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齋洞書院(재동서원)과 西洞祠(서동사) ; 高興(고흥)
( 礪山 원윤공파 동주공 後人 德宇 宋政永 添削 )
● 위치(소재지) : 전라남도 고흥군 大西面(대서면) 禾山里(화산리) 16번지.
❏ 창건연도 : 1785(정조 9)년. ❏ 문화재지정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55호.
❏ 배향인물 : 이곳 재동서원에는 礪山 宋氏(여산송씨) 忠剛公(충강공) 宋 侃(송 간)을 주벽으로 하여 梅月堂(매월당) 金時習(김시습;1435~1493)을 同配(동배)하고, 宋 大立(송대립;1550;명종5~1597;선조30년), 宋 諶(송심), 宋純禮(송순례;1528~1597), 宋希立(송희립;1553~1623), 宋 建(송건;1558~1592), 宋商輔(송상보), 宋得運(송득 운), 宋碩隆(송석융), 宋弘淵(송홍연), 宋眞夫(송진부), 宋明圭(송명규), 宋粲文(송찬 문), 宋廷奎(송정규). 15위를 享祀(향사)하는 곳이다.
❏ 연 혁 = 三綱과 五倫은 生民의 紀綱이요 社會의 棟樑이다. 그러므로 忠孝大節을 세운 者는 반듯이 永世崇慕하고 祠宇에 配享하는 것은 人紀를 바로잡고 社會에 오래 維持하게 함이니 이는 선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했다. 1782(正祖;壬寅)년 太學館(태학관)에서 ‘유생 한덕보’등이 전라 四掌管(사장관)에 端宗節臣(단종절신) ‘서재 송간’을 위한 祠堂(사당)을 세워 配享(배향)하라는 通文을 보내어 祠宇 建立(사우건립)을 發議한데서 비롯되어 光州, 羅州, 南原儒生等(광주,나주,남원유생등) 內外 儒林들의 公論(공론)과, 興陽 儒生(흥양;고흥 유생)들의 노력으로 건립이 결정되었으며, 1785(정조 9)년 鄕儒(향유)의 公論으로 최초 건립 당시 여산 송씨 宋 侃(송간)을 주벽으로 하고, 宋大立(송대립), 宋諶(송심)과 고흥 유씨 ‘성재 柳濯(유탁), 영광 정씨 고주 정연희’ 등의 4위를 배향 봉안하기로 하고 두원면 雲谷(운곡)에 건립 운곡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며, 1793년 ‘서재 송간’에게는 資憲大夫 議政府 左參贊兼 知 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자헌대부,의정부,좌참찬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을 贈職(증직)하고 諡號(시호)를 忠剛(충강)이라 내려졌다. 1796(정조 병진)년 宣諡(선시)를 위하여 宋侃(송간)의 遺居址(유거지)인 동강면 마륜리 西齋洞(서재동)에 운곡사 강당을 뜯어다가 建祠(건사)하여 移安하고 齋洞祠(재동사)라 하였었고, 宣諡(선시)는 1797년에 하였는데 諡號決定節次가 마무리 되면 諡號敎旨(시호교지)를 傳達하는 ‘선시’행사(延諡;연시)가 進行되는데, 보통 吏曹(이조)에서 賜諡官(사시관)이 派遣(파견)되어 諡號를 내리는 宣諡行事(선시행사)에는 隣近(인근)의 현감, 현령들과 鄕儒와 유림대표들이 참여하며,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그 지방의 최고 官吏(관리)에 의해 시호교지를 읽고 받들어 神位 앞에 펼쳐놓으면서 諡函(시함)에 안치된다. 諡號(시호)맞이 행사에는 막대한 經費와 인력이 소요되었었는데, 家內, 집안 門中의 費用으로 충당되나 행사 자체가 鄕中(향중)의 큰 잔치였으므로 財力있는 隣近士族(인근사족)들의 觀心(관심)과 扶助(부조)의 답지로도 이루어 졌었다.
1801(순조 1)년 송건, 송순례, 송희립을 追配하여 “一門 六忠祠”로 불리었다.
1823년 사액상소로 고흥의 재동사는 端廟節臣(단묘절신) 충강공 서재선생과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임진왜란,병자호란) 兩亂(양난)의 忠臣(충신)을 모신 곳이니, 그 체통이 다른 祠堂과 다르므로 근처주민에게는 雜役을 면제하여 崇奉(숭봉)의 道를 극진히 하라하고 완문을 내려 院生 30명, 保奴(보노) 30명, 院僕(원복) 10명을 永久確保(영구확보)하여 시행하라고 하였는데 本營所藏(본영소장)의 祠院錄(사원록)에 登載(등재)되어 있다.
1833(순조 33)년 송상보(1564~1597), 송득운(1570~1633), 송석융(1614~1733)을 추배하여 世忠祠(세충사)라 하였고, 태학관과 전국 유명서원의 義合(의합)으로 1846(헌종 12)년 구인득인의 의를 함께한 동지이자 후학인 매월당 김시습을 합설 봉안(同配;동배)하였다.
1848년에는 院儒(원유)들의 改號上疏(개호상소)로 禮曹(예조)에 의해 「서동사」로 改稱(개칭)하였고, 1868년 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 때 훼철하였다가 곧 이어서 撤去(철거)하지 말라는 「勿毁(물훼)」의 令과 敎旨가 있었으나 사정상 이내 복원하지 못했었다.
1956년 광복 후에 철거 된지 89년 만에 당시 「勿毁(물훼)」의 令을 이루지 못했던 恨을 씻고 옛터의 건너(東)편이 되는 지금의 현 위치에 儒林(유림)의 뜻을 모아 옛 儀式으로 다시 지으면서 公의 諡號를 따서 忠剛祠(충강사)이라 하였었고, 湖南儒林들의 共同發議로 齋洞書院(재동서원)이라 稱(칭)하였다. 1972년에 송홍연, 송진부를 추배하였다. 1980년에 같은 境內에 창효사를 건립 효열을 분리하여 송석융, 송명규, 송찬문, 송정규 등을 배향하고 있다. 1982년 梅月堂을 다시 同配하여 원래대로 西洞祠(서동사)라고 하였다. 本齋인 西洞祠에는 ‘宋 西齋’ ‘金 梅月堂’과 임란왜란 병자호란의 忠臣 9위를 배향하고, 彰孝祠에는 旌閭孝子(정려효자) 4위를 모시였다. 그 외의 건물로는 東齋인 求仁齋, 西齋로 明義齋, 內,外三門, 유물전시관, 洋乎門(양호문)과 書院廟廷碑譯文碑(서원묘정비역문비), 그리고 端宗 招魂七賢臣 事蹟碑(단종초혼칠현신사적비)가 있다. 書院 境內 앞뜰에는 고례에 행하던 ‘相揖禮圖(상읍례도)’가 새겨져 있으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실제로 향사의 입제일이나 행사때는 행하고 있다. 후학들이 公을 讚하는 글들에는 동방의 역사에서 과연 一門에서 대를 이어 이렇게 많은 忠賢忠臣들이 나올 수 있다 말인가? 이는 평소 宋門 傳統의 가르침의 德이다. 라고 칭송했다.
▣ 祭享日(제향일)은 음력 3월, 9월 初丁日(초정일=첫번째 丁日)이며 광주, 전주등 近遠距離(근원거리)의 內外 儒林(내외유림)과 著名人士(저명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 서원을 구성하는 건물의 배치
입구에는 3칸의 외삼문과 내삼문이 있으며, 내삼문에는 재동서원이라는 현판과 進修門(진수문)이라는 현판이 있다. 前面에 강학공간, 뒤에는 제향공간이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講堂인 4칸의 敬孝齋(경효재)는 書院 境內의 동북쪽, 東. 西齋와 분리되어 一廓(일곽)을 이루는 곳에 위치하여 별도로 낸 洋乎門(양호문)을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다. 내삼문을 통해 제향공간에 들어서면 西洞祠(서동사)와 彰孝祠(창효사)가 각각 동쪽과 남쪽에 ㄱ자형으로 서로 직교하여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4칸씩의 東齋인 求仁齋(구인재)와 書齋인 明義齋(명의재)가 있다.
本齋인 西洞祠(서동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며,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며, 동·서재는 정면 3칸 규모의 팔작집이다. 외딴 곳에 위치하여 근래에 수많은 書籍들과 유물들이 盜難(도난)을 당하였는데, 이제는 그나마 도서와 귀중한 물건들은 별도로 보호하는 시설속에 보관 비치하고 있다. 당시 송희립장군의 칼과 옷은 잡으면 바스라질 듯하여 손을 대지 못하고 옛날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 유물관 1동, 다목적 강단 1동, 여산 송씨 임정양란(임진왜란,정유재란)의 44인 공 신비등 추가건축물과 비각과 비석들이 있다.
● 배향인물 (서동사 11위와 창효사 4위)
○ 西洞祠(서동사).
1) 忠剛公(충강공) 西齋(서재) 宋 侃(송 간;1405~1480).
재동서원의 主壁(주벽)으로 조선전기의 忠臣(충신). 本貫(본관)은 礪山(여산). 여산출신. 號는 西齋(서재). 諡號(시호)는 忠剛(충강). 開城元尹(개성원윤)의 6세손이며, 할아버지는 고려 중랑장 仁忠(인충)이며 良瑨(양진)의 아들이다. 世宗朝(세종조)에 登科(등과)하여 ‘세종·문종·단종’의 3朝를 섬겨 벼슬이 刑曹參判 同知 中樞 府使(형조참판 동지 중추 부사)로 嘉善大夫(가선대부)에 이르렀다. < *= 참고로 釜山東萊(부산동래)의 入鄕祖(입향조)이시며 中始祖가 되시는 東洲公 克明(동주공 극명)님은 礪山 始祖의 8世손(=개성원윤의 3세손)이 되시며 충렬사의 宋門 功臣들은 동주공의 3세에서 7세손들이시다. 동주공은 충강공의 작은집 할아버지가 되신다.>
1455(단종 乙亥)년 王命으로 八道 都鎭撫使(팔도도진무사)로 남쪽으로 순시하고 巡撫途中(순무도중)돌아오는 길에 소위 癸酉靖難(계유정난)으로 단종이 簒位(찬위)로 遜位(손위)하고, 영월로 쫓겨 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로 고향 여산 先塋下로 돌아가 稱病(칭병)하고 杜門不出(두문불출)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고 지내다가 노산군으로 降封되어 영월로 안치된 소식을 듣고 義憤(의분)을 참지 못하여 목숨을 걸고 즉시로 그곳으로 가서 千辛萬苦(천신만고)끝에 단종께서 子規樓(자규루)에 오르신 기회를 얻어 당시 세조인 수양대군이 아닌 영월의 단종에게 가서 巡撫復命을 하고 失聲痛哭(실성통곡)하다가 禁軍에게 變을 당하니 한 老吏가 救援하여 무사히 여산으로 돌아왔다. 끝내 舊主 단종이 살해당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서슬이 시퍼렀던 당시, 깊은 산 속 계룡산 동학사로 들어가 梅月堂 金時習(김시습), 淨齋 曺尙治(조상치), 漁溪 趙旅(조여), 仁齋 成熺(성희), 望越菴 李蓄(이축), 逋翁 鄭之産(정지산),등 六賢과 함께 死六臣의 壇위에 品字形으로 上王壇(상왕단)을 쌓고 당시 嚴興道가 奉行한 御袍(어포)로 招魂祭(초혼제=초혼하여 告由文을 지어 鎭魂祭;진혼제)를 모시고, 3년 喪(喪服)을 마치고 지냈는데, 엄흥도등과 함께 服喪(복상)한 八節(팔절)로 또한 端廟招魂七賢(단묘초혼칠현)으로 崇尙(숭상)받았으며, 1468(세조 12)년에는 姦臣(간신)들의 탄핵으로 그 忠臣들이 사방으로 흩어질 때, 가족친지들과도 연락두절하고 남쪽끝인 興陽(흥양=고흥) 馬輪村(마륜촌) 要而谷에 隱居하여 夜間에는 後學들을 돌보고, 山嶝(산등)에 西山亭을 세워 朝夕으로 올라가서 北向拜哭(북향배곡)하며 舊主를 思慕하며 숨어 지냈다. 항상 술에 만취하여 돌아다니기도 하며 통곡하기도 함으로 모두들 미쳤다고 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生涯(생애)를 마쳤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곳을 西齋洞(서재동)이라 한다. 훗날 左參贊(좌참찬)에 追贈(추증)되었고, 계룡산 東鶴寺 肅慕殿(숙모전)의 招魂閣(초혼각)과 東學祠, 東學書院, 雲谷書院 및 숙모전의 東廡(동무)와 세충사(=현재 재동서원의 서동사)에 祭享(제향)되었었다. 1818(선조 戊寅)년 墓祀日(묘사일)에 床石앞에 겨울 고사리가 발견되어 癸未(계미)까지 6년에 걸치니 遠近(원근)의 士林(사림)이 詩와 文으로 稱頌(칭송)하며 西山採薇(서산채미)의 義를 세겼다. 그래서 이곳 院洞을 薇院(미원)이라고 稱했었다고 한다. <*=참고로 앞의 七賢臣과 服喪한 山僧明禪 月岑(월잠), 雲波等이 함께 會議하여 每年 三月 十五日 招魂祭日과 十月 二十四日 기일을 春秋享으로 定하니 지금도 지금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실을 동학사 雲波스님이 일일이 기록하여 樑間(량간;대들보)에 保存하였던 것이 1828(순조 戊子)년에 栗寺 경문의 들보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었다.>
2) 淸簡公(청간공) 梅月堂(매월당) 金時習(김시습,; 1435~ 1493).
조선 초기의 학자·문인, 생육신의 한 사람. 본관은 江陵(강릉). 字는 悅卿(열경), 호는 梅月堂(매월당)·淸寒子(청한자)·東峰(동봉)·碧山淸隱(벽산청은)·贅世翁(췌세옹), 법호는 自號로 雪岑(설잠). 諡號는 淸簡이다. 서울 출생, 3세에 능히 詩를 짓고 5세에 中庸, 大學을 通讀하여 世人이 神童이라 하였다고 한다. 三角山 重興寺에서 修道中 수양대군이 王位를 찬탈한 消息(소식)을 듣고 3일간을 문을 잠그고 痛哭을 하다가 書冊과 著述(저술)을 모두 불사르고 머리를 깍아 중이 되어 周遊天下(주유천하)에 나섰다고 한다.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狂人(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그는 배운 바를 실천으로 옮긴 知性人(지성인)이었다. 율곡 李珥(이이)는 그를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매월당집≫에 전하는 <上柳襄陽陳情書(상류양양진정서)>, 尹春年(윤춘년)의 傳記(전기), 이이의 전기, 李耔(이자)의 序文(서문), ≪莊陵誌(장릉지)≫·≪해동명신록≫·≪연려실기술≫등이 있으며 부산 동래 상현당에도 影幀(영정)이 모셔져 있다.
3) 宋大立(송대립;1550;명종5~ 1597;선조30년).
朝鮮武將(조선무장). 字는 信伯(신백), 본관은 礪山(여산), 현감 寬(관)의 아들로 宋侃(송간)의 六世孫이다. 興陽(흥양=고흥)출신. 經史(경사)에 밝고 武藝(무예)에 뛰어났다. 1594(선조 27)년 임진왜란 중 武科(무과)에 급제, 당시 智島萬戶(지도만호)로 있던 아우 宋希立(송희립)과 함께 統制使(통제사) 李舜臣(이순신)의 휘하에서 참모로 되였다가 都元帥(도원수) 權慄(권율) 밑으로 옮겼다. 1597(선조 30)년 丁酉再亂(정유재란)이 일어나자 倡義別將(창의별장)이 되어 권율의 휘하에서 戰功(전공)을 세우고, 고향인 흥양에서 많은 義兵(의병)을 모집하여 奮戰(분전)하며, 전투에서 수많은 적을 殲滅(섬멸) 무찔렸으나 伏兵(복병)을 만나 賊彈(적탄)에 장렬하게 戰死(전사) 殉節(전사순절)했다. 후에 兵曹參議(병조참의)에 追贈(추증), 金山大捷壇(금산대첩단)에 配享되고 흥양의 世忠祠(세충사=현재의 재동서원 서동사)에 祭享(제향)되었다. 希立(희립)의 兄이다.
4) 忠襄公(충양공) 宋純禮(송순례,; 1528~1597).
조선중기의 武臣(무신). 本貫(본관)은 礪山(여산). 字는 文伯(문백). 宋侃(송간)의 玄孫(현손)이다. 1566(명종 병진)년에 登第, 武科(무과)에 급제하였고, 全州鎭 兵馬節制都尉(전주진 병마절제도위)가 되고, 1583(선조 16)년 阿山鎭(아산진)을 지킬 때 여진(야)인들이 侵入(침입) 쳐들어오자 이들 敵將(적장)을 사살하고 敵軍들을 擊退(격퇴)하여 동방의 飛將軍(비장군)이라 불렸다. 이 해 尼湯介(이탕개)의 침입(南侵)을 물리쳐 討平(토평)하니 그 功(공)으로 선조로부터 岳飛(악비=중국 남송의 충신)의 <精忠錄(정충록)>을 下賜(하사)받고 里山郡守(이산군수)가 되었다. 1588년 謀陷(모함)으로 貪汚(탐오)하다 하여 군수직에서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그 뒤 다시 제주목사겸 濟州兵馬와 수군절도사 ·전라도방어사 등을 역임했었다. 興陽(흥양=지금의 高興)의 世忠祠(세충사)에도 제향되고, 資憲大夫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忠襄(충양)이라 내렸다. 충양공을 모신 齋室(재실)은 興慕齋(흥모재)는 전남 고흥군 대서면에 있다.
5) 宋希立(송희립, 1553~1623).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礪山(여산). 字는 信仲(신중). 호는 三規堂(삼규당), 侃(간)의 6대손이며, 전남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서 송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大立(대립)의 아우로, 형 송대립과 아우 송정립 3형제 모두 임진왜란에 참전을 한다. 선조때 進士로 나라의 前途를 豫感하고 兵書를 探究(탐구)하여 1583(선조 16)년, 별시로 치른 무과에 登第하였다. 1592(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鹿島萬戶(녹도만호) 鄭運(정운)의 軍官(군관)으로서 5월 1일 거제에서 왜병을 격파하고, 남해 앞바다에서 머물며, 이순신과 함께 원균 등과 합동 작전을 벌일 것을 주장하여, 유일하게 영남지역에의 원병파견을 주장하였고, 옥포해전, 사천해전, 한산대첩, 부산포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다. 智島萬戶(지도만호)가 되어 형 대립과 함께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당시 嶺南의 各鎭이 陷落되어 救援을 청함으로 陣中會議가 열렸고 諸將이 湖南固守를 主張(주장)하였으나 公은 鄭運과 함께 不可함을 주장하여 ‘嶺南도 우리 땅이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차가운 것이니 嶺南을 구하여 賊의 氣勢를 꺾어야 全國이 安保할 것이요 不幸이 失敗한다 할지라도 그 죽음에 早晩(조만)이 있을 뿐’이라 하니 全軍이 肅然(숙연)하여 出征(출정)을 決議(결의)하고 公이 副官(부관)이 되어 閑山島등에 진군하여 連戰連勝(연전연승)하였다. 1597(선조 30)년,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승선한 板屋船(판옥선)에 함께 승선하여 적의 함대로 진격 하였다. 1598(선조 31)년 정유재란에 露粱海戰(노량해전)에서 적에게 포위된 명나라의 제독 陳璘(진린)을 구출하였으며, 기략을 다하여 적선을 무수히 沈沒(침몰)시켰으나 忽然(홀연)히 賊彈에 맞어 氣絶하였는데, 이순신이 또 탄환에 맞았을 때 옆에서 戰死를 지켜보았다. 당시 그 渦中(와중)에 精神을 수습하여 忠武公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公이 직접 旗와 북을 잡고 군사들을 督勵(독려)하며 督戰하여 奮戰(분전)하다가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아 戰傷으로 死境을 해매기도 하였으며, 殘賊을 섬멸한 후 충무공의 屍身(시신)을 收斂(수렴)하여 牙山(아산)으로 返葬(반장)하도록 하였다. 朝廷에서는 이 사실을 접하고 宣武 一等勳에 봉하였다. 1601(선조 34)년 양산군수·多大浦僉節制使(다대포첨절제사)를 제수 받아 지냈었고, 1611(광해군 4)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619년 67세 때 별장으로 재직하였으며, 주사청의 업무로 慶尙道에 파견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정권을 잃었으며, 그해 7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송희립은 흥양(현 전라남도 고흥)의《재동서원》《세충사》에 祭享되었다. 그 후 장군의 護國忠節을 기리는 곳은,《충무사》(=순천, 한산, 고흥),《순천과 광주의 무광사》등에도 배향되고 있다. 육군에서는 광주 상무대에도 이순신, 정운 장군의 동상과 함께 송희립 장군의 銅像(동상)이 세워져 있다.
6) 宋建(송건,;1558~1592)
본관은 礪山(여산), 字는 士立(사립), 忠剛公(충강공) 侃(간)의 5세손. 縣令(현령) 宋弼衡(송필형)의 아들. 익산군 출신. 居(거)동강 마륜, 1588(선조 21)년 武科에 급제하여 訓鍊院主簿가 되었다. 北邊(북변)의 軍營(군영)에 보직되고, 1592(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助防將(조방장) 梁士俊(양사준)의 先鋒(선봉)으로 적의 勢力(세력)이 아무리 강성해도 後退(후퇴)는 있을 수 없다고 하며 出戰, 活躍(활약)하여 도처에서 세운 큰 功(공)으로 星州判官(성주판관)이 되었다. 그 뒤 咸昌(함;창尙州) 싸움에서 적의 大軍을 맞아 싸우며 大勝을 하였으나 後援軍(후원군)이 없음을 看破(간파)한 敵軍의 激烈(격렬)한 반격으로 敵彈(적탄)을 맞아 쓰러져 事勢를 보니 不可抗力이라 北向再拜(북향재배)하고 軍劍(군검)으로 자결 장렬히 戰死했다. 1605년 선조 왕이 禮官(예관)을 보내어 致祭하고 祭田을 내려 慰勞하였다. 흥양의 세충사(=현재의 재동서원 서동사)에 祭享되었다.
7) 宋商甫(송상보,; 1564~1597)
일명 商輔(상보)라고도 한다. 본관은 여산. 字는 季仲(계중)이며, 號(호)는 鳳齋(봉재)이다. 충강공 侃(간)의 후손으로 1591년에 登科하여 軍資監正(군자감정)을 역임하였다. 壬辰倭亂(임진왜란)때 권율의 막하의 행주싸움에서 大功을 세웠다. 당시 선조가 ‘公이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은 功이 있으리요’ 라는 글을 내려 慰勞(위로)하고 御屛(어병)을 내렸으며, 정유재란에는 李忠武公幕下에서 唐浦血戰(당포혈전)에 참전하여 奮鬪(분투)하다가 왼쪽어깨에 적탄을 맞았으나 신기자약 하여 크게 이기니, 선무원종훈에 기록되고 당진현감에 제수되었다. 居(거)고흥 남계. 재동서원의 사동사에 배향되었다.
8) 宋弘淵(송홍연;, 1569~1629).
본관은 여산, 字는 洄淑(회숙), 宋純禮(송순례)의 장손으로 임진왜란때 軍官으로서 진주에서 큰 功(공)을 세웠다. 1594(선조 甲午)년에 登科, 1596(선조 丙申)년에 前部將(전부장)으로 李夢鶴(이몽학)의 난을 西厓 柳成龍과 白沙 李恒福, 象村 申欽등과 함께 홍주에서 평정(討平)한 功으로 ‘정란일등훈’에 기록되었다. 1600년 南海縣令, 인조대 忠佐衛(충좌위) 左部將(좌부장), 內禁將(내금장), 穩城判官(온성판관), 介川郡守(개천군수), 渭原郡守(위천군수), 1615년 豊川都護府使(풍천도호부사), 茂山僉使(무산첨사), 1626년 昌州僉使(창주첨사)등을 역임하였다. 당시 백사 이항복의 薦(천)으로 征遼都督(정요도독)이 되어 遼를 平定하니 明나라 天子가 銀牌(은패)와 紅緞(홍단)으로 포상하고 還國(환국)하니 인조가 握手를 하며 畵工(화공)을 시켜 君臣握手圖(군신악수도)를 그려주었다. 後孫으로 柱漢(주한)이 있다. 거(居)동강 매곡. 재동서원 서동사에 배향되어 있다.
9) 宋得運(송득운,; 1570~1633).
本貫(본관) 礪山(여산), 字는 亨甫(형보), 晟(성)의 子이다.
1594(선조 甲午)년 登科하여 守門將(수문장)이 되니 임진왜란으로 因하여 선조가 龍灣(용만)으로 移御(이어)함으로 護駕(호가)를 하였고, 정유재란 때에는 食糧輸送官으로 李舜臣(이순신)將軍을 도와 왜병을 물리치는 데 큰 戰功을 세워 功臣에 錄勳(녹훈)되었다. 당시 唐浦의 싸움에 赤梁萬戶(적량만호)가 되어 火箭을 써서 賊船(적선)을 殲滅(섬멸)시키니 선조가 舟師犒饋圖(주사호궤도)를 그려 더욱 힘쓰라 勸獎(권장)하였다. 그리고 南桃浦(남도포)로 옮기니 傳書하되 네가 맡은 일에 충실히 하여 軍卒(군졸)을 잘 撫恤(무휼=잘어루만짐)하니 嘉祥(가상)하다 하시고 衣服 한 벌을 下賜(하사)하여 樂安郡守를 命하고 후에 羅州營將이 되었다. 세충사(=현재의 재동서원 서동사)에 배향되었다.
10) 宋眞夫(송진부;, 1569~1597).
조선 중기의 무신·학자. 본관은 礪山(여산). 字는 景蓋(경개). 호는 石溪(석계). 아버지는 군자감직장인 宋尙長(송상장)이다. 1589년 鄕試(향시)를 거쳐 1590(선조 庚寅)년 文科에 及第(급제)한 뒤 成均館學錄(성균관학록)에 임명되었으나, 그를 猜忌(시기)하는 사람(謀利輩)의 謀陷(모함)을 입어 削科(삭과)되었다. 그 뒤 兵書를 耽讀(병서탐독)하며 국가의 危難(위난)을 염려하여 武藝를 닦아 銅鐵穿槍(동철천창)의 妙計(묘계)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이듬해 또 武科에 급제, 訓鍊院副正, 宣傳官(선전관)이 되었다가 얼마 뒤 會寧僉使(회령첨사)를 지내고 泗川縣監을 거쳐 慶尙兵使가 되어 왜적과 싸워 큰 功을 세웠었다. 신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일시 고향에서 휴양하고 있을 때 1596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各地로 檄文(격문)을 보내 義兵(의병) 수만 명을 모은 뒤 부사를 지낸 羅迪(나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장이 되어 장성으로 진군하였다. 그 때 적군이 남원성을 포위하고 있어 군량이 부족하므로 여러 군에 격문을 보내 義穀(의곡) 800여 섬을 얻어 軍糧을 確保하고, 賊陣(적진)을 掩襲(엄습)하여 賊將魁帥(적장괴수) 7인을 斬(참)하고 殘卒을 섬멸시켰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賊들이 夜陰을 타서 進擊(진격)을 시작하자 날이 저무니 來日을 기다리자는 同僚(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劍을 뽑아 들고 말에 올라 ‘倭奴들은 즉시 降伏하라’하고 나서는데, “賊의 氣勢에 놀라 先鋒이 後退하므로 斬하여 軍律을 밝히고 자신이 스스로 先鋒이 되어 賊의 陣中으로 突進하니 劍光이 번개 같아 賊을 풀 베듯 하니 賊數萬이 다시 加勢하여 에워싸므로 더욱 猛威(맹위)를 加하니 賊들이 氣劫(기겁)하여 逃走(도주)하였다. 그러나 賊들을 노칠새라 연이어 진격하는데 賊이 칼로 公의 말(馬)다리를 내리치니 떨어져서 殉節(순절)하였다. 그러나 顔色(안색)은 생전과 같았고, 右手(우수;오른손)에는 劍을 左手에는 활을 잡았으며 瑞氣(서기)가 하늘을 뻗쳐 연일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朝廷에서는 그의 전공을 높이 치하하여 宣武勳에 記錄하고 병조참판의 증직을 내렸다. 그리고 禮官에게 御製詩(어제시)와 祭文을 내려 致祭하였다. 그 詩에 “海內奇男子(해내기남자)요 天東大丈夫(천동대장부)라 하였고 傳敎(전교)에 千載一節(천재일절)이요 萬古一人이라”하였다. 著書로는 石溪文集이 缺稿로 즉 ≪석계결고≫ 4권이 남아 있는데 원사 권율과 駱村 박종원은 祭文을 白洲 李漢明은 挽詩(만시)를 동춘당 송준길은 遺事序를 文谷 金壽恒, 寒圃齋 李健命은 遺事애 글을 붙였다. 南原 忠烈祠 萬人塚(만인총)에 父親과 아우 眞海와 같이 配享되었고 재동서원 서동사에 배향되었다.
11) 宋諶(송심;,1590~1637).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礪山(여산). 字는 士允(사윤). 아버지는 倡義別將(창의별장) 宋大立(송대립)이다. 그의 나이 8세 때인 1597(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아버지가 창의별장으로서 많은 義兵(의병)을 모아 興陽(흥양=고흥)에서 적을 무찌르다가 殉節(순절)하자 그 후 이를 복수하려는 일념으로 원수를 갚으려고 일찍이 兵書를 熟讀(숙독)하여 用兵術(용병술)을 통하였고 武藝를 硏磨(연마)하는데 一貫(일관)하였다. 한때 균전사 權縉(권진)이 호남의 民田(민전)을 감사하기 위해 내려왔을 때 그의 勇猛性(용맹성)을 보고 大盛(대성)할 것을 예견하였다. 또한, 都事(도사) 金時講(김시강)이 儒生(유생)들에게 講(강)을 下課(하과=왕이 講의 과제를 냄.)할 때 그는 自請(자청)하여 兵書(병서)를 훌륭하게 講하였다. 그는 부친의 뒤를 이어 1614(광해군 6)년 武科(무과)에 급제, 北邊(북변)의 守備(수비)에 종사하고 돌아온 뒤에 늙은 어머니를 奉養(봉양)하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 후 1623년 인조반정 후 水軍統制使(수군통제사) 具宏(구굉)의 幕僚(막료)가 되어 그의 薦擧(천거)로 宣傳官(선전관)이 되고, 이어서 1632년 全羅道兵馬虞候(전라도병마우후)가 되었다. 1635년에는 洪原縣監(홍원현감)이 되었다. 1636(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北兵使 李沆(이항), 남병사 徐佑申(서우신) 휘하의 斥候將(척후장)으로 남한산성 구원에 나섰다. 그러나 楊根(양근)에 이르렀을 때 이미 인조가 播遷(파천)하고 三田渡에서 강화가 이루어진 후, 胡軍들이 본국으로 撤軍하면서 온갖 노략질등 蠻行(만행)을 恣行(자행)하므로 朝廷이 그를 막도록 하니 公이 中領軍을 거느리고 鐵嶺을 넘다가 胡軍을 만나 모두 斬하고 追擊하는 등, 勇猛(용맹)을 날리었는데, 安邊南山驛(안변남산역)에 이르러 賊의 騎馬兵 수천명이 돌출하자 前後營將(전후영장)과 함께 賊을 攻擊途中(공격도중)에 동료의 배신으로 逃走(도주)해버리고, 公이 홀로 賊을 相對하여 血戰을 하였었다. 당시 胡軍(호군)들에게 포위당하는데 부족한 병력으로 孤軍奮鬪(고군분투)하다가 주변에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戰死하였다. 이때 그는 “나의 선친은 마흔여덟살에 丁酉亂(정유란)에 돌아가시더니, 내 나이 마흔 여덟산에 丁丑胡亂(정축호란)에 죽는 도다. 이것은 하늘이 命함이리라”라고 하며 죽기를 각오하고 終日토록 혼자서도 싸우면서 화살을 모두 다 쏘고 그로 인해 손가락이 떨어져나가고 화살도 없어지고 백병전에서 부러진 칼로 싸우다가 칼도 부러져 安邊(안변)에서 마침내 장열한 죽음을 당하여 殉節(순절)하였다. 이에 이들 父子(부자)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704(숙종 갑신)년에 忠臣의 旌閭를 즉 雙忠旌閭(쌍충정려=지방기념물 110호)로 褒賞(포상)하고, 송대립은 병조참의에, 송심은 左承旨(좌승지)에 추증되고, 1757(영조 丁丑)년에 禮官을 殉節遺址(순절유지)에 보내어 慰靈致祭하였다. 1798(정조 戊午)년에 洪原 敬忠祠에 배향하고 廟廷에 記績碑를 세우게 하였고, 전라남도 흥양(고흥) 재동서원의 世忠祠(세충사=지금의 서동사)에 祭享(제향)되었다.
○ 彰孝祠(창효사)= 1956년 忠剛祠(충강사)의 重建때에 孝子를 合設하였었는데, 1982 년 擴張工事 當時(확장공사당시) 堂室(당실)이 狹小(협소)하므로 士林의 公論에 따라 창효사를 新築(신축)하여 四位孝子를 이곳에 별도로 配享했다.
1) 宋碩隆(송석융;, 1614~1733).
본관은 여산이며 송간의 8세손이다. 慈堂께서 太乙의 꿈을 꾸고 낳았는데, 五世에 처음으로 왼손을 펴니 孝子라는 文身(문신)이 손바닥에 역력하였다. 일찍이 父親을 여이고 哀痛(애통)을 이기지 못하여 마음으로 母親의 奉養을 極盡(극진)히 하는데 母親이 風病으로 누우니 壇을 쌓고 하늘에 祈禱(기도)하며 誠意를 다하였다. 모친이 문득 자라고기를 願하므로 어름을 깨고 결국 자라를 얻어 끓여 드렸더니 큰 약효가 있었다. 그래서 그곳을 사람들이 자라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郡守가 그 孝行을 朝廷에 上奏(상주)하니 桃源道 察訪을 命하였다. 그러나 곧 母親을 잊을 수 없어 辭任하고 더욱 孝誠을 다하고 길고 긴 30년의 병구완을 하면서 “하늘이시어 우리 어머니를 살려 주소서”하는 소리가 입에서 그치지 않았다. 及其也 病患(병환)이 위독하니 손가락을 끊어 입에 피를 흘려 넣으니 三日間 回生하였으나 마침내 돌아가셨다. 墓옆에 막을 지어 侍墓(시묘)하면서 自警編(자경편)을 지어 父母思慕하는 哀痛을 달랬다. 1704(숙종,갑신)년에 이조참의, 1776(영조,병신)년 吏曹參判을 贈職하고 1833년 재동사에 배향, 1892(고종 임진)년에 孝子旌閭를 받았고, 현재는 재동서원 창효사에 배향되었다.
2) 宋粲文(송찬문).
본관은 礪山. 나이 겨우 6歲에 父親이 甚(심)한 病을 얻어 氣絶상태로 여러 날을 깨어나지 않음으로 온 집안이 慌忙(황망)하여 통곡을 하는데 公이 어머니께 어느 손가락이 무명지이냐고 묻기에 가르쳐 주었더니 밖에서 칼을 갖어 와서는 자기 손가락을 잘라 아버지 입에 넣으니 경각간에 回生하여 2l여년 延壽(연수)를 하였었고, 10歲에는 國喪을 當하니 服을 입었다. 이러한 消息(소식)을 傳해 들은 文正公 미수 許穆(허목)이 그를 찾아와 公을 격려하고 讚揚하는 詩를 지어주고 朝廷에 알리었고, 1710(숙종 庚寅)년에 六歲孝子旌閭(6세효자정려)가 내려졌다. 재동서원의 창효사에 배향되었다.
3) 宋明圭(송명규).
本貫(본관)은 礪山(여산). 태어날 때에 하늘에서 孝子가 난다하는 소리가 세 번이나 들려서 마을 사람들이 奇異(기이)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더니 과연 天性(천성)이 極孝(극효)하더니 父親의 病患(병환)에 精誠을 다하여 藥(약)湯劑(탕제)에 시중을 하던 중 醫員(의원)이 노루고기가 가장 좋다하므로 百方으로 求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三晝夜(삼주야)를 祈禱(기도)하였더니 意外에 호랑이가 담장 밖에서 노루 한 마리를 던져주었다고 한다. 그것으로 크게 효험을 보았는데 病이 再發하여 위독함으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었더니 五日間을 回生(회생)하였으나 끝내 돌아가시었다. 晝夜로 墓前(묘전)을 떠나지 않고 哭泣(곡읍)하니 哀傷(애상)이 너무 過하여 그 一個月만에 世上을 떴다. 葬事(장사)後 婦人(부인)의 꿈에 나타나 내가 喪人인데 喪服(상복)을 입히지 않았느냐 하므로 꿈에서 깨어 곧바로 墓前에 가서 喪服을 태워주었다고 한다. 1776(영조 丙申)년에 공조참판을 贈職(증직)받고, 재동서원에 배향되었다.
4) 宋楨圭(송정규).
본관은 礪山(여산). 字는 和中, 3세때 어머니를 여의고 哀痛(애통)하는 모습이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 19세에 父親(부친)의 病患(병환)으로 위독하니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回生하니 數年(수년)을 安過(안과)하였고, 끝내 세상을 뜨니 侍墓(시묘)살이를 하던중 뜻밖에 廬幕(여막)앞에서 샘물이 솟아나 便宜(편의)를 도왔었고, 밤마다 범(虎)이 와서 保護(보호)해 주더니 하루는 범이 오자 않음으로 이상하게 생각하였더니 현몽하기를 나 지금 순천월곡산중의 陷穽(함정)에 빠져 있으니 속히 救(구)해 달라하여, 꿈에서 깨어 상복차림으로 곧바로 월곡산중에 다다르니 洞民數百名이 꽹가리를 치며 포위하고 있으므로 손을 저어 범을 해치지 말라 하며 ‘그 범은 내범이다’라고 외치니 동민이 미친 사람이라 하였으나 不問曲直하고 함정앞으로 다가서니 怒氣衝天(노기충천)하던 범이 노기를 풀고 반기듯 꼬리를 저어며 살려달라는 기색을 보이니 좌우를 설득하고 범을 끌어내어 데려오니 모두가 驚歎(경탄)하였다. 그 후 侍墓살이를 마치니 샘물도 범도 자취를 감추었다. 이러한 일이 朝廷에 알려지니 童蒙敎官(동몽교관)을 내리고 후에 工曹參議(공조참의)를 贈職(증직)하였다. 재동서원 창효사에 배향되었다.
○ 인근의 宋氏雙忠旌閭(송씨쌍충정려)는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 있는데 지방기념물 110호로 정유재란때 순절한 송대립과 병자호란때 功(공)을 세운 宋諶(송심)父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644(인조 22)년에 銘旌(명정)을 褒賞(포상)받아 건립되었다.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齋洞書院史要, 齋洞書院誌, 等.
고흥군청 홈페이지 http://www.gohe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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