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이현응 박사님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절대성과 상대성"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말 좋은 비유를 들었기에 여기에 기록해보려 합니다.
*** 참고로, 이현응 박사님은 저와 석사 동기이고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에서 HRD(인적자원개발)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훌륭한 인재이십니다. 열반에 드는 것이 꿈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절대성과 상대성이 차원을 달리하여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여 제가 한참을 설명하였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크레타 섬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다..."라고 중얼거리시더군요. 그 순간 "아하~ 이거 참 좋은 비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이 상대적인 것이 만약 참이라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라는 말은 곧 참이며 절대적인 지식이 되어버리죠.
결국 참인 지식이 존재하게 되므로 모든 지식이 상대적이라는 것은 거짓이 됩니다.
모든 지식이 상대적이라는 말이 참이 되는 순간 곧 거짓이 되어야 하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러한 모순된 현상을 이해하기 쉽게 다음의 비유를 들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크레타 섬에 사는 어떤 한 크레타인이 "모든 크레타 섬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다~!!!" 라고 했습니다.
과연 이 말이 참일 수 있을까요?
이 말이 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참이라면 이 말을 한 크레타인도 거짓말장이가 되어야 하는데,
참말을 한 것이므로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모든 크레타인이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진실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크레타 섬 바깥에 살고 있는 외부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즉,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명제의 절대성은 모든 지식이 상대적인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말해질 수 있는 명제라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차원을 달리하여 존재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스 크레타 섬>
최근, 저의 이러한 아이디어와 맥락이 통하는 논의들을 아래에 붙입니다.
수학자, 철학자, 교육학자 등등... 역설적 난제에 부딛힌 학자들은 모두 저와 같은 고민을 했었던 모양입니다. ㅎㅎㅎ
아래 설명되는 학자들의 해법은 다소 일시적, 특수적 해법으로 보입니다.
이에 비하여 제 아이디어는 상대적으로 보편적, 일반적 해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위키백과에서 "거짓말쟁이 역설"에 대한 설명을 옮겨놓아보았습니다.
버트란드 러셀과 알프레드 타르스키의 해법이 바로 제 아이디어와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 위키백과 "거짓말쟁이의 역설" ***
http://ko.wikipedia.org/wiki/%EA%B1%B0%EC%A7%93%EB%A7%90%EC%9F%81%EC%9D%B4%EC%9D%98_%EC%97%AD%EC%84%A4
에피메니데스와 에우불리데스
철학자이자 시인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는 기원전 6세기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참고로 에피메니데스 자신도 크레타 섬 사람이다.
"모든 크레타 섬 사람들은 거짓말쟁이이다."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을 종종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같은 용어로 여기거나, 서로 혼동해서 쓰기도 하지만, 이 둘은 같은 용어가 아니다. 에피메니데스가 의도적으로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노리고 글을 썼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며, 이것이 모순된다는 것도 아마도 후세에서야 발견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문장은 문장이 거짓일 경우에는 역설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크레타 섬 사람들 중 진실을 말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이 문장은 거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알려진 거짓말쟁이의 역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우불리데스(Eubulides)의 역설이다. 에우불리데스가 에피메니데스의 글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에우불리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 남자가 자기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한 것은 참인가? 아니면 거짓인가?"
버트런드 러셀
버트런드 러셀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을 집합 이론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그는 러셀의 역설로 알려진 이 역설을 1901년에 발견하였다. 이 역설은 자신을 원소로 가지지 않는 모든 집합을 원소로 포함하는 집합에 자기 자신도 원소로 포함되는지 여부 를 고려할 때 발생한다.
만약 이 집합에 자신을 원소로 포함한다면, 집합의 정의에 따라 자신은 원소가 되지 않아야 한다. 반대로 만약 자신을 원소로 포함하지 않는다면, 역시 집합의 정의에 따라 자신도 원소가 되어야 한다.
(홍영일 주: 따라서 러셀은 집합은 절대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가지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집합과 원소의 위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이러한 역설적 상황을 해소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집합 차원이 상위 차원이고 원소는 하위 차원이라고 하겠습니다.)
알프레드 타르스키
알프레드 타르스키(Alfred Tarski)는 스스로를 다시 참조하지 않는 문장들도 조합할 경우 스스로를 다시 참조하면서 역설적이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논하였다. 이러한 조합의 한 예는 다음과 같다.
1. 2번 문장은 참이다.
2. 1번 문장은 거짓이다.
그는 이러한 '거짓말쟁이의 순환(liar cycle)' 문제를
하나의 문장이 다른 문장의 참/거짓을 참조할 때, 의미상 더 높도록 하여 해결 하였다.
참조되는 문장은 '목표 언어(object language)'의 일부가 되며, 참조하는 문장은 목표 언어에 대한 '메타 언어(meta-language)'의 한 일부로 간주된다. 의미 계층(semantic hierarchy)의 더 높은 '언어들(languages)'에 있는 문장들은 '언어(language)' 계층에 있는 낮은 순위의 문장들을 참고해야 하며, 순서를 거꾸로 바꾸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시스템이 자기 참조가 되는 것을 막는다.
(홍영일 주: 여기서 타르스키가 말하는 메타언어가 상위차원, 목표언어가 하위차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의 세계는 가시적(可視的)인 세계, 현상(現象)의 세계, 상식(常識)의 세계이며, 논리의 세계는 불가시적(不可視的)인 세계, 실재(實在)의 세계,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세계입니다. 이 두 세계가 각각 몇 단계로 다시 구분되어 있다 하더라도, 본질상 두 개의 세계로 양분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양분(兩分)된 세계가 여기에 실린 글들에 어떻게 대비되어 있는가를 일일이 말씀드리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이 두 세계의 어느 쪽에 사는가에 따라 삶의 의미, 그리고 그 안에서의 교육(敎育)의 의미가 다르게 파악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이러한 생각이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대강은 알고 있습니다. ‘이분법적 사고(二分法的 思考)’, ‘양분적 사고(兩分的 思考)’, ‘흑백논리(黑白論理)’ 심지어 ‘분열증적 사고(分裂症的 事故)’ 등등, 그런 생각을 나쁘게 부르는 이름은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른바 ‘종합지향적(綜合指向的)’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사실(事實)과 논리(論理)가 어떻게 다를 수 있는가, 논리는 반드시 ‘사실의 논리’이어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사실의 연장(延長)’이어야 하지 않는가’하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저로서는, 비록 논리가 ‘사실의 연장’이라고 하더라도 어디엔가 그 연장이 시작되는 지점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연장은 그냥 미끈한 연장이 아니라, 그 시작되는 지점에서 토마스 쿤(Thomas Kuhn, 1962)이 말한 ‘도약(跳躍)’ 같은 것이 이루어지는 그런 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도약’의 주관적인 느낌을 저는 본문에서 ‘온 세상이 폭발하는 듯한 굉장한 폭음과 함께 불꽃처럼 눈부신 빛이 사방에 쏟아져 내리는 것과 같은 경험’이라는 식으로 표현해보았습니다. .......
(홍영일 주: 여기서 '사실의 세계'는 하위차원, '논리의 세계'는 상위차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