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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定宗, 1357~1419]
조선 제2대 왕(재위 1398~1400). 제1차 왕자의 난이 수습된 뒤 왕위에 올랐으며, 재임 2년 후 보위를 이방원에게 양위하였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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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광원(光遠). 휘(諱) 경(?). 초명 방과(芳果). 태조의 둘째 아들. 비(妃)는 김천서(金天瑞)의 딸 정안왕후(定安王后). 성품이 인자하고 용기와 지략이 뛰어나, 고려 때 아버지를 따라 많은 전공을 세웠다. 조선 개국 뒤 영안군(永安君)에 책봉되었고,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로 책립되었다.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는데, 신도(新都) 한양(漢陽)에서의 골육 상쟁, 즉 제1차 왕자의 난을 상기하여 구도(舊都) 개경(開京)으로 돌아갔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수습된 뒤 동생 정안군(靖安君:芳遠)을 왕세제로 삼고 왕족 ·권신(權臣) 등이 기르던 사병(私兵)을 폐지하여 삼군부(三軍府)에 편입시켰다. 하륜(河崙)의 건의에 따라 관제를 개혁하고, 한양의 5부에 각각 학당(學堂)을 설립하였다. 정종의 정치는 거의 이방원의 뜻에 따라서 이루어졌다. 정종은 재위 기간동안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 오락에 심취하였으며 그의 이런 행동은 이방원을 안심케하는 효과가 있었다. 즉위한 지 2년 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추대되었는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인덕궁에 거주하면서 사냥과 격구, 연회, 온천여행 등으로 세월을 보내다 1419년 6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정종은 사망 후 묘호도 없이 공정대왕으로 불리다가 1681년(숙종 7년)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능은 개풍군의 후릉(厚陵)이다. ![]() 정종(1357~1419)은 조선 제2대 왕(재위 1398~1400)으로 제1차 왕자의 난이 수습된 뒤 태종 이방원에 의해서 허수아비 왕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재임 2년 후 보위를 이방원에게 양위하였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태조의 둘째 아들로 비는 김천서의 딸인 정안왕후입니다. 정종은 성품이 인자하고 용기와 지략이 뛰어나서 고려 때 아버지를 따라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조선 개국 뒤 영안군에 책봉되었습니다. 1398년(태조 7)에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로 책립되었습니다.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는데 새로운 수도인 한양에서의 골육 상쟁인 제1차 왕자의 난을 상기하여 개경으로 돌아갔습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수습된 뒤 동생 정안군인 이방원을 왕세제로 삼고 왕족과 권신 등이 기르던 사병을 폐지하여 삼군부에 편입시켰습니다. 하륜의 건의에 따라 관제를 개혁하고, 한양의 5부에 각각 학당을 설립하였습니다. 정종의 정치는 거의 이방원의 뜻에 따라서 이루어졌습니다. 정종은 재위 기간동안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 오락에 심취하였으며 그의 이런 행동은 이방원을 안심케하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즉위한 지 2년 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추대되었는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왕위에서 물러난 뒤 인덕궁에 거주하면서 사냥과 격구 및 연회와 온천여행 등으로 세월을 보내다 1418년 6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습니다. 정종은 사망 후 묘호도 없이 공정대왕으로 불리다가 1681년(숙종 7년)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습니다. 능은 북한 개풍군에 있는 후릉(厚陵)입니다. 2009년 7월15일(수) 1시20분에 종묘에서 "조선왕릉 세계유산 등재기념 대국민 보고회 및 고유제 봉행"이 있습니다, 조선왕릉 42기중 북한에 남아있는 제릉과 후릉을 잠시 소개 합니다,
조선왕릉 42기중 2기가 북한에 있습니다,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이 되었는데 북의 2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릉齊陵 (소재지 : 개성시 판문군 지동(북한소재) 무성한 잡초위에 낡을대로 낡아 제대로 된 문짝 하나 없는 정자각,겨우 건물의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비각,동축의 곡장은 허물어져 자취만 남았고,서측과 북측의 곡장은 담장형식이 아닌 축대형식으로 남아있다,
신의왕후 [神懿王后, 1337~1391] 이성계의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는 고려말 고려 동북 지방에서 밀직사부사증영문하부사였던 안변 한씨 안천부원군 한경과 어머니 평산 신씨사이에서 1337년 출생하였다. 안변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풍류산(청학산)이 위치하고 있던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이 부근지역에 조상 3대가 묻혀있다고 전한다.
한씨 나이 15세때 당시 신분이 비슷한 17세의 이성계와 가례를 올리고 함흥 운전리에 살았으며 이때 방우, 방과(정종), 방의, 방간, 방원(태종), 방연과 경신, 경선의 6남 2녀를 낳았다. 정계의 1인자로 부상하기 전까지 고향에서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하는 등 내조가 지대하였다.
고려말 우왕 14년인 1388년 요동 일대와 철령 이북땅을 정벌하기 위해 동원된 10만 대군을 이끌고 우군도통사로 원정에 참여하게 된 이성계는 압록강 하류의 중지도인 위화도에서 우왕과 최영(우왕의 장인)의 무리한 행군 어명으로 10만 대군이 몰살당할 뻔하는 위기에 처하자 위화도에서 5월 회군하였다. 이때 이성계의 5남 방원은 포천 재벽동에 살던 어머니와 철현에 살던 둘째 부인 강씨를 동북면으로 피난시키던 중 조정에서 이성계의 가족을 체포하려 한다는 전갈을 듣고 숲속으로 피신하여 한동안 노숙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한씨는 위장병이 악화되어 조선 개국 1년 전인 1391년 55세에 사망하였다.
자녀
후릉厚陵 (소재지 :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북한 소재) 후릉은 조선2대 정종과 정안왕후를 모신 쌍릉이다,
정안왕후 [定安王后, 1355~1412] 조선 제2대 왕 정종의 비. 본관 경주. 성 김(金). 월성부원군 김천서(金天瑞)의 딸. 1398년(태조 7) 남편 영안군(永安君:방과)이 세자가 되면서 세자빈이 된 뒤 덕빈(德嬪)에 책봉되었다가 정종이 즉위하자 덕비(德妃)로 진봉되었다. 야사에서는 정안왕후가 잠자리에서 정종에게 이방원에게 왕위를 이양할 것을 권하였다고 전한다. 1400년(정종 2) 정종이 세제(世弟) 방원(芳遠)에게 양위하자 순덕왕태비(順德王太妃)의 존호를 받았다. 소생은 없으며, 1412년 5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1681년(숙종 7) 온명장의(溫明莊懿)의 존호가 추상되었다. 능은 풍덕(豊德:개성 개풍군)의 후릉(厚陵)이다. |
역사적 주요핵심내용
정종(定宗, 1357년~1419년, 재위 1398년~1400년)은 조선의 제2대 임금이다. 휘는 경(曔)(초명 방과(芳果)), 자는 광원(光遠), 정식 명칭은 정종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1] 태조와 신의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생애 - 1357년 음력 7월 1일에 태조와 신의왕후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품이 온화하고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나 고려 말기에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쟁터에 참여하여 많은 공적을 세웠다.
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이방과는 영안대군으로 책봉되었다가 1398년 음력 8월에 동생 정안대군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본래 왕위에 뜻이 없었던 이방과는 왕세자가 되기를 극구 사양하였지만, 태조의 맏아들이자 형 진안대군 이방우는 이미 죽었던 데다가, 그 당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동생 이방원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왕세자에 올랐다가 1개월 뒤인 1398년 음력 9월에 태조의 양위로 조선의 임금이 되었다. 정종은 2년의 재위 기간 동안 동생인 이방원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이방원의 뜻에 따라 권력가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들을 해체하고 군사권을 국가의 최고 군사기관인 의홍삼군부(義興三軍府)로 집중시켰다.
정종은 서울의 운기가 나빠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는 이유를 들어 수도를 서울에서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그러나 다음 해인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방원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9개월 뒤인 음력 11월 13일에 왕세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정종으로서는 권력의 중심인 왕위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은 인덕궁에서 격구나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오락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다가 세종 1년인 1419년 음력 9월 26일에 63살의 나이에 승하하였다. 능은 개경에 있는 후릉(厚陵)이다. 2년 동안의 짧은 치세에 거의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정종을 과도기 집권자로 여기고 묘호도 올리지 않고 ‘공정대왕’(恭靖大王)으로 불렀으나, 262년이 지난 1681년(숙종 7년) 음력 12월에 이르러서야 정종이란 묘호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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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http://blog.naver.com/nk920218?Redirect=Log&logNo=10177343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