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대문 시장
비오는 시장길
화방畵房과 문방구점文房具店도 한산
색색의 우산이 느릿한 파노라마
팥죽 아줌마 과일 쥬-스로 깜짝 변신
주인의 바뀐 안경집
상호가 없어진 점포
많이도 변했다
이뿐이 희수 정겹이 파주네
곱던 얼굴에 주름
시장에 사람이 없으니 한숨
갈치조림 집 찐빵 집
줄서기 옛말
경쟁자만 늘어나고
그래도 위안의 빛
외국 관광객의 명소가 되어
유창한 본토 발음의 상인들의 미소가
아름답고
커먼 프라자 옆
소품집 인형과
옷가게를 안내하는 피노키오의 몸짓이
정겹다
남대문 시장과의 인연
조 윤옥
비오는 날이라 남대문 시장으로 향하고 싶었다. 아침에 광화문으로 출근하는 남편을 따라가면 가기에 수월하기에 일찍 서둘렀다. 마석이라 교통체증으로 막히는 시간을 피해 오전 9시 십분 전후로 출발하여 국민대 앞으로 빠지면 한 시간 내로 광화문을 통과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날에는 두 시간의 소요시간이 드는 버스와 국철을 타야 한다. 비가 장마전선으로 장대비가 쏟아져 남편이 시장입구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런 날은 나를 기억해 주고 찾는 시장 상인이 있기 마련이다. 비가 오면 더 심하게 여기저기 쑤시는 아줌마들. 새벽잠을 못자고, 무게 나가는 짐 보따리를 늘 움직이며 생활하는 상인들은 아픈 곳이 많다. 그들은 여유 있게 쉴 수 없는 좁은 공간에 화학섬유에서 뿜어 나오는 독성으로 찬 환기가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
남대문과의 나의 인연. 사람들은 중병이 걸리면 공기 좋은 시골로 들어가는데 전원도시에서 반대로 낮에는 서울로 나왔다. 나는 유방암 수술 후 사람과 더불어 대화하며, 운동도 하는 회복의 기회를 거꾸로 잡았다. 합창단 단장을 하고 그 후 적십자 회장을 하다 갑자기 중병. 공인의 자리에서 옛날부터 알아 온 많은 사람들. 나를 향한 안타깝고 불안한 시선들. 밤새 불쌍해서 울었다는 위로의 말. 나를 보는 안쓰러움이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
나 또한 몹쓸 병이 걸려 친한 사람에게 심적 부담을 줘야 한다는 일이 회복에 악영향을 주었다. 유방암 두 번. 일 년 후 위 대장에서 용정을 떼는 수술을 하고는 즉시 광화문으로 출근하는 남편을 따라 나섰다. 인연을 무 짜르듯 베어 버렸다. 남편의 위로. 부부의 충분한 대화가 회복에 끼치는 영향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남편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 몇 번이고, 일으켜 주신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때로는 통증으로 울면서 내가 오뚝이 인 줄 아느냐고 소리쳐도 마음은 늘 고마웠다. 워낙 오지랖이 넓어 많은 사람을 상대하다 병으로 그들 곁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도 사람이 많고 활기찬 장소를 찾다보니 남대문을 택했다. 남편의 현악기 공방이 광화문에 있어 이동하기도 좋았다. 또한 남대문의 국보적 1호의 가치도 나를 매료시켰고, 공기 좋은 남산도 매력이 있었다. 공기가 나쁜 것 같으면 남산을 올라갔다 내려와 다시 상인들 곁으로 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사는 이야기를 나눈다. 타인들이라 병에 대해, 자연식에 관하여도 편안하게 말할 수 있어 좋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병자인 주제에 그들이 아프다하면 만져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관절과 혈액의 문제라 장사를 하다 병원에 가는 것이 딱해 주물러주다, 상가 고객도 만져주다, 인기 짱으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고, 17시면 문을 닫는 상인들과 퇴근을 같이 하여 남편 사무실로 곁으로 간다. 환자의 주제 넘는 행동은 엉뚱했지만 나는 그 인연 때문에 공부를 시작했다. 사람들의 신체 일부를 만지는데 인체에 관해 모른다는 사실이 책을 보며 공부하다 부족한 생각과 더 배워야 한다는 의욕이 생겨 십 여 년이 넘는 동안 경기 대학 약손. 대한 경락과 태국 마사지. 중국학원 침술과 오행을 배워 전문인이 되었다. 그리고 신학도 공부하며, 방학에는 의료선교로 인도 태국 독일 등을 다니며
봉사를 하고 있었다. 사회복지 석사를 졸업한 작년까지 주에 두 번 이상을 시장으로 간다. 지금은 목사 안수를 받고, 박사공부를 하며, 글도 쓰랴, 그림을 그리느라 바쁜 일정에도 시간을 쪼갠다. 모자라는 시간 밤을 새는 일이 있을지라도......,
한 동안 못가면 마음이 늘 남대문에 가 있다.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들은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으며 나는 살아가는 강인함과 서민의 애환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삶의 의지를 키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위로와 공부를 꼽았다. 최선을 다하려는 기질도 악착같은 상인들의 삶에서 배웠다.
남대문은 숭례문 옆 남창동에 위치한 최대의 재래시장으로 “남문안장” 이라 불리며 태종 14년에 새 도읍지인 남대문 근처에 가게를 지어 상인들에게 빌려준 것이 시초로 지방의 특산물을 사고팔다가 선조 때 조선농업 주식회사로 설립하여 미곡 어류 잡화 과일 등을 팔다 1922년 경영권을 일본인이 손에 넘어가 있다가 해방과 함께 다시 활기를 뛴다. 미군의 군용원조 물자를 비롯하여 도깨비 시장이라 하여 없는 물건이 없다고 할 정도이었다. 상인은 북한 출신의 생활력 강한 실향민이 70%를 차지하였다. 이제는 창의적인 젊은 세대로 상인이 움직여가는 2만 2천 평의 거대한 시장이 되었다. 전통 공예품. 한국적인 선물. 바이어 선물들. 가격에 비해 품질이 좋은 중저가 상품으로 중간 도매인들은 새벽 3시에 사가고, 낮에는 소매상인, 밤에는 길 가운데 야시장이 서 외국 관광 코스가 되었다. 24시 영업으로 3파트가 돌아가는 셈이다.
백화점에 밀리지 않기 위하여 쇼핑 시장 진출을 목적으로 현대화하고 새로운 홍보전락을 짜야 한다. 환경과 문화가 어우러진 고급화를 지향해야 세계적인 한국 문화로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도에 관광 특구로 지정된 저력을 바탕으로
보다 활발하게 활성화 되어야 한다.
젊은이들로 상인 연합회가 주축으로 바뀌는 과정과 시대의 변천사에서 나도 새로운 삶의 힘을 얻었다. 아는 사람을 완전히 인연을 끊고 피해 다니는 낮은 자존감. 수많은 죽음의 생각. 육체적 병보다 더 극복키 어려운 정신적 불구에서 원기를 찾아 건강한 생각으로 전환하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원동력을 얻었다.
지금은 혈압 약만 먹고 있고, 건강은 양호하다.
그러나 내가 심하게 아파하던 시기처럼 지금 남대문 시장은 위기를 맞은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우선 서민의 발길이 줄어들었다. IMF처럼 자금이 돌지 않아 가게 주인이 바뀌고, 새로운 업종으로의 전환의 고비를 맞고 있다.
옷을 찾는 고객이 밀려 줄을 서던 커먼프라자. TV를 탄 빵집. 갈치조림 음식점도 예전만 못하다. 더욱이 시장 통을 들어섰는데도 북적거리지 않는다.
그 대신 새벽장인 도매시장이 늘어나고.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많아졌다. 이럴 때 내국인도 함께 힘을 합쳐 빠른 시간에 내수가 활성화되도록 잦은 발걸음을 했으면 좋겠다.
시장이 재 기능을 하여 활발해지면 상인들은 기분이 좋아져 혈액도 잘 돌아 육체적 건강도 회복되리라 믿는다. 고민하고 걱정하면 뼈가 마른다고 하지 않는가
재래시장이 살고, 서민의 애환이 줄어야 실물 경제의 체감온도도 올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지 않을까. 대기업이 재래시장과 골목상권까지 참여 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여긴다.
이런 생각 저런 의견들. 때로는 걱정으로 몇 마디 위로하고 아픈 곳을 주물러 주는 것이 다인 나는 오늘은 이불도 장만하고, 며느리 선물과 손자의 옷가지를 사며, 내 옷도 조금은 화사한 톤으로 기분 좋게 샀다. 깊숙한 비상 주머니를 털었다.
메고 들고 묵직한 가방의 무게가 하루의 만족이 되어 밀려와 일단은 늦도록 패션쇼도 해 보고 흡족하여 옷장을 뒤 업고 정리도 한다.
밖은 밝아지더니 벌써 육시가 넘었다.
2009/7.3
남대문 시장과의 인연
조 윤옥
비오는 날이라 남대문 시장으로 향하고 싶었다. 아침에 광화문으로 출근하는 남편을 따라가면 가기에 수월하기에 일찍 서둘렀다. 마석이라 교통체증으로 막히는 시간을 피해 오전 9시 십분 전후로 출발하여 국민대 앞으로 빠지면 한 시간 내로 광화문을 통과할 수가 있다. 그렇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날에는 두 시간의 소요시간이 드는 버스와 국철을 타야 한다. 비가 장마전선으로 장대비가 쏟아져 남편이 시장입구까지 데려다 주었다. 이런 날은 나를 기억해 주고 찾는 시장 상인이 있기 마련이다. 비가 오면 더 심하게 여기저기 쑤시는 아줌마들. 새벽잠을 못자고, 무게 나가는 짐 보따리를 늘 움직이며 생활하는 상인들은 아픈 곳이 많다. 그들은 여유 있게 쉴 수 없는 좁은 공간에 화학섬유에서 뿜어 나오는 독성으로 찬 환기가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
남대문과의 나의 인연. 사람들은 중병이 걸리면 공기 좋은 시골로 들어가는데 전원도시에서 반대로 낮에는 서울로 나왔다. 나는 유방암 수술 후 사람과 더불어 대화하며, 운동도 하는 회복의 기회를 거꾸로 잡았다. 합창단 단장을 하고 그 후 적십자 회장을 하다 갑자기 중병. 공인의 자리에서 옛날부터 알아 온 많은 사람들. 나를 향한 안타깝고 불안한 시선들. 밤새 불쌍해서 울었다는 위로의 말. 나를 보는 안쓰러움이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
나 또한 몹쓸 병이 걸려 친한 사람에게 심적 부담을 줘야 한다는 일이 회복에 악영향을 주었다. 유방암 두 번. 일 년 후 위 대장에서 용정을 떼는 수술을 하고는 즉시 광화문으로 출근하는 남편을 따라 나섰다. 인연을 무 짜르듯 베어 버렸다. 남편의 위로. 부부의 충분한 대화가 회복에 끼치는 영향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남편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 몇 번이고, 일으켜 주신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때로는 통증으로 울면서 내가 오뚝이 인 줄 아느냐고 소리쳐도 마음은 늘 고마웠다. 워낙 오지랖이 넓어 많은 사람을 상대하다 병으로 그들 곁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도 사람이 많고 활기찬 장소를 찾다보니 남대문을 택했다. 남편의 현악기 공방이 광화문에 있어 이동하기도 좋았다. 또한 남대문의 국보적 1호의 가치도 나를 매료시켰고, 공기 좋은 남산도 매력이 있었다. 공기가 나쁜 것 같으면 남산을 올라갔다 내려와 다시 상인들 곁으로 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사는 이야기를 나눈다. 타인들이라 병에 대해, 자연식에 관하여도 편안하게 말할 수 있어 좋다. 그런데 희한한 일은 병자인 주제에 그들이 아프다하면 만져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관절과 혈액의 문제라 장사를 하다 병원에 가는 것이 딱해 주물러주다, 상가 고객도 만져주다, 인기 짱으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고, 17시면 문을 닫는 상인들과 퇴근을 같이 하여 남편 사무실로 곁으로 간다. 환자의 주제 넘는 행동은 엉뚱했지만 나는 그 인연 때문에 공부를 시작했다. 사람들의 신체 일부를 만지는데 인체에 관해 모른다는 사실이 책을 보며 공부하다 부족한 생각과 더 배워야 한다는 의욕이 생겨 십 여 년이 넘는 동안 경기 대학 약손. 대한 경락과 태국 마사지. 중국학원 침술과 오행을 배워 전문인이 되었다. 그리고 신학도 공부하며, 방학에는 의료선교로 인도 태국 독일 등을 다니며
봉사를 하고 있었다. 사회복지 석사를 졸업한 작년까지 주에 두 번 이상을 시장으로 간다. 지금은 목사 안수를 받고, 박사공부를 하며, 글도 쓰랴, 그림을 그리느라 바쁜 일정에도 시간을 쪼갠다. 모자라는 시간 밤을 새는 일이 있을지라도......,
한 동안 못가면 마음이 늘 남대문에 가 있다.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들은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으며 나는 살아가는 강인함과 서민의 애환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삶의 의지를 키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위로와 공부를 꼽았다. 최선을 다하려는 기질도 악착같은 상인들의 삶에서 배웠다.
남대문은 숭례문 옆 남창동에 위치한 최대의 재래시장으로 “남문안장” 이라 불리며 태종 14년에 새 도읍지인 남대문 근처에 가게를 지어 상인들에게 빌려준 것이 시초로 지방의 특산물을 사고팔다가 선조 때 조선농업 주식회사로 설립하여 미곡 어류 잡화 과일 등을 팔다 1922년 경영권을 일본인이 손에 넘어가 있다가 해방과 함께 다시 활기를 뛴다. 미군의 군용원조 물자를 비롯하여 도깨비 시장이라 하여 없는 물건이 없다고 할 정도이었다. 상인은 북한 출신의 생활력 강한 실향민이 70%를 차지하였다. 이제는 창의적인 젊은 세대로 상인이 움직여가는 2만 2천 평의 거대한 시장이 되었다. 전통 공예품. 한국적인 선물. 바이어 선물들. 가격에 비해 품질이 좋은 중저가 상품으로 중간 도매인들은 새벽 3시에 사가고, 낮에는 소매상인, 밤에는 길 가운데 야시장이 서 외국 관광 코스가 되었다. 24시 영업으로 3파트가 돌아가는 셈이다.
백화점에 밀리지 않기 위하여 쇼핑 시장 진출을 목적으로 현대화하고 새로운 홍보전락을 짜야 한다. 환경과 문화가 어우러진 고급화를 지향해야 세계적인 한국 문화로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도에 관광 특구로 지정된 저력을 바탕으로
보다 활발하게 활성화 되어야 한다.
젊은이들로 상인 연합회가 주축으로 바뀌는 과정과 시대의 변천사에서 나도 새로운 삶의 힘을 얻었다. 아는 사람을 완전히 인연을 끊고 피해 다니는 낮은 자존감. 수많은 죽음의 생각. 육체적 병보다 더 극복키 어려운 정신적 불구에서 원기를 찾아 건강한 생각으로 전환하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원동력을 얻었다.
지금은 혈압 약만 먹고 있고, 건강은 양호하다.
그러나 내가 심하게 아파하던 시기처럼 지금 남대문 시장은 위기를 맞은 것이 분명하게 보인다. 우선 서민의 발길이 줄어들었다. IMF처럼 자금이 돌지 않아 가게 주인이 바뀌고, 새로운 업종으로의 전환의 고비를 맞고 있다.
옷을 찾는 고객이 밀려 줄을 서던 커먼프라자. TV를 탄 빵집. 갈치조림 음식점도 예전만 못하다. 더욱이 시장 통을 들어섰는데도 북적거리지 않는다.
그 대신 새벽장인 도매시장이 늘어나고.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많아졌다. 이럴 때 내국인도 함께 힘을 합쳐 빠른 시간에 내수가 활성화되도록 잦은 발걸음을 했으면 좋겠다.
시장이 재 기능을 하여 활발해지면 상인들은 기분이 좋아져 혈액도 잘 돌아 육체적 건강도 회복되리라 믿는다. 고민하고 걱정하면 뼈가 마른다고 하지 않는가
재래시장이 살고, 서민의 애환이 줄어야 실물 경제의 체감온도도 올라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지 않을까. 대기업이 재래시장과 골목상권까지 참여 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여긴다.
이런 생각 저런 의견들. 때로는 걱정으로 몇 마디 위로하고 아픈 곳을 주물러 주는 것이 다인 나는 오늘은 이불도 장만하고, 며느리 선물과 손자의 옷가지를 사며, 내 옷도 조금은 화사한 톤으로 기분 좋게 샀다. 깊숙한 비상 주머니를 털었다.
메고 들고 묵직한 가방의 무게가 하루의 만족이 되어 밀려와 일단은 늦도록 패션쇼도 해 보고 흡족하여 옷장을 뒤 업고 정리도 한다.
밖은 밝아지더니 벌써 육시가 넘었다.
2009/ 7/
|
첫댓글 좋은일을 한다는 건 행복한 일이며 밤을 새어도 졸림지 않는 마력을 갖고 있죠.대단하십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그 넓은 광장 누비고 다녔다니 건강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였군요 작가님 이젠 건강하시죠 더욱더 보람찬 일 많이 하시고 건강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