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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56:1-8> 여호와께 연합한 사람의 복, 이방인의 구원,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 이스라엘의 회복. 만민이 기도하는 집, 마른나무와 같은 고자의 구원
1. 말씀배경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창세기에서부터 모든 족속이 구원을 받는 그림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 12:2-3).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여기서 복은 구원을 포함한 복입니다. 구원없는 복은 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는 예수님을 통해서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들이 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오늘 말씀 바로 앞에 있는 이사야 55장에서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1절) 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만만의 구원에 대한 초정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국한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값없이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 55:5절을 보면, 메시야를 통하여 만민이 구원받을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네, 네가, 너를, 네게로, 너를”은 곧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은혜로 믿기만 하면 값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는 이방나라들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인 이사야 56장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모든 민족이 주를 찬송하게 해 달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 67:3]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 이런 하나님의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 계획으로 구원자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십자가에서 대속적인 죽음과 승천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이방인들에게도 보혜사 성령을 부어 주시고 생명을 얻게 하는 회개를 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0:45]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사도행전 11:18]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오늘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유대인들이 이방인이라고 하는 수십억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10지파로 구성된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정복당한 후 혼혈족이 된 사마리아인들까지도 그들은 상종하지 않을 정도로 배타적이었습니다.
[요한복음 4: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그들은 열방을 구우너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다 알지 못하고 마치 자기들 곧 유대인들 만이 구원을 받는 백성으로 알고 선민의식으로 가득찼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대하여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셨는데, 아예 이방인들은 출입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소와 지성소 그리고 제단이 있는 뜰 부분은 이스라엘 남자들만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헤롯성전의 경우에는 이방인의 뜰을 성전건물과 제단이 있는 뜰 바깥에 별도로 만들었습니다. 거기까지만 출입을 허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들어가는 출입문에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이방인들에게는 성전 접근을 엄격히 금한다. 이 규정을 어기면 자동적으로 사형을 자초할 것이다“라고 돌에 새겨 놓았습니다.
얼마나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 곧 그들이 말하는 이방인들에게 구원과 관련하여 폐쇄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상적인 성전인 에스겔 성전에서는 뜰은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의 뜰과 이방인 의 뜰을 구분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신앙의 단계에 따라 뜰에 머무를 사람,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는 사람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말씀이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오래동안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신을 섬기고 그들의 풍습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은 품으십니다. 구원에 관한 유월절 규례를 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너희 중에 거류하는 이방인에게 이 법이 동일하니라“ (출 12:49) 하셨습니다. 그들에게도 구원이 열려 있으니 금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솔로몬 성전을 짓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모든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시오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대하 6:33)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방인의 기도도 들어달라는 것이며 이방인들이 주를 경외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오늘 말씀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 대한 구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방인은 누구입니까?
믿는 우리들이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판단하고 관심을 갖지 않고 배척하는 자들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믿는 자들이 유기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들이 볼 때에 이 사람은 도저히 구원이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 사탄에 완전히 잡혀 있어 구원이 어려울 것 같은 사람, 정박아와 같이 스스로 뭔가를 결정할 수 없는 자들, 무당을 하고 있는 사람, 불심이 강하여 절에 사는 사람, 이방종교의 사제들, 엄청난 죄를 짓고 있는 사람 등등, 저들은 반드시 지옥갈 거야 하면서 아예 구원의 문을 닫아버리는 대상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내팽개친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들의 이방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디모데전서 2:4]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방인으로 분류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의 삶이 끝까지 하나님을 부정하고 불법을 저지르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도 구약시대처럼 이방인과 같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기회는 주어져야 합니다. 성전 문을 걸어 닫으면 안됩니다. 전도의 문을 닫으면 안됩니다. 왜, 그렇까요? 그들도 구원을 받기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도저히 구원이, 생명이 없는 것 같은 그들에게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회를 똑 같이 주시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3.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의 구원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두 개의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지키고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을 지키고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것입니다.
두 개의 명령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정의 (히, 미쉬파트)는 심판, 공평, 재판, 공의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재판에서의 공정인 것입니다. / 돈이 있다고 해서 지식이 있다고 해서 무죄가 아니고 반대로 없다고 유죄가 아닌 공정하게 법대로 재판을 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물론 여기서는 사회법도 포함될 수 있지마는 하나님의 법을 정의롭게 지키는 것입니다.
의(히, 체다카)는 옳은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따른 올바른 삶을 행하는 것이 의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정의와 의를 행하기 위하여 대표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2절에 나와 있습니다.
① 대신관계속에서 대표적인 율법인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단지 하루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자기를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함부로 자기 마음대로 정의를 버리고 재판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만을 예배하며 예배자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② 그리고 대인관계 속에서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분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를 지키고 행하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복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심판의 기준이므로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심판을 면하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구원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기 위하여, 심판을 면하기 위하여 정의를 지키고 의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구원의 히브리어가 ”예수아“입니다. 우리들의 구원자 ”예수“와 음가가 비슷합니다. 마치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의 초점은 아니지만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잠시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 본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구약시대의 구원의 방법은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에 한계가 있습니다. 이제 율법의 기능은 자신이 죄인 임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게 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다만,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지만 구원을 받은 자의 합당한 행동은 요구되는 것입니다.
3절에, 여호와와 연합에서 연합이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연합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합을 위하여 그가 선택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웨슬리를 따르는 구원의 방법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성령의 감동에 의한 인간의 반응이 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칼빈을 따르는 교단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12절을 보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루라“의 동사는 동명령 중수디포동사입니다.
디포동사는 형태는 능동태인데 뜻은 수동태의 뜻을 가지고 있는 동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동태, 능동태의 의미가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에 의한 구원이 주어지는 수동적인 부분과 인간의 반응이라는 능동적인 부분이 함께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에 의한 구원이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성령의 감동이 있을 때에 거부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생명을 선택하는 인간의 반응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감동이 있는데도 거부하면 구원을 못 받는 것입니다. 신명기 30:19절 말씀을 보면 생명을 그가 택해야 사는 것입니다.
[신명기 30: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구원이 거저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민 유대인이라고 해서 계속적으로 정의를 지키지 않고 의를 행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3절부터는 ”여호와께 연합 한 이방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연합 (히, 라와)는 수동형으로 사용되었을 때 원어적으로 군사의 연맹, 남편과 아내의 부부 결합, 레위인들이 성막 봉사를 위하여 아론과 연합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연합은 마치 부부가 연합한 것과 같은 연합이며, 군사동맹과 같이 생명을 함께 하는 연합이며, 하나님과 동역하는 연합인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진 이방인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3절)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방인들은 유대인들로부터 갈라내듯이 구원이 없는 자들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방인들을 갈라냈습니다. 그리고 또 율법적으로도 고자들은 여호와의 총회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신명기 23:1]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런데, 고자들에게 “마른 나무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른 나무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면 불에 타서 없어질 땔감에 불과합니다. 실제 고자는 자식을 낳을 수 없기에 생명을 이어갈 자손들도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가 많아 출산할 수 없을 때에 성경은 “죽은 자”와 같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히 11:1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생명도 없고 생명을 이어갈 수도 없는 고자들에게도 구원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4절에, 그런 고자들도 2절과 같이 안식일을 지키며, 하나님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잡는 자는 한 마디로 구원이 있는데,
이것을 5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6:5]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내 집”, “내 성”은 여호와의 성전입니다. 그들이 들어갈 수 없었던 성전인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입니다. 그러므로 성에 들어가는 것은 구원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곳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더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는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실제로 아들과 딸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보다 더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 안에 그의 이름이 기록된 비석을 세워 영원히 두겠다는 표현입니다.
궁극적으로 이런 모습은 새예루살렘 성에 구원받은 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계시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요한계시록 21:14]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구원받은 자의 이름이 성의 문에, 기초석에 기록되어 영원히 남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로 다윗에게 반역을 했던 압살롬도 자신의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에 따라 자기 이름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는데 그것이 “압살롬의 기념비”입니다 (삼하 18:18)
또 6절을 보면,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이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면 복을 받게 되는데 그 복이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사 56: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5절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나의 성산, 내 집”은 성전이며 궁극적으로 거룩한 성 예루살렘입니다.
이방인들이 거룩한 성전에 들어온다는 것이며, 그들을 그곳에서 기쁘게 한다는 것이며, 그들의 제사도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전 출입을 막았던 유대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선언인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잡혔을 때 그들의 주장이 헬라인을 성전에 들어가게 해서 더렵혔다는 것입니다 (행 21:28).
이때까지도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은 절대적인 금지인 것입니다.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어떤 분위기인지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방인에 대한 이런 엄청난 선포로 인하여 오늘날 유대인들이 아닌 수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큰 무리들이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서 찬송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계 7:9-10)
8절에, 하나님은 그동안 죄로 인하여 쫓겨난 자들을 먼저 모으십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바벨론으로 포로된 자들의 귀환입니다. 그리고 이미 모은 백성 외에도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방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 시대에 우리안에 들어온 양들도 있지만 다른 양들도 또 모으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하시기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알 수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맺는 말>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온 민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데 감히 하나님의 마음과 다르게 오늘날 우리들 스스로 이방인으로 구분해 놓고 그들을 배척할 권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혹시 내가 이방인 취급하는 이웃이 있습니까? 즉시 회개하셔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에 잡혀 이방인들을 그들과 갈라놓고 개 취급을 한 결과는 오히려 그들의 다수가 구원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고, 대신 수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여기서 먼저된 자는 유대인들입니다. 나중된 자는 이방인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먼저 되었으면 오늘날의 이방인, 우리들이 규정해 놓고 갈라낸 이방인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품어야 합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우리들이 포기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들입니다.
구원의 여부는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저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마음의 문을 열고 성전의 문을 열고 그들이 들어오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 우리들도 한때에는 이방인들과 같이 마른 나무와 같이 생명이 없는 고자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셔서 구원을받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아예 없었습니다. 고자와 같고 연기나는 타다 만 부지깽이와 같았습니다.
[이사야 7: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웨슬리도 화재 사고에서 건짐을 받고 자신이 타다가 만 부지깽이라고 이사야 7장 4절 말씀을 근거로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똑 같습니다. 그냥 두면 지옥불에 들어가 태어질 자들입니다.
이미 화재 사고를 만난 자처럼 그 불이 가까이 와 있었는데 건짐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깊이 깨달으시고 외면되고 소외된 영적 이방인들도 우리들과 같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을 향해 닫혀 있는 모든 것을 열어놓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다가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