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겔 마이스터.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단어죠?
풀어보자면 오르겔을 만드는 명인 또는 장인을 일컫는 말인데요, 오늘 공감 인터뷰의 주인공은 바로 현역에서 활동 중인 한국 최초의 오르겔 마이스터,
홍성훈씨입니다.
* 오르겔(Orgel)은 파이프 오르간의 독일어로,
오르겔바우마이스터(Orgelbaumeister)는 최고의 파이프 오르간 건축가를 뜻합니다.
 설계에서부터 재료 선택, 디자인까지 오르겔 제작에 관한 모든 매커니즘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경기도 양평의 두물머리를 조금만 지나면 공기 맑고, 경치 아름답기로 유명한 국수리가 나오데요, 홍성훈씨의 작업실은 바로 이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홍성훈 오르겔바우'는 한국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단 하나뿐인 오르겔 제작소입니다.
 경기도 양평 국수리에 위치한 '홍성훈오르겔바우'.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것처럼 주변 경치가 아름답다.
“처음엔 클래식 기타를 배우려고 갔었죠. 오르겔을 만드는 분야가 있을 거라곤 생각을 못했거든요. 지인의 소개로 오르겔 바우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땐 아름답고 무게감 있는 오르겔의 소리가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물론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이 도전을 부추겼지만요.(웃음)”
13년에 걸친 독일 마이스터 과정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이곳에 터를 잡기까지 또 다시 5년 여의 시간이 흘렀지만 어떤 기다림도 오르겔을 향한 그의 열정을 꺼뜨릴 순 없었습니다. 이렇게 오로지 한 길만을 걸어왔을 것 같은 그에게도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며 진로에 대한 막막함으로 좌절하던 때가 있었다면 믿을 수 있을런지.
“제 전공은 산업공학입니다. 뭐… 특별히 공부를 잘했던 것도 아니고, 졸업했다고 어디 불러주는 곳도 없고...(웃음) 그렇다고 남들이 다하는 그런 건 하고 싶지 않았어요. 진짜 나의 인생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피아노부터 기타, 대금, 탈춤 등 여러 가지를 배웠죠. 나중엔 뮤지컬 단원으로 무대에 서기도 했구요. 독일로 떠나기 전까지 서울시립가무단원으로 활동했을 정도니까요.”
오르겔을 만나면서 그의 방황은 끝이 났는데요, 그가 인생을 건 오르겔바우어는 독일의 인재양성 제도인 '마이스터 제도'의 한 분야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도입한 마이스터고의 롤 모델이기도 하고요.
마이스터 제도란?
'마이스터(Meister)'란 영어의 마스터(master)를 뜻하는 독일어로, 말 그대로 전문가, 대가, 장인을 일컫는다. 한마디로 현장에서 경험과 기술을 쌓아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 독일에서 마이스터가 되려면 우선 기초교육과정(9년)과 직업훈련원(3년)을 거쳐 기능사 시험에 합격한 후 직장에서 3년의 경력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소정의 교육을 받은 다음 자격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러한 도제식 직업훈련의 최고 과정을 졸업한 마이스터는 법적으로 전문적인 직업을 보장받으며 장인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된다. 마이스터 제도는 소시지, 맥주 제조, 자동차 수리, 기계, 배관, 금속재련, 목재가공, 꽃꽃이 등 수많은 분야에서 운영되고 있다.
“4년 반의 도제 과정을 거치면서 오르겔바우어가 생각했던 것만큼 고상한 일이 아닌 걸 알게 됐어요. 나무를 쌓아 올리고, 기계로 깎고, 톱밥을 치우는 일은 예사죠. 한마디로 목수예요.(웃음) 여기에 목공에 주물, 구조, 역학, 음향, 디자인 등 다양한 기술과 이론까지,
오르겔 제작은 하나의 건축물을 만드는 것과 같은 예술행위예요.”
도제 과정을 끝내고 마이스터 과정에 입문하고자 했을 때 시위원회가 열릴 만큼 독일 정부는 완고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독일의 전통 문화를 계승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들여 마이스터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외국인의 입학을 허락한다면 국가에서 돈을 줘가며 외국인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꼴이 되기 때문이죠.
“마이스터 과정에 지원했을 때 시에서 저를 추방을 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놨었죠. 우연히 세계적인 오르겔 제작 회사 클라이스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그 회사의 도움으로 마이스터 과정을 밟을 수 있었어요.”

 '천상의 악기'라 불릴 만큼 아름답고 웅장한 소리를 내는 오르겔의 제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람'이다. 파이프 구멍의 크기, 길이 등에 따라 전혀 다른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오르겔 제작에 있어 정교한 설계와 섬세한 손길은 가장 기본적이며 필수적인 요소이다.
 현재 작업 중인 오르겔의 뼈대. 정교하고 섬세한 오르겔 제작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굉장히 힘든 작업이다. 1년에서 1년 반이 걸리는 오르골 제작을 끝내고 나면 말 한마디도 할 수 없을 만큼 온 몸의 기운이 빠져나간다고 한다.
홍성훈 마이스터는 오르겔을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 말합니다. 그가 제작하는 오르겔을 작품 번호로 남기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인데요, 그는 지금 꿈꾸고 있습니다. 오르겔을 통해 우리의 문화를 전파하는 날을 말이죠.


 오르겔은 규모에 따라 그 크기가 다른데, 대형 오르겔의 경우 2500~5000개의 파이프가 사용된다. 위의 사진은 구로 아트밸리의 파이프 오르간 작업으로 기존 오르겔의 고정관념을 깨고 센서를 통해 소리를 낸다.
“오르겔이 서양의 악기라고 하지만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시아의 악기예요. 터키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거니까. 제 꿈은 우리 전통의 소리와 디자인이 담긴 오르겔을 만드는 겁니다. 오르겔을 만들다 보면 여기에 들어가는 파이프들이 우리의 피리와 원리가 같음 알게 되요. 피리뿐만 아니라 퉁소, 대금 등 오르겔에 우리의 소리를 넣고, 전통적인 문양을 형상화한 디자인을 가미하는 거예요. 어때요? 오르겔로 지금 우리의 문화를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죠?(웃음)”
오르겔 전면에 드러나는 파이프와 옥타브별로 정리되어 있는 나무 파이프들. 하루의 일이 끝나면 이렇게 정리를 해 둬야 작업을 진행하기가 편하다고.
오르겔은 물론이거니와 제작소에서 사용되는 탁자 하나까지 모두 제 손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그에게 마이스터고에 관한 얘기를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단호했는데요, 우리나라에 특화된 교육이 있었다면 분명히 자신은 독일로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어느 대학이나 경영학과가 있잖아요. 처음 독일에 갔는데 경영학이 그냥 경영학이 아니었던 거예요. 음악 경영, 미술 경영 등 다양한 경영학이 있는 겁니다. 우린 아직까지 진로를 고민하는 청소년들에게 다양한 길이 있음을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마이스터고는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흔히 30대에 겪는 사춘기가 더 무섭다고들 하죠.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드는 '인생과 진로'에 대한 고민이 더 심각하다는 이야기인데요.
"독일에선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적성에 맞는 진로가 결정되요. 실제로 현장에 가보면 20대에 벌써 전문적인 기술자로 몇 년씩 경력을 쌓은 거예요. 빨리 자신의 적성을 찾아, 그에 합당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간을 낭비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기 위해선 적성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하고, 진로 결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시스템과 국가적 지원이 필요하죠."
20만 가지 이상의 소리를 내는 오르겔의 제작은 '바람의 길'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인생에 있어 '꿈의 길' 만들어 온 마이스터 홍성훈. 그의 바람대로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새로운 오르겔 문화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길, 그가 만들고 있는 '꿈의 길'이 전 세계로 이어져 가길 바래봅니다.
홍성훈 마이스터의 작품
성 루드게루스 성당(1988) / 독 일 성 스테파누스 성당(1989) / 뮌스터 성 마리아 임 캐피톨(St. Maria im Kapitol:1990) / 쾰 른 성 프리돌린(St. Friedolin Muenster) 대성당(1991) / 바드 제킹엔 성 빌리발트(St. Willibald) 성당(1992) /바이센부르크 테네 콘서트 홀(1992) / 그리이스 라이캬빅 대성당(REYKJAVIK Muenster:1993) / 아이스랜드 르히데스가덴 대성당(1993)/독일 광림교회(1994) / 서 울 서울교회(2003) / 서 울 외 17대의 오르겔 |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글에 오류가 있어 알려드립니다. 홍성훈씨는 한국 최초의 마이스터가 아닙니다. 홍성훈씨가 마이스터가 되기전이 1994년에 이미 한국인으로 처음 마이스터가 되신분이 있습니다.
물론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시작한다는 사실이 도전을 부추겼지만요.(웃음)” 이 부분은 더욱 아니네요. 그 후 홍성훈씨 이후에도 또 한명의 마이스터가 탄생했구요. 뒤 늦게 글을 보게되어 글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