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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조선의 '문화적 차이'가 빚은
오해와 갈등, 그리고 무력충돌"
■ 미국인 시각의 '조선과 신미양요'
* 필자 註
우리가 교과서로 배웠던 신미양요와 미국이 인식하고 있는 신미양요 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19세기 중후반은 서양열강의 아시아 진출 시도가 러시를 이뤘던 '격동의 세계사' 가 펼쳐진 시기였고, 그때 미국은 조선과 국제전쟁을 치렀다.
아시아 맹주입네 자처하던 중국과 일본도 서양열강의 '함포시위' 앞에는 끽소리 못하고 무릎을 꿇었건만, 조선만은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1871년 여름, 강화도전쟁을 이기고도 어쩔 수 없이 조선을 철수해야 했던 당시 미국은 "조선이란 나라" 를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까.
영문판 뉴월드백과사전(New World Encyclopedia)에 게재된 신미양요 관련 내용은 필자가 보기에도 "비교적 정확하고 객관적인 미국의 시각"을 담보한다고 생각되어 여기에 원문과 한글번역문을 싣는다. 영어원문을 혹시라도 잘못 번역한 부분이 있다면, 따끔한 지적 해주시기 바란다.
- http://www.newworldencyclopedia.org/entry/United_States_Korean_exp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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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국원정
United States Korean expedition
1871년 미국의 외교적 임무를 띠고 시작된 한국원정은 한국에서 신미양요란 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미양요가 일어나기 10여년 전, 미국이 남북전쟁(Civil War)으로 국력을 소모하는 동안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제국은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국가들과 통상관계를 확대했다. 남북전쟁으로 신생독립국으로 도약한 미국은
아시아진출을 위한 교두보가 필요했고, 대상물색을 하던 중 당시 ‘조선왕국’으로 알려진 한국과 통상수호조약을
맺기로 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은둔의 왕국 조선과 미국간에는 극복할 수 없는 문화적 차이가 존재했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오해로 말미암아 두 나라 모두가 소망스럽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 군사적 무력충돌까지 일으켰다.
The United States expedition to Korea in 1871, which came to be known in Korea as Sinmiyangyo (Korean: 신미양요 ,Western Disturbance of the Year Sinmi) started out as a diplomatic mission. During the previous decade, while the United States was consumed by Civil War, England, France and other European nations had expanded their foreign trade relations with Asian countries, particularly China and Japan. Emerging from the Civil War, the United States wanted to catch up, and sought to make a trade agreement with the Joseon Kingdom, as Korea was known at that time. Unfortunately the culture gap between the hermit kingdom Korea and the United States proved insurmountable, and their mutual misunderstanding led to a military conflict which ultimately yielded no useful results for either side.
- 사태의 배경
한국과 중국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수 백년동안 한국은 중국과 조공(朝貢; 정기적으로 종주국에 예물을 바침) 관계를 유지했다.
주권국가로서 한국의 국권유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중국은 매년 한국으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물품들을
받아 챙겼고, 두 나라 간의 통상관계가 조정돼왔다. 중국과의 이런 효율적인 통상관계가 고착화된 결과,
지정학적으로 중국외 다른 나라와는 격리된 반도국가 한국은 중국외 그 어떤 나라와도 수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미국과 유럽처럼 아시아국가들을 물색해 식민지 혹은 통상수교를 맺으려는 서양선박들이 수시로 한국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그들과의 소통을 원하지 않았고, 중국을 제외하고는 어떤 외국과도 수교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듯 했다. 한국의 대외적 위상을 파악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중국을 통하는 길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한중관계를 방해하거나 직접 위협하지 않고 한국과의 통상수교
지름길은 중국을 경유하는 것 뿐이었다.
- Background
Korea and China
For several centuries leading up to the nineteenth, Korea had maintained a relationship of tribute with China. In exchange for annual payments of tribute by Korea, China provided a buffer of protection, while still considering Korea an independent nation, and commerce was conducted between the two countries. As a result of this long-standing and effective relationship with China, Korea, a peninsular nation geographically separated from the rest of the world, had not faced the necessity of conducting relations with any other outside countries. As Europe and the United States began to travel to Asia in search of trade relations and colonies, western ships began to make occasional visits to Korea. Korea was not eager to engage in communications with them, feeling that they had no need of relations with any outside peoples, other than China. China did its best to try to explain Korea's position to outside countries and vice versa, but only to the point that it did not threaten or interfere with the China – Korea relationship.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6년 미국의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라는 상선 한 척이 무역거래를 트려고 한국에 상륙했다.
그 배는 환영받지 못했다; 육지에 오른 선원들은 모두 체포돼 사살됐으며 선박은 불타고 말았다. 미국전함
워츄세트(USS Wachusett)와 세넌도어(USS Shenandoah)가 1867, 1868년에 잇달아 한국을 방문해 제너럴셔먼호의
행방을 조사하고 생존자구조 확인작업을 벌였지만, 한국 관리와 공식접촉은 물론 관련정보조차 획득할 수 없는
헛수고만 하고 말았다. 대동강주변의 현지주민들로부터 방화로 인해 제너럴셔먼호가 파괴됐으며 생존자에 관한
온갖 억측이 난무하는 내용만 청취할 수 있었다.
The General Sherman Incident
In 1866, a US merchant ship, the USS General Sherman, landed in Korea seeking trade opportunities. The ship was not welcomed; on the contrary, the crew was all killed or captured, and the General Sherman was burned. The USS Wachusett (1867) and the USS Shenandoah (1868) traveled to Korea to confirm the fate of the General Sherman and try to rescue any survivors, but were not afforded any official meetings or information. From local residents near the Taedong River, they heard that the General Sherman had been destroyed by fire, and were told conflicting stories about survivors.
두 번이나 파견한 조사단은 어느 쪽도 제너럴셔먼호 행방에 관한 명확한 정보를 얻지 못하자, 미합중국 국무부는
중국 상하이주재 영사 조지 슈워드(George Seward)를 전권대사로 임명하고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제너럴셔먼호에 관한 공식적인 정보를 얻는 것 외에도 미국이 중국과 일본과 맺은 것과 유사한 무역통상조약 체결을
협상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미 국무부는 조약체결에 군사적 무력사용은 배제한다고 명기했다. 그런 계획이 세워졌던 무렵,
상하이에 거주하던 미국의 한 사업가 프레데릭 젠킨스(Frederick Jenkins)가 슈워드 영사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내용은 “한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조사하는 미국측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하기위해 대표단을
상하이에 파견했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워싱턴에 보고됐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것도 확실한 결론이
도출되지 않았고 워싱턴에도 결코 그 한국대표단은 도착하지 않았다.
Since single ships had been unable to obtain any clear information, the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decided to send an official delegation of ships to Korea, following the recommendation of the American Consul in Shanghai, General George Seward. In addition to seeking official information about the General Sherman, the delegation would negotiate a trade treaty similar to the treaties Korea had with China and Japan. The State Department stipulated that no military force should used in securing the treaty. About the same time, a US businessman in Shanghai, China, Frederick Jenkins, reported to Seward that Korea had sent a delegation to Shanghai to inquire about the most effective way to respond to the US regarding the General Sherman incident; whether it might be appropriate to send a delegation to Washington to report. It is not known for certain what conclusions were reached, but no such delegation ever arrived in Washington.
중국을 통한 접촉시도
미국은 중국 상하이를 거점으로 한국원정을 착수했는데, 중국주재 프레데릭 로(Frederic Low) 미국대사가
한국에 보낼 외교메시지를 중국 외교부를 통해 전달하려 준비했다. 중국은 마지못해 관련했지만, 중립을 견지하려했고
대조선은 물론 대미국 관계악화는 피하려는 눈치가 역력했다. 중국이 미국대사의 조선원정 임무를 찬성하거나
지원의 여부와 상관없이, 어쨌건 조선으로 건너간다는 미국의 계획이 확정되자 중국은 어쩔 수없이 미국대사의
공식서한을 조선에 발송하는데 동의했다.
그 공식서한을 받아든 조선정부는 딜레마에 부닥쳤다: 조선은 미국인의 원정방문은 환영받지 못하니
와서는 안된다고 확실히 밝혔고; 한편으로, 조선은 미국과의 어떤 관계도 원치않았는데 미국의 공식서한에 조선이
답장을 할 경우 그게 곧 통상관계의 시작이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조선은 한미가 모두 만족할만한 내용으로
디자인한 답장을 만들었다. 그들이 중국을 경유해 미국에 보낸 답장에는 "미국 대표단과는 만나지 않겠으며
제너럴셔먼호의 행방조사와 선원들에 행한 적대행위와 관련된 어떤 내용도 미국대표단과는 논의할 것이 없다"고 적었다.
불행하게도, 이 답장은 너무 늦게 중국에 도착했다; 미국함대가 벌써 한국으로 출항한 뒤였다.
Attempts at liaison through China
As the American expedition, based in Shanghai, prepared for the trip to Korea, the US's main representative in China, Minister Frederic Low, prepared a diplomatic message to send to Korea through China's Zongli Yamen (foreign office). The Chinese were reluctant to get involved, eager to maintain their neutrality and avoid jeopardizing their relations with Korea and the US. However, when it became clear that the Americans planned to travel to Korea whether or not China assisted them or approved of the mission, China finally agreed to forward Minister Low official letter to Korea.
On receiving the letter, the Korean government faced a dilemma: they wanted to firmly convey to the Americans that they were not welcome and should not come; on the other hand, any letter of response to the US would in and of itself be considered as the beginning of a relationship of communication, something Korea also did not want. They drafted a response designed to satisfy both of these stances. They wrote a response asking China to tell the US that they could not meet with the US delegation and that there was nothing to discuss about the "General Sherman," since the fate of the 'General Sherman' was brought upon it by the hostile actions of its crew. Unfortunately, the reply reached China too late; the American squadron had already set sail for Korea.
첫 접촉
군사원정단은 1,200명이 넘는 해군수병과 해병대 그리고 5척의 전함 : 콜로라도, 알래스카, 패로스, 모노캐시
그리고 배니시아함, 거기에 함대규모에 걸맞은 소형지원선들로 편성됐다. 기함 콜로라도에는 해군소장
로저스(Rear Admiral John Rodgers) 제독과 중국주재 미국대사 프레데릭 로(Frederick F. Low)가 승선했다.
원정에 따라나선 미국인으로는 사진작가 펠리스 비토(Felice Beato)가 있었는데, 그는 최초의 종군사진작가 가운데
한사람이었으며 그의 사진작품들은 아시아지역에서 잘 알려져있었다. 조선군은 "호랑이 사낭꾼들"(Tiger Hunters)로
알려졌는데, 어재연장군이 지휘했다.
▲ 이탈리아-영국계 미국인 종군사진가
펠리스 비토(Felice Beato; 1832-1909).
펠릭스 비토(Felix Beato)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동아시아지역 사진을
처음 찍은 사진작가로, 최초의 종군사진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신미양요때
참전공로를 인정받아 명예훈장을 받았다.
미국인들은 백의민족(흰옷입은 사람들)으로 묘사되는 조선의 현지주민들을 안심시키며 접촉했는데,
그들은 미국측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해 질문을 할 때마다 한결같이 관련된 화제를 꺼내는 것조차 싫어했다.
(함부로 발설하다가 당하게 될)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Initial Contact
The expeditionary force that set out for Korea from China included over 1,200 sailors and Marines and five ships: USS Colorado, USS Alaska, USS Palos, USS Monocacy, and USS Benicia, as well as a number of smaller support vessels. On board the Colorado, Rear Admiral John Rodgers' flag ship, was Frederick F. Low, the United States Ambassador to China. Accompanying the American contingent was photographer Felice Beato, known for his photographic work in Asia, and one of the earliest war photographers. The Korean forces, known as "Tiger Hunters," were led by general Eo Je-yeon (Korean: 어재연 Hanja: 魚在淵).
The Americans safely made contact with the Korean inhabitants, described as people wearing white clothes, and, when they inquired them about the USS General Sherman incident, the Koreans were initially reluctant to discuss the topic, because they feared paying any recompense.
조선해안 측량탐사를 요청하다
5월31일 조선 고종임금이 보낸 공식대표가 미국함대 기함 콜로라도를 방문했는데, 미국측은 중국어 통역관을 통해
조선대표단에게 "내일부터 조선의 해안선을 측량하고 탐사하겠다"는 답사계획을 전했다. 미국측은 또 조선대표단에게
몇가지 선물도 주었다. 조사와 탐사요청에 대해 조선대표단은 어떤 거부의사도 표명않고 묵묵부답이어서 미국측은 내심
'암묵적 동의'를 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동떨어진 착각이었다. 당시 조선정책은 한강으로
진입하는 어떤 외국선박도 안전을 보장하지 않았다. 한강은 수도 한양(지금의 서울)과 곧자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화읍과 인접한 해협의 구부러진 수로인 손돌목은 지방관청의 허가서없이는 어떤 선박들도
출입통행이 허용되지 않았다.
Request Permission to Explore the Coast
When an official delegation from King Gojong visited the American flagship U.S.S. Colorado on May 31, the Americans, speaking to the delegation through their Chinese-speaking interpreter, told the Koreans that they planned to explore and survey the coastline in the upcoming days. They also presented the Korean delegation with some gifts. The Americans assumed that the Koreans' failure to voice any objections to the surveying trip indicated tacit approval. This was far from the truth. The Korean policy at the time allowed no safe passage for foreign ships into the Han River, for the river led directly to the Korean capital Hanyang (modern Seoul). Also, no vessel was permitted to journey past the bend in the river at Sandolmok, near Ganghwa city, without express written permission from the local authorities.
통행허가는 거부되고
6월1일 전함 알래스카와 모노캐시가 얕은 수심의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전략을 짜고 탐사여행을 시작했는데,
해병대 약100명을 포함한 650여명의 병사를 승선시켰다. 미군이 강화해협 탐사에 나서게된 까닭은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일전 콜로라도함을 방문한 조선대표단이 '암묵적 동의'를 했다는 미국측 생각이다. 그러나 한국인들로서는
특별한 승인이 없는 한 외국선박의 강화해협 출입은 금지된 사항이다. 그래서 미국함선이 손돌목에 이르자 해변둔덕의
조선군 진지들에서 대포를 발사한 것이다. 조선군 화포는 골동품축에 속하고 포구방향이 고정돼 있는 조악한 상태에서는
포탄이 목표를 정확히 맞출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포탄은 미국전함 위를 날았다. 조선군이 왜 대포를
발사했는지 미군은 그 이유를 몰랐지만, 그로 말미암아 미군은 응징보복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Permission Denied
On June 1, the Alaska and the Monocacy, which had drafts shallow enough to maneuver in the shallow waters of the Ganghwa Straights began their surveying trip, manned by a crew of about 650 men, including about 100 marines. They proceeded up the river with what they thought was
Council of War aboard the US Flagship Colorado.tacit permission from the Koreans. The Koreans, on the other hand, considered the waters closed to foreigners unless specific permission had been given to enter the waters, and as soon as the US ships reached Sandolmok, the Korean soldiers in the fortresses on the riverbank fired their cannons at the US ships. The Korean cannons were outdated, poorly positioned and in disrepair such that the Koreans could not aim well, and most of the shots sailed over the US ships. Since the Americans did not understand why the Koreans had opened fire, the Americans planned a punitive assault.
무력충돌
1871년 6월10일, 미군은 부근의 적군반격이 거의 없는 가운데 강화도 초지진을 공략했고 진지 가까이에 캠프를
치고 그날밤 야영했다. 다음날 아침 미군은 초지진과 진지의 화포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이 진지는 1866년 프랑스의
침략으로 이미 파괴됐던 곳으로 그후 새로 만들었는데,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또 한번 일본군의
포탄세례를 받았다. 조선군은 마치 게릴라 부대처럼 서로간 띠를 묶고, 무기라고는 오로지 화승총 하나로
미군의 12파운드 야포공격을 저지했는데, 화승총으로는 효과적인 유효사거리 확보가 불가능했다.
미군은 다음 목표인 덕진진(fort Monocacy; 모노캐시 요새)으로 진격했다.
미군의 승리는 덕진진까지 이어졌다. 조선군은 덕진진을 버리고, 더 북쪽에 있는 진지에서 뭉쳤다.
미 해병은 초지진에서 했던 것처럼, 덕진진의 무기들을 모두 무장해제(파괴)했다. 미군들은 광성보(the Citadel; 최후의 요새)로
진격을 계속했다. 그때 조선군은 광성보에서 재편성돼 있었다. 미군이 진격하는 동안 몇몇 조선군이 미군의 측면을
침투했으나, 최후의 요새(광성보) 가까운 두 언덕에 전략적으로 배치해둔 미군의 야포공격에 의해 또 다시 격퇴됐다.
보병의 야포를 비롯해 전함 모노캐시와 앞바다의 또 다른 4척의 전함은, 미군 상륙병이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땅과 바다에서 광성보가 있는 서쪽언덕으로 직격 포탄세례를 퍼부었다. 9개중대 해군수병과 1개중대의 해병대는
그룹을 지어 언덕을 향해 엄호와 응사를 했다.
진격명령이 떨어지자 포사격이 중지됐고 미군들은 휴 맥키(Hugh McKee) 중위의 지휘로 손돌목돈대(최후의 요새)
공격에 나섰다. 실탄을 재장전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화승총으로 무장한 조선군은, 뛰어난 성능의
볼트액션 라이플(bolt action rifles)을 든 미군이 성벽을 넘어와도 수수방관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군은
성벽을 타오르는 미군을 막으려 화승총은 제쳐놓고 돌을 던지기까지 했다. 맥키 중위는 진지안으로 가장먼저
뛰어들었는데 사타구니에 총탄을 맞았고 옆구리는 창에 찔렸다. 뒤따라 왔던 지휘관 슐리(Schley)가
동료의 복수를 했다.
마지막 15분간의 전투가 이어졌다. 미군은 어재연장군을 포함해 눈에 띄는 조선군 모두를 무찔렀고
생존 조선군들은 해협 끝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했다. 전투가 끝나자 약 350명의 조선군과 3명의 미군이
사망(맥키 중위, 3등수병 세스 앨런, 그리고 해병대 데니스 해너한 이병)했고, 9명의 미군이 부상당했으며
20명의 조선군 부상자는 포로로 잡혔다. 조선군 부상자포로 가운데는 부장(副將)도 있었다. 미군은 조선군포로들을
협상용으로 활용하려 조선관리들을 만났지만, 협상을 거부했다.
▲ 이 한장의 사진은 신미양요 당시 조선과 미국간 '격차'를 백 마디의
설명보다 더 리얼하게 웅변하고 있어 지금의 우리를 가슴 아리게한다.
사진속 상투틀고 흰옷입은 우리 조상가운데 한 분은, 당시 미국전함에
억류돼있던 조선군 포로들을 인수하러 기함 콜로라도를 방문한 영종진
(지금의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선 영종도)의 관리 3명 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미군의 빈병(샴페인이나 포도주 등을 담았던 병으로 여겨진다)을
한 아름 선물받고, 참으로 행복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 미군들에게야
'쓰레기'에 불과한 빈 술병이지만,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매우 진귀한
유리병"으로 기름이나 간장, 약을 담는 소중한 생활용품이 됐다.
그러나 이런 '물질문명의 차이' 만으로 당시 조선과 미국의 국가정체를
규정하고 우열(優劣)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화승총 하나로
"죽을지언정 무릎꿇지 않겠다" 당당하게 미군의 라이플에 맞선 강화도
방어 조선군의 정신(Spirit) 만은, 저 빈병 속에 담겼던 내용물들을 훨씬
뛰어넘는 '고귀함'으로 우리 가슴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The armed conflict
On June 10, 1871, the Americans attacked Choji Garrison on Ganghwa and met nearly no opposition; they camped nearby overnight. The next morning, they finished destroying the fort and its guns. This same fort had previously been destroyed and rebuilt following the French incursions of 1866, and was later shelled again by the Japanese in 1876 in the events leading to the Treaty of Ganghwa. The Korean forces banded together as guerrilla units but, armed with only matchlocks, and being kept in check by American 12 pound howitzers, they could not get within effective firing range. The US troops moved on toward the next objective, Deokjin Garrison (Fort Monocacy).
Americans victorious over the Deokjin Garrison.The Korean forces had abandoned Deokjin and chose to mass together further north. The Marines quickly dismantled this fortress in the same fashion as they did for the Choji garrison. American forces continued to Gwangseong Garrison (the Citadel). By that time, Korean forces had regrouped there en masse. Along the way, some Korean units tried to flank the US forces; they were checked, again, by the strategic placement of artillery on two hills near the Citadel.
Artillery from both ground and USS Monocacy and the other 4 ships offshore pounded the Citadel and the hill directly west of it, in preparation for an assault by US forces. The US troops of nine companies of sailors and one company of Marines, grouped on the facing hill, keeping cover and returning fire.
When a signal was given, the bombardments stopped and the Americans made a charge against the Citadel, with Lt. Hugh McKee in the lead. The slow reload time of the Korean matchlock rifles allowed the Americans, who were armed with superior bolt action rifles, to overwhelm the walls; the Koreans even ended up throwing rocks at the attackers. Lt. McKee, the first to make it into the Citadel, was shot in the groin and speared by the side. After him came Commander Schley, avenging his comrade.
The fighting lasted 15 minutes. Those who saw defeat as inevitable, including General Eo, took their lives by the river. In the end, about 350 Koreans and three Americans died (Lt. McKee, Ordinary Seaman Seth Allen, and USMC Pvt. Dennis Hannahan), nine Americans were wounded, and 20 wounded Koreans were captured. The Korean deputy commander was among the wounded who were captured. The US hoped to use the captives as a bargaining chip to meet with Korean officials, but the Koreans would not negotiate.
누가 예의바르고, 누가 무례한가?
당시 한양에서는 유학자 김병학이 어린 고종임금에게 "미국은 이민자끼리 모여서 만든 역사가 일천한 나라이니,
그들의 행동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조언했다. 한편 미국의 뉴욕 신문들은
"미국이 이교도의 나라와 벌인 작은 전쟁"이라 묘사했다. 조선이나 미국 모두가 상대국의 장점과 문화를
깊이 이해하려 들지않았다. 한국은 4천년이 넘는 세계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나라가운데 하나다.
미국은 사실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진 문명국가였지만, 최근에 사람을 끌어모아 급조한 나라는 아니었다.
미합중국은 현대세계의 몇몇 강력한 문화를 가진 나라의 이민자들로 이뤄진 새 영토국가로, 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하나의 국가차원을 뛰어넘어 세계 속에 우뚝 선 나라였다.
Who are the civilized, Who are not?
In Hanyang, scholar Kim Pyeong-hak advised the young King Gojong that the United States consisted merely of a collection of settlements, adding that it was not necessary to take them too seriously. Back in the US, on the other hand, a New York newspaper described the incident as America's Little War with the Heathens. Neither the Koreans nor the Americans came even close to understanding the strengths of the other's culture. One of the oldest cultures in the world, Korea had a history of more than 4,000 years. The United States, it is true, was a very young civilization, but it was not a nation formed by peoples recently banded together from a life of hunting and gathering. The United States was a new territory settled by immigrants from some of the strongest cultures in the contemporary world, and possessed strengths and an international standing far beyond its years as a nation.
강화도전쟁의 여파
광성보전투이후 조선군의 극렬한 저항을 잠시 맞닥뜨렸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미군은 한강을 거슬러올라가
한양으로 계속 진입한다는 두번째 작전을 수립했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과 수교를 거부하기 때문에, 미국정부의 외교적
목적은 달성될 수가 없었다.(그리고 미군이 한양침공을 단독결정할 권한도 없었으며 원정대 무력만으론 불가능했다).
게다가 조선에 장기체류한다고해서 그 어떤 뾰족한 해결책이 생기는 것도 아니어서,
미국함대는 7월3일 한국을 철수하고 말았다.
조선조정은 미군철수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 조선의 군사력이 월등해 미군들을 내쫒았다는 식으로 자화자찬했다.
미군 병력손실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지만 조선군은 수백명이 전사했다는 사실조차 문제가 안 되는 듯 했다.
임금권한을 대행한 대원군은 야만인(미국군)을 물리친 사실에 용기백배, 쇄국을 더욱 강하게 밀어부치는
정책을 전국에 선포했다.
▲ 신미양요의 미군이 대원군에게 준 선물 '척화비'
"서양오랑캐가 침입할 때 싸워서 물리치지 않거나 화해
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라고 적었다.
사진의 척화비는 미군이 철수하고 난 뒤 곧바로 전국에
세워졌던 척화비가운데 하나로, 부산시 강서구 성북동
에서 1993년에 발굴된 '가덕도(加德島)척화비'의 모습.
Aftermath
The Americans met stiff resistance a short time later when they made second attempt to continue up the Han River toward Hanyang. The US diplomatically was not able achieve its objectives, as the Koreans refused to open up the country to them (and the US forces did not have the authority or strength to press further). Concluding that staying longer would not produce any superior results, the US fleet departed for China on July 3.
For their part, the Koreans were convinced that it was their military superiority that drove the Americans away. It did not seem to matter that the US had suffered only a handful of casualties and their own forces had lost several hundred. The regent Daewongun was emboldened to strengthen his policy of isolation and issue a national proclamation against appeasing the barbarians.
외교 통상조약들
어쨌건 대원군 집권기간동안은 쇄국정책 유지를 위해 노력했고 1873년부터 친정(親政)체제를 구축한 고종임금도
쇄국정책을 지속하려 했다. 그러나 한국은 영원히 지구촌 외톨이로 남을 수는 없었다. 일본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하고
한양을 포격하겠다며 위협하자 조선은 1876년에 일본과 최초의 근대적인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 강화도조약은
19세기 말엽 조선이 체결한 여러 형태의 조약들에 앞선 '첫 타자'였다. 한국과 일본의 시각에서만 보면, 그동안
중국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치던 한국의 대중국 관계종말을 고하는 신호가 됐다.
몇년 뒤인 1882년, 일본인 몇명이 조선의 국지적 불안정사태(* 필자註; 임오군란)로 말미암아 살해됐고, 그걸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안전보장이 강화된 조항들을 포함한 새 조약을 체결했다. 이 제물포조약은
체결한 장소이름을 따서 붙였는데, 현재 인천시에 속하는 곳이다. 같은 해에 조선은 유럽의 여러나라와
미국과 조약을 맺었다. 1882년 4월과 5월에 미국은 중국과 조선측 실무협상자와 협의를 거쳐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우호적 통상과 항해 등에 관해 때로는 제물포조약을 참고하여 14개 항목을 체결했는데, 그 속에는 상호 우호적
관계정립과 적의 침공시 공동방어, 역량있는 한국인의 미국이민과 무역관계에서의 최혜국대우, 한국거주 미국인의
치외법권 그리고 조선내 선교활동 보장과 조선인의 개종(改宗)을 보장하는 내용이 담겼다.
한미수호조약은 1910년 일본이 한국을 합병할 때까지만 유효했는데,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 상태를 유지했다. 미군의 강화도전투이후 다음번 한국진출은 1945년 2차대전 막바지 때 였고;
그 다음번 한국에서의 군사충돌은 1950년-1953년의 한국전쟁과 관련되면서였다.
Foreign trade treaties
However, despite Daewongun's efforts to maintain isolation throughout the rest of his administration, and King Gojong's policies when his direct reign starting in 1873, continuing with the same emphasis on isolation, it was not possible for Korea to stay separated from the world forever, and in 1876, Korea established its first modern treaty, a trade treaty with Japan after Japanese ships approached Ganghwado and threatened to fire on Seoul. This treaty, the Treaty of Ganghwa, was the first in a series of unequal treaties that Korea signed near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and, at least in the eyes of Japan and Korea, signaled the end of Korea's tributary relationship with China.
A few years later, in 1882, after some Japanese citizens were killed during local unrest in Korea, Japan demanded that Korea signed a new, stronger treaty, which had several provisions protecting Japanese citizens in Korea. This Treaty of Jemulpo is named for the place where it was signed, now part of the city of Incheon. There were also treaties with European countries and the US followed the same year. Negotiated and approved in April and May 1882 between the United States, working with Chinese negotiators and Korea, the 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sometimes also referred to as the Jemulpo Treaty, contained 14 articles, which established mutual friendship and defense in case of attack, the ability of Koreans to emigrate to the US, most favored nation trade status, extraterritorial rights for American citizens in Korea, and non-interference with Christian missionaries proselytizing in Korea.
The treaty remained in effect until the annexation of Korea in 1910 by Japan, which maintained control over Korea until the end of World War II. The next US military presence in Korea took place at the end of WWII, in 1945; and the next military conflict in Korea, also involving the US, was the 1950-1953 Kore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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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강화도 한미전쟁(韓美戰爭) - 미국관점의 신미양요(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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