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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의 현안, 특히 경제 및 정치와 관련한 사회 문제들에 관하여 천주교 교종 프란치스코가 그동안 발언한 내용들을 언론인 미켈레 찬추기가 편집하여 펴낸 [돈과 권력(Potere e Denaro)](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펴냄)을 일곱 차례에 걸쳐 요약합니다.
빈부 격차와 환경의 파괴 등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민감한 현안들에 대하여는 그동안 천주교 교종들이 <교종 회칙>이라는 문서를 통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개선 방향을 제시하는 등 적극적으로 발언해 왔으며, 특히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 점에 있어서 훨씬 강도높은 내용의 발언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 책 [돈과 권력(Potere e Denaro)]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종의 제안들을 정리한 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7.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만남의 문화
형제들이 심지어 때로는 원수로 나타나고 때로는 두려움을 자아내는 겉모습에 가려져 있더라도 그들을 만나라고 당부합니다. ‘버리는 문화(cultura dello scarto)’와 정반대인 ‘만남의 문화(cultura dell’incontro)’는 인류 가족이 나아가야 하는 유일한 방도입니다. 이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초월의 지평 안에서 살아가는 문화입니다.
그저 보는 것만이 아니라 눈여겨보고, 그저 듣는 것만이 아니라 귀담아들으며, 사람들을 그저 스쳐 가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멈추어서야 합니다. “불쌍하여라, 가난한 사람들!”하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연민으로 기꺼이 그들을 보듬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어루만지고 그에게 “울지 마십시오.”하고 말하며 생기를 북돋우는 작은 성의를 전해 주어야 합니다.
상황을 바꾸려면 다수로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세력을 키울 필요도 없습니다. 도시나 지역, 온 인류의 생활을 바꾸려고 다수가 되어야 할필요가 없습니다. 간을 맞추고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하려면 소금과누룩이 변질되지 않은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선의의 사람들, 의인들이 그러합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선의의 사람들을 북돋워 주는 행동 원칙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소금은 단지 양을 늘린다고 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소금은 빵을 먹을 수 없게 만듭니다. 소금은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제 성질을 보존할 때 제맛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개인, 당파, 운동,민족 심지어 교회조차도 수를 불려서 자신과 세상을 지키려는 생각으로 권력 구조를 만들고 자리를 차지하느라,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짬을 낼 틈도 없습니다. 다만 소금과 누룩이 되는 것만으로 우리의 경제와 정치를 구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소금은 제맛을 잃고 누룩은 효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인간적인 경제의 바탕이 되는 일치와 나눔과 친교의 행동 원칙을 잃지 않으려면, 지난 시절 농부의 표상이 유용할 수 있습니다. 냉장고가 없던 때에는, 누룩 씨앗을 보존하려고 이웃집에 나누어주고, 새로운 빵을 구워야 할 때 그것을 나누어주었던 이웃에게서, 또는 다른 이웃에게서 거저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호성입니다. 친교는 재화를 나누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재화를 늘리는 것이기도 하며, 새로운 빵과 새로운 재화 또는 ‘새로운 선’을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사랑은 자신을 내어 줄 때만 끊임없이 풍성한 열매를 맺고 생명을 낳습니다. 상상이 아니라 직접 사랑을 할 때에만 사랑이 활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신경 쓴다면 사랑은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는 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만약 자신을 내어주는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돈은 구원이 아니라 단죄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경제, 가난한 이들,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존경과 겸손의 형제애와 삶의 희망입니다. 돈은 그 다음입니다.
가정 안에서
만남의 문화를 가장 먼저 배우는 곳은 가정입니다. 우리는 ‘사회로나가기’에 앞서 가정에서 사회성을 경험합니다. 가정을 중시하는 사회는 개인주의나 집단주의 경향에 맞서는 가장 좋은 보루입니다. 가정 안에서 개인은 언제나 수단이 아닌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가정과 경제생활이 이루는 관계는 사회의 핵심이 됩니다. ‘경제eco-nomia’라는 말은 그리스어 oiko-nomia, 곧 집의 관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디 가사 노동에서 생겨난 말이라는 사실을 되새겨봐야 합니다. 집은 많은 지역에서 예전부터 지금까지도 생산의 단위, 삶의 중심지가 되어 왔으므로, 가정은 국가 경제생활의 중요한 주역으로 여겨져야 하며, 시장 논리가 아니라 세대 간의 나눔과 연대의 논리를 따라야 합니다.
이처럼 가정이 사회에 기여하기 때문에, 시민과 국가 제도는 가정이 모든 다른 공동체보다 우위성을 지닌다는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 전체와 경제도 가정의 차원을 바탕으로 하여 그 핵심적인 문화적 정치적 전망을 정립해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애와 정의와 충실성
하느님은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카인이 모른다고 대답하자 하느님은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울부짖고 있다.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개개인이 책임지고 돌보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유지해야 하는 임무를 소홀히 할 때, 자기 자신, 다른 이, 하느님, 땅과 맺은 내적 관계가 얼마나 파괴되는지를 명백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우리 자신의 삶과 자연과 맺는 관계를 올바로 돌보는 것은 형제애, 정의, 다른 이에 대한 충실함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구를 하나의 조국으로 인식하고, 인류를 공동의 집에 사는 한 민족으로 이해하는 흐름이 20C 중반부터 형성되었습니다. 상호 의존성은 우리가 하나의 세상, 공동의 계획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는 ‘인간과 세상uomo-mondo’이 하나로 살아가는 세상, 곧 온 인류를 돌보는 개개인이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상호 의존성은 인류 가족의 유대를 강화하고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며, 인류의 일치를 보이는 새로운 모델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돌봄의 문화와 사랑의 문명
우리 지구가 황폐해지고 지구에 사는 인류가 자기 파괴적 악행에 빠져드는 것을 피하려면, 오늘날 돌봄의 문화가 그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 다른 이들, 공동선, 함께하는 삶에 대한 돌봄의 문화를 자기 자신 안에 간직하고 키워나가는 것은, 공존과 친교의 역량을 증진하면서 자신의 생활 양식을 바꾸는 일로 이어집니다.
형제애는 거저 주는 것이어야 하기에, 결코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나 앞으로 해 줄 것을 기대하고 주는 선금과 같은 것이 돼서는 안 됩니다. 형제자매가 된다는 말은 지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임을, 이 사회를 함께 이끌어가는 것임을 다시금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우리가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고 환경을 존중하며 이민을 환대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돌봄의 문화, 생명의 참다운 생태 문화는 폭력, 착취, 분노, 이기주의의 논리를 타파하는 일상의 작은 몸짓들로 이루어집니다. 광란의 소비문화를 야기하며 다른 이들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는 그러한 문화와는 정반대의 문화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길’은 ‘큰 길’이기도 합니다. 서로를 돌보는 작은 몸짓으로 가득한 사랑은 사회적 사랑이 되며,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모든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사회적 사랑이 되는 개인의 사랑은 모든 참다운 발전, 덧없는 것이 아닌 모든 진보를 위한 열쇠입니다. 개인적 일상의 작은 몸짓과 함께 사회적 사랑은 우리를 이끌어, 우리가 불의와 불평등, 착취와 부패, 환경 훼손을 효과적으로 막고 돌봄의 문화가 온 사회에 개인 차원으로든 전체 차원으로든 스며들도록 하는 위대한 전략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국제기구
오늘날 초국적 경제와 금융이, 경제의 윤리적 차원을 활성화시키는 기술인 정치를 지배하는 경향은, 지구 온난화 저지와 국제적 빈곤 퇴치라는 중요한 목적마저도 달성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에 따른 참담한 결과로는 국제협력기금의 급격한 감소를 들 수 있는데, 이 기금들은 과도한 이윤 추구, 국가적 야심, 정치적 지배욕, 가난한 나라들에 비인간적 이념을 강요하는 부유한 나라들의 시도를 조금이나마 제어하는 데에 기여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더욱 강력하고 효과적인 국제기구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국제기구들이 지니는 권위는, 국가 정부들이 합의하여 공정하게 위임하고 제재권을 부여한 데에 따른 것입니다. 온 세상의 정치 경제생활의 발전을 이루려면, 국제 정치는 언제나 더욱 협력하는 방안을 채택하고 정치적 적개심과 국제기구들을 조종하려는 의도를 내려놓으며 평화와 발전의 목표를 향할 의무가 있습니다.
세계 경제를 관리하고 위기에 처한 경제를 되살리는 것, 현재의 위기가 악화되어 불균형이 심화되지 않는 것, 전체적이고 시의적절한 군비 축소와 식량 안정과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 환경을 보호하는 것, 이민을 규제하는 것, 이 모든 것을 위해서는 참된 세계적 정치 권위가 시급히 필요합니다.
세계공동체의 공권력은 세계의 공동선이 제기하는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문화적 내용들을 검토하고 해결해야 할 임무를 지니는데, 여기에서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국경을 넘어 벌어지는 매우 심각한 문제들을 초국가적으로 치유하고 예방하는 전략을 바로 외교를 통해서 증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민족들과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균형과 평등의 조건이 국제 공동체의 참된 발전을 위한 전제조건임을 유념할 때, 어떤 나라들이 다른 나라들에 종속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정치가 경제에 종속되거나 경제가 효율 중심의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과 법칙에 종속되지 말아야 합니다. 공동선을 고려하면서, 정치와 경제는 반드시 서로 대화를 나누며 생명, 특히 인간 생명에 확고히 봉사해야만 합니다.
실체 없는 자본의 잘못으로 초래된 금융위기에 대한 부담을 백성들에게 전가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 은행구제는, 체제전반을 재검토하고 개혁하려는 확고한 결의가 없는 한, 금융의 절대적 지배만 재확인시켜 줄 뿐입니다. 미래가 없는 금융은, 장기간에 걸쳐 많은 비용을 치러도 표면적으로만 회복될 뿐 결국 새로운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금융거품은 실제로 생산거품이기도 합니다. 결정적으로, 사람들은 실물경제의 문제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습니다. 투기와 불로소득을 장려하는 대신에, 생산의 다각화와 증진, 기업들의 원활한 기능, 중소기업의 발전과 일자리 창출을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정치의 역할
정치의 자리는 보조성의 원리를 명심해야 합니다.* 이는 모든 수준에서 각자 능력을 발전시킬 자유를 보장하면서 동시에 더많은 권력을 지닌 이들이 공동선을 위하여 더 큰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보조성의 원리는 다양한 권력 남용에서 개인을 보호하는 한편,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향한 지원과 연대의 행동을 촉구합니다. 보조성은 연대활동이 복지주의assistenzialismo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오늘날 일부 경제부문이 정치부문보다 더많은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치가 결여된 경제는 위기를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논리를 증진할 수 없습니다.
환경에 대한 참다운 배려가 없는 논리는 사회의 가장 힘없는 이들의 통합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성공 모델에서는 뒤처지거나 힘없는 이들, 능력이 모자란 이들이 삶의 길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투자하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폭넓은 시각으로 생각하는 정치, 위기의 다양한 측면들을 고려하고자 대화에 힘쓰는 학자들과 활동가들을 포함하며 통합적인 접근법을 문제들에 적용하는 정치가 필요합니다.
또한 정치가 올바른 공공정책의 부재와 부패 때문에 불신을 받는다면 책임져야 합니다. 한 지역 국가가 본분을 다하지 못하면, 일부 경제 집단이 후원자를 자처하며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고, 스스로 공동 규범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조직범죄, 인신매매, 마약매매, 폭력과 같은 근절하기 어려운 모든 범죄를 일으키기에 이릅니다.
따라서 실질적 변화를 위한 전략에는 세계화된 경제와 정치 과정 전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소비문화와 버리는 문화의 논리를 문제 삼지 않고 부분적이고 피상적인 고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정치는 이러한 과제를 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정치와 경제가 빈곤과 환경 훼손과 같은 중대한 문제들을 풀지 못한 데 대하여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공동선을 지향하는 상호 작용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한쪽은 경제적 수익만을 추구하고 다른 한쪽은 권력의 유지나 확대에만 집착한다면, 결국 남은 것은 전쟁이든지 아니면 환경 보호와 가장 힘없는 이들을 돌보는 일에는 전혀 관심을 쏟지 않고 정치와 경제가 맺는 불순한 협약뿐입니다. “일치는 갈등보다 우월합니다.” “위대한 정치는 사람들이 복음적 제안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죽음의 구조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병든 체제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존엄을 빼앗긴 이들에게 존엄을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용기와 지성과 끈기가 필요합니다. 다만 맹신이나 폭력이 아닌 열정을 지녀야 합니다. 가장 심각한 갈등일지라도 그 안에 빠져 있지 말고 맞서 싸우며, 더욱 깊은 일치와 평화와 정의를 이루고자 언제나 창의력과 자비로 긴장 관계를 해결하는 데에 힘써야 합니다. 변방에서 나오는 변화의 신호들, 무대 뒤에 있는 사람들의 작은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에게는 평화와 쇄신을 위한 체계적이고 명확한 행동의 척도가 필요합니다. 바로 행복 선언입니다. 우리는 이를 끊임없이 되뇌어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찾아 주었다.” 그러자 우매한 제자들이 묻습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 그런 일들을 했습니까?” 그러자 예수가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장)
불행하여라, 권세가들과 영혼 없는 부자들과 투기꾼들.
행복하여라, 약자들과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들.
*보조성의 원리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모든 상위 질서의 사회는 하위 질서의 사회들에 대하여 도움의 자세(보조성), 따라서 지원과 증진과 발전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회 중간 단체들은 그들 고유의 임무를 다른 상위 단체들에게 부당하게 양도하도록 강요받지 않고 제 임무를 적절히 수행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중간 단체들은 결국 상위 단체들에 흡수되거나 대치되어 고유의 품위와 본연의 위치를 스스로 부인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사회 하위 단체들에 대한 경제적 제도적 사법적 지원이라는 적극적 의미로 이해되는 보조성은, 그에 상응하여, 사회를 구성하는 더 작은 기본 세포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사실상 제한하는 모든 행위를 중단하도록 국가에 요구하는 소극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간추린 사회교리』 186항 참조.
** “보조성이 결여된 연대는 ‘복지주의assistenzialismo’로 쉽게 변질될 위험이 있는 한편, 연대가 결여된 보조성은 이기적인 지역주의 행태들을 부추길 위험이 있다.” 『간추린 사회교리』 351항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