금 여기의 미술관 문화를 고려했을 때, 큐레이터들은 좀 먼 곳을 바라보고 각자의 전문성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이것이 근대와 탈근대가 공존하는 시대에 이제 막 전문성을 찾아가고 있는 한국 큐레이터들의 소명이자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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