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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리 섬진강을 따라 가는 답사길
인천 남구문화원
전라북도 진안군(鎭安郡) 백운면(白雲面)에서 발원하여 남해의 광양만(光陽灣)으로 흘러드는강. 길이 225㎞(560리). 유역면적 4896.5㎢. 한국에서 아홉번 째 긴 강으로, 진안군 백운면과 마령면(馬靈面) 등에 충적지를 발달시키고, 성수면(聖壽面)에서 굽이굽이 흘러 임실군(任實郡) 운암면(雲巖面)에서 갈담저수지로 흘러든다.
섬진강의 발원이 되는 데미샘은 선각산 오계치와 팔공산 서구이재(896) 사이의 계곡에 있다. 백운면 신암리 임신 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오계치 고개를 향하여 오르다 오른쪽 계곡으로 들어서면 데미샘이 나오고, 그 위로 봉우리 능선에 천상데미가 있다.
'데미'라는 어원은, 발원샘 주위가 돌무더기 또는 돌더미로 되어 있어 이 곳 방언에 무더기를 무데기, 더미를 데미로 부르는 데서 비롯한 것으로 추측된다.
강의 분수령이 되고 원천이 되는 샘이 산의 정상 부근에 있게 되는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금강의 분수령이 되는 장수의 신무산 뜬봉샘, 소백산, 백두산, 한라산 등과도 같이 비교할 수 있다. 섬진강은 진안 백운면 신암리에서 발원하여 임실 운암호, 구례, 하동 화개장터를 거쳐 광양만 바다로 흘러들기까지 500 여리를 남하한다.
남도의 풍류의 중심이 되었던 섬진강은 북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흐르는 이제 겨우 하나 남은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맑은 강이다. 전라북도 남원시, 진안군, 임실군, 순창군, 장수군의 1개시 4개군과 전라남도의 순천시, 광양시, 곡성, 담양, 화순, 보성, 장흥, 구례군의 2개시, 6개군 그리고 경상남도 하동시를 지나 바다에 이르게 된다. 맑고 깨끗한 강은 은어, 참개, 재첩등 40여종의 민물고기와 남한 특산종의 40%를 키워내면서 잘 조화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 화개면(花開面) 탑리(塔里)에서부터 경상남도와 전라남도의 도경계를 이룬다. 전라남도 곡성군(谷城郡) 오곡면(梧谷面) 압록리(鴨綠里)부터 하천 양쪽에 넓고 고운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1928년 동진농업주식회사(동진농장)가 임실군 강진면(江津面)에 운암제(雲巖堤)를 축조하였고 65년 운암제 아래 섬진강다목적댐이 건설되어 유역변경식 발전을 하며 계화도(界火島) 간척지에 농업용수가 공급된다. 하구 광양만에는 광양제철소가 가동중이다. 하류의 하동군 화개면 용강리(龍岡里)에는 신라의 고찰 쌍계사(雙溪寺)와 불일암(佛日庵)․불일폭포가 있다. 명산물로 은어와 참게가 있다.
옥정호
섬진강 다목적 댐은 일제의 강점기인 1926년에 동진 농지개량 조합에 의해서 1차 준공되었고, 제1차경제개발 5개년 계획사업으로 1965년에 준공되었다. 유역면적이 7백 63㎢ 저수면적 26.5㎢ 총저수량 4억 3천만 톤에 달하는 옥정호는 노령산맥 줄기 사이 임실군 운암면 일대를 흘러가는 섬진강 상류 물을 옥정리에서 댐을 막아 반대쪽인 서쪽 정읍군 칠보로 넘겨 계화도와 호남평야를 적셔주는 한편 물을 배수하면서 그 낙차를 이용하여 발전하는 다목적 댐이다. 맑고 깨끗한 넓은 호반과 운암대교와 어우러진 주변경관이 빼어나 전국 각지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섬진강은 전북 진안군에서 발원하여 도중에 대소지류와 합류, 경남 하동군과 전남 광양군 사이에서 남해로 유입되는 유역면적4,897㎢, 유로연장 226km의 국내 5대 하천중의 하나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1,253mm로써 비교적 풍부한 물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회문산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에 있는 산. 전북 순창군 구림면 높이 : 830m 천마봉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금창리에 있는 산으로, 순창군과 임실군을 가르고 있다. 봉우리와 골짜기가 많아 첩첩산중을 이루고 있는데다 서쪽을 제외한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예로부터 천혜의 요새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많은 사연을 품고 있다.
소설 《남부군》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으며 동학혁명과 한말 의병활동의 근거지가 되었고, 빨치산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이곳에 자리잡고 700여 빨치산들이 오랫동안 저항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빨치산의 훈련장이었던 곳에 체력단련장이 들어서 옛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진메마을
김용택 시인
■ 프로필
1948년 전북 임실 충실
1982년 <창작과비평>의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작품 발표
1986년 김수영문학상 수상
1997년 소월시문학상 수상
■ 작가 이야기
박절하고 매몰한 도시적 삶을 동글게 순화시키는 자연의 원초적인 힘
김용택의 시엔 섬진강의 잔잔한 물결이 일렁인다. 그이 시에 귀를 쫑긋대고 있으면, 수런거리는 바람결에 섬진강이 가만히 뒤척이는 소리가 밀려온다. 문명의 과부하와 중압에 의해 그 형해(形骸)가 바스러져 가는 흙의 정서를 되살려내고,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영혼이 맑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가지는 소외 혹은 모멸감, 죽음조차도 축제의 언어로 재생해 내는 우리 시대의 탁월한 시인, 김용택.
그는 방학 중에도 교실에서 재잘거리던 아이들의 천진한 눈빛을 그리워하는 '선생님' 시인이다. 운동장에서 어린애들과 공을 쫓아 뛰어 다니는 땀흘리는 선생님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 혹은 자연의 이름으로 우리를 계도하려는 선생님이고, 그 자신이 시를 배우는 선생님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교실에 걸린 칠판과 백묵의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그가 칠판에 스케치한 섬진강의 풍경은 이렇게 한눈에 쏙 들어온다. "산 사이/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가만히 있는 곳/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논과 밭과 함께/가난하게"('섬진강 15 ―겨울, 사랑의 편지'). 비갠 뒤의 투명한 초가을 햇빛에 펄럭이는 손빨래한 옥양목처럼 실로 아름다운 풍경이 아닌가.
이처럼 그의 시는 자연 그 자체로 숨쉰다. 그의 시를 읽는 맛의 버금이 이런 정갈한 풍경화를 감상하는 쏠쏠한 재미라면, 그 으뜸가는 맛은 우리들 모두의 기억 속에 각인 된 어머니상, 즉 마음의 원적(原籍)과 정신의 본적(本籍)과 만나는 애잔한 감동일 터. "오늘도 강을 건너 비탈진 산길 거름을 져다 부리고 빈 지게로 집에 오기가 아까워 묵은 고춧대 한짐 짊어지시고 해 저문 강길을 홀로 어둑어둑 돌아오시는 어머니. 아, 불 보다 더 뜨겁게, 불붙을 살도 피도 땀도 없이 식지 않는 발바닥으로 뜨겁게 뜨겁게 바람 타시는 어머니"('섬진강 9').
이처럼 그의 시는 '정신평야'의 사막화, '정서토양'의 산성화, '도덕대기'의 황사화 현상으로 정리될 수 있는 이 삭막한 세상의 한켠에서, 뭔가 어그러진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개선하고 회복하는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박절하고 매몰한 도시적 삶을 동글게 순화시키는 자연의 원초적인 힘이 내재해 있다. 모두가 '비싸게 팔릴 사람이 되어라'고 웅변하는 지금, 그의 시는 우리들에게 '올바른 삶이란 무엇인가'를 나직한 목소리로 찬찬히 따져 묻고 있는 것이다. (류신/문학평론가)
■ 대표작
「 맑은 날 」 창작과비평사
「 나무 」 창작과비평사
「 나는 둥그배미야 」 푸른숲
「 시가 내게로 왔다 」 마음산책
「 섬진강 이야기(합본) 」 열림원
섬진강․1
김용택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 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 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섬진강 9
김용택
강 건너 산밭에 하루 내내 스무 번도 더 거름을 져 나르셨단다.
어머님은 발바닥이 뜨겁다며 강물에 발을 담그시며 자꾸 발바닥이 뜨겁단다.
세상이야 이래도 몸만 성하면 농사 짓고 사는 것 이상 재미있고 속 편한 게
어디 있겠냐며 자꾸 갈라진 발바닥을 쓰다듬으시며 자꾸 발바닥이 뜨겁단다.
어머니, 우리들의 땅이신 어머니. 오늘도 강을 건너 비탈진 산길거름을 져다 부리고 빈 지게로 돌아오기가 아까워 묵은 고춧대 한 짐 짊어지시고 해 저문 강길을 홀로 어둑어둑 돌아오시는 어머니, 마른 풀잎보다 더 가볍게 흔들리시며 징검다리에서 봄바람 타시는 어머니. 아, 불보다 더 뜨겁게, 불붙을 살도 피도 땀도 없이 식지 않는 발바닥으로 뜨겁게 뜨겁게 바람 타시는 어머니. 어느 물이 나라 어느 강물인들 어머님의 타는 발바닥을 식히겠습니까 어머니, 우리들의 땅이신 어머님.
천담마을, 장구목
이광모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시절' 촬영지
이 곳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요강바위이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큰 바위는 아니고, 너른 강폭에 비하면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요강바위에는 사연이 많다.
"이 장엄한 바위들을 뽑아 가서 돈 많은 자들의 정원으로 옮겨 놓으려는 도둑들이 이 물가에 눈독을 들였다. 몇 해 전에는 20여 명의 떼도둑이 중장비를 끌고 와서 '요강 바위'를 뽑아 갔다. 요강 바위는 가운데가 두 사람이 들어앉을 수 있을 만큼 오목하게 파여 있으며, 그 안에 늘 물이 고여 있었다. 도둑들은 물가에 중장비를 들이대느라고 진입로 공사까지 했다. 도둑들은 이 바위를 경기도 광주군의 야산에 숨겨 놓고 살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다. 매매가 성립되지는 않았지만 이 바위 한 덩어리의 값이 10억 원을 넘었다. 눈썰미 밝은 주민이 이 바위가 섬진강 바위임을 알아채고 경찰에 신고했다. 도둑은 붙잡혔고, 요강 바위는 장물로 분류되어 전주 지점 남원 지청의 마당으로 운반되었다. 남원에서 이 물가까지 바위를 옮기는데 중장비 사용료 500만원이 들었다. 바위의 무게가 25톤이었다. 장구목 마을 주민 12가구가 돈을 모아서 500만원을 마련했다. 요강 바위는 중장비에 실려서 4년 만에 고향 물가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바위를 제자리에 심어 놓던 날, 장구목, 싸리재 마을 사람들은 돼지를 잡아 물가에서 잔치를 벌였다." (김훈, 자전거 기행)
구례
진정한 섬진강은 남원에서부터 시작된다. 강의 발원은 한참이나 위지만 우리들이 느낄 수 있는 섬진강은 남원에서부터다. 구례와 하동, 광양의 아름다운 골들을 헤집고 나서야 섬진강은 비로소 남해로 흘러든다. 섬진강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일몰 때다.
지리산을 끼고 도는 남도의 젖줄, 섬진강. 전라도와 경상도의 정취를 함께 느끼게 하는 유일한 곳이다. 바로 이 섬진강을 끼고 가는 19번 도로는 드라이브의 묘미뿐만 아니라 그 곳을 달리는 의미와 생각까지도 남다르게 한다.
구례는 전라남도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군. 면적 443.03㎢, 인구 3만 3031(2001). 서쪽으로 같은 도의 곡성군(谷城郡), 남쪽으로 광양시(光陽市), 북쪽으로 전라북도 남원시(南原市), 동쪽으로는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과 맞닿아 있다.
구례군 북동부의 산악지대는 지리산국립공원에 포함되어 관광지로 유명하다. 화엄사(華嚴寺)․천은사(泉隱寺)․연곡사 등의 이름난 절이 있으며, 특히 화엄사는 지리산 최대의 사찰로서 544년(진흥왕 5)에 창건되었다. 경내에는 국보 제67호인 화엄사 각황전(華嚴寺覺皇殿), 제12호인 화엄사각황전전석등(華嚴寺覺皇殿專石燈), 제35호인 화엄사사사자삼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천연기념물 제38호인 올벚나무 등이 있다.
구례사람들 눈빛은,
김인호
지리산을 우러르지 않을 수 없는
구례에 와서 밤하늘 바라보면
구례에는 별이 두 개 더 있다
마을 가까이 내려서고 싶은 모양으로
시암재와 노고단에서 빛나는 두 별
그 하나의 별빛은
산으로 쫓겨가야 했던 사람들의 맑은 눈빛이고
또 하나의 별빛은
돌아오지 못하고 잠든 사람들의 깊은 눈빛이다
그 두 별을 가슴에 품어서일까,
구례사람들 눈빛은
유난히 맑고 깊은 그 별빛을 닮아있다
지리산
전라남도 구례군(求禮郡), 전라북도 남원시(南原市), 경상남도 함양군(咸陽郡)․산청군(山淸郡)․하동군(河東郡)에 걸쳐 있는 산. 높이 1915m. 두류산(頭流山)․방장산(方丈山)․지리산(地理山)이라고도 한다. 소백산맥 남단에 속하는 고산으로 산역의 둘레가 320여㎞에 달하며, 서남서~동북동 방향으로 주능선이 이어져 있다.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칠선봉(七仙峰)․덕평봉(德坪峰)․명선봉(明善峰)․토끼봉․반야봉(般若峰)․노고단(老姑壇) 등과 동쪽으로 중봉․하봉․써리봉 등의 능선이 이어지고 여기에 많은 고봉․준령들이 다기다양(多岐多樣)하게 어우러져 웅대한 산악군을 형성하고 있다. 신산(神山)의 하나로 수려하고 중후한 산악미를 지녔다. 화엄사(華嚴寺)․쌍계사(雙磎寺) 등의 유서 깊은 사찰과 천연의 동․식물 및 국보․보물 등의 문화재가 많으며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다.
지리산의 봄 1
- 뱀사골에서 쓴 편지
고정희
남원에서 섬진강 허리를 지나며
갈대밭에 엎드린 남서풍 너머로
번뜩이며 일어서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 한 자락이 따라와
나의 갈비뼈 사이에 흐르는
축축한 외로움을 들추고
산목련 한 송이 터뜨려 놓습니다
온몸을 싸고도는 이 서늘한 향기,
뱀사골 산정에 푸르게 걸린 뒤
오월의 찬란한 햇빛이
슬픈 깃털을 일으켜 세우며
신록 사이로 길게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열어 줍니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뢰 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앞서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
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
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 내리고
육천 매듭 풀려나간 모세혈관에서
철철 샘물이 흐르고
더웁게 달궈진 살과 뼈 사이
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 소리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
구례 산동마을
산동마을의 지명은 중국 산동성의 처녀가 지리산으로 시집올 때 산수유나무를 가져와 심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수유는 그 생김새도 어린 아이 마냥 귀엽지만 한약재로도 긴히 쓰여 이 곳 마을의 큰 소득원이 되기도 한다. 특히 이 곳 산수유는 과실이 실해 전국에서 최고의 산수유로 손꼽힌다고 한다. 3만여 그루의 나무에서 전국 생산의 30% 정도가 이 마을에서 나는데 서너 그루만 있어도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 하여 '대학나무'로까지 불리었단다.
이처럼 풍광좋고 여유있는 마을 같지만 한국 현대사의 적지 않은 시련을 겪은 곳이기도 하다 '산동애가'로 알려진 사연을 역시 참고한 책에서 그대로 옮긴다.
이 곳 산동마을은 임진왜란 때 피난민들이 처음 자리를 잡은 곳으로 백 여가구가 훨씬 더 넘는 큰 마을이었으나, 여순반란사건의 여파로 무고한 주민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 지금은 30여 가구에 불과하다. 백부전(본명 백순례)은 위로 오빠 셋에 언니 하나를 둔 산동면 상관 마을 백씨 집안의 막내였다. 여순사건 당시 오빠 둘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를 대를 이어야 한다며 막내딸 부전더러 셋째 오빠를 대신하여 희생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그녀는 하나 남은 오빠 대신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길에 '산동애가(山洞哀歌)'를 지어 부르며 눈물로 길을 적셨을 터이다.
산동애가(山洞哀歌)
잘 있거라 산동山洞아 /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 피오보지도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골을 / 멍든 다리 절어 절어
다리머리 들어오는 /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짝에서 / 이름없이 쓰러졌네
잘 있거라 산동山洞아 / 산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 설운 정情을 맺어놓고
회오리 찬 바람에 / 부모효성 다 못하고
갈길마다 눈물지며 / 꽃처럼 떨어져서
노고단 골짝에서 / 이름없이 쓰러졌네
(대사)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곳에 나는 간다. 노고단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너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
- 백남천 저, 행복한 테마기행 (시대의 창, 2003) 중
이 노래는 당시에 완성된 것은 아니고, 이후 구전되어 오다가 레코드판으로 나왔지만 곧 금지곡이 되었다고 한다. 이래 저래 이념의 날카로운 대립 속에서 역사의 뒤안으로 영영 사라질 뻔한 이 노래는 우여곡절 끝에 다시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 마음의 고향4
- 가지 않은 길
이시영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이 남아 있을까
중학 1학년,
새벽밥 일찍 먹고 한 손엔 책가방,
한 손엔 영어 단어장 들고
기름젱이 콩밭 사잇길로 사잇길로 시오리를 가로질러
읍내 중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에
함뿍 젖은 아랫도리가 모락모락 흰 김을 뿜으며 반짝이던,
간혹 거기까지 잘못 따라온 콩밭 이슬 머금은
작은 청개구리가 영롱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팔짝 튀어 달아나던.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을 다시 한번 걸을 수 있을까
< 압 록 >
유곡나루
- 곽재구
육만 엥이란다
후쿠오카에서 비행기 타고 전세버스 타고
부산 거쳐 순천 거쳐 섬진강 물 맑은 유곡나루
아이스박스 들고 허리 차는 고무장화 신고
은어잡이 나온 일본 관광객들
삼박사일 풀코스에 육만 엥이란다
초가지붕 위로 피어오르는 아침 햇살
선선하게 터지는 박꽃 넝쿨 바라보며
나빠나 모노 데스네 니빠나 모노 데스네
가스불에 은어 소금구이 살살 혀 굴리면서
신간선 왕복 기차 값이면 조선 관광 다 끝난단다
육만 엥이란다, 낚시대 접고 고무장화 벗고
순천 특급 호텔 사우나에서 몸 풀고 나면
긴 밤 내내 미끈한 풋가시내들 서비스 볼 만한데
나이 예순 일본 관광객들 칙사 대접 받고
아이스박스 가득 등살 푸른 섬진강
맑은 물 값이 육만 엥이란다
운조루
구름속을 나르는 새가 사는 집 운조루(雲鳥樓) !!!
구례군 토지면을 감싸고 있는 풍후의 핵심에는 운조루가 있다. '구름 속을 나르는 새가 사는 집' 금환낙지의 핵심에 운조루가 있다는 얘기다. 운조루는 지금으로부터 2 백여 년 전인 1776년 경상도 안동태생의 유이주라는 사람이 명당의 핵심에 99칸 집을 짓고 그 일가들을 모두 살도록 만들었다. 운조루 창건주 유이주는 놀기를 즐겼지만 부모에 대한 효성이나 불의를 참지 못하는 기개가 남달랐다고 한다. 유이주는 운조루 터를 닦으면서 "하늘이 이 땅을 아껴 두었던 것으로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린 것"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 이라는 뜻과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본래 중국의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 혜사에서 따온 글귀이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개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 에서 첫 머리인 운과 조를 따온 곳이다. 한편 운조루 창건 과정에서는 운조루가 명당의 증거라는 사건이 발생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집터를 잡고 주춧돌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는 도중 부엌 자리에서 어린아이의 머리크기만한 돌거북이 출토됐다. 이는 운조루의 터가 비기에서 말하는 금귀몰니의 명당임을 입증하는 것이라 해석됐다. 이 돌거북은 운조루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다가 지난 1989년 도난당했다. 운조루의 또다른 가보는 홍살문에 걸려 있는 호랑이 뼈이다. 유이주가 평북 병마절도사로 부임하면서 삼수갑산을 넘게 됐다. 새재에 이르러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채찍으로 그 호랑이를 잡아 가죽은 영조대왕에게 바치고 뼈는 잡귀가 침범하지 못하게 운조루 홍살문에 걸어 두었던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이 일로 유이주는 영조대왕으로부터 박호장군이란 칭호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호랑이 뼈는 민간에 만병통치 약으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바람 난 남편의 바람기를 잡는데도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인근 마을은 물론 타지에서 온 여인네들이 조금씩 갉아가는 바람에 이중 삼중으로 수난을 당하고 있기도 하다. 명당 중의 명당에 터를 잡은 운조루에서는 아직까지 일반인들이 기대하고 생각하는 고관대작이나 입신양명한 걸출한 인물이 배출된 것은 아니지만 재산이 자손대에 이르면서 꾸준히 늘었고 자손들이 관직에 많이 진출한 점을 들어 명당의 효험이 발하고 있다는 주장도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 부귀영화, 입신양명의 기준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명당의 효험이 발생하고 있는가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이다. 현재 유이주의 10대손이 관리하고 있는 운조루는 중요민속자료 제 8호로 지정돼 있다.
* 금환낙지 : 풍수지리에 의하면 천상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형국으로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명당으로 인식되고 있다.
참조_ 운조루에 관한 글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제".......조용헌
ꡒ젊었을 때는 설악산이 좋고, 나이 먹어서는 지리산이 좋다ꡓ는 말이 있다. 설악산의 호쾌한 암벽들은 루틴한 일상에 지친 봉급쟁이들의 정신을 번쩍 나게 만든다. 반대로 지리산은 사람을 훈훈하게 감싸고 어떤 허물이라도 용서해 줄 것처럼 후덕한 육산(肉山)이다. 쉬지 않고 3천리를 달려오던 백두대간이 숨을 멈추고 결국(結局)을 이룬 지리산. 그 지리산의 노고단을 배산(背山)으로 하고 은빛으로 흐르는 섬진강을 임수(臨水)로 삼아 류씨 집안의 고택 운조루(雲鳥樓)는 자리잡고 있다. ꡐ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ꡑ. 그 호방한 품격만큼 이름도 낭만적이다. 그러나 이 집에 바로 조선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정수(精髓), ꡐ없는 이들에 대한 배려ꡑ의 정신이 담겨 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누구나 열어 쌀을 퍼갈 수 있다는 의미의 ꡐ타인능해 ꡑ글귀를 새겨 넣은 뒤주.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는 조선 영조 52년(1776년)에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冑)가 세운 집이다. 99간의 대저택이었던 이곳 사랑채와 안채의 중간 지점에 곳간 채가 있고, 그 곳간 채에 지금도 쌀뒤주가 하나 놓여져 있다. 둥그런 통나무의 속을 비워 내고 만든 뒤주라서 네모지지 않고 둥그런 원목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뒤주의 특이한 장치는 하단부에 가로 5센티 세로 10센티 정도의 조그만 직사각형 구멍을 만들어 놓고, 그 구멍을 여닫는 마개에다가 ꡐ타인능해(他人能解)ꡑ라는 글씨를 새겨놓은 것이다. ꡐ다른 사람도 마음대로 이 구멍을 열 수 있다ꡑ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뒤주는 누구라도 와서 쌀을 마음대로 퍼갈 수 있는 뒤주인 것이다. 류씨 집안에서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베풀기 위한 용도의 뒤주였다. 보통 가난한 동네사람들이 주 대상이었고, 그 외에도 운조루를 찾아오는 지리산 일대의 과객들도 조금씩 쌀을 가져가곤 하였다.
그런데 왜 주인이 직접 쌀을 주지 않고 이처럼 곳간 채에 별도로 뒤주를 만들어 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서 가져가도록 했을까? 이 집 후손인 류응교 교수(60․전북대)는 자존심을 배려한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이 주인에게 직접 쌀을 받아 가면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곳간 채에 설치한 쌀뒤주는 주인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편안한 마음으로 쌀을 가져갈 수가 있다. 아름다운 마음씨는 이렇게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쓰는 법이다.
이 쌀뒤주에는 쌀이 약 2가마 반이 들어간다고 한다. 상당히 큰 뒤주이다. 뒤주 하단부의 타인능해 마개는 옆으로 돌리게 되어 있다. 마개를 옆으로 돌리면 쌀이 나온다. 한 사람이 가져가는 쌀의 양은 보통 1~ 2되 분량이었다고 한다. 주인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5~6되씩 몽땅 가져가는 양심불량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가난하긴 하였지만 불문율과 염치가 살아 있는 사회였다. 운조루에서 지은 논농사가 2만평, 연평균 200가마를 수확했는데 쌀 뒤주에 들어간 쌀이 1년 36가마 분량이었으니 유씨 집안은 1년 소출의 약 20%를 없는 이들에 대한 배려로 쓴 셈이다.
밥짓는 연기가 멀리서 보이지 않도록 굴뚝을 낮게 설치,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배려했다.
이 집안에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사헌부감찰과 상주목사를 지낸바 있는 류억(柳億: 1796-1852)가 어느 날 집안 곳간 채에 놓여 있는 쌀뒤주를 살펴보니 뒤주에 아직 쌀이 남아 있었다. 즉시 며느리를 불렀다. ꡒ왜 이렇게 많은 쌀이 남아 있단 말이냐? 우리 집안에서 그만큼 덕을 베풀지 않았다는 증거 아니냐. 당장에 이 쌀을 주변사람들에게 나누어 줘라. 항상 그믐날(월말)에는 뒤주에 쌀이 없도록 해라!ꡓ
운조루에 남아 있는 타인에 대한 배려의 또 한가지 유물은 굴뚝이다. 이 집은 다른 집에 비해서 굴뚝이 아주 낮게 설치되어 있다. 1미터 높이도 안된다. 건축적으로 볼 때 굴뚝이 높아야 연기가 술술 잘 빠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낮게 설치한 이유는 밥하는 연기가 높이 올라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쫄 쫄 밥 굶고 있는 사람들이 부잣집에서 펑 펑 올라가는 굴뚝 연기를 보면 자연히 증오와 질투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운조루의 나즈막한 굴뚝을 보면서 조선의 선비정신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동학과, 여순반란사건, 6.25의 한 가운데인 지리산에 있었으면서도 운조루가 불타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쌍계사, 화개십리벗꽃길
< 혼인길로 불리는 화개 십리벗꽃길>
하동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초입까지 이어지는 4㎞ 정도의 도로변은 봄날이면 그야말로 연분홍 꽃비에 젖어든다. 오죽했으면 김동리 선생이 단편소설 ꡐ역마ꡑ에서 ꡐ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의 시오리 길은 언제 걸어도 길멀미를 내지 않게 하였다ꡑ고 했을까. 오십 성상의 수령을 자랑하는 벚나무가 2차로에 도열해 산화공덕의 열병식을 벌인다. 꽃이 피면 꽃 터널이요, 꽃이 지면 꽃길이다.
쌍계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이다. 840년(신라 문성왕 2)에 진감선사(眞鑒禪師) 최혜소(崔慧昭)가 개창, 처음에 옥천사(玉泉寺)라고 부르다가 헌강광(憲康王) 때 한 고을[州]에 같은 이름의 절이 두 개가 있어 혼동을 일으켰으므로, 문전에 흐르는 쌍계에 연유하여 쌍계라는 호를 하사(下賜)하고 학사(學士) 최치원(崔致遠)으로 하여금 ꡐ쌍계석문(雙磎石門)ꡑ의 4자를 쓰게 하여 바위에 각자(刻字)하였다. 그 후 두 차례나 화재로 절이 소실되었으나 1632년(인조 10)에 벽암(碧岩)을 비롯한 여러 승려들에 의하여 복구 ․중수되었다.
경내에는 국보 제47호인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를 비롯하여 보물 제380호의 쌍계사 부도(浮屠), 보물 제500호의 대웅전 등의 지정문화재가 있고, 이 밖에 5층석탑․석등․일주문(一柱門)․팔상전(八相殿)․명부전(冥府殿)․천왕문(天王門), 중국의 승려 혜능(慧能)의 두상(頭像)을 봉안했다는 금당(金堂)에 있는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과 나한전(羅漢殿)․금강문․칠불아자방(七佛亞字房)․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차시배지
쌍계사는 차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신라 흥덕왕3년(828년) 김대렴이 당나라 사신으
로 처음으로 차 나무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남쪽 줄기 쌍계사 일원에 심었다고 하
며 일주문 못미쳐 차시배 추원비가 세워져 있으며 마을 차밭에도 차 시배지 기념비(도기
념물 제 61호)가 있다.
악양
악양골이 들어있는 지리산 남서면 일대에는 몸에 쩡쩡하게 느낄 정도로 기운(山氣運)이 강한 골짜기들이 네 곳 있다. 문수골, 피아골, 화개골, 그리고 악양골이다. 악양골은 이 네 골짜기 가운데 가장 넓은 180정보의 악양벌(ꡐ무딤이들ꡑ이라고도 한다)이 있다는 사실이 골짜기의 웅장함을 말해준다.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중국의 악양과 같다 하여 이름 붙였다는 악양면의 소상팔경 중의 하나인데, 하동군지에는 악양면의 소상팔경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 소상야우(瀟湘夜雨) : 고소산성 중턱 소상반죽에 밤비내리는 정경
- 산시청람(山市晴嵐) : 수목이 울창한 산허리 감도는 아지랑이의 풍경
- 원포귀범(遠浦歸帆) : 섬진강 멀리 돌아드는 돛단배와 江岸의 풍경
- 어촌낙조(漁村落照) : 섬진강의 개치마을에 떨어지는 저녁놀의 어스름
- 동정추월(洞庭秋月) : 가을 달에 젖은 동정호의 풍경
- 평사낙안(平沙落雁) : 편편한 모래밭에(마을 이름도 平沙里입니다) 줄지어 내려앉는
기러기떼
- 연사모종(煙寺募鐘) : 멀리 안개에 잠긴 山寺의 저녁 종소리
- 강천모설(江天募雪) : 섬진강 하늘에서 내리는 백설풍경이 산허리를 수놓는 정경.
소설 ꡐ토지ꡑ의 무대 평사리
악양 지주 최참판댁의 삼대를 중심으로 갑오 동학혁명부터 광복까지 우리 근대사를 펼쳐낸 박경리의 대하소설 ꡐ토지ꡑ의 무대인 평사리도 있다
토지는 하동 평사리의 대지주 최씨 가문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문을 연다. 최씨 집안의 안주인인 윤씨부인(최치수의 모친)은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후에 동학 접주가 되어 처형당하는 김개주에게 겁탈 당해 김환(일명 구천이)을 잉태한다.
그후 김환은 최씨 가문으로 잠입하여 하인이 되지만, 최치수의 아내인 별당아씨와 사랑에 빠져 둘은 지리산으로 도망친다. 최씨 가문의 재산을 탐낸 귀녀와 몰락 양반 김평산의 음모로 최치수는 교살당하고 음모를 꾸민 두 사람은 윤씨부인에게 발각되어 사형당한다.
최씨 집안의 외가 쪽 먼 친척인 조준구는 윤씨부인이 마을을 휩쓴 콜레라(호열자)로 죽자 최씨 집안의 재산을 강탈하려고 한다. 그는 한편으로 최씨 집안의 유일한 생존자인 최치수의 외동딸 서희를 몰아내고 마을 사람들을 분열시키면서 일본인들의 힘을 빌려 모든 재산을 손아귀에 넣게 된다.
여기에 더해 서희와 자신의 아들 병수를 결혼시키려는 음모를 꾸미자 서희는 충직한 하인 김길상 등과 함께 용정으로 탈출한다. 서희는 용정에서 윤씨부인이 남긴 금은괴를 자본으로 장사로 성공하여 거부(巨富)가 되고, 하인이었던 길상과 혼인한다. 여기까지가 토지 1 2부의 개괄적인 내용인데, 국권상실, 봉건 가부장 체제와 신분 질서의 붕괴, 농업 경제로부터 화폐 경제로의 변환 등 1900년대와 1910년 한국 사회의 변화가 소설의 밑그림으로 담겨 있다.
작가 박경리
1926년 10월 28일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나 1945년진주여고를 졸업하고 결혼했으나, 한국전쟁 중 부군이 납북된 후 창작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토지는 집필기간 25년, 2백자 원고지 3만2천장, 총 5부 16권에 달하는 대하소설이다. 토지를 통해 평사리와 간도, 서울,일본으로 이어지는 광활한 무대와 그 무대 위에서 명멸해 가는 인간상을 그려내며 민초들의 고난과 끈질긴 생명력, 그리고 홍수처럼 밀려오는 이념과 이념사이에서 고뇌하는 지식인들의 삶과 우리의 문화를 아낌없이 형상화한 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집필기간동안 한번도방문하지 않고 오로지 작가의 상상력만으로 그려낸 평사리 사람들의 삶이 마치 꿈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정확한데 대해서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ꡒ섬진강변 도로확장 전면 재검토ꡓ
[한겨레] 건설교통부는 섬진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경남 하동~화개장터 사이 19번 국도의 4차선 확장사업이 주민 반발을 사자(<한겨레> 3월24일치 18면) 사업 추진을 전면 보류하고 재검토에 들어갔다.
강동석 건교부 장관은 7일 ꡒ문제가 되고 있는 섬진강변 19번 국도 확장사업에 대해 전면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ꡓ고 말했다. 최재덕 건교부 차관도 ꡒ모든 도로가 차를 빨리 가게 하는 것이 목적일 필요는 없으며, 천천히 가는 것이 좋은 도로도 있을 수 있다ꡓ며 ꡒ물류를 고려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지자체와 주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돼 재검토를 하고 있다ꡓ고 말했다. 최 차관은 ꡒ실무 담당부서가 그런 관점에서 검토를 하고 있지만, 지자체는 강력하게 건설을 요구하고 있어 조정이 필요하다ꡓ고 덧붙였다.
건교부 부산지방국토관리청은 관광철 상습적 교통정체 해소를 위해 19번 국도 하동읍내~화개장터 구간의 4차선화 사업을 올해 안에 착공할 예정으로 추진해 왔으며, 환경․종교단체와 도로주변 주민들은 ꡒ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의 하나로 꼽히는 하동의 대표적 관광자원인 섬진강변길을 망칠 것ꡓ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환경단체 ꡐ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ꡑ의 이상윤 사무국장은 ꡒ벚꽃 철 며칠의 교통정체 해소가 4계절 내내 아름다운 길을 훼손하는 이유가 될 수 없으며, 물류망 개선도 광양~전주간 고속도로가 추진되고 있어 설득력이 없다ꡓ며 ꡒ하동군이 친환경적 건설을 주장하지만 일단 4차선으로 넓히면 섬진강변길만의 아름다움은 사라질 것ꡓ이라고 말했다.
<악양 무넘이들>
청매실 농원
섬진강변에 자리한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로 가면 이제는 어엿한 여행명소 반열에 오른 매화마을(본명 섬진마을)을 만나게 된다. 3월 초순부터 꽃이 피기 시작해서 3월 중순 경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10만 그루의 매화나무와 2000개가 넘는 장독대 너머로 바라보이는 섬진강의 풍광을 바라보면 저절로 시심이 인다.
섬진강 유래비
섬 진마을 입구인 수월정 옆에는 네 마리의 돌두꺼비와 섬진강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섬진강 유래를 보면 고려 말엽 우왕 때(1385년경)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였다. 광양만과 섬진강에도 왜구들이 자주 출몰하였다. 한번은 왜구들이 하동 쪽에서 강을 건너러 하였다. 그 때 진상면 섬거에 살던 수만 마리의 두꺼비들이 지금의 다압면 섬진마을 나루터로 몰려들어 진을 치고 울부짖는 통에 왜구들이 놀라 도망치는 바람에 무사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섬진강이라 부르게 되었다. (섬진강(蟾津江)의 섬(蟾)은 '두꺼비 섬'자이고, 진(津)은 '나루 진'자이다. 즉 나루터에 두꺼비가 나타난 강이라고 하여 섬진강이라고 했다는 설명이다)
하동재첩
분류- 이매패강 대합조개목 재첩과
형태- 검은 갈색의 가로줄무늬가 쳐진
2~3cm크기의 민물조개.
서식지- 강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염분이 적은 민물의 모래바닥
분포- 섬진강을 비롯한 우리나라 전역의 맑은 하천
현황- 하동 섬진강 일대에서 많이 잡힘 (예전에는 부산 낙동강 일대가 유명했음.)
특징- 재첩이란 가막조개 또는 새조개라고 불러지는 담수패류로 조개
겉 표면이 검은 갈색에 가로 줄무늬가 있고, 엄지 손톱만한 세모꼴 모양의 조약돌과 비슷하게 생겼다. 강물과 바닷물이 교차(난류와 한류의 만남)하고, 소량의 염분이 함유된 사질토양인 담수지역의 모래 속에서 자연 서식하는 민물 조개이다.
천혜의 자연식품이라 할 수 있는 재첩은 우리나라 전역의 맑은 강과 내에서 분포되어 있지만, 최근 하구의 수질변화로 서식 환경파괴와 수질오염 때문에 일부 강에서만 자라고 있다. 그 중에서 섬진강 유역은 다행히도 1`2 급수를 유지하고 있어 물이 맑고 깨끗하여 재첩의 시원한 맛이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다.
간 기능 보호 및 해독작용 그리고 개운한 아침 해장국으로써 식용가치가 높아 현대인의 건강에 매우 소중한 식품으로 각광 받고 있다. 하동 사람들은 재첩을 "갱조개" (강조개)라고 부르고 있다..
하동포구 노래...
하동포구 팔십리에 물새가 울고
하동포구 팔십리에 달이 뜹니다.
섬호정 댓돌 위에 시를 쓰는 사람은
어느 고향 떠나온 풍유낭인고
하동포구 팔십리 굽돌이 배에
하동포구 팔십리에 봄을 실어라
백사장 모래 위에 남아있는 글자는
꽃바람에 쓸리는 충성 충이요
하동포구 팔십리에 물결이 고와
하동포구 팔십리에 인정이 곱소
쌍계사 종소리를 들어보면 알께요
개나리도 정답게 피어줍니다.
<참조 글>
[생명평화 이야기]어디에도 사람의 길 없었네
친구여.
지난 3월1일 노고단에서 시작하여 오늘까지 천리길을 걸었네. 하루도 빠짐없이 길을 걸었건만 기계의 길, 자동차의 길이 있었을 뿐 사람의 길이 없었네. 길에 서있는 한길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고 자동차이었네. 혹여 사람이 있을지라도 사람을 배려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네.
자동차가 장악한 지 오래, 결코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네. 미덥지 않으면 한번쯤 서울을 벗어나 길을 걸어보게나. 내 이야기가 구체적 사실임을 바로 실감하게 될 것이네. 그뿐만 아니라 길에서의 인간이란 참으로 초라하기 그지없네. 적어도 길 위에서만큼은 인간의 생살여탈권을 자동차가 쥐고 있음이 틀림없네.
ꡐ길을 장악한 자가 세상의 주인이 된다ꡑ는 옛말을 들은 적이 있네. 어떤 사정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인지는 아는 바가 없네. 하지만 옛사람들의 뛰어난 통찰력은 감탄스럽기 그지없네.
길을 걸어보니 옛 말씀대로 길을 장악한 기계가 세상의 주인으로 등장한 지 이미 오래 전이네. 자기도취에 빠진 무지한 인간들만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네. 사람이 길의 주인인 시절은 벌써 끝이 났네. 만물의 영장이라며 큰 소리 치던 인간들이 자기 꾀에 빠져든 셈이네. 돈, 기계, 자동차 따위를 주인으로 섬겨야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사람다운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네. 대다수 사람들이 장밋빛 미래를 이야기 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조짐들은 말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네. 크게는 자연 재앙이 인류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네. 가깝게는 부시에 의한 이라크 전쟁이 21세기를 야만의 시대로 후퇴시켜버렸네.
너도나도 부자 되면 좋다고 하는 허구에 찬 거짓말을 좇아 혈안이 되어있네. 마음껏 먹고 쓰고 즐기는 것이 행복이라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에 현혹되어 모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네.
꽤 괜찮다는 사람들이 2만달러 시대를 열자고 외쳐대고 있지만 문 열고 나서면 우리 아들딸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어찌 좋은 세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똑똑하고 귀하신 분들이 최첨단 정보화 시대라고 으스대지만 숨쉬고 물마시고 밥 먹는 일이 우리 손자 손녀의 목숨을 병들게 하는 현실인데 어찌 행복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며 마침내 우리들의 그리움으로 숨쉬고 있는 섬진강변 길에 이르렀네. 굽이굽이 섬진강 물결 따라 흐르는 아름다운 꽃길, 섬진강 길을 걸었네. 마지막 남은 하나밖에 없는 섬진강 꽃길을 걷고 있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름다움과 그리움의 길은 오간 데 없고 불안과 공포의 길만 있네. 꽃동네 옛 고향은 찾아볼 수 없고 오염과 파괴만 기다리고 있네. 국민들의 가슴에 고향길로 남아있는 섬진강 꽃길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어있네. 우리 모두의 마음에 아름다움의 길로 숨쉬고 있는 섬진강변 길이 위험에 처해 있다네.
제발 부탁하네. 자네는 높은 분들하고 잘 통하지 않는가? 진정 누구를 위한 길인가? 당연히 뭇 생명을 위한 길이어야 하네. 무엇을 위한 길인가. 당연히 삶의 평화를 위한 길이어야 하네. 인간을 비겁하게 하고 초라하게 만드는 도로정책은 청산되어야 하네. 뭇 생명을 병들게 하고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국토정책은 바로잡혀야 하네. 특히 민족의 성산인 지리산 길만큼이라도 뭇 생명의 길로 살아있게 해야 하네. 다른 길은 몰라도 국민들의 고향길인 섬진강변 길만큼은 꽃길, 물길, 사람길, 생명의 길로 가꾸어져야 하네.
섬진강길 뭇 생명의 길로 경험해 보아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인생은 그리 길지 않네. 세상은 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네. 좋은 일 할 기회를 놓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손실이네. 좋은 위치에 있을 때 좋은 일 한번 하게나. 자네는 충분히 잘 할 수 있을 것이네. 순례자의 염원, 시민들의 바람이 실현될 수 있도록 마음 써주게나. 좋은 일 하면 분명 복 받을 것이네.
본지에 생명평화 칼럼을 집필 중인 도법스님은 지리산 지역에서 생명평화 탁발순례 중 이 글을 보내 주었습니다.
〈도법/남원 실상사 前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