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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와 브랜드의 특별한 만남
우리가 흔히 아라비아 숫자(상용 숫자)라고 하는 0에서 9까지의 기호는 인도에서 처음 발명되어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이 10가지 숫자의 발명은 수학, 과학의 엄청난 발전을 일으켰다. 숫자는 전세계의 공통언어이기도 하지만 나라와 문화권에 따라 각각의 다른 상징성을 지니기도 한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숫자 ‘3’,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 ‘8’, 기독교 문화권에서 사탄을 상징하는 ‘6’, 한자 문화권에서 ‘죽을 死’와 유사한 발음 때문에 죽음을 상징하는 ‘4’, 행운의 숫자로 불리는 ‘7’등 이 그런 예이다.
이러한 10가지 숫자와 그 조합들은 ‘디지털 시대’를 맞이함으로써 가감승제의 원리로 계산되는 본질적인 용도를 떠나 브랜드의 한 요소, 혹은 브랜드 그 자체로서 제조업자 또는 판매업자가 부여한 상징성으로 재탄생 되고 있다.
상표법 상으로도 2자리 이하의 숫자, ‘123’과 같은 연결형, 너무 간단해 식별력이 없는 숫자가 아니라면 숫자만으로도 상표등록을 받을 수 있으니 ‘숫자’는 더 이상 단순한 기호가 아닌 ‘브랜드’로서의 자격을 가진 셈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시대적 흐름과 트렌드에 맞추어 숫자를 활용한 브랜드들이 성장하고 다양하게 변해왔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제품의 등급 혹은 속성, 성분을 표시하는 단순 식별로의 숫자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숫자를 활용하는 것은 등급, 버전, 속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자동차 시장의 경우 등급과 배기량을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BMW는 세자리 숫자로 차명을 정하는데 첫번째 숫자는 차의 크기를 말하는 것으로 3시리즈(준중형), 5시리즈(중형), 7시리즈(대형)로 정해지며 두번째, 세번째 숫자는 배기량을 의미한다. 차종이 525라면 중형급으로 2천5백cc 엔진을 장착했다는 것이다. 르노삼성자동차의 경우도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어 한동안 BMW와의 마찰이 생기기도 했었다. 한편 현대자동차의 [쏘나타] 시리즈가 I, II, III로 신차를 출시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예를 살펴보면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제품이 업그레이드 될 때도 비슷한 방법을 쓰기도 하고, 캡슐안에 미세입자 수가 약 600개 정도 들어있다고 하여 [콘택600]이라는 브랜드를 사용한 경우도 있다. 이렇듯 숫자가 브랜드로서 역할을 하기 이전에는 제품 구분을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되거나, 제품의 특징을 기호화 한 정도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은 숫자가 브랜드로서 재탄생 되는 데 큰 전환점이 되었다.
디지털 시대와 함께 성장한 숫자브랜드
90년대 중반 ‘삐삐’라고 불리우던 무선 호출기의 전성시대가 열리면서 숫자는 단순히 연락처가 아닌 문자를 대체하는 하나의 언어로 발전했다. 젊은층에게 공동의 암호화 되어 있던 호출기 안의 숫자는 ‘8282(빨리빨리)’, ‘010(응)’, ‘1052(사랑)’, ‘1010235(열열히 사모)’ 등의 구나 문장을 대체하는 수단으로 발전되어 기발한 아이디어를 담은 통신언어가 되었다.
이러한 유행과 맞물려 발음을 차용한 숫자를 적극 활용할 수 있었던 분야가 ‘클로버(080) 서비스’와 ‘전화정보(700) 서비스’이다. 이 서비스들은 각 사업체들이 자신과 연관성 있는 숫자를 선점하기 위해 다양한 숫자 조합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화번호를 이미 다른 업체들이 선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특별할 것도 없는 단 몇 개의 숫자를 어떻게 소비자에게 인식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 자체로는 어떠한 연상도 주지 않지만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4개의 숫자가 있다. ‘칠공공 오사~이오’라는 징글(Jingle)로 널리 알려져 있는 서비스 브랜드 이다. 이 서비스를 공급하는 기업의 사명도 ‘㈜5425’이다. 90년대 중반 무선 호출기의 인사말 서비스와 음악 메시지 서비스가 붐을 일으키고, 최근 몇년간 휴대폰 시장이 급성장 하면서 자신만의 개성 넘치는 휴대폰 벨소리를 갖고 싶어하는 신세대의 열광 속에 컨텐츠 시장은 포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5425]는 독특한 징글의 사용과 재미있는 광고로 젊은층을 넘어 중장년층까지도 멜로디만 듣고도 브랜드를 연상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막대한 비용의 광고비가 투입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치열한 경쟁에서 차별화된 커뮤니케이션 활동은 수많은 전화정보 서비스들을 제치고 소비자의 머릿속에 4개의 숫자를 강하게 인식시킬 수 있었던 대표적인 성공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몇 년 전 011, 016, 018, 019 등 통신서비스 시장의 경쟁이 치열한 때에는 고유번호 앞에 ‘스피드 011’, ‘원샷 018’등의 수식어를 결합함으로써 자사의 서비스 우위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최근의 이러한 숫자 브랜드들은 기호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지를 선호하는 디지털 세대들의 라이프 스타일과 맞물려 그 효과를 더하고 있다.
숫자가 주는 미묘한 매력
한국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커다란 변화를 준 IMF로 경제가 위축되면서 소비자의 꽁꽁 닫힌 지갑을 열기 위해 마케터들은 어느 때보다 깊은 고심을 해야했다. 수많은 회사들이 도산하였고, 소비자들은 점점 가계를 축소시켰다. 이 때를 기점으로 많이 볼 수 있었던 숫자는 ‘9’단위의 숫자였다. 각 업체들은 가격표 5천원’, ‘6만원’의 가격표 대신에 ‘2만 4천 9백원’, ‘5만 9천 9백원’이라는 숫자를 기재하였다. 가격차이는 100원에 불과하지만 소비자가 체감하는 가격의 차이는 100원 이상의 가치를 준다. 딱 맞아 떨어지는 가격보다는 뭔가 좀 더 할인되고 저렴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는 세일즈에서 사용되는 기법이지만 숫자가 갖는 특성을 잘 대변해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술적이고 첨단적인 이미지를 전달하는 컴퓨터에 ‘X90’이라는 숫자를 기재하는 것 보다는 ‘X9900’이라는 숫자를 기재했을 때 좀 더 업그레이드 되고, 첨단적인 이미지를 제품에 담을 수 있다. 이렇듯 숫자는 그 단위가 딱 맞아 떨어지는 것 보다 좀더 세세하고 긴 숫자가 소비자에게 믿음과 전문성을 전달하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숫자로 호기심을 유발하여 브랜드를 각인시켜라
’187168’, ‘533533’, ‘808’이 숫자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187168]은 성장기 청소년을 타겟으로 코카콜라에서 출시한 아미노산과 칼슘이 함유된 음료의 이름이다. 청소년들이 가장 원하는 남자의 키 187cm와 여자의 키 168cm를 의미하는 이 숫자는 생소하고, 낯설지만 이 의미를 알면 쉽게 와 닿는다. 숙취해소 음료인 [여명 808]의 ‘808’이라는 숫자 역시808번째의 실험 끝에 제품화에 성공하였다는 재미있는 사연으로 그 효능과 함께 화제가 되었던 브랜드 이다. 비단 제품 브랜드에서의 숫자뿐 아니라 광고에서 숫자를 활용하여 고객을 유인한 사례도 있다. ‘CJ몰’은 ‘533533’, ‘202020’등의 숫자를 상품 검색창에 입력하면 상황에 맞는 상품을 추천해 준다.
숫자는 조합형태에 따라 첨단적이고 전문적인 제품에 어울리기도 하지만 소비자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또 다른 재미를 준다는 점에서 감성에 소구하는 브랜드에도 사용된다. 패션 브랜
드들이 숫자 활용을 통해 컨셉을 표현하고 차별화를 시도하는 것은 숫자가 갖는 또 다른 매력 때문일 것이다.
흔히 사용하는 ‘1’, ‘24’, ‘365’, ‘100’등의 숫자는 이미 식상하다. 요즘의 소비자들은 뜻이 뻔히 보이는 숫자 브랜드에는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기억해 주지도 않는다. 소비자의 머릿속에 퀘스쳔 마크를 던져 한번 더 상기시킬 수 있는 숫자 브랜드만이 인구에 회자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차별화 포인트 – Follower의 숫자 브랜드
1.[2% 부족할 때]
미과즙 음료 시장을 처음 개척한 브랜드는 남양유업의 [니어워터]였다. 그러나 곧바로 롯데칠성에서 [2% 부족할 때]라는 브랜드를 출시하였고, 이제는 미과즙 음료를 대표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2%’는 체내 수분이 2% 부족할 때 갈증을 느낀다는 과학적인 수치를 활용하여 소비자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미용과 건강을 위해 저칼로리 음료를 선호하는 소비자의 욕구충족, 타겟의 감성을 자극하는 지속적인 광고 캠페인을 통해 선발주자를 제치고 카테고리 대명사가 되었다.
2.[덴탈클리닉 2080]
다수의 치약 브랜드들의 존재하던 시장에 ‘2080’이라는 숫자가 던져준 것은 ‘신선함’이었다. ‘20개의 건강한 치아를 80세까지’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애경산업’은 기존의 치약 브랜드들이 영어를 활용해 치아건강, 위생, 청결을 전달하던 네임의 스타일을 바꾸는 [2080]을 출시함으로써 발매 6개월만에 히트 상품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얻었다.
3.[콜라독립 815]
외국 브랜드인 [코카콜라]와 [펩시]가 양분하던 콜라시장에 국내의 식품회사인 ‘건영식품’이 도전장을 내밀었던 이름이 [콜라독립 815]이다.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된 이 브랜드는 제품의 출시가 IMF라는 경제 환란기와 맞물려 있고, 외국에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해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일제침략기의 종지부를 찍는 8월 15일 광복절을 연상하게 하는 숫자 ‘815’를 사용함으로써 더 의미가 잘 전달 되었다. 비록 히트 브랜드로 성장하지는 못하였으나 제품의 기획 의도와 숫자 브랜드의 적절한 조화로 소비자들의 머리에 깊이 각인된 예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개시된 인터넷 숫자 도메인 서비스는 대중적이고 유의미한 숫자의 2차 선점경쟁을 예고하고 있다.
각각의 숫자들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소비자에게 각인되고, 성공을 거두기까지는 단지 ‘숫자’를 결합해 뛰어나고, 독특해 보일 것이라는 기대는 지나친 욕심이다. 숫자를 활용한 브랜드는 이미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숫자 브랜드는 식품, 패션, 전자 등 다양한 산업군에 활용되고 있다. 같은 숫자를 활용하더라도 식품에서는 식감을 떨어뜨리는 반면 전자 분야에서는 첨단성을 높일 수 있다. 그리고 숫자는 문화나 언어권에 따라 친숙도가 다르고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도, 생각지도 못한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몇개의 나열된 숫자에 개발자의 임의로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기 이전에 그 숫자가 소비자의 마음을 낚아챌 수 있는 날카로운 갈고리가 될 수 있을지, 소비자의 마음에 ‘1(최고)’이라는 숫자를 새길 수 있는지 한번 더 신중히 재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 숫자를 이용한 브랜드 네임에 관한 연구–브랜드 이미지 형성을 중심으로-, 최환원, 1998
- 숫자를 이용한 브랜드에 관한 연구-소비자의 숫자에 대한 지각을 중심으로-, 김규훈,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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