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울산 부자들이 한 순간 부자가 되어 재산을 오랫동안 간직하지 못하고 사라진데 반해 사일 서부자는 지금까지 조상의 재산을 지키고 있는 뿌리 깊은 부자다.
또 울산의 다른 부자들과 달리 270여년 전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사일 마을에 지은 집을 지금까지 장손들이 지키고 있다. 따라서 울산에서는 아직 완벽하게 옛 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집이 이 집이다.
▲ 울산시 울주군 범서읍 사연리 사일마일 서부자는 울산의 다른 부자들과 달리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해 지금까지 재산을 잘 지키고 있고 또 종택 역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사진은 사연리 서씨고가 모습.
망조당(望潮堂) 서인충(徐仁忠) 장군은 달성(達城) 서씨(徐氏)로 임진왜란 때 신야, 전탄, 기장, 아리포 등 울산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선무원종일등공신에 녹훈되었다. 서 장군은 관(寬), 용(容), 정(定), 안(安) 등 아들 4명을 두었는데 이중 세 번째 아들 정이 사일 서씨의 중시조다.
그런데 정의 증손 달원(達元)이 난곡과 사일 마을로 들어와 서씨 집성촌을 이뤘다. 달원씨는 현재 사일 집을 지키고 있는 만교(敎)씨의 9대 조가 된다.
사일 서부자가 울산의 다른 부자들에 비해 재산을 지금까지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은 철저한 장자 상속에 있었다. 일반 부자들의 경우 많은 재산을 자식들에게 나누어 상속하다보면 몇 대 가지 않아 재산이 쉽게 없어진다는 것을 알았던 서씨 집안은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했고 후손들이 이를 철저히 지켰다.
이 집안의 또 다른 특징은 자손대대로 며느리들이 첫 자식으로 아들을 낳아 대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른 부자들의 경우 세월이 흐르다 보면 아들을 낳지 못해 소실을 얻을 때가 많았고 때로는 양자를 두기도 했는데 이 집안은 지금까지 대가 끊겨 소실을 얻거나 양자를 두는 일이 없었다.
이 집안의 재산이 제일 번창했던 때는 이 집안에서 계명 할아버지로 불리는 만교씨의 6대 조 조병(肇秉)씨 때다. 이 때 재산이 3000석 정도로 당시 사일은 물론이고 언양과 삼남에도 논이 많았는데 이중 일부 산이 아직 삼남에 있다.
재산을 많이 모았던 조병씨는 관직도 가졌다. 이 어른이 가진 공식 관직이 김해부사로 후손들이 아직 조병씨가 받은 교지를 갖고 있다. 교지에는 당시 탁지부대신이었던 어윤중의 도장이 찍혀 있다.
어윤중은 고종 때 탁지부 대신을 지냈는데 당시 일본을 돌아보고 온 후 개화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적극 주장하다가 아관파천이 일어났을 때 친일파로 몰려 피살되었다. 그런데 계명 할아버지는 교지만 받았지 실제로 부사로 부임은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김해로 가는 도중 모친이 돌아가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와 3년 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대신 3년 상이 끝난 후 받은 관직이 가감역(假監役)이다. 감역은 지방정부가 벌이는 토목과 건축 사업을 감시하는 벼슬로 당시로서는 고위직이었다. 그런데 감역 앞에 ‘假(거짓 가)’자가 하나 더 붙은 것은 벼슬을 늘이기 위해서다.
조선 조 말기가 되면 조정에서 국고를 채우기 위해 벼슬자리를 만들어 지방 유지들에게 팔게 되는데 지방 부자들 중에는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 이 벼슬을 사기도 하고 또 조정에서 지방 유지들에게 강매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감역 벼슬이 모두 팔리다 보니 더 팔아먹을 벼슬이 없어지자 조정은 감역 앞에 ‘假’자를 붙여 이 자리를 또 팔아먹은 것이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이처럼 부패한 조정을 비난하는 매천 선생의 글이 많이 실려 있다. 경술국치 후 일본 제국이 경술국치를 합리화 시키는 방안으로 “조선에는 매관매직만 있었을 뿐 정치라는 것이 없었다”고 표현 한 것은 이런 엉터리 정치를 당시 우리 선조들이 했기 때문이다.
만교씨의 고조부 응규(應圭)씨는 부모들로부터 물려 받은 재산으로 유유자적하면서 한량으로 살았지만 유교 가풍을 철저히 지켰다. 응규씨는 말타기와 사냥을 좋아해 사연 마을에 살면서 자주 울산 읍내로 나들이를 나오기도 했는데 평소 인정이 많아 주위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왔다.
응규씨는 당시 대부분의 부자들이 자식들을 일본에 유학을 보낸데 반해 오히려 일본 유학을 적극 반대 했던 인물이다. 당시 울산 부자였던 김홍조씨가 일본으로 보낼 유학생을 울산에서 3명 선발했는데 이 명단 속에 그의 장남 석기(錫麒)씨가 들어 있었고 석기씨 역시 이에 응해 유학 갈 준비를 했다. 그러자 응규씨는 “상놈 나라에 가서 배울 것이 무엇이 있느냐”면서 사흘을 단식하는 바람에 아들 석기씨가 유학의 꿈을 접어야 했다.
유학 대신 신농법에 몰두했던 석기씨가 시작한 사업이 인삼재배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인삼 재배는 개성에서만 가능했던 희귀 농업이 되어 울산에서 인삼을 재배한다는 자체가 힘들었다.
그러나 석기씨는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인삼재배법을 배우기 위해 개성으로 갔다. 개성으로 갈 때 그는 삼남지방의 논을 많이 팔아 그 돈을 포대에 넣어 기차를 타고 갔다. 그런데 개성으로 가는 동안 이 포대를 열차 안에서 잃어버리는 바람에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인삼 재배에 대한 그의 집념은 끈질겨 이후 그는 다시 개성으로 가 많은 돈을 주고 인삼 재배법을 배운 후 인삼씨를 사와 사일 마을 인근에 심었다. 그런데 기온 차로 인삼이 잘 자라지 않아 상품으로 팔수가 없었다. 대신 아직 덜 자란 인삼 뿌리를 캐내어 삶은 후 가족들이 모두 마셔야 했다.
현재 사일 마을에 남아 있는 고가는 처음부터 크게 지은 것이 아니었다. 조선 정조 때 처음 지은 것으로 알려진 이 집은 이후 후손들이 한 채 한 채 증축한 결과 요즘처럼 큰 집이 되었다.
집은 정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본채가 있고 그 앞에 사랑채가 있다. 7칸의 본채는 건축한지 300여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 옛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대신 각종 희귀식물이 많이 심어져 있는 사랑채는 손질을 많이했다.
이 집의 특징은 집 입구에 연못이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연못은 집안에 있기 마련인데 이 집은 연못이 대문 밖에 있다. 연못이 집 밖에 있는 것은 이 연못이 서씨 집안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를 화마로부터 방지할 수 있다는 풍수지리에 따른 것이다. 이 때문인지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사일 인근 마을 집들이 빨치산들에 의해 모두 소실되었는데도 사일 마을과 이 집은 건재했다.
이 연못에서 여름에는 아름다운 연꽃을 볼 수 있다. 요즘은 울산에 인공적으로 못을 파고 연을 심어 재배하는 연못이 많다. 그러나 10여년 전 만해도 울산 주위에서 연꽃을 보는 것이 쉽지 않아 이 연못에 피는 연꽃을 구경하기 위해 이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집안에 피는 모란도 유명하다. 옛날 이 집 마당에는 디딜방아가 있었다. 그런데 이 디딜방아 옆에 기품 있는 모란이 많이 자랐다. 따라서 한때는 울산문인들이 여름날 이 마당에서 모란 축제를 지내자는 안을 내어 놓기도 했다.
만교씨의 부친인 상연(相演)씨는 학업을 위해 잠시 울산을 떠난 것을 제외하고는 울산에서 계속 살았던 향토 시인으로 울산과 연관된 시를 많이 썼다. 따라서 그가 이 집을 지키고 있을 때는 전국에서 유명 문인들이 자주 찾았다. 이 집을 찾은 문인들 중에는 울산 출신의 오영수씨는 물론이고 경주 출신의 김동리와 그의 부인 손소희 여사 그리고 진주 출신의 파성 설창수씨가 있다. 또 우리들에게는 <보리밭>의 작사자로 알려진 박화목 선생도 이 집을 다녀갔고 한국 펜클럽회장을 지냈던 성기조씨도 이 집을 찾았다.
상연씨의 호는 휘정(暉亭)인데 이 호는 설창수 선생이 지어 주었다. 또 사랑채에는 ‘청아당’(淸雅堂)이라는 당호가 마루위에 붙어 있는데 이 당호는 이 집을 자주 찾았던 김동리 선생이 썼다.
2000년대 중반 경상일보 논설실장을 지내기도 했던 상연씨의 시에는 울산을 노래하는 글귀가 많다. 특히 그가 말년에 썼던 ‘그리운 울산’에는 울산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듬뿍 담겨 있는데 이 시가 아직 울산 중구청 3층 통로에 걸려 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 집에서 태화강 너머 남쪽으로 보면 문수산 정상이 문필봉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 때문인지 이 집안에서는 상연씨 외에도 인물들이 많이 났다. 울산 MBC 보도국장을 지냈던 상용(相瑢)씨가 상연씨의 동생이다. 또 부산으로 가 해운대 구청장을 지냈던 석인(碩寅)씨와 그의 아들 병수(秉洙)씨도 이 집안이다. 병수씨는 아버지를 따라 해운대 구청장을 지낸 후 새누리당 4선의원이 되어 지난주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또 올해 울산경찰청 차장으로 와 4개월 동안 울산에서 일한 후 부산경찰청으로 간 범수(範洙)씨가 병수씨의 친 동생이다.
울산문화원장을 지냈고 현재 달성 서씨 대문중 총회장으로 있는 서진길씨와 울산발전연구원 원장을 지냈던 서근태 역시 갈래가 다르지만 서인충 장군의 장남 관(寬)의 후손이 되어 모두 가까운 집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