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凌霄花) 이야기◁
不道花依他樹發 强攀紅日鬪鮮明
簇蘂色依紅日近 放梢影共碧雲長
"다른 나무에 의지하여 핀다고 말하지 마소/붉은 해 끌어잡고 고운 빛 다투네/떼 지은 꽃들 빛은 붉은 해와 가깝고/늘어선 가지 그림자는 푸른 구름같이 길어라“ -王世貞(明:1526~90) ‘凌霄花’
“능소화/담벼락에/뜨겁게 너울지더니 능소화/비었다 담벼락에/휘휘 늘어져 잘도 타오르더니 여름 능소화/꽃 떨구었다 그 집 담벼락에/따라갈래 따라갈래 달려가더니 여름내 능소화(이하 생략)” -정끝별(1964~) ‘염천’
요즘 한창 제철인 능소화는 조선시대에는 ‘양반의 꽃’이라 하여 서민들은 감히 집에 심지 못한 귀한 꽃나무였다. 꽃말이 ‘명예’로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다.
凌霄는 '능운지지(凌霄之志)' 에서 온 말로, 이는 높은 하늘을 향해 웅비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凌’은 ‘두껍게 쌓인 얼음’ 뜻 외에 짓밟아 오르고 엎신여기는 뜻이 있다. 능가凌駕ㆍ능멸凌蔑ㆍ능욕凌辱의 단어가 그렇다. 그래서 능소화(凌霄花)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하늘을 능가하는 꽃이다.
또 금등화(金藤花)라고도 부르는데,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입신양명 하겠다는 청운의 꿈과 통하여 양반들에게 환영받았다. 양반들이 자기 집 마당에만 심었으니 '양반꽃' 이라 불린 이유다. 지금 사찰 담장이나 옛 기와집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 평민이 이 꽃을 심는다는 것은 지배층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곤장 맞아 죽을 일이었다.
두 번째로 담쟁이덩굴은 벽을 타고 오르고 칡이나 등나무는 나무를 감고 오르지만, 능소화는 벽을 타고 오르고 나무도 더위잡고 오른다. 고목(枯木)ㆍ生木 가리지 않고, 높고 낮음을 가려 피지 않는다. 힘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타고 오르지만, 위치의 좌우고하를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기품 있는 모습으로 피어나니 과연 그 이름에 걸맞다. 능소화가 피어 있을 때는 싱싱한 모습 그대로였다가 땅에 떨어져서야 시든다. 꽃으로써 생명을 다할 때까지 기품을 잃지 않고 언제나 당당한 모습을 유지한다.
박완서(1931~2011) 소설 『아주 오래된 농담』(2000년)에서 능소화 빛깔은 부잣집 친구 집에 핀 화려한 치장으로 부러움과 시샘의 대상으로 묘사됐다.
여름이면 이층 베란다을 받치고 있는 기둥을 타고 능소화가 극성맞게 기어 올라가 난간을 온통 노을 빛깔의 꽃으로 뒤덮었다. 그 꽃은 지나치게 대담하고, 눈부시게 요염하여 쨍쨍한 여름날에 그 집 앞을 지날 때는 괜히 슬퍼지려고 했다. (중략) 흐드러진 능소화가 무수한 분홍빛 혀가 되어 그의 몸 도처에 사정없이 끈끈한 도장을 찍으면 그는 그만 전신이 뿌리째 흔들리는 야릇한 쾌감으로 줄기를 놓치고 밑으로 추락하면서 깨어났다. /p.12~13
또한 박완서에겐 능소화는 색채에 예민한 그녀의 창작 욕구를 십분 발휘한 호재(好材)로 작용했다.
“능소화가 만발했을 때 베란다에 서면 마치 내가 마녀가 된 것 같았어. 발밑에서 장작더미가 활활 타오르면서 불꽃이 온몸을 핥는 것 같아서 황홀해지곤 했지.” /p.41
한편 능소화는 슬픈 사연이 있다. 옛날 ‘소화’라는 궁녀가 한번 王의 은총을 입었지만 그 후로 王이 그녀의 처소를 찾질 않았다. 그리움이 지친 그녀는 마침내 숨을 거둔다. 유언으로 담장 밑에 묻어달라고 한다. 능소화 꽃잎이 활짝 벌어진 것은 王이 오는 모습을 더 잘 보기 위해서라니 그녀의 단심이 불꽃처럼 활활 타오른다. 그래서 이해인(시인ㆍ수녀:1945~)님의 '능소화'가 더욱 와닿는 이유다.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은/당신이 보고 싶어 내 마음이 흔들립니다/옆에 있는 나무들에게/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나도 모르게/가지를 뻗은 그리움이/자꾸자꾸 올라갑니다/저를 다스릴 힘도/당신이 주실 줄 믿습니다/다른 사람들이 내게 주는/찬미의 말보다/침묵속에도 불타는/당신의 그 눈길 하나가/나에겐 기도입니다/전 생애를 건 사랑입니다.
'침묵속에도~기도입니다' 멋진 표현이죠. 시인의 내공의 함량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님을 그리다 생을 마감한 한 아리따운 여인의 절규가 담벼락을 타고 전해온다.
여름볕 만큼 강렬한 능소화에는 많은 얘기가 스며있다. 이 글을 읽고 바라본 능소화는 달리 보일 것이다. 이처럼 자연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끊임없이 손짓하고 있다. 올 여름 폭염속에 능소화는 또 그렇게 생을 살지어다.
*사진은 청평역 부근을 지나다 발견한 능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