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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의 성만찬론:
팔츠의 종교개혁(1556년)부터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1563년)까지
The Doctrine of the Lord's Supper in Heidelberg:
from the Reformation of the Palatinate(1556)
to the Heidelberg Catechism (1563)
이남규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의 성만찬 교리가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에 대한 토론이 있어 왔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의 성만찬론은 개혁주의 입장을 잘 드러내면서도 개혁주의 중 어느 한 노선을 분명한 어조로 따르지 않는다. 또는 그 요리문답서의 성만찬론이 결정적으로 제네바, 취리히, 또는 멜랑흐톤의 것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의 성만찬론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또는 당시의 성만찬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델베르크가 경험했을 성만찬론을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따라서 본 논문은 1556년부터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까지 성만찬론에 관련된 중요한 사건과 이에 관련한 문서들을 고찰한다.
유럽의 중요한 개혁신학의 도시였던 하이델베르크에게 성만찬론이 어떻게 다가가는지 살펴보면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을 지를 정리한다. 이 작업은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와 당시 개혁교회의 성만찬론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1. 오트하인리히(Ottheinrich)의 종교개혁과 성만찬론 논쟁의 촉발
1556년 오트하인리히가 선제후령 팔츠지역(Kurpfalz)을 다스리면서 루터주의를 실행했다. 정확히는 1553년에 요하네스 브렌츠(Johannes Brenz)가 작성한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의 교회법을 받아들였고, 아욱스부르그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였다. 교육을 위해서는 브렌츠가 만든 뷔르템베르크의 요리문답서를 사용했다. 나아가 오트하인리히는 스트라스부르그의 루터주의자 요한 마르바흐(Johann Marbach)에게 팔츠지역을 시찰하게 했다.
하이델베르크대학도 개혁되었다. 오트하인리히는 대학의 개혁을 필립 멜랑흐톤에게 많이 의존했다. 새로운 규칙이 제정되었고, 학교 구성도 새로워졌다. 여러 학부에 유명하고 실력 있는 교수들이 왔다. 신학부에는 먼저 피에르 보크빈(Pierre Boquin)이 왔다. 오트하인리히는 멜랑흐톤을 청빙했으나 멜랑흐톤은 거절했다. 대신 멜랑흐톤의 제자인 틸레만 헤스후스(Tilemann Heshus)가 왔다. 헤스후스는 하이델베르크에서 교수로 활동했을 뿐 아니라 팔츠교회의 감독(Superintendent)이었기 때문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런 인적구성은 이미 갈등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보크빈은 칼빈주의자였고, 헤스후스는 강한 루터주의자였으며, 의학부에 있었던 토마스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는 쯔빙글리주의자였다. 성만찬에 대한 갈등이 그들 내부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하이델베르크로 온지 얼마 되지 않은 1559년에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독일 서북부 프리스란트(Friesland) 지역의 출신 스테판 실비우스(Stephan Silvius)가
박사학위취득을 위한 방어식을 가지려고 했을 때, 신학부의 학장이었던 헤스후스는 실비우스에게 ‘주의 만찬에서 단순한 표를 받아들이는 쯔빙글리주의자들의 오류’라는 주제를 주었다. 그러나 쯔빙글리를 옹호하였던 실비우스는 이 주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때 대학의 총장은 쯔빙글리주의자라 할 수 있는 의학부교수 에라스투스였다. 에라스투스는 이 문제를 대학평의회로 가져갔다. 이 회의에서 신학부 부학장이었던 보크빈이 실비우스의 방어식을 책임지기로 하였지만 헤스후스는 거절했다. 이렇게 갈등이 증폭되는 시기였던 1559년 2월 12일 오트하인리히는 소천했다.
2. 프리드리히 3세의 통치 시작과 성만찬 논쟁의 절정
오트하인리히의 뒤를 이어 프리드리히 3세가 취임했다. 총장이던 에라스투스는 실비우스의 문제를 다시 선제후 자문회 앞으로 가져갔다. 헤스후스는 거기서도 격한 반응을 했고 이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 선제후는 대학평의회의 결정대로 보크빈이 실비우스의 방어식을 주관하도록 했다. 그리고 헤스후스는 더 이상 대학평의회에 참석할 수 없도록 했다. 실비우스는 3월 9일 쯔빙글리편에서 성만찬론을 옹호하는 주제로 보크빈에 의해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프리드리히 3세가 선제후로서 일을 시작했을 때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이처럼 성만찬의 갈등 속에 있었다. 실비우스의 일이 지나간 후 바로 헤스후스와 클레비츠(Klebitz)의 갈등이 일어난다. 헤스후스가 모친상으로 고향 베젤(Wesel)로 떠났을 때, 클레비츠는 보크빈의 주관아래 학사 학위를 받게 된다(1559년 4월 4일). 여기서 그는 성만찬의 핵심을 교통(communicatio)으로 본다. 믿음으로 취하는 하늘의 것, 즉 그리스도의 살과 피와 교통하는 것을 말하여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제로 떡과 잔에 임재하여서 살과 피의 본체를 취하는 루터주의 방식을 거절했다. 이때의 논제들은 아래와 같다.
1.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실 때, 말씀 ‘이것은 내 몸이다’를 단순히 이해하는 것을 믿음의 규칙이 허락하지 않는다(Institutoris Christi verba; Hoc est corpus meum simpliciter intelligere, Fidei regula non sinit).
2. 왜냐하면 주의 만찬은 두 실제 또 이 구분된 것들인 땅의 것과 하늘의 것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경건한 자들에게 인정되었다(Nam Coenam Dominicam duabus rebus, iisque distinctis, constare, Terrena & coelesti, inter pios convenit).
3. 땅의 것은 떡과 포도주다: 하늘의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교통
하는 것이다(Terrena est panis & vinum: Coelestis est, Communicatio corporis & sanguinis Christi).
4. 땅의 것은 몸의 입으로, 하늘의 것은 영혼의 입으로 곧 믿음으로 얻어진다(Terrena ore corporis, coelestis ore animae, id est, Fide percipitur).
5. 그리스도의 말씀의 첫 부분을 성례의 실제로 말해지곤 했다: 그런데 뒷부분을 성례의 사용이나 효과로 돌리는 것은 사도가 권하듯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나누는 것이 아니다(Verborum Christi partem priorem ad rem, ut dici solet, Sacramenti: posteriorem vero ad usum seu effectum, referre, non est recte secare, ut Apostolus monet, veritatis sermonem).
6. 살리는 능력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교통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Vis vivificandi a communicatione corporis & sanguinis Christis separari non debet).
7.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이 신성한 만찬의 다른 목적들에 대해서 어떤 논쟁이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De aliis Finibus Coenae huius sacrosanctae inter Ecclesias Christi, nulla videtur esse controversia).
위 논제는 단순히 클레비츠 개인의 것일 뿐 아니라, 동시에 보크빈의 생각이다. 그리고 위 논제를 중심으로 논쟁이 확장되어 간다. 위 논제에서 이중적 먹음(duplex manducatio)이 핵심적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이중적 먹음이 후에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의 성만찬론의 정의에서 구조로 등장한다. 즉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의 75번에서 “주님의 빵이 내게 떼어지고(gebrochen) 잔이 내게 주어지는 것을 내가 눈으로 보듯이 그의 몸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당했고 찢겨졌으며(gebrochen) 그의 피가 나를 위해 흘려졌다는 것입니다. ... 내가 종의 손으로부터 주의 떡과 잔을 받아 육체적으로 맛보듯이, 그가 직접 내 영혼을 십자가에 달리신 몸과 흘리신 피로서 영생에 이르도록 그렇게 확실하게 먹이시고 마시운다는 것입니다”라고 이중적 먹음의 구조를 드러낸다.
칼빈은 이중적 먹음을 통해서 부처, 루터에게 있는 성례의 도구적(instrumental) 면(이 도구들을 통해 은혜가 신자들에게 교통한다)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불링거에게 있는 상징병렬(analog und parallel)인 면(성례적 표와 행위들이 보이는 은혜에 대한 비유)과도 일치시킨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은 이중적 먹음의 병렬구도는 받아들이나 단순한 상징인지(불링거) 아니면 도구적인 면까지를 포함하는지(칼빈)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이중적 먹음의 병렬구도는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에 그대로 받아들여져 성만찬 예식의 내용을 드러내고 있다.
헤스후스가 돌아왔을 때, 헤스후스는 클레비츠를 비난했다. 둘 사이의 싸움은 극렬해져서 설교단에서 서로를 비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헤스후스는 클레비츠를 출교시켰다가 주변의 우려로 다시 회복시켰다. 이런 힘든 갈등의 과정을 완화시키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헤스후스가 두 번째로 클레비츠를 출교했다가 다시 회복한 후, 프리드리히 3세는 ‘떡 안에’ 또는 ‘떡 아래’ 등의 그리스도의 현존에 관한 표현을 금지시켰다. 헤스후스는 말을 듣지 않았다. 선제후의 인내는 한계에 도달했다. 그는 1559년 9월 16일 헤스후스와 클레비츠 두 사람을 퇴출시켰다.
3. 멜랑흐톤의 판단문의 역할
프리드리히 3세는 멜랑흐톤에게 조언을 구했다. 멜랑흐톤의 답장이 11월에 도착했다. 멜랑흐톤은 극렬했던 두 사람을 내보내서 교회가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한 선제후의 처리에 동의했다. 그는 성만찬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0장 16절의 말씀을 따라 그 유익이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는 것이라고 했다. 멜랑흐톤은 이 교통(κοινωνία)과 연합(consociatio)이 성례의 사용 가운데서 생긴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떡과 몸을 일치시키려는 교황파와 브레멘파와 헤스후스를 거절했다.
이 논쟁에서 바울의 말을 붙잡는 것이 가장 좋다: 우리가 먹는 떡은 [주님의] 몸과 교통이다. 성만찬의 유익에 대해 충분하게 말해져서 사람들이 이 보증에 대한 사랑과 잦은 사용으로 초대되어야 한다. 그리고 단어 교통(κοινωνία)이 알려져야 한다. 교황파처럼 떡의 본성이 변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브레멘파처럼 떡이 그리스도의 본성적 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헤스후스처럼 떡이 그리스도의 참된 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통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는 것이다. 이 연합은 사용에서 생기는데, 마치 쥐들이 떡을 씹듯이 지각없는 것이 아니다.
멜랑흐톤은 성만찬의 정당한 유익은 떡 때문이 아니라 믿는 자들 때문에 있다고 한다. 위에 인용한 문단에서는 성례의 사용에(in usu)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는 것이 있다고 했는데, 편지의 다른 부분에서 복음의 사역 가운데(in ministerio Evangelii)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 하신다(adest)고 한다. 멜랑흐톤은 옛 선생들의 건전한 교리와 루터주의자들의 성만찬론은 다르다고 지적한다. 멜랑흐톤은 옛 선생들의 건전한 교리를 소개하고 성만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설에 기댄 루터주의자들의 교리를 교황주의자들의 것과 함께 놓으면서 거절한다. 이것은 하이델베르크의 루터주의자들의 예상치 못한 심한 비판이었다. 멜랑흐톤은 떡에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를 연결하려는 루터주의자들과 분명하게 결별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복음의 사역 가운데 함께 하신다. 거기서 확실히 믿는 자들에게 효과가 있다. 그리고 떡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함께 하신다: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참된 위로하는 말씀 안에서, 우리를 자신의 지체로 만드시고 자신이 우리의 몸을 살리실 것을 증거하신다. 그렇게 옛 사람들이 주의 만찬을 선언했다. 그러나 유익에 대한 이 참되고 단순한 교리를 어떤 이들은 변장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마치 떡 때문에 성례가 세워지고 교황의 예배가 세워진 것처럼 몸이 떡 안에 있는지 또는 떡의 나타남에 있는지 말해지기를 요구한다. 나중에 그들은 어떻게 떡에 포함되었는지를 만들었는데, 어떤 이들은 변화를, 어떤 이들은 본질 변화를, 어떤 이들은 편재를 생각해냈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에 끼친 멜랑흐톤이 영향력에 대한 토론이 있어 왔다. 일찍이 에브라르드(August Ebrard)가 멜랑흐톤-칼빈적이거나 칼빈-멜랑흐톤적이라고 했다. 하인리히 헤페(Heinrich Heppe)는 새로운 것도 없고, 칼빈적인 것도 없다고 했다. 카를 주드호프(Karl Sudhoff)는 헤페의 의견을 길게 거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비판하면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은 처음부터 끝까지 칼빈주의적이며, 따라서 헤페가 부당하게 뒤바뀐 평가를 했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의 성만찬론이 멜랑흐톤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도 옳지 않듯이, 멜랑흐톤의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옳지 않다.
위 편지에 나타난 멜랑흐톤의 중요한 변화는 비판할 때를 제외하고는 ‘참되게’(vere) 또는 ‘실체적으로’(substantialiter)라는 단어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전에 있었던 멜랑흐톤의 단어 사용과는 다른 중요한 변화이다. 1554년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Examen ordinantorum”에 나타난 멜랑흐톤의 성만찬의 정의를 보면, 주의 만찬을 주님의 몸과의 교통(communicatio corporis)으로 보거나, 믿는 자들(credentibus)에게 제한되는 것이나, 요한복음 15장의 인용 등은 이미 멜랑흐톤이 언급했던 내용들이다. 1559년 우르시누스는 멜랑흐톤의 정의의 많은 부분을 받아들여서 사용할 때에 “vere et substantialiter”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로 온 이후에 작성된 Summa Theologiae와 Catechesis minor에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지 않는다. 칼빈의 경우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실체(substantia)의 참여자가 된다고 표현했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에 ‘substantialiter’나 ‘substantia’라는 표현이 없는 것 때문에 성만찬론을 취리히(츠빙글리, 불링거)의 영향 하에 있었다고 보거나, 그 표현이 없는 것을 순전히 취리히의 영향만으로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비어마(Bierma)는 그 이유를 하이델베르크 작성자들이 합의를 목적으로 칼빈적이거나 루터란적으로 보이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칼빈이 이미 취리히 일치(Consensus Tigurinus, 1549)를 통해서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멜랑흐톤은 프리드리히 3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에 빠질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이 편지가 1560-1561년 동안 12회(또는 이상, 라틴어 8회, 독일어 4회) 출판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팔츠지역에서 이 편지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멜랑흐톤의 권위에 기대어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편지 때문에 멜랑흐톤은 개인적으로 루터주의 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이후 루터주의 교회에서 멜랑흐톤의 이름이 사라져간다. 그러나 멜랑흐톤의 이 편지는 하이델베르크와 독일의 개혁교회에 큰 힘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멜랑흐톤의 편지에 기대어 멜랑흐톤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은 하이델베르크를 떠나도록 명했다.
4. 하이델베르크 성만찬 공개토론(1560)과 아욱스부르그 신앙고백서(Augsburger Bekenntnis) 변경판의 채택
프리드리히 3세의 딸의 결혼식에 열린 신학토론(1560년 6월 3일-7일)이 선제후로 하여금 개혁주의 성만찬론에 대해 더 큰 확신을 갖게 했다. 선제후의 사위 작센-고타(Sachsen-Gotha)의 요한 프리드리히(Johann Friedrich)가 장인의 노선을 우려하여서 신학자 두 사람, 즉 요한 슈토셀(Johann Stössel)과 막시밀리만 뫼를린 (Maximilian Mörlin)을 데리고 하이델베르크로 왔다. 주 논쟁은 보크빈과 슈토셀 사이에 있었다. 프랑스출신인 보크빈이 독일어에 완전히 능숙치 못한 관계로 옆에서 에라스투스가 도왔다. 보크빈은 위에서 인용된 클레비츠의 테제를 변호하고 해설했다.
여기서 보크빈은 믿음의 규칙(Fidei regula)에 따른 해석을 따라 성만찬 예식을 세우실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독교 교리의 다른 부분과 일치하도록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과 그와 연결된 효과가 분리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보크빈에 의하면 성만찬에 있는 살리는 능력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교통하는 것에서 분리할 수 없다. 따라서 그 효과를 소유하지 못하는 자는 아무도 그리스도의 몸의 본질(οὐσια)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표현을 사용해서 성만찬의 실체(Substanz)는 그리스도의 효과와 분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빵과 잔이 아니라 몸과 피의 교통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이다.
성만찬은 빈 표나 또 본질이 없는 능력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교통, 즉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라는 단어를 통해서 성만찬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몸이 분리되는 것을 반대한다. 성만찬에서 하늘의 것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교통하는 것이라면 이 교통에는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교통은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인 자들, 즉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에 참여한 자들이 갖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몸은 영의 양식이요 마음의 양식이지 배의 양식이거나 몸의 양식이 아니다.
프리드리히 3세는 개혁신학자들의 의견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래서 아욱스부르그 신앙고백서 변경판(Confessio Augustana variata)이 공식적으로 인정받도록 노력했다. 신성로마제국 안에서는 공식적으로 로마가톨릭을 따르는 것과 아욱스부르그 신앙고백서를 따르는 것 두 가지만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아욱스부르그 신앙고백서 비경판(Confessio Augustana Invariata)보다는 변경판이 개혁주의적 입장을 더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비변경판의 독일어판은 루터주의자들의 편에 기울어진 것처럼 보여서 비변경판만 인정된다면 하이델베르크는 불리한 입장에 처할 수도 있었다. 변경판이 (적어도 비변경판과 함께) 공식적으로 인정될 때에 팔츠지역이 종교평화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를 수 있었다.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독일어판(CA 1530): 주의 만찬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가 실제로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의 형체아래 현존하고 거기서 배분되어지고 취하여진다고 가르친다(Vom Abendmahl des Herrn wird also gelehrt daß wahrer Leib und Blut Christi wahrhaftig unter der Gestalt des Brots und des Weins im Abendmahl gegenwärtig sei und da ausgeteilt und genommen wird.)
라틴어판(CA 1530): 주의 만찬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함께 하고 주의 만찬에서 먹는 자들에게 배분되어진다고 가르친다(De Cœna Domini docent, quod corpus et sanguis Christi vere adsint, et distribuantur vescentibus in Cœna Domini.).
변경판(CAV 1540): 주의 만찬에 대해서는, 빵과 잔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주의 만찬에서 먹는 자들에게 배분되어진다고 가르친다(De cœna Domini docent quod cum pane et vino vere exhibeantur corpus et sanguis Christi vescentibus in Cœna Domini.)
비변경판 독일어 판에서 빵과 포도주의 형체 아래(unter Gestalt)라고 했다면, 변경판에서는 빵과 포도주와 함께(cum)라고 하여서 분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후에 루터주의자들은 비변경판을 고집했고, 개혁주의자들은 변경판을 인정했다. 1561년 1월 나움부르그(Naumburg)에서 개신교 통치자들이 모였을 때, 프리드리히 3세는 다른 이들을 감동시켰고, 변경판이 비변경판과 함께 인정되도록 했다. 이것에 근거해서 후에 프리드리히 3세가 1566년에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를 효과적으로 변호할 수 있었다.
5. 떡을 뗌(fractio panis)
프리드리히 3세와 하이델베르크는 이제 자기 노선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팔츠교회와 대학을 새롭게 이끌어갈 역량 있는 인물이 필요한 시점에 두 사람이 왔다. 1560년 초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가, 그리고 1561년 여름이 지나고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가 왔다. 같은 해인 1561년 성탄절부터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성만찬 예식에서 작은 편원모양(oblaten)을 사용하지 않고, 빵을 떼는 방식(fractio panis)을 택했다.
이 빵을 떼는 것은 후에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에 포함된다. “그리스도께서 이 떼어진 떡에서(von diesem gebrochnen brod; de hoc fracto pane) 먹고 잔에서 마시라고 명령하시고 약속하셨습니다. ... 그의 몸이 ... 희생당하시고 찢겨졌습니다(gebrochen; fractum) ... 떡이 ... 내게 떼어지는(gebrochen; frangi) 것을 내가 눈으로 보는 것처럼 확실히 ...”(HC 75문답). 빵을 뗀다는 표현은 칼빈의 제네바 요리문답에도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번역 출판된 베자의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베자가 1559년에 출판한 Confession de la foy chrestienne를 올레비아누스가 번역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빵의 떼어진 것이 우리 눈앞에서 놓이는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몸이 죽음의 고난을 통해 찢기어진 것과 같다. 포도주를 따름은 그의 피가 흘려진 것이다. 우리에게 빵과 포도주를 건네주는 사역자는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대신이다. 우리가 빵과 포도주를 취하여 먹고 마시는 것은 우리 몸과 영혼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갖는다는 우리 마음의 하나의 증거요 인이다.
위에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에서 나오는 몇 가지 표현들을 만나게 된다. ‘빵의 떼어진 것’, ‘우리 눈앞에서’, 또 빵과 포도주를 건네주는 사역자의 등장(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에 의하면, “사역자의 손으로부터 받는”[ausz der hand des dieners empfange]) 등 이다. 이렇게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에 베자의 신앙고백서의 번역문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이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빵을 뗌(fractio panis)에 대하여 좀 더 고찰하도록 하자. 이십년 후에 베른에서 편원모양(oblaten)의 사용 대신에 빵을 떼는 것으로 바꾸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한 적이 있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팔츠교회에서 편원모양 대신 빵을 떼어서 사용하는 방식으로 변화시키려는 시도도 쉽지 만은 않았다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토마스 에라스투스가 1562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빵을 떼는 것이 시작된 이후 빵을 떼는 것을 변호하기 위해 책을 내놓았다. 여기서 그는 고린도전서 10장 16절을 인용하면서 ‘빵’이 ‘떼어진 빵’으로 기록되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는 1563년 하이델베르크에서 “우리 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만찬의 고귀한 성례에서 왜 빵이 떼어지는 것 없이 행해져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몇 가지 이유들의 해설”(Erzelung Etlicher ursachen, warumb das hochwirdig Sacrament des Nachtmals unsers Herrn und Heylandts Jhesu Christi, nicht solle ohne das brodbrechen gehalten werden)을 출판했다. 여기서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행하셨고, 그의 제자들이 분명하게 그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죽음의 그 괴롭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묘사하시고 우리 눈앞에 두셔서, 이것으로 우리 죄가 얼마나 무겁고 큰지를 가르치신다. 셋째,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통해 머리가 그리스도인 한 몸이 되며, 그렇기 때문에 한 몸의 지체로서 서로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성령께서 권고하시고 기억하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6. 우르시누스의 Catechesis Minor와 Catechesis Maior
하이델베르크가 개혁신학으로 노선을 정한 후 루터주의 교수들을 대신해서 개혁신학자들이 왔다. 이 때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의 작성에 중심적 역할을 한 인물이 오게 되는데,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 1534-1583)이다.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태어나 비텐베르크에서 멜랑흐톤에게서 배웠으며, 1557년과 1558년 바젤, 취리히, 제네바 등을 방문하면서 개혁신학자들을 만났다. 고향 브레슬라우에서 교사로 활동하다가 하이델베르크로 왔다. 하이델베르크와 팔츠에 개혁신학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은 특히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의 공로가 크다. 이 둘은 프리드리히 3세에게 큰 힘이었다.
우르시누스는 하이델베르크로 와서 두 개의 요리문답서를 작성했다. 소요리문답(Catechesis Minor)이라 불리는 기독교기초요리문답서(Catechesis, hoc est, rudimenta religionis christianae)를 1562년 초나 그전에 작성했다. 비슷한 시기 대요리문답(Catechesis maior)이라 불리는 신학요목문답서(Catechesis, summa Theologiae)를 작성했다.
소요리문답서는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와 아주 유사하기 때문에 요리문답 작성 위원회의 초안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대요리문답서는 작성 위원회의 초안은 아닐지라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르시누스가 작성에서 가장 핵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에, 우르시누스를 거쳐 어떻게 최종적으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에 성만찬론이 정착되는지 성만찬의 정의를 중심으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로 오기 전 1559년에 그가 작성한 정의와 Maior와 Minor의 정의를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와 함께 비교한다.
Theses(1559): 주의 만찬은 복음에서 세워진 것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들을 기억하면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것이다. 그것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참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신자들에게 함께 하고, 자신이 그들과 자기의 몸과 피를 교통하고 있다는 것, 즉 자기의 은총을 적용한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자신에게 심겨진 우리들을 자기의 지체로 만들기 위해서 인간 본성을 취했고 우리를 그의 피로 씻겼다는 것을 증거한다. 동시에 자신이 신자들 안에 이후로도 있기를 원하시고 영원한 아버지의 로고스인 자신이 신자들을 살리고 다스린다는 것을 가르치신다는 것을 증거한다.(Coena Domini est instituta in Evangelio panis et vini distributio cum beneficiorum Christi commemoratione, in qua sumptione Filius Dei vere et substantialiter adest credentibus ac testatur se his communicare corpus et sanguinem suum, id est applicare sua beneficia et se assumsisse humanam naturam, ut nos quoque sibi insertos fide membra sua faciat et nos ablutos esse sanguine suo, simul etiam testatur se velle in credentibus deinceps esse et se cum sit λόγος aeterni Patris, docere, vivificare et regere credentes.)
Maior 293: 그리스도를 기억하기 위해 행해지는 것이고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신자들의 회중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고 받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확실하게 신자들, 즉 이 빵과 이 포도주를 취하는 자들에게, 세례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영원히 유효하도록 자기의 몸과 피를 영생을 위하여 교통한다는 것을 자신이 이 표로 증거한다.(Est distributio et sumtio panis et vini in congregatione fidelium, facta ad recordationem Christi, instituta a Christo, ut ipse hoc signo testetur, se certissime fidelibus, hunc panem et hoc vinum sumentibus, corpus et sanguinem suum ad vitam aeternam communicare, ut foedus in baptismo cum Deo initum, perpetuo illis ratum sit.)
Minor 64: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그의 죽음을 전하는 것과 함께, 주님의 빵을 떼어서 먹는 것과 그의 잔을 신자들의 공동체에 배분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이는 보증과 공적 증거로서, 참 믿음 안에서 이것을 행하는 우리 모두를 권하며 확증하기를, 우리가 영생의 참 양식과 음료를 먹고 마시듯이 그의 몸은 다른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각자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찢기셨으며 그의 피가 흘렀다고 한다. 그리고 오직 그 안에서만 생명을 찾아야 하고, 그의 지체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고, 서로 사랑할 책임을 갖도록 한다.(Est fractio et manducatio panis Domini, et calicis eius distributio in coetu fidelium, cum annunciatione mortis eius, a Christo instituta, ut ea tanquam visibili pignore et publico testimonio, omnes nos, quotquot in vera fide hoc facimus, admoneat et confirmet, corpus suum non pro aliis tantum, sed pro nobis etiam singulis in cruce fractum, et sanguinem suum effusum esse, et a nobis tanquam verum aeternae vitae cibum et potum manducari et bibi: utque nos vicissim ad vitam in ipso solo quaerendam, et veluti membra ipsius decet, vivendum, ac nos mutuo diligendos obligemur.)
그리스도께서는 나와 모든 신자들에게 그를 기념하여 이 뗀 떡에서 먹고 이 잔에서 마시라고 명령하셨고 또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첫째, 주님의 떡이 나를 위해 떼어지고 잔이 나에게 나누어지는 것을 내가 눈으로 보는 것처럼 확실히, 그의 몸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되었고 찢기셨으며 그의 피가 나를 위해 흘렀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확실한 표로서 내게 주어지는 주님의 떡과 잔을 내가 목사의 손에서 받아 맛보는 것처럼 확실히,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그의 몸과 흘린 피로써 나의 영혼을 영생을 위하여 먹이시고 마시우실 것입니다.(Also, daß Christus mir und allen Gläubigen von diesem gebrochenen Brot zu essen und von diesem Kelch zu trinken befohlen hat zu seinem Gedächtnis, und dabei verheißen : Erstlich , daß sein Leib so gewiß für mich am Kreuz geopfert und gebrochen und sein Blut für mich vergossen sei, so gewiß ich mit Augen sehe, daß das Brot des Herrn mir gebrochen und der Kelch mir mitgeteilt wird ; und zu mandern , daß er selbst meine Seele mit seinem gekreuzigten Leib und vergossenen Blut so gewiß zum ewigen Leben speise und tränke, als ich aus der Hand des Dieners empfange und leiblich genieße das Brot und den Kelch des Herrn, welche mir als gewisse Wahrzeichen des Leibes und Bluts Christi gegeben werden.)
위 내용을 비교하여서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가 제정하셨다(instituta)는 부분이 공통적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 부분은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68문에서 논의되었으므로, 성만찬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75문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둘째, 기억 혹은 기념에 대한 것은 Theses와 Maior는 언급하나 Minor는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에 Minor에는 ‘그의 죽음을 전하는 것’을 추가한다. 우르시누스가 여기에는 ‘기념’이라는 표현을 넣지 않았다. 즉,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에 가까이 갈수록 취리히의 영향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취리히의 영향이 직접으로 나타나 보인다고 생각했을 수 있고 논란의 여지를 감춘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75문답에는 기념이 성례에 대한 해석의 방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기념하라고 명령하셨다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셋째, 빵을 떼는 것이 Minor에 나타난다. Maior에서는 297문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 표현은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에 들어간다. 계속해서 예식의 형식과 관련해서 빵과 포도주의 배분(distributio, Theses), 배분과 받음(distributio et sumtio, Maior), 빵을 떼어서 먹고(fractio et manducatio, Minor) 잔을 배분(distributio, Minor)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이런 표현이 하이델베르크 75문답에도 등장하여서, 뗀 빵으로부터 먹고(von diesem gebrochnen brod zu essen), 잔에서 마신다(von diesem kelch zu trincken)는 표현을 취한다. 라틴어역에서는 잔의 배분(distributio)에서 마신다는 표현을 한다.
넷째, “vere et substantialiter adest”라는 표현은 하이델베르크에서 작성한 요리문답서(Maior, Minor)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즉,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에 가까이 가면서 논란이 되는 용어를 피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에도 이 용어는 당연히 들어가지 않는다.
다섯째, 약속에 대한 것을 비교해보자. Theses, Maior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의 만찬으로 ‘증거하신다’(testatur)는 표현을 사용하나, Minor에서 ‘권하며 확증한다’(admoneat et confirmet)를 사용한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에서 ‘약속하셨다’는 표현을 쓴다(verheissen; addita hac promissione). 이 약속의 내용이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75문답에 두 가지이다. 첫째, 그의 몸이 나를 위해 희생당하고 찢기셨고, 그의 피가 나를 위해 흘렀다는 것이다. 둘째, 주께서 영생을 위하여 나를 먹이시고 마시우실 것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는 과거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우르시누스가 멜랑흐톤의 영향을 받아 작성한 Theses에 나타난다.
즉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에서 멜랑흐톤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에서 이 약속의 내용이 묘사되는 방식은 Minor(우리 몸이 먹고 마시듯이 ... 그의 몸이 찢기시고 그의 피가 흘렀다)와 가깝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에서 성만찬 예식의 표가 단순히 떡과 잔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목사에 의해 떼어지고 나누어지고 신자가 받고 맛보는 전체 예식에 있는데, 감각으로는 수동적 시각(떼어지고 나누어지는 것을 본다)과 적극적 촉각과 미각(받아 맛본다)이 사용된다. 즉, 떡이 떼어져서 내게 주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그 몸을 찢기신 과거로 이끌며, 받아 맛보는 것은 먹이시고 마시게 하며 나를 이끄시는 미래를 보게 한다.
7. 결론
지금까지 하이델베르크가 성만찬론에 대해 어떤 경험들을 했는지 살펴보았다. 위에서 살핀 경험들을 통해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는 개혁주의 입장을 잘 드러내면서도 문장과 운율에 있어서 아름다운 요리문답을 갖게 되었다.
위에서 살핀 내용들을 정리하면 먼저 오트하인리히의 시대에 루터주의와 긴장이 드러났고, 프리드리히 3세의 시대에 개혁주의적인 성만찬론을 채택했다. 우리가 살핀 클레비츠에 의한 초기 논쟁 때 이미 이중적 먹음(duplex manducatio)의 구도가 이미 드러났고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도 이 병렬적 구도를 받아들였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멜랑흐톤이 보낸 판단문은 하이델베르크 개혁주의자들을 응원했는데, 그는 이 판단문에서 ‘실체적으로’(substantialiter)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멜랑흐톤 덕분에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는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아가 하이델베르크는 아욱스부르그 종교평화안에 머물기 위에서 아욱스부르그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여야 했는데, 오해의 소지가 적은 변경판을 택했다. 성만찬 예식의 집례에 있어서 하이델베르크 개혁신학자들은 떡을 떼는 것(fractio panis)을 위해 변증했다. 그리고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는 떡을 뗀다는 분명한 표현을 했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 작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우르시누스의 중요한 문서도 우리는 살폈는데, 거기서 개혁주의적 입장이 분명히 드러나면서도 멜랑흐톤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에서 우리는 츠빙글리, 불링거, 멜랑흐톤, 칼빈, 베자 등의 개혁신학자들의 영향을 모두 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이델베르크는 당시 개혁교회가 받아들였던 공통된 입장을 잘 조합하여서 문답서를 작성했다는 것이다. 만일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가 개혁주의적 입장을 어느 정도 포기했거나, 아니면 개혁신학자 중 어느 한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했다면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서가 개혁교회의 고백서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문답서가 하이델베르크에만 머물지 않고 전체 독일에 세력을 확장하고, 네덜란드에 받아들여졌고, 나중에 전 유럽에 확산되었다는 것은 하이델베르크가 개혁교회의 공통된 입장을 잘 드러냈다는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