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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 正 福
·1971년 7. 4. 生
·인천 성헌고등학교 졸업('90)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입학('90)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졸업('94)
·제15회 군법무관 수석 합격
Ⅰ. 들어가며
독서실 총무 생활을 하면서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던 때도 벌써 상당한 기간이 지났다. 그동안 군사훈련을 마치고 연수원에 입소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지도 몇주 지났다.
고시계에서 근무하시는 선배님으로부터 함격기를 써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처음에는 제 자신이 특별하게 내세울 것도 없고, 그렇다고 짧은 수험기간에 합격한 것도 아니어서 적지않게 망설였다. 그렇지만 20대 청춘에 있어서 중심이 되었던 수험생활을 정리하고, 수험생활을 시작하시는 분들에게 저와 같은 시행착오를 격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에서 '꾸준히 노력하면 합격할 수 있다'는 합격의 당위성을 전하기 위해 이글을 쓰려고 결심했다.
Ⅱ. 동 기
나는 인천의 중구에 위치한 조그만 섬 영종도의 넉넉지 않은 농가에서 위로 누님과 아래로 여동생 둘이 있는 집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가난한 살림으로 누님과 여동생들은 대학 공부를 엄두도 내보지 못하고 상고를 졸업해야 했고 집안 살림에 기여를 해야만 했다. 단지 나만이 외아들이라는 명분으로 인천시내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했다. 그렇지만 섬과 시내는 학력차가 심해 학업을 따라가기가 힘들었고 나는 그만 시가지 화려함에 빠져 공부와는 멀어져만 갔고 날마다 새로운 곳으로 나다니게 됐다. 시간은 흘러 대학진학을 몇 달 앞두고 법대에 가라는 아버님 말씀에 왜 가야만 하는지도 모르는체 암기과목 위주로 입시학원에 등록해 공부를 시작했으나 기대했던 대학에는 실패하였다. 철이든 지금에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때 공부를 안한 것이 후회되고 부모님과 누님, 동생들에게 미안하기 그지없다.
다행히 대학에 합격했으나 대학생활이라는 것도 금방 싫증이 났고 여기저기 놀러다니면서 1년을 보냈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짧은 군생활을 끝낸후 복학했을때 예비역이라는 신분으로 이제는 무엇인가 한번 해봐야 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으나 며칠안가 예전생활로 돌아가게 되었다. 3학년 겨울방학이 시작할 무렵 학교 선배 병표형이 신림동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하면서 생각이 있으면 같이가지 않겠느냐고 해서 여기서 하면 되지 무엇하러 신림동까지 가서 하냐고 하니 가보면 틀리다고 정색을 하기에 한번 가보기로 하고 대충 짐을 싸서 따라 나섰다.
신림동 고시촌의 고시원에 들어갔으나 아는 이도 없고(병표형과는 따로 고시원을 썼다) 분위기도 낯설어 1주일을 왔다갔다 허비한후 학원수강을 할 결심을 하고 형법을 들기 시작했다. 1달에 한과목을 끝내주는데 짧은 기간에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고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햇다. 병표형 말이 맞았다. 공부를 하려면 신림동에 와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겨울방학 동안 몇과목을 수강했고 나름대로 열심히 들었다. 개강할 무렵이 되어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니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학교로 돌아온 후로는 다시 예전의 나태한 나로 돌아가 공부는 멀어져만 갔다. 4학년 2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취업을 할것이냐, 공부를 시작할 것이냐에 대해 아버님께 전화드렸을 때 사법시험을 공부해 보라는 아버님 말씀으로 집안형편을 뒤로한 체 막연한 계획으로 다시 짐을 챙겨 신림동에 입성했다.
넉넉지 않은 살림으로 등록금과 생활비를 보내주시느라 고생하신 부모님과 동생들에게 고맙고 또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형편이 어려워 등록금 만기일을 초과하게 되어 제적될 뻔한 일도 있었으나 총학생회의 도움으로 제적되지 않은 일도 있었다. 그때에도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며 애쓰셨을 부모님을 생각하니 가슴아펐다.
Ⅲ. 긴긴 어둠을 지나서
사법시험을 공부해 보겠다는 막연한 계획으로 신림동에 들어와 고시원 방을 얻어 다시금 학원강의를 들으며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다. 겨울내내 헌,민,형 3법을 들으며 체계를 잡으려고 애썼고 영어공부는 매일 2시간씩 했고 국사, 문화사는 잠들기 전에 틈틈이 읽었다. 경제학은 혼자서 이해하기가 힘들어 학원강의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다. 드디어 1차시험 접수일이 되었으나 접수기간을 몰라 접수를 못해 1차시험에 응시해 보지도 못하게 되었다. 같은 고시원에 있는 수험생들이 모두 도시락을 들고 시험보러 갈 때 나는 도시락을 들고 뒷산으로 갔다. 내가 오죽 못났으면 접수기간도 몰라서 접수를 못했을까 하는 자책감과 시험보러 갔을줄 아시고 합격을 기원하고 계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가슴아팠다.
그해 1차시험을 치르지도 못한체 다시 1차 준비에 들어갔으나 조금씩 생활이 나태해 지고 주위에 아는 동료들이 늘어감에 따라 당구,술,비디오감상등 잡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찬바람이 불고 정신을 차려 조급한 마음에 문제집 위주로 몇회독을 한 후 시험을 치렀으나 결과는 역시 불합격이었다. 불합격이라는 통보를 받고 부모님께 전화를 할 면목이 없어졌으나 담담히 불합격을 전해드렸다. 어머님께서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해보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부모님과 동생들은 나를 위해 힘겹게 일해 고시원비, 학원비, 용돈 등 만만찮은 돈을 보내 주시는데 나는 그런 소중한 돈으로 당구나 치면서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되니 내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다.
97년부터는 시험과목이 축소 변경되어 내가 힘들어했던 국사, 문화사, 경제학이 없어졌고 배점도 기본3법이 커지게 되어 나로서는 정말 잘된 일이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는 마음으로 기본3법 위주로 차근차근 열심히 해 나갔다. 영어는 하루 한시간 정도씩 꾸준히 했고 선택과목인 노동법과 형사정책도 여름에 미리 몇회독을 했다. 나름대로 충실히 준비했고 드디어 1차시험일이 다가왔다. 오전에 기본3법을 치루고 오후에 선택과목을 치렀다. 오전 오후 모두 시간이 남았다. 시간이 남아서 몇문제를 고쳤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고친 답은 다 틀렸다. 역시 처음 선택한 답이 정답일 확률이 높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시험이 끝나고 고시원에 돌아와 같은 고시원에 계신 동료분들과 문제를 복원해 보니 어느정도는 기대해도 될 것 같았다. 드디어 발표일 초조한 마음으로 고시원 방안을 맴돌고 있을 때 같은 고시원에 계신 분이 합격자 명단을 들고와서 내가 합격하였다고 전해 주었을 때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기쁜 마음에 집에 전화를 드렸을 때 어머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고 나도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그해 1차 합격했을때가 제일 기쁜때였던 것 같다.
1차 합격이라는 들뜬 마음으로 여라날을 보냈을 때 2차시험 준비기간은 보름밖에 남지 않았고 올해는 그냥 응시한다는 마음으로 후4법을 1회독도 하지 못하고 4일간의 시험일정을 마쳤다. 다른 1차 합격생들은 1차사험을 치르고 나름대로 스터디나 학원수강을 통해 모의고사를 치루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한다. 1차합격에 대한 불안감과 합격에 들뜬 마음으로 그해 시험은 그렇게 실패했고 엄청나게 후회를 하게 됐다. 다음에 시험을 위해 학원종합반에 들어가 기본강의와 모의고사를 통해 성실하게 밀고 나갔다. 그때만 해도 사례로 2문제 나오던 때여서 약술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고 사례를 푸는 요령과 답안 작성의 기술을 익히면 합격하리라는 막연한 기대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드디어 시험일이 다가오고 시험장소인 성균관대 근처로 숙소를 옮겨 4일간의 시험을 무사히 마쳤다. 4일간 긴장으로 인해 잠도 거의 자지 못했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으므로 몹시 피곤했으나 이젠 끝났구나 하는 안도의 함숨을 쉬었다.
신림동으로 돌아와 동료들과 문제에 대해 토론해 보니 중요쟁점을 거의 다 쓴 것 같았다. 남은 일은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기만을 기원하며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드디어 발표일이 다가왔다. 기대와는 달리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고 집에 불합격을 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머님의 눈물이 눈에 선했다. 그렇지만 전화를 안할 수는 없었기에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여'하는 떨리는 어머님의 목소리. 차마 목이메어 말을 할 수 없었지만 눈물과 흐느낌으로 불합격을 알려드렸다. 어머님은 상심하지 말고 한번더 열심히 해보라고 하시며 끝내 눈물을 흘리셨다. 가슴이 메어 왔다. 뒤에 안 일이지만 뒷바라지 고생하고 마음조이던 여동생들도 많이 울었다고 한다.
두 번을 떨어지고 나니 시험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감이 없어졌고 다시 1차를 준비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나를 눌러왔다. 마음을 가다듬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오신 부모님과 여동생들을 생각하며 이대로 체념과 상실감에 빠져 세월을 보내고 있을수만은 없었고 내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두달여 남은 기간동안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 또 결심했다. 준비기간이 짧아 문제집 위주로 1순환을 하고 기본서에 밑줄친 부분을 중심으로 2회독을 하고 1차시험에 응시했다. 99년에는 문제를 가지고 나올수 있었으므로 채점해 본 결과 학원가에서 예상하는 합격선보다 점수가 더 나와서 1차합격에 대한 기대와 다시 2차시험준비를 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1차 합격자 발표가 있고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있었다. 처음 1차합격때보다는 기쁨이 덜했으나 두 번의 2차시험 응시 기회를 갖을수 있어 기뻤다. 부모님과 여동생들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어렵게 다시 잡은 기회이므로 1차 합격의 기쁨은 뒤로 한 채 다시 2차공부에 매진했다. 2년동안 모아둔 자료와 학원 모의고사를 통해 답안 작성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독서실을 학원 근처로 옮기고 무더운 날씨와 싸워가며 시험장에서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매시간 집중해서 한자한자를 읽어 나갔다.
2차 시험일은 다가왔고 집안 형편상 시험장소인 성균관대 근처에 방을 얻을수가 없었고 후배인 승익군의 배려로 그의 승용차로 4일간 시험을 보러 다녔다. 40분정도 걸렸으나 차를 안타다 타서인지 몹시 피곤했으나 그렇게 나를 위해서 성심껏 시간을 내준 후배에게 고맙다는 마음을 전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농협에 다니던 첫째 여동생이 아버님의 농가 부채 미상환을 이유로 시달리가다 결국 그만두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농협에 다니면서 집안 살림살이와 못난 오빠 고시원비 보내 주느라 이쁜 옷한번 못사입었을 것과 그러한 일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게 된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 질것만 같았다.
시험은 끝났지만 막연히 합격자 발표만 기다리며 세월을 보낼만큼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가세가 더 기울어 편안히 고시원비에 학원비 내며 공부에 전념할 수 없었고 고시원비내는 날이 두렵게 되었다. 공부도 어느정도 경제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고 가장 큰 근심거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즈음 이런 사정을 알게 되신 동문 정성도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의 도움으로 다시 경제적인 어려움없이 공부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그중 일부는 집에도 보내 드렸다). 그후로 몇 년을 합격하면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라며 아무런 대가없이 도와주셨다.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왔고 그날 나는 예비군훈련을 받고 있었다. 후배 경태가 전화로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점수 확인결과 총점2점이 모자랐다. 나는 실망감에 빠졌으나 한번의 기회가 더 있고 든든하게 후원해 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안도감과 내년에는 꼭 붙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집에서도 한번의 기회가 더 있으니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해보라는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학원 모의고사반에 등록해서 매일매일 모의고사에 최선을 다했고 같은 고시원에 있는 분들과 쟁점별로 토론을 하여 나름대로 정리를 했으며 약술에 대비해 출제가능한 예상문제를 선별해 중요 쟁점을 숙지하려고 노력했다.
드디어 2차시험이 다가왔고 성균관대에 다니는 후배 희동군의 배려로 성균관대 근처에 있는 그의 원룸을 빌려 후배인 찬우군의 세심한 뒷바라지를 받으며 4일간의 시험을 무사히 치렀다. 신림동으로 돌아와 학원가의 예상답안을 보니 어느정도 합격에 대한 기대감이 생겼다. 하지만 만에 하나 떨어지면 어떻에 하나 하는 생각에 막연히 발표만을 기다릴수는 없었고 집안 형편상 신림동에서 편안히 있을수는 없었다. 떨어지는 경우를 대비해 취업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여기저기 원서를 내 보았으나 IMF이후여서 경기가 안 좋을 때라 취업하기도 쉽지 않았다. 면접도 몇군데 보았으나 뽑아 주지 않았고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 고시원에서 나와 학교 선배인 성숙이 누나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그렇게 배려해주신 누나에게 감사드린다).
시간은 흘러 합격자 발표일이 되었다. 서점가에 명단이 붙었고 가슴 조이며 명단 앞으로 다가갔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내 이름을 찾았다. 몇 번이고 다시 보아도 내이름은 없었다.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4번이나 떨어졌다는 사실보다는 집에서 가슴조이며 전화를 기다리실 부모님과 여동생들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방에 들어와 누었다. 몇시간이 지나 집에서 전화가 왔다. 아무말 없이 수화기를 들고만 있었다. 이미 눈치를 채신 듯 어머님께서 '고생했다 너무 상심하지 마라'는 말씀을 하셨고 동시에 나는 엉엉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며칠을 방에서 나가지 않고 누워있었다. 집에서 할머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왔다. 몇 달을 몸져 누워계셨다가 내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 뵙지도 못했는데 정말 합격이라는 큰 기쁨을 드리고 싶었는데 말이다. 장례식을 치르면서 엄청난 눈물을 쏟아냈다. 서러웠다. 아무런 의욕도 없었고 계획도 서질 않았다. 장례식이 끝나고 부모님과 누님 여동생들이 모두 모였다. 그동안 내가 공부하느라 온식구들이 가슴조이며 살았고 더 이상 내가 고생하는 것 보고 싶지 않으며 더 이상 경제적인 뒷받침도 해줄 수 없으니 이제 그만 시험을 접고 평범하게 살라고 하셨다. 눈물이 자꾸만 나왔다. 아무런 대답도 드리질 못했다. 더 이상 합격할 자신감도 나질 않았다. 며칠만 생각해 본다고 말씀드리고 신림동으로 돌아왔다. 또 며칠을 누워있다가 동문이신 정성도님을 찾아 뵈었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해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하고 싶으면 끝까지 해보라고 하셨다. 간신히 눈물을 참고 인사를 드린후 신림동으로 돌아와 집에 전화를 드렸다. 한번만 더해보고 싶다고 그리고 정말이지 죄송하다고....
다시 한번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두달여 남은 1차 시험에 대비해 독서실을 다니면서 하루하루 매진했다. 그러나 4번이나 2차시험에 떨어지고 나니 1차시험에 대한 두려움도 만만찮게 컸다. 1차 시험장에 들어섰고 문제지를 받았는데 긴장감이 컸는지 문제가 잘 읽어지질 않았고 오전 기본 3법과목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시험이 끝나고 신림동으로 돌아와 채점을 해본 결과 예상합격선보다 평균 2점이나 모자랐다. 사법시험운은 여기서 끝나는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부모님과 여동생들 볼 면목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합격자 발표를 기다렸으나 역시 명단에 내 이름이 없었다. 고개를 들고 거리를 지나가기가 부끄러웠다. 결국 차선으로 생각했던 군법무관 2차 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정말이지 이게 내게 남은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동안 공부해온 자료와 학원모의고사를 통해 반복에 또 반복해서 정리에 들어갔고 드디어 2차 시험일이 다가왔다. 학원에서 주선해준 모범택시 편으로 4일간의 시험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매 과목마다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을 답안지에 현출시키려고 노력했다.
시험은 끝났고 한달을 아무 생각없이 쉬었다. 거쳐를 고등학교 동창생인 영준이와 학종이 전세집으로 옮겼고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집안 형편상 아무일 없이 발표만 기다릴수 없어 독서실 총무생활을 시작했고 불안한 마음에 그중간에 공기업체 시험을 봐서 합격했다. 그로부터 며칠후 합격자 발표일이 도래했고 친구 영준이로부터 내가 붙었다는 말을 듣고 그길로 달려가 명단을 보았다. 정말 내 이름 석자가 있었다. 이제야 말로 긴긴 내 수험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너무 기뻤고 멍하니 서서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참이 지난뒤 집에 전화를 드렸다. 어머님도 우셨고 여동생들 모두 울었다고 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합격할수 있다는 의지와 신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 붙는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 기쁘기 그지 없었다.
Ⅳ. 공부방법에 대해
1. 1차시험
사람의 외모와 성격이 모두 다른 것처럼 공부방법에는 왕도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공부방법을 취해 꾸준히 밀고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1차시험이 객관식이라고 하여 문제집 위주로 공부하는 것은 전반적인 체계를 세우고 이해하는데 부족하므로 기본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기본서를 일정분량을 먼저 읽고 그만큼 문제집으로 풀고난 다음 다시 기본서로 확인하는 것이 이해력을 높이는 효율적인 공부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처음에는 시간이 많이 들어서 힘들겠지만 한번만 그렇게 하고나면 그다음부터는 훨씬 수월하게 경제적으로 할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사람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시험전 일정기간을 정해서 전과목을 빠른시간내에 반복 학습함으로써 자신이 공부한 것을 생생하게 정리하는 것이 꼭 필요한 방법이라고 본다.
2. 2차시험
후4법은 양을줄여 단권화하는 것이 중요했고 모의고사를 많이 풀어서 자신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답은작성의 기술을 익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례문제보다 약술형에서 점수차가 많이 난다고 하므로 중요약술 문제를 추려 목차정도를 암기하여 두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2차 과목들은 그양이 방대하여 마지막 단기간에 정리하기 어려우므로 서브노우트를 하는 것은 어렵더라도 단권화를 해 두는 것이 필요하나 완벽을 기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므로 처음부터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말고 회독수를 늘려가면서 보충하는 방법이 좋을 것 같다.
또한 4일간의 시험기간은 1년의 수험기간보다 더욱 중요하므로 자신의 실력을 수험장에서 충분히 발휘할수 있도록 체력을 길러두는 것이 실력못지않게 중요한 일임을 강조한다.
Ⅴ. 수험생에게 드리는 글
앞에서 언급했듯이 1차 시험의 경우 마지막 단계에서는 전과목을 빠른 시일안에 반복해서 기억력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2차시험의 경우 1차시험에 합격한 그해에 최대한 열심히하여 2차시험에 끝가지 응시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만 다음해 시험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수 있고 나름대로의 준비를 할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합격에 대한 자신감과 하고자하는 의지를 가지고 성실히 매진하다보면 합격의 문이 열린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오늘의 고통은 분명 내길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본다.
오늘도 도서관 구석자리에서 영광의 그날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계신 수험생 여러분의 건강과 합격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Ⅵ. 앞으로의 계획과 감사의 글
1. 앞으로의 계획
군사훈련을 마치고 연수원에 입소하여 생활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 앞으로의 포부를 밝히자면 군법무관으로서 세심한 법률조언과 군기강 확립, 군권익보호에 힘쓰고 전쟁법과 국제관계법을 연구하여 우리군의 위상과 국익을 위해 미력한 힘이나마 더하고 싶고 작
게는 그동안 뒷바라지 하시느라 고생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열심히 살며 어려운 분들과 함께 하고 싶다.
2. 감사의 글
우선 읽기힘든 저의 답안에 대해 후한 점수를 주신 시험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모교의 교수님들께 감사드리며 모교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긴 수험생활동안 묵묵히 뒷바라지 해 주신 부모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그동안 많은 후원을 아끼지 않으신 분들게 감사드린다.
또한 나를 믿고 10여년간 곁에 있어준 약혼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끝으로 이글이 나의 의도대로 수험생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합격기 쓰기를 권고하신 선배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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