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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변정도감 (田民辨整都監) |
고려 후기에 토지 및 노비에 관한 행정을 정비하기 위해 설치하였던 특별기구이다. 무신정권이 국정을 농단(壟斷)하던 중기 이후, 고려의 전정(田政)은 무신을 배경으로 한 권문(權門) 때문에 문란해져 국가재정과 직결되는 공전(公田)은 불수조(不輸租:免稅地)의 특권을 가지는 사전(私田)으로 변화하여 농민을 귀족의 경작자로 삼는 병작반수제(竝作半數制)의 확대를 이루어 국가재정은 극도로 약화되어 갔다. 1260년 원종(元宗)이 즉위한 전후를 기해서 몽골의 강력한 내정간섭으로 왕권이 약화되자 몽골 세력을 등에 업은 권신세력도 공전을 대대적으로 사전화하고, 여기에 딸렸던 농민(良人)을 겸탈(兼奪)·천례화(賤隷化)함으로써 국가의 재정적 기반은 무너져 갔다.
전민변정도감은 이러한 전정의 문란을 시정·개혁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1269년(원종 10)에 처음으로 설치한 이래 1288년(충렬왕 14)·1291년(충렬왕 17)·1362년(공민왕 11)·1381년(우왕 7)·1388년(우왕 14) 등 여러 차례 설치되어 전정의 개혁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개혁시도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충렬왕 때에는 막대한 토지를 겸탈한 환관(宦官) 등 왕의 측근 및 원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권신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실패를 거듭하였다.
그리고 1352년 공민왕이 즉위해 개혁에 착수하면서 전민(田民)의 탈점을 시정하기 위해 이 기관을 설치했다. 1356년 반원개혁정치를 본격적으로 시도하면서 사회경제적 개혁을 위해 전민변정도감(전민추정도감)을 설치하여, 이당시 기철 등과 같은 부원배와 원 관계기관들이 마구 공사전을 탈점하며 백성을 노예로 삼아 경영하고 있던 농장을 혁파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뒤에도 압량위천(壓良爲賤) 등의 방법으로 농장인구의 집중과 같은 문란상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1366년 최영(崔塋)과 같이 실권을 갖고 있던 무장세력이 중앙정계로부터 외직으로 내보내지고, 신돈(辛旽)이 등용되어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강력한 변정사업을 추진했다. 1365년 가뭄과 관련하여 세워졌던 형인추정도감(刑人推整都監)의 기능을 확대·전환하여 명칭도 전민변정도감으로 바꾸고, 자신이 판사가 되어 의욕적으로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권문세가들이 탈점한 토지와 노비에 대해 개경은 15일, 지방은 40일의 기간을 정해 자진 신고하도록 했다. 특히 권세가에 의해서 빼앗긴 토지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양인(良人)이 되려는 노비는 모두 그들의 소원대로 해주었다. 결국 이로 인해 지배층의 강한 반발이 일어나게 되어 신돈은 제거당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1388년 위화도 회군과 함께 사전개혁(私田改革)을 단행하여 새로운 전제(田制)의 기준으로 삼은 토지제도이 과전법(科田法)이 실시되었다. |
***********고려 후기 사급전(賜給田)과 농장의 발달에 따라 권세가들이 토지나 농민을 탈점함으로써 국가재정이 고갈되자, 이들을 추쇄(推刷)·환본(還本)하기 위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 등의 임시관청을 설치하여 벌였던 사업. 12세기 이래 농민들은 권세가의 농장 확대로 인해 토지를 탈점당했고, 원간섭기에 이르러서는 정치혼란과 과렴(科斂) 등으로 과도하게 수탈당했다.
따라서 농민의 대규모 유망이 발생했는데, 유망민들은 원의 세력을 등에 업은 권세가와 국왕 및 왕실의 부속기관들이 차지했던 농장에 투탁하여 전호화되어 국가의 수취체제에서 이탈, 국가재정을 위협했다. 따라서 국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임시관청을 설치하여 탈점된 토지를 본주인들에게 돌려주고 노비가 된 자들은 다시 양인으로 환원시켜 민생의 안정과 재정수취를 도모하는 전민변정사업을 했다. 이러한 전민변정사업은 대체로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시기는 무인집권기이다. 이 시기는 몽골과의 전쟁으로 민이 유망하고 토지가 황폐하여 조세가 불균등해지자 이전의 호적이나 양안(量案)으로는 수취가 불가능해졌다. 또한 권세가들은 여전히 황무지 개간을 빙자하여 공전·사전의 탈점과 투탁을 통한 농장의 확대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따라서 1269년(원종 10)에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호구를 재조사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공부를 정했다. 이 사업은 정부가 전민문제로 인한 국가재정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며, 정치적으로는 최씨무인정권을 몰락시키고 집권한 김준(金俊) 정권의 경제 기반을 제거하기 위해 임연(林衍)·임유무(林惟茂) 부자가 실시한 것이었다.
제2시기는 충렬왕 이후부터 공민왕 이전의 원간섭기이다. 이때는 본격적인 원간섭기로 정치가 파행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대원관계에 따른 비용의 마련 등으로 국가재정은 고갈되어갔다. 이와 관련하여
충렬왕대에는 1288(충렬왕 14), 1298, 1301년에 각각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었다. 그 가운데 1301년에 설치된 도감은 성격이 달랐다. 당시는 원의 간섭이 가장 심했던 시기로 일본정벌과 같은 대규모의 사업이 진행되면서 심지어 고려 국내의 문제인 노비법을 개정하고자 원나라 정동행성평장사 활리길사에 의해 노비들이 속량된 일도 있었다. 이 사건은 고려 지배층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1301년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속량된 노비들을 추쇄하여 본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충숙왕대에는 1318(충숙왕 5), 1320, 1321년에 찰리변위도감(察理辨違都監)과 화자거집전민추고도감(火者據執田民推考都監)이 각각 설치되었다. 당시 이 사업의 주체는 국왕이었으며 그 대상은 권문세가들과 원나라와 긴밀했던 기관들이었다. 그러나 최고지배층의 공신사전(功臣賜田)과 홀치[忽赤], 순군(巡軍) 등 국왕과 긴밀했던 기관들에 대해서는 전민변정사업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었다.
충목왕대의 전민변정사업은 1347년(충목왕 3) 2월에 설치된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정치관들이 주체가 되어 전개되었다. 정치관들은 대부분 가문의 배경이 없는 과거 출신자들로, 권문세가들과 원을 배경으로 등장한 환관세력(宦官勢力)들을 대상으로 전개되다가 친원세력의 방해를 받고 실패했다. 이때의 전민변정사업은 대부분 신진사대부가 주체였으므로 반원적인 성격으로 이해되기도 하나 사실상 원의 지원을 받아 실시되었다. 즉 당시의 전민변정사업은 역대 국왕들이 교서의 형식을 통하여 제시했으며 그 활동은 전민변정도감 등 임시관청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는 원의 지원을 받은 국왕의 즉위나 복위 등 대체로 정치적인 재편기에 실시되었다. 당시 원은 고려국왕을 통하여 고려를 지배하고자 했으며 국왕 역시 중요한 정치 기반은 원의 지원이었다. 따라서 원의 지원을 받은 국왕이 즉위 또는 복위하는 과정에서 교서를 반포하면서 전민사업을 시행한 것은 '개혁정치'가 크게 원의 고려지배 전략에 부응하는 성격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고려사회의 모순이 워낙 커서 국가체제의 유지가 힘들 정도였으므로, 원나라의 간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국왕 및 신진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고려국가체제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컸다.
제3시기는 원의 영향력이 쇠퇴하던 공민왕 이후이다.
공민왕대에는 1352(공민왕 1), 1356, 1366년에 각각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었다. 이 가운데 1366년 5월 신돈(辛旽)의 주청에 의해 설치된 전민변정도감이 주목된다. 공민왕은 즉위 이후 대륙의 정세변동에 따른 원의 약화를 이용하여 변발(髮)·호복(胡服)을 풀고 정방(政房) 혁파, 지정연호(至正年號)의 사용정지, 관제개혁 등 반원정책을 단행했고 기씨(奇氏) 등 친원 정치세력을 제거했다.
공민왕은 1365년에 실권자였던 최영(催塋)을 계림윤(鷄林尹)으로 폄출하는 등 일군의 무장세력을 거세시키는 한편 신돈을 등용하여 정치권력을 새롭게 재편성했다. 이에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전민의 추쇄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즉 그는 1365년 가뭄과 관련하여 세워졌던 형인추정도감(刑人推整都監)의 기능을 확대·전환하여 명칭도 전민변정도감으로 바꾸고, 자신이 판사가 되어 의욕적으로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권문세가들이 탈점한 토지와 노비에 대해 개경은 15일, 지방은 40일의 기간을 정해 자진 신고하도록 했다.
신돈이 추진한 전민변정사업은 국가재정의 확보를 목적으로 했으며, 당시 일반민중으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각 정치세력들의 이해와 크게 어긋나 신돈이 실각하면서 이 개혁작업도 와해되었다.
결국 몇 차례의 전민변정사업으로는 고려사회의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고려 말기에는 사전의 혁파를 주장하는 개혁파들이 등장하여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뒤 새로운 개혁정치를 단행했다.
신돈과 전민변정도감
근래에 기강이 크게 무너져 탐욕이 풍속을 이루고 있다.
종묘,학교,창고,사원,녹전(녹봉),군수의 토지와 나랏 사람들이 대대로 생업으로 삼았던
전민(田民 : 토지와 여기에 종사하는 사람)을 권문세가들이 강제로 빼앗아 깡그리 차지하고 있다.
더러 판결이 났는데도 그대로 잡아 두고 있으며 더러 양민으로 인정되었는데도 종으로 삼고 있다.
여러 고을의 역리, 관노, 백성으로서 부역을 도피한 자들을 농장에 숨겨두고 있다.
이처럼 백성을 병들게 하고 나라를 여위게 하기에 하늘이 가뭄과 장마를 내리고
역질이 그치지 않는다.
지금 도감을 설치하여 찾아내어 바로 잡으려 하노라
농장에 부당하게 편입된 토지를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부정하게 농장에 소속된 일꾼을 양인으로 환원하여 국가의 부역을 지우겠다는 것이다.
또 사전의 탈세를 막고 고리대를 제한하며, 양민을 농노에 예속하는 사태를 방지하는 것이다.
[고려사] 열전 신돈
*********전민변정도감은 고려 후기에 토지와 노비를 정리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임시관청이다.
고려의 토지제도는 12세기 경부터 지배층의 대토지 겸병으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무인집권기를 지나 고려후기에 이르러 권문세족은 권력을 이용하여 남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빼앗아 거대한 농장으로 만들어 운영하였다. 농장을 경작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비가 필요했으므로 권문세족은 양민을 노비로 만들어 부리기도 하였다.
한편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투탁'이라 하여 스스로 노비가 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수의 권문세족이 소유하게 되었다. 이는 농민의 생활을 위협하였고, 농민이 부담하던 조세와 공납과 역등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국가의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다. 이에 고려 정부에서는 신돈 등 개혁을 진행하려는 세력이 중심이 되어 던세가들이 불버적으로 빼앗은 토지를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노비는 다시 양인으로 만들어주려고 하였는데 이를 위해 설치된 것이 "전민변정도감"이었다.
전민변정도감은 1269년 원종 때 처음 설치된 이후 고려가 망할 때까지 전민추정도감,전민추쇄도감 등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10여 차례에 걸쳐 설치되었다. 그러나 권문세족의 방해로 이러한 병폐를 없애지는 못하였고, 고려 말에 사전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과전법을 시행함으로써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