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
모두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간다
멀어져서 아득하고 아름다운 너는
흰 셔츠처럼 펄럭이지
바람에 펄럭이는 것들을 보면
가슴이 아파서
내 눈 속의 새들이 아우성친다
너도 나를 그리워할까
분홍빛 부드러운 네 손이 다가와
돌려가는 추억의 영사기
이토록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구나
사라진 시간 사라진 사람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해를 보면 해를 닮고
너를 보면 쓸쓸한 바다를 닮는다
자화상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
슬럼프에 빠진 그녀의 독백
청춘의 벌판을 지나고
그곳은 타버린 무명옷으로 굽이치지
애인도 나만의 방도 없었지만 시간은 많다고 느꼈지
여린 풀잎이 바위도 들어올릴 듯한 시절
열렬하고 어리석고 심각한 청춘시절은 이제 지워진다
언덕을 넘고, 밧줄 같은 길에 묶여 나는 끌려간다
광장의 빈 의자처럼 현기증을 일으키며 생각한다
지금 나는 무엇인가?
내가 원했던 삶은 이게 아닌데
사랑이 없으면 시간은 죽어버리는데
옷장을 열어 외출하려다 갈 곳이 없듯
전화할 사람도 없을 때의 가슴 그 썰렁한 헛간이란,
헛간 속을 들여다봐 시체가 따로 없다구
사람을 만나면 다칠까봐 달팽이가 되기도 하지
잡지나 영화도 지겹도록 보아 그게 그거 같고
내가 아는 건 고된 노동과 시든 꽃냄새 나는 권태,
내일은 오늘과 다르리란 기대나
애정이나 행복에 대한 갈망만큼 지독한 속박은 없다
나라는 연장을 어떻게 닦아야 하나
가질 순 없는 건 다 상처랬죠?
가질 수 없는 건 다 상처랬죠?
닿지 않는 하늘 닿지 않는 바다
돈이 없어 닿지 않는 외투
빌릴 수 없는 방 두 칸짜리 집
닿지 않는 사랑
절망의 아들인 포기가 가장 편하겠죠
아니, 그냥 흘러가는 거죠
뼈처럼 흰구름이 되는 거죠
가다보면 흰구름이 진흙더미가 되기도 하고
흰구름이 배가 되어 풍랑을 만나고
흰구름 외투를 입고
길가에 쓰러진 나를 발견하겠죠
나는 나를 깨워 이렇게 말하겠죠
<내가 나를 가질 수 없는데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져서 뭐하냐>구요
사랑이 올 때
그리운 손길은
가랑비같이 다가오리
흐드러지게 장미가 필 땐
시드는 걸 생각지 않고
술 마실 때
취해 쓰러지는 걸 염려치 않고
사랑이 올 때
떠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리
봄바람이 온몸 부풀려갈 때
세월 가는 걸 아파하지 않으리
오늘같이 젊은 날, 더 이상 없으리
아무런 기대 없이 맞이하고
아무런 기약 없이 헤어져도
봉숭아 꽃물처럼 기뻐
서로가 서로를 물들여 가리
당신이 나를 생각한다
당신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
흰 풀뿌리 같은 목소리에 이끌려
비바람 속에서 내 발은 부푼다
비바람 속에서 당신을 찾아 떠난다
얼굴 한번 어루만지고 싶어
착한 마음 비치는 눈을 보고 싶어
멀리서 흰고래처럼 춤추는 당신
닿을 듯 닿지 않는 당신을
훔쳐만 보고 잠잠히 사라진다
아무 것도 아니었지
너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
순식간에 불타는 장작이 되고
네 몸은 흰 연기로 흩어지리라
나도 아무 것도 아니었지
일회용 건전지 버려지듯 쉽게 버려지고
마음만 지상에 남아 돌멩이로 구르리라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도 괜찮지
옷에서 떨어진 단추라도 괜찮고
아파트 풀밭에서 피어난 도라지라도 괜찮지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의 힘을 안다
그 얇은 한지의 아름다움을
그 가는 거미줄의 힘을
그 가벼운 눈물의 무거움을
아무 것도 아닌 것의 의미를 찾아가면
아무 것도 아닌 슬픔이 더 깊은 의미를 만들고
더 깊게 지상에 뿌리를 박으리라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비로소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리라
시간 창고로 가는 길
어디로든 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때
무작정 밖으로 나서는 것이다.
좀 가다보면 바람도 불고,
성성한 빗발도 날리고,
비로소 우울한 일도
잊으리라.
밖으로 나가
내 안의 문제들을
살피면 아주 하찮아서
부끄럽다.
그래서 지나치게
자신 안에 갇혀 있으면
위험하다.
잠시 정전된 을지로 지하
갑자기 내 걷던 자리가 정전이 되었다
바다 속 같은 침묵이 주변을 휘감아 갔다
일순간 어둠이 지하도를 덮자
낯선 쾌감에 몸을 떨었다
왜 이 상태가 불안하기보다 경이로울까?
수도원처럼 고요한 상태
어쩌면 나는
가장 단순한 상태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살이 썩어 흰 뼈만 남듯이
복잡한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
모든 전등을 끄고 싶듯이
단순함의 가치를 생각한다
걷고, 보고, 숨 쉬고, 마시고
텅 빈 방, 텅 빈 컵, 물과 바람 소리
단순함 속에 보이는 인생의 핵심
다시 시작하는 발길
하나, 둘 ...
지하도는 다시
들꽃 만발한 벌판처럼 훤해졌다
해질녘에 아픈 사람
- 향수병
이제 떠나야 할 것 같네요
그대 해안가를 떠도는 것만으로 즐거웠어요
그대 외투 빛깔처럼 황토빛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
그 바다에 내 얼굴 파묻고 웃고 운 것만으로
그대도 날 그리워할까요
언젠가 그대 향기 잊혀지겠죠
향수병에 담아두지 못했는데
그대 손 한번 잡지도 못했는데
그대 갈망. 슬픔도 껴안지 못했는데
그대가 믿는 모든 게 되고 싶었는데
먹고살기 참 힘들죠
밤새 일하느라 거친 손등 호박잎이구
거긴 밥만큼 따뜻한 얼굴이구
아아, 그새 정들었나 봐요
홀홀 떠나려네요
멀리 꽃나무가 흔들리네요
속절없이 바다가 나를 덮어가네요
갑자기
갑자기 한 바구니 오렌지가 먹고 싶고
갑자기 커피 냄새 나는 사람이 그립고
그 사람과 신나게 춤을 추고 싶고
풀밭의 호랑나비처럼 태양을 입고 날고 싶다
갑자기 행인들이 둥둥 떠다니는 환상을 본다
꾸질꾸질한 재개발아파트가 무너질 듯 비바람이 불면
아랫집 옆집 연탄가스가 수의처럼 날려온다
창을 열고 산성비에 천사가 녹아버렸다
빌어먹을 인간들! 나는 욕하면서 부끄러웠다
왜 이렇게 살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나 자신이 답답해 죽고만 싶었다
액자 속의 그림같이 조용히 살다가도
갑자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행복
행복은 행복하리라 믿는 일
정성스런 손길이 닿는 곳마다
백 개의 태양이 숨 쉰다 믿는 일
그리운 사람들을 부르며
소처럼 우직하게 일하다 보면
모든 강 모든 길이 만나 출렁이고
산은 산마다 나뭇가지 쑥쑥 뻗어 가지
집은 집마다
사람 냄새 가득한 음악이 타오르고
폐허는 폐허마다 뛰노는 아이들로 되살아나지
흰 꽃이 펄펄 날리듯
아름다운 날을 꿈꾸면
읽던 책은 책마다 푸른꿈을쏟아 내고
물고기는 물고기마다 맑은 강을 끌고 오지
내가 꿈꾸던
행복은 행복하리라 믿고
백 개의 연꽃을 심는 일
백 개의 태양을 피워 내는 일
노란 꽃을 드릴께
귀다툼의 바닷물을
오래 끌고 다니면
어둠은 하얘지기도 했어
철로 위엔 노란 꽃도 피어났어
무덤들은 흙을 풀어헤쳐 쉬기도 했구
물결치는 관 위에
호수를 뜨위기라도 하면
웃음의 향기가 메아리쳤어
철로 위의 꽃도 손에 와 앉았어
손가락 새로는 세상의 눈물도 보이구
푸른 빵에 주린 몽유병으로
강물을 오르면 넘어지기도 하겠지
이 큰 눈에 가득 담겨오는
헐벗어서 더욱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면 노란 꽃을 드릴께
나의 싸움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한 쓸쓸함
줄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오백원 대학생
왕복 전철비 이백원
점심 라면값 이백원
커피값 백원
대학 때 하루 생활비는 오백원이었다
오백원만 더 달라고 어머니께 애원한 오백원 인생
정신의 빈곤은 죽음이라 여긴 오백원 대학생
도시락 싸들고 아낀 점심값으로 복사 떠서 공부한 오백원 인생
신경정신과 의사한테 비싸다고 울어서 약값 깎던 오백원 인생
<500 마일즈>를 부르며 회한에 젖어 나는 눈보라처럼 흩날렸네
비틀즈보다 조용필을 좋아했고
투쟁이란 말 끝에 꽹과리처럼 울리는 ㅇ음을 사랑했네
희망의 돌덩이 같은 <아침이슬>을 부르며 함께 돌을 던지고
절망의 구역질을 하며 이렇게 살다 죽진 않으리라다짐했네
오른 물가만 빼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네
가난의 역사를 바꾸고 싶은 서러운 오백원 인생
까짓것 허기진 채 일렁이며 흘러가죠
그러나 못살겠다 갈아보자 오백원 인생
제기랄, 바꿔져라, 바꿔져라,
부익부 빈익빈 세상이여
내 여인이 당신을 생각한다
저녁 태양은 빵같이 부풀고
언덕은 아코디언처럼 흘러내립니다
거리에 북풍이 넘치도록 그녀는 당신을 생각합니다
우연히 만난 길과
알 수 없는 희망에 들뜬 날들을
소리가 아픈 풍금이 북풍따라 노래하고
당신에게 나던 사막의 붉은냄새가 몰려옵니다
잠시 바라보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렸나요
그냥 앞에 계시는 것만으로 기쁨에 넘쳐 봤거든요
소중해서 숨긴 애정의 힘이 비탈길을 오르게 합니다
정든 이의 행복을 빌고 하늘에 새들이 날아드는
가장 아름다운 시간에 헤어져야 합니다
그녀는 당신이 그린 수묵화입니다
수묵화 한 장이 비바람에 젖습니다
뱃사람이 풍랑을 이기며 바다를 밀고 가듯
사람들은 저마다 추억을 견디며 오늘을 건넙니다
겨울 정거장
겨울은 외투주머니에서 울고
추운 손들은 난로 같은 사람을 찾는다
오후의 저무는 해 아래 모두
깡마른 기타처럼 만지면 날카롭게 울부짖을 듯하다
싸구려 운동화처럼 세월이 날아가는데
생활은 변한 게 없고 아무도 날 애타게 부르지 않고
특별한 기억도 없다 어리석은 열망으로 뭉친
얼음덩이 처럼 서로 가까와지는 일은 불가능한 듯
침묵의 물살에 떠밀려가는 것이 강물빛이 변하고
벌써 늙어간다는 것이,
어두워지는 창공에 흰 백지장이 나부낀다
내 장갑을 누군가에게 벗어줄 기쁜 위안이 그립다
희망의 작은 손전등을 들어
내게 오는 자를 위해 길을 비춘다
나는 즐거운 타인이 있으므로 살아가고
삶은 그들에게 벗어나려 할때 조차
그들에게 속하려는 끝없는 노력이므로
감미로운 고통에 싸여 길을 비춘다
이별한 자가 아는 진실
담배불을 끄듯 너를 꺼버릴 거야
다 마시고 난 맥주 캔처럼 나를 구겨버렸듯
너를 벗고 말 거야
그만, 너를, 잊는다,고 다짐해도
북소리처럼 너는 다시 쿵쿵 울린다
오랜 상처를 회복하는 데 십년 걸렸는데
너를 뛰어넘는 건 얼마 걸리까
그래, 너는 나의 휴일이었고
희망의 트럼펫이었다
지독한 사랑에 나를 걸었다
뭐든 걸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 생각했다
네 생각 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너는 어디에나 있었다 해질녘 풍경과 비와 눈보라,
바라보는 곳곳마다 귀신처럼 일렁거렸다
온몸 휘감던 칡넝쿨의 사랑
그래, 널 여태 집착한 거야
사랑했다는 진실이 공허히 느껴질 때
너를 버리고 나는 다시 시작할 거야
슬픔의 독을 품고 가라
빈민가 담벼락 같은 가슴을 뚫고 겨울이 온다
슬픔은 미친 종처럼 울고 슬픔은 끝없이 나는 연
저 환장한 연을 잡았으면
내가 너 대신 아팠으면 너를 안고 나는 갈매기였으면
아우야, 추운 너를 안고 어머니가 금강산을 날으셨구나
너를 안고 나는 바닷속을 달렸더구나
마음으로라도 날고 뛰지 않으면 살 수 없던 날들
열린 차창처럼 비명을 지르고 싶던 날들
불탄 아현동 사람들이 무덤으로 던져진 어제
저녁이 오기도 전에 식탁의 빵들은 부패했다
장송곡보다 무거운 원피스를 입고 너는 꿈 속 강변을 헤매고
버림받은 자들이 부르는 유행가가 싸락눈으로 날린다
의지대로 되는 일이 없다
우리는 토실토실한 쓰레기나 불리며 살고
작별의 꽃을 던지며 사나니
술잔은 자꾸 죽음을 향해 기울어지더라
기나긴 밤마다
아무 위로없이 남겨진 나의 너여
더 이상 탄식의 나팔을 불지 마라
현세가 지옥인 때는 슬픔의 독을 품고 가라
무자비한 세상, 지옥의 슬픔을 월경하기 위하여
빵을 가진 남자
먼 빛 속에서
출렁거리는 아침 바다로 오십니다.
창공을 흔들고 제 가슴을 치며
야생화 보다 풋풋하게 오시는
당신은
해저같이 캄캄한 제 영혼이
끝없이 다다를 역입니다.
인간이 결국
무덤이라는 둥근 빵을 얻기 위해 살듯
빵을 가진 마음처럼 둥그래져야 겠지요
빵속의 해와 강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끌어안은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무덤까지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
키스, 키스, 키스
떠도는 말이 부딪쳐 상처와 이별을 만들고
따뜻한 수증기로 스미면 마음의 키스가 되지
키스, 키스, 키스! 번역해서 뽀뽀는 얼마나 이쁜 말이니
삶이 아프지 않게 시원하게
말은 사려깊은 타월이 돼야지
매순간 모든 이로부터 버려질 쓰레기까지
뽀뽀하는 마음으로
"네 일은 잘 될 거야 네 가슴은 봄바다니까"
인사하는 바로 그것
삶이 꽃다발처럼 환한 시작이야
내 혀의 타올로
당신의 눈은 얼굴은
슬픔의 피빠는 노을
눈보라치는 정거장이야
당신을 삶는 상처의 휘발유
내 혀의 타올로 닦아줄께
나도 함께 흐느낄께
병원으로 가는 길
사는 게 병원가는 길은 아닐까. 나든 가족이든 번갈아 가며 병원 찾는 길.
푸른 안개가 펄럭이는 밤. 생사의 갈림길에 선 당신. 내가 할 수 있는 건 간
절한 기도밖에 없다. 뇌출혈을 멎게 해주시고, 새들이 떠메고 가는 아침을
보여주시고, 모든 후유증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다.
맨살을 찢듯, 그대의 아픈 자리가 주는 우울과 공포. 몇 겹 파도를 일렁이
며 덮쳐온다. 우리는 사랑보다 다툼이 더 많았고, 함께 가는 길이 꼭 끼는
바지처럼 버겁고, 함께 있고 싶은 만큼 벗어나고 싶었다.
'사랑은 결심'이란 말을 생각해 본다. 그대 손을 잡고 봄의 산맥을 오르고
싶다. 그대 손에 연분홍 철쭉꽃이 피어오르고 다시 태어나는 기분을 느끼
며, 함께 추스릴 시간, 깨어나 부활할 시간에.
당신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
흰 풀뿌리 같은 목소리에 이끌려
비바람 속에서 내 발은 부푼다
비바람 속에서 당신을 찾아 떠난다
얼굴 한번 어루만지고 싶어
착한 마음 비치는 눈을 보고 싶어
멀리서 흰고래처럼 춤추는 당신
닿을 듯 닿지 않는 당신을
훔쳐만 보고 잠잠히 사라진다
삼십 삼 세의 가을
삼십 삼 세란 무엇인가
아이 하나, 둘 유아원에 보내거나
미리 죽어 목화솜 같은 바람으로 떠돌거나
우울의 강둑을 거닐며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 달래거나
좀더 넓은 아파트
좀더 안정된 살림을 위해
고되고 답답한 나날을 장승처럼 견디는 것인가
돈을 모아 자유로울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일로 밥을 먹을 수만 있다면
성취와 만족은 얼마나 먼 등대인가
등대와 가을 태양을 보며 사무치는
나의 삼십 삼 세란
무엇에든 용감해지는 일이다
바람 속 장작불처럼 거친 외로움은
죽음의 공포쯤은 커피 마시듯 넘겨주는 일
지금껏 사랑했는가 무얼 제대로 사랑했는가
슬프다면 대신 울어주마
불쾌하다면 기분을 바꿔주마
손을 내밀어 情人들을 편안히 맞이하고
내 안의 깊은 산책길을 따라
잊고 지낸 것을 생각하는 일이다
간소하게 사는 매력과
초조하게 들린 시계소리가
얼마나 어여쁜 노래인가 느끼는 일이다
가을빨래
바다가 보이는 곳에
빨래를 널어두었다
셔츠가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겠지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
모두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가지
자신이 그리워하는 것을
기다리면 언젠가 그대가 다가오듯
가을을 그리워하니
어느새 낙엽이 떨어진다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나뽈레옹의 이 말은 10년 동안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송곳이었다
게으름을 피울 때마다
내 많은 실패를 돌아볼 때마다
송곳은 가차없이 찌르고 찔러왔다
모든 불행엔 충고의 송곳이 있다
자만치 말라는, 마음 낮춰 살라는 송곳
불행의 우물을 잘 들여다보라는 송곳
바닥까지 떨어져서
다시 솟아오르는 햇살의 송곳
송곳은 이제 지팡이처럼 내게 다가와
신들린 듯 거친 바다처럼 밀어간다
초록말을 타고, 문득
돌아본다
세월의 넝쿨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산
여전히 검다
산은 구겨진 땅에 욕된 얼굴들을
쏟아내고 흐린 빛을 깨문다
폐 속에 이끼를 뜯어내고
나는, 초록 말을 꺼내 탄다
하늘은 멀고 갈 길이 아득할수록
지상은 연한 환희로 가득 차 보인다
자주 늘어나는 목에선
우울의 가래가 튀어나온다
사람마다 지르는, 길고 축축한
비명에 뜨거워지는 철로변에서
얼마나 격렬히 끌어안아야 하나
이 죽음의 민둥산을
술 마시기 좋은 방
햇빛에 내어 말린 고급 속내의만큼
사랑도 우정도 바래더라
변하지 않는 건 무엇인가
속이 텅 비면 견디지 못해 마시는
술과 음악은 세월을 썩게 하는 정겨운 습기라
겨울비 내리는 밤 빌리 홀리데이와
바하보다 절실한 '혼자만의 사랑' 열한 번
'백학' 일곱 번 번갈아 들으며
마음의 지붕인 쓸쓸함을 위하여
식구와 뭇사람의 건강을 위하여
홀로 건배하는데 창밖 깊은 연못에서
거북이가 솟아올라
맥주 한상자 밀고 방으로 기어오더라
혼자 사는 일
일어설 수도 없이
마음은 가랑비처럼 부서져내린다
꿈도 희망도 없이
헤매던 맨발은
죽음 가까이 아주 가까이
저녁 강 따라 흘러간다
먼 창가 흰 등불 비쳐나면
환한 웃음 메아리치는
아늑한 집이 그리워
쓸쓸한 내 손 잡아줄
당신이 그리워
그대는 혼자가 아니리라
그대 슬픔 한 드럼통 내가 받으리라
감미로울 때까지 마시리라 평화로운 우유가 되어
그대에게 흐르리라 또한 태풍같이 휘몰아쳐
그대 삼키는 고통의 식인종을 몰아내고
모든 먹고 사는 고뇌는 단순화시켜 게우리라
술에 찌든 그대 대신 내가 술마시고
기쁜 내 마음 안주로 놓으리라
그대 병든 살 병든 뼈 바람으로 소독하리라
추억의 금고에서 아픈 기억의 동전은 없애고 말리라
그대 가는 길과 길마다 길닦는 롤러가 되어
저녁이 내리면 그대 가슴의 시를 읊고
그대 죽이는 공포나 절망을 향한
테러리스트가 되리라 신성한 연장이 되어
희망의 폭동을 일으키리라
하느님이 그대의 희망봉일 수 있다면
물고기가 되어 교회를 헤엄쳐 가리라 험한 물결
뛰어넘으리라 간절히 축복을 빌리라
그대는 혼자가 아니리라
영원히 홀로치 않으리라
뜻깊은 인생이라고 속삭여 줘
여기 한 여자가 무너지다
한시절을 지배한 젊음과 애인
가족과 삽시간에 헤어지다
상심의 덩굴손이 지붕을 뚫고
문 밖으로 사랑의 붉은 원피스가 달려가고
무엇 하나 되흘러오는 것 없이
이곳은 하염없이 빠져나가기만 하다
여기 한 여자가 무너진다
밤마다 대머리가 되는 여자
파산한 성찬대처럼 썰렁한 여자
춥고 무서운 여자 가엾은 여자
여기 한 여자가 무너지다
사랑한 애인이 울린 여자
모든 시간이 버린 여자
그의 삶을 가볍게 해 줘
자선냄비처럼 기쁘게 해 줘
죽음의 피서지로 떠날 때까지
푸른 우산 푸른 이불을 덮어 줘
그가 헛디딘 곳마다
격려의 십자가가 피어나게 해 줘
뜻깊은 인생이었다고 속삭여 줘
그는 나와 나의 너니까
내일의 끝이니까
나의 시
나의 시는
오르는 물가를 잠재우지 못하고
병든 자의 위로도 못 되고
뜨거운 희망을 일깨우는 망치소리도 못 되고
네 상처의 주름살도 지우지 못하고
그래, 아무 힘도 못 되지
그래도 날 여류시인이라 부르진 마
여류가 뭐야? 이쑤시개야, 악세사리야?
여류는 화류란 말의 사촌 같으니
여자라는 울타리에 가두지 마 폄하하지 마
세상을 향해 품을 열어놓고
나는 돌아본다
뭣보다 진하게 느끼는 세기말을
도시의 우울과
슬픈 열정의 그림자를
사람의 욕망과 쓸쓸함을
솔직하게 비춰내고자
괴로움을 넘고자 내 노래는 출렁인다
거침없이 일렁이며 흘러가고자
사무치는 아리랑처럼 격정의 록처럼
푸른한 재즈, 블루스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