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소리 외 10편*
이 달 균
그 성당 종지기 영감이 죽었다
말없이 종만 울리며 살다간 사람은
가슴에 무슨 말들을 여미고 살았을까
종각 옆 광목빨래처럼 펄럭이던 한 생애
당신의 이빨빠진 웃음도 내 유년도
한 장의 낡은 사진처럼 붙박혀 남았을 뿐
*목질(木質)의 휘파람*
나의 빈 내부에서
소리가 난다
오래된 목조건물,
그 목질(木質)의 휘파람처럼
빈 가슴
깊은 그 어디에서
소리가 난다
휘어진 강물이
얕아지거나 깊어질 때마다
그 소리의 진폭은
다르게 울린다
편지를 부쳐야겠다
낯선 마을을 향해
빈 채로 소리를 내는
가을날의 하모니카처럼
아이들 돌아가버린
삐걱이는 골마루처럼
터엉 빈
나의 내부에서
소리가 난다
(인용은 첫째 수)
*소매물도는 없다*
몇 해째 소매물도를 가지 못했다
맺혀 사는 일들을 자르기가 힘든 탓이다
하지만 내 생의 며칠을 어쩌지 못하다니
최후를 예감한 전장의 장수처럼
마지막 결전인양 오늘을 산다면
혜초의 왕오천축국인들 다녀오지 못할 것인가
오늘도 소매물도는 저만치 앉아 있다
차라리 지도 속에 실재하지 않는 섬
사라진 전설의 바다, 그 파도였으면 좋겠다
그리운 이가 죽으면 핏빛 동백이 피고
그 생애를 덮을 만큼의 싸락눈이 내리는
먼 바다 작은 섬 하나를 가슴에 묻고 산다면.....
그래, 어디에도 소매물도는 없었다
다만 그리운 이와 동백을 피고 지우는
쓸쓸한 싸락눈의 빛깔만이 내게 남아 있을 뿐
(인용은 3, 4, 5수)
*기억의 종이배 타고*
눈빛이 투명하다 물소리가 난다
사람의 뼛속으로도 출렁이며 흐르는 강물이 있다면
향기도 빛깔도 없이 그저 흘러서 모래내를 이루던 남강
하류 그 기슭에서 보던 갓잡은 물메기 지느러미의 깃치는
소리며 물밤줄기나 수초에 묻어나던 물때냄새, 배추씨 모종삽 뜨는
경삼이 아재 누런 이빨같이 오래 잊었던 것들아,
청청한 물빛으로 반짝이는 그대, 그대를 지나
기억의 종이배 타고
그곳에 가고 싶다
*낙타*
등짐이 없어도 낙타는 걷는다
고색한 성채의 늙은 병사처럼
지워진 길 위의 생애 여정은 고단하다
생을 다 걸어가면 죽음이 시작될까
오래 걸은 사람들의 낯익은 몸내음
떠나온 것들은 모두 모래가 되어 스러진다
모래는 저 홀로 길을 내지 않는다
동방의 먼 별들이 서역에 와서 지면
바람의 여윈 입자들은 사막의 길을 만든다
낙타는 걸어서 죽음에 닿는다
삐걱이는 관절들 삭아서 모래가 되는
머나먼 지평의 나날 낙타는 걷는다
*잠자리 . 2*
사람의 뒤꼭지에선 비애의 냄새가 난다
제국을 꿈꾸던 공룡들의 최후처럼
백악기 그 잿빛 소멸의 쓸쓸한 냄새가 난다
아이들은 공룡이 남긴 발자국을 헤며 놀지만
어른들은 선 채로 석유냄새를 맡곤 했다
한 차례 더운 바람이 전야처럼 몰려왔다
잠자리는 날개를 펴고 잠행을 시작한다
비릿한 폐허의 연기 자욱한 도심 하늘
공장의 불빛을 지나 화력발전소 굴뚝을 지나
*생명을 위한 연가 . 12*
-점화
사랑은 간결했어
흐느끼는 한 소절
색소폰 음률처럼
허공에 흩어지는
달콤한
입맞춤의 여운
간결한 최후였어
넌 이미 알고 있었지
타다 만 한 줌의 재
허무의 가슴에
던지는 붉은 비수
결행의
짧은 한 순간
비명 같은 흔들림
운명처럼 내던져져
점화된 한 점 불씨
옷깃에서 커튼으로
찬란한 불기둥의
완벽한
사랑의 연소
오, 탐미의 동반자살
(인용은 9행부터 끝까지)
*순장(殉葬)*
묻혀주마 충직한 개처럼 살았으니
죽음의 핏방울도 그렇게 뿌려주마
나란히 청동보검의 녹빛으로 썩어질 몸
나머지의 여생도 내 것이 아닐 바엔
차라리 빛나는 수의를 걸치고
장엄한 노래에 묻혀 뜬눈으로 죽어주마
동강난 헌 칼처럼 쓰러져 뒹굴어도
뼈마디 마디마디 꺾여 울진 않겠노라
한 마리 준마와 함께 서서 잠들 내 영혼
(인용은 5∼9행)
*생명을 위한 연가 . 11*
-부화
살며시 문을 열자 세상이 있더군
눈부셔 가만히 세상을 내다볼 때
일제히 세상의 눈들이 나를 쏘아보더군
나는 천천히 호흡을 고르고
주머니 속에 든 표창을 꺼내어
세상의 눈들을 향해 힘껏 던져버렸어
(인용은 둘째 수)
*생명을 위한 연가 . 10*
-자궁 속으로
돌아가리 이승의 생명줄 끊어버리고
당신의 따뜻한 자궁을 걸어서
소멸의 한탄 미립자로 돌아가고 싶어라
생성 이전의 바다는 폐허인가 절정인가
잉태의 꿈 끝끝내 못 이룬 닮은꼴들의
꽃다운 절망의 창법 나는 듣게 되리니
사랑이여 태동보다 아름다운 소멸이여
오늘은 아득히 자궁 속을 걸어가서
무정란(無精卵) 씨방의 노래 귀대고 들어보리라
*저무는 가내공업 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
그래도 나는 쓰네 손가락을 구부려
떠나는 노래들을 부르고 불러모아
저무는 가내공업 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
⊙이달균 시집[북행열차를 타고], 서울 : 태학사, 2001 ; (해설▶ 소멸과 대결의 미학 -오형엽) 인용 작품
▣해설
소멸과 대결의 미학
-이달균 시의 의미-
오 형 엽
(해설 一部)
"태동보다 아름다운 소멸"을 노래하는 이달균의 소멸의 미학은, 죽음의 운명을 죽음으로 맞서려는 대결의 미학이다. 따라서 시인이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은 소멸을 견디고 넘어서는 역설의 힘을 낳는다.
-이달균 시집[북행열차를 타고], 서울 : 태학사, 2001
※<해설>은
①흔히 볼 수 있는 시집의 앞뒤 표지나 날개에 인용되는 구절을 가져오거나,
②시집 앞뒤 표지나 날개에 인용 수록된 해설문이 없을 경우 샘지기가 임의로 부분 인용하여 보임.
위 인용문은 ①에 속하며 뒷표지에 수록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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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
1번 멘트에 밝힌 것처럼 이곳 <저서 소개>는 우리 경남시조시인협회 회원님들의 저서를 개략적으로나마 소개해서 널리 알리는 자리입니다. 물론 책의 출판연도는 아무 상관이 없겠습니다.
우선, 그 하나의 방법으로 2002년 이후 개인홈(http://sijosam.com)을 운영하면서 <2.표주박/시조시인 대표 작품>이란 게시판에 정리했던 자료를 가져와 봅니다. 그곳에선 시집 해설문에 수록된 작품 원문을 모으고 위에 소개된 것처럼 해설 일부를 인용해 보이는 식으로 묶어보곤 했었습니다.....
이 게시판에는 위와 같이 정리하는 외에도,
▶회원 각자가 본인의 저서를 독창적인 방법으로 인상깊게 소개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문예지 북 리뷰(신문 지면의 서평....등)로 실린 글을 누가 올려도 좋겠습니다. 이때는 가능하다면 본보기 작품도 몇 편 소개되면 금상첨화겠지요....!!
우리 회원님들의 동참을 기다리며, 우선 예를 보이는 뜻에서 제 개인홈의 자료를 가져다 소개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