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1장-1> 노래 중의 노래, 솔로몬의 노래, 술람미, 사랑의 노래, 주님과 신부인 교회, 사랑의 여정과 입맞춤 (1)
1. 말씀배경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곧 예수님과 교회의 깊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제가 부족해서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충분히 전해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브라이언 시몬스“라는 분의 아가서강해 책을 읽었는데, 그분은 아가서를 제대로 깨닫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가서 주석을 보면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학문적으로 신학적으로 접근한 반면에 이분은 체험적인 사랑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몬스 만큼 전할 자신이 없어서 아쉽다는 것입니다.
▶ 아가서는 요한계시록과 더불어 정말 학자마다 다양하게 해석되어지는 성경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같은 구절에 대하여 해석도 다양하고, 번역도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각자가 나름대로 히브리어 원어를 가지고 번역과 해석에 충실하고자 했지만 간혹 이상하게 번역된 부분도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가 깨달은 한 부분을 말씀드리면, 아 6:13절 한글번역입니다.
[아가 6:13]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이것은 전후 내용을 보아도 “돌아오라”고 하는 내용이 아니라 “돌고 돌는” (슈비 슈비-칼, 명령, 여성 단수) 모습으로 마치 둘이 쌍춤을 추는 모습일 것입니다. 언어유희인 것입니다.
원어 “슈브”가 (되)돌아가(오)다의 뜻이 있어 그렇게 번역한 것인데, 그렇게 하면 이어서 나오는 천사들의 쌍춤인 “마하나임에서의 춤” (창 32:2)과 내용이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앞의 내용을 보다라도 술람미 여인이 성숙한 신부가 되어 자기 백성을 돌보고자 백성들의 삶 가운데로 들어갔는데, 자꾸 그를 다시 돌아오라고 재촉한다는 것은 혼인을 하고 성숙한 신부의 삶을 사는 술람미 여인의 모습과도 맞지 않게 됩니다.
아 4:8절도 마찬가지로 이상한 번역이 되어 침방에 들어간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의 신방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르게 번역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용의 흐름을 끊고 있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번역을 위하여 아가서의 전체 큰 틀속에서 내용의 흐름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간에 이상한 내용이 생뚱맞게 갑자기 튀어나와 내용을 단절시킨다면 그 부분은 잘못된 번역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아가서는 처녀가 신랑을 사모하여 갈망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 혼인을 하고, 첫날 밤 합방을 통하여 서로가 본 신체와 순결함, 고결함을 은유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후 성숙한 신부로서 신랑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을 말씀하고 있으므로 이 내용의 흐름 안에서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남녀간의 사랑의 단계를 이해하면서 풍유적으로 이것이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와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면 되는 것입니다.
▶ 또 한가지 온전한 해석을 위하여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묵상해 볼 것은, 남녀간의 사랑의 노래인데, 여자 주인공인 술람미 여인의 이름이 6장에서 처음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름대로 깨달은 내용을 잠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누구의 동의를 얻고자 함도 아닙니다. 또한 신학적인 연구 결과로 나온 것도 아니므로 참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여성형입니다. (히, 슐라마이트는 솔로몬과 같이 “살람”에서 유래하였는데 평화스러운 자의 뜻) 그러므로 6장에 가서야 비로소 여자 솔로몬이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자에게서 솔로몬의 형상이 온전히 드러나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닮듯이 솔로몬을 온전히 닮게 된 것입니다. 솔로몬의 형상을 이룬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부인 우리들이 주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룬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 8:10절에서, “나는 그가 보기에 평화를 얻은 자 같구나”라고 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원어가 살롬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술람미(슐라마이트) 곧 여자 솔로몬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나타냅니다. 대표합니다. 정체성, 전인격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슐라마이트라고 불리는 것은 이제 그가 진정한 여자 솔로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형상을 온전히 이룬 것입니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이 6장에 가서야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름과 관련된 이와 같은 영적원리가 요한계시록에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버가모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이기는 자가 새 이름을 기록한 흰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흰돌은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힌돌에 이기는 자의 새 이름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이름은 그 분의 온 인격을 의미하므로 그는 예수님과 모든 면에서 온전히 같이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형상도 닮고, 나타나는 향기도 같고, 인격도 성품과 같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받는 자 밖에 그 이름을 모릅니다. 술람미 여인이 예수님의 온전한 형상 닮은 것을 다른 사람은 겉으로는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본인만 아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2절에, 빌라델비아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것도 같습니다. 그가 이기므로 그이 위에 하나님의 이름, 새 예루살렘의 이름, 주님의 새 이름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과 주님의 소유가 되었고, 새 예루살렘 성의 소유주가 되었고,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이제는 하나님과 주님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온전히 하나되었다는 것입니다.
▶ 술람미 여인이 여자 솔로몬이 되어지니 왕과 동격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 손 잡고 빙글 빙글 돌면서 춤을 출 수 있는 것입니다 (아 6:13).
술람미 여인의 생각이나 말이 솔로몬의 생각과 솔로몬의 말이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향기가 술람미 여인의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술람미가 솔로몬을 이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아 7:10-13). 신랑이 신부가 이끄는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가 영적으로 술람미 이름이 붙여지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 위에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지기를 축복합니다. 지금 무슨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상관없습니다. 주님과 온전히 연합되어 사랑한다면 여러분들 만이 아는 “새 이름”이 주어질 것입니다.
2. 아가서 1장
1절, 솔로몬의 아가라 (쉬르 핫쉬림 아쉐르 리쉴로모)
원어적으로 솔로몬의 의한 아가, 솔로몬을 위한 아가 등으로 해석되어 솔로몬이 노래의 저자라는 의미와 누군가가 솔로몬을 위하여 지은 노래 또는 부른 노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래 천 다섯편을 지은 솔로몬의 저작설이 유력합니다 (왕상 4:32)
아가(雅歌)는 “노래 중의 노래” (song of somgs), “가장 아름다운 노래”, “왕의 노래” 라는 뜻입니다. 참고 아악(雅樂, 궁중음악)
▶ 솔로몬이 주님을 예표하고, 신부인 술람미 여인이 신부인 우리들을 예표한다면, 우리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 노래를 하고, 주님도 우리들을 향하여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이 신부인 우리들을 위하여 노래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의 노래가 들리십니까? 잘 안들리시죠? 그 이유는 우리가 사랑의 노래를 부르지 않거나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한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물론 여기서는 “노래” 차원을 넘어 “기쁨의 외침” (히, 린나)입니다.
2절,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술람미 여인이 입을 맞추겠다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입을 맞추어 달라는 것입니다.
“입맞추다”가 복수, 미완료로 되어 있어서 한번이 아니라 계속 입을 맞추어 달라는 술람미 여인의 사랑의 갈망의 표협입니다.
입맞춤은 이 두 연인의 사랑의 시작입니다. 이것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선 입맞춤부터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한 사랑의 갈망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 내게 입맞추어 주세요”를 기도하면서 갈망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기도를 자주 합니다. 식사 기도시간에도 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 귀한 양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주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시고, 제게 입맞추어 주세요 아멘” 멋진 기도 아닙니까? 입으로 먹기도 하지만 입맞춤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과 입맞춤에는 다양한 입맞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주 계속 여러번도 필요하지만 다양한 입맞춤도 필요합니다.
사랑의 입맞춤, 구원의 입맞춤, 생명의 입맞춤, 말씀의 입맞춤, 용서의 입맞춤 등 등
▶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는 것은 생명의 입맞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 2:7), 코 (히, 아프)는 코, 콧구멍이란 뜻도 있지만 얼굴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창 3:19). 볼에, 이마에, 빰에 하는 입맞춤도 입맞춤입니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말씀의 입맞춤입니다 (출 33:11)
[민수기 12: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대면하여 말씀하다”의 원어가 “페 엘 페 다바르”입니다. “페”는 입입니다. 입과 입을 맞대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입에 하나님의 입을 맞대어 말씀을 넣어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입맞춤입니다.
말씀의 입맞춤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의 입을 통해서 그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입맞춤이 되어지면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자가 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은 자가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구원의 입맞춤도 있습니다.
[시편 2: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저는 시 2:12절에서 말씀하는 입맞춤을 “구약적인 입맞춤”으로 깨닫고 잇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우리가 입맞춤을 위하여 하나님께 다가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적으로 행위적으로 우리가 다가가 사랑을 얻는 것입니다. 자발적이라기 보다는 율법적이고 계약적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진노가 임하는 것입니다.
마치 구약적 구원의 방법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율법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습니다. 입맞추기 위하여 다가가야 하는 자기의 의지, 행위가 뒤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에게 “입을 맞추어 달라”고 합니다. 저는 이것을 “신약적인 입맞춤”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랑을 갈구하는 자에게 다가와 입맞춤을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랑입니다.
[요한1서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본문으로 돌아가서, 입맞추기를 원하는 이유가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진하기 때문“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이 솔로몬의 포도주보다 진한 사랑이 나중에는 술람미 여인에게도 나타납니다 (아 4:10). 솔로몬의 것이 술람미 여인에게 부어진 것입니다. 향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복수로 되어 있으니 큰 사랑이요, 다양한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이 추상적인 단어인데, 여기서는 입맞춤, 포옹, 팔 베게, 신방을 차리는 등 매우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도 말로만 사랑이 아니라 신부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을 하셨습니다 (엡 5:25). 그 사랑은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한 사랑입니다 (렘 31:3), 오늘은 우리가 죄를 지었기에 사랑 안하고, 내일 선한 일을 했기에 사랑하는 그런 조건적 사랑도 아닙니다.
세상의 사랑은 끊어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합니다. 사랑이 떠나가기도 합니다. 변질되기도 합니다. 상당히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 누구도 무엇도 끊을 수 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로마서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래서 포도주보다 진하다는 것입니다. 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는데, 세상의 포도주와 차원이 다른 맛있는 포도주가 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을 통해서 술람미 여인에게 부어지는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사랑에 비하여 더 진한 사랑인 것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의 포도주는 한번 맛보고 취하면, 다른 사랑은 더 이상 추구할 수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주님과 바꿀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처녀들이 입맞추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가 호세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멜은 원래부터 음란한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호세아는 그녀와 혼인을 했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세명이나 낳았음에도 타인의 사랑을 받아 떠나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하여 돈을 주고 그녀를 다시 사오게 합니다. 이 돈이 은 열다섯개와 보리 한 호멜인데, 은 삼십에 팔린 예수님의 몸값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부를 사기 위하여 댓가를 지불한 것과 같습니다.
음란한 여인인 고멜을 데려와서 하는 말이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 1:2-9, 3:1-5).
음행을 저지른 자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우리 주님의 신부를 향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죄를 지었다고 당장 사랑의 관계를 끝내지 않습니다. 다시 계약조건을 바꾸자고 하지 않습니다. 신랑, 신부로 한번 맺은 언약을 지키십니다.
우리들의 인간적인 사랑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주보다 진한 사랑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