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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곡리(仙谷里) |
신설들이 놀던 최씨 집성촌
위풍당당하게 권세를 누리던 최씨의 아성을 쌓으며 금적산 아래 둥지를 틀고 앉은 삼승면 선곡리. 일명 선우실에서는 중요 민속자료인 최태하 가옥, 금화사, 계당 등 옛 양반고을의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세한도(歲寒圖)에 나올 듯 싶은 소나무가 운치 있게 서있는 마을 입구에서부터 절개와 지조를 지키던 양반고을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기지개를 켜며 영농준비를 하는 주민들의 바쁜 일손 속에서 선곡뜰은 봄기운을 맞이하고 있다. 55가구에 인구 151명이 대부분 60대 이상의 노인이지만 겨울이면 사랑채에 모여 장기를 두고 노인정에 모여 윷을 노는 등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선곡리는 삼승면의 서북쪽에 위치해 동쪽은 우진리, 서쪽은 수한면, 남쪽은 서원리, 북쪽은 둔덕리와 인접해 있다. 아랫말, 윗말, 상 윗말, 서편 등 자연마을 4개로 구성되어 있는 선우실은 한문으로 표기하면 선곡(仙谷)으로 ‘신선들이 놀던 골’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명과도 같이 선우실 주민들의 인심은 넉넉하고 후해 ‘내가 지금 배고프면 내 이웃도 배고플 것’이라 하여 뭐든지 나눠먹는 인정을 보여주고 있다. 선우실은 또한 제2대 대한국민당 국회의원으로 보은에서 당선, 활약한 고 최면수씨를 배출해 이목이 집중된 마을이기도 하다.
본래 선우실은 최씨 집성촌으로 마을인구의 8할정도가 화순 최씨로 구성되어 있어 한 마을이 거의 일가를 이루기 때문에 비록 파(派)가 다르더라도 집안의 제례가 있으면 주민들이 형님, 아우, 삼촌하며 함께 참여하는 한 가정같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최씨 성을 가진 주민들이 하나 둘 고향을 떠나 지금의 선우실은 과거 최씨 집성촌으로서의 명성은 사라지고 다만 남아있는 몇몇 가구에서 집성촌의 명맥을 유지하며, 가풍을 이어가고 있다.
집성촌이었던 만큼 주성(主性)인 최씨가 소유한 땅이 워낙 방대해 선우실 경작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주민들이 생산하고 있는 것은 쌀 위주의 논농사이지만 타 지역에 비해 소득이 낮아 3년전부터 몇몇 주민들이 사과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하우스 시설도 설치, 소득작목을 입식하고 인삼도 경작하는 등 다양한 작목을 입식, 소득증대를 꾀하고 있다.
화순 최씨가 선우실에 터를 잡게 된 것은 1545년 을사사화때 계당 최홍림이 휴학이 땅에 떨많은 선비들이 죽음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힐 것을 결심하여 산수좋고 물맑은 보은 금적산을 택해 낙향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후에도 자손들이 벼슬보다는 한 곳에 머무르며 학문연구에만 심취해 화순 최씨는 인근 마을에까지 번성, 집성촌을 이루었다.
계당선생이 낙향했을 때 보은읍 종곡리에서 성대곡 선생이 학문을 논하고 있을 때였기에 계당은 대곡과 자주 교류하며 성리학을 논했고, 고결한 인품과 벼슬에 연연하지 않는 선비정신으로 많은 후학을 길러내기도 했다. 계당과 대곡은 금적산의 깊은 수림(樹林)사이 계곡을 따라 오르면 보이는 곳에 작은 초당을 짓고 계당(溪堂)이라 명명한 뒤 그곳에서 주로 학문을 논했는데, 당대의 명인이었던 조식, 성운, 성제원도 이 자리에 함께 했다고 한다. 계당 옆 이름없는 잡초를 헤치고 돌담을 돌아가다 보면 넓은 바위가 눈에 띄고 그 자리에 사현석(四賢石)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어 당대 명인의 사색당파에 휘말리지 않고 학문을 연구하던 정신이 각인되어 있다.
선곡리에 있는 금화사에서는 최운, 성운, 조식, 성제원, 최홍림의 위패를 봉안해 매년 3월 초정과 9월 초정에 제를 올리고 있다. 한편 조선 고종 29년(1892년)에 건축된 최태하 가옥은 최씨 집성촌으로 번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으로 그 위태를 자랑, 중요 민속자료 제139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번성했던 옛날은 가고 이젠 후덕한 임심과 아름다운 산수 외에는 내세울 것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선우실의 현실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과거에는 학생들이 금화사 주변으로 소풍을 와서 선비들의 넋을 기리며 그들의 훌륭한 정신을 가슴에 새기기도 했는데 지금은 찾는 이가 별로 없다” 며 “금화사는 담장이 무너져 보수도 시급한 실정”이라며 관심을 촉구한다. 또한 과거 위풍당당했던 선우실이 이제는 삼승면에서도 가장 낙후된 마을이 되었다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마을 안길 포장도 덜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마을 사업도 마무리되지 않아 정돈되지 않은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90년에 진행되었던 송죽∼거현구간 군도 확포장 공사도 마무리 되지 않은 채 도중하차해 이 공사가 하루 빨리 완공되어 시내버스가 다니기를 주민들은 소원한다.
최근하 이장은 “현재 마을이 도로변과 많이 떨어져 있어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송죽리까지 2㎞를 족히 걸어야 한다”면서 정주권 개발사업에서도 선우실이 소외되고 있어 지역의 균형적인 개발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회가 다양하게 변하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 집성촌으로 환경이 좋았던 과거와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과거 번성했던 마을이 현재의 낙후된 모습으로 변모한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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