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19혁명 전후에 있었던 청주에서의 모습을 청주시지에 실린 내용과 몇 가지 자료에 있는 사진들을 모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상당공원에 있는 기념탑 사진들을 언급하며 청주에 있는 또 다른 관련지를 문제로 냈었는데 그것은 바로 청주공고 앞에 있습니다.
<청주공업고등학교 정문 모습...좌측에 4.19혁명 진원지 비>
<청주공고 교문 옆 4.19혁명 진원비>
청주시지에 실린 내용(아래 내용들은 1997년 청주시지 상권 제3편 역사 제6장 현대 제2절 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전망 1. 4.19혁명과 청주시민의 궐기)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 물론 이 이후로 또 다른 연구를 통해 조금 다른 내용들이 있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에...그리고 중간에 들어간 사진들은 청주시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자료들에 있는 것들을 넣은 것입니다.^^
이승만정권은 반일주의와 반공주의를 내세우면서 독재체제를 수립해갔지만, 이승만정권의 반일주의는 일본에 대한 하나의 외교상의 정략에 이용되었을 뿐이며, 정계에서는 물론 문화, 교육계에서도 친일세력은 그대로 안존했다. 친일파 숙청의 실패로 이승만정권 존립의 민족사적 명분은 무너졌고, 다만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립을 표방한 반공주의만이 정권유지의 명분으로 남게 되었다.
정당성을 잃고 독재체제로 치닫던 이승만정권에 대항한 민중운동으로서의 4․19운동은 국민주권회복운동으로 출발했다. 제4대 대통령선거에서 특히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자유당의 선거부정은 절정에 달했다. 선거 당일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민중시위가 일어나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하다 8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시위가 서울, 부산 등지로 퍼져나가는 한편, 마산에서도 피살된 시위학생 김주열의 시체 인양을 계기로 두 번째 민중시위가 일어났다.
<청주에서 4.19혁명때 시위하는 학생들 모습>
한편, 청주공업고등학교의 써클인 공석회(公石會)는 3월 9일의 민주당 강연을 계기로 시위를 벌일 것을 모의하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되고 시위는 사전에 봉쇄되었다. 경찰에 연행된 학생들은 시내 소명여관에 감금되어 있다가 민주당 강연이 끝난 다음 풀려났는데, 이 학생들의 발의로 각 학교 대표들이 모여 3월 12일 야간에 봉화데모를 하기로 결의하였으나 이것도 사전에 발각되어 좌절되었다.
그런데 3월 13일, 청주에서는 경찰이 학생들을 협박하여 자유당 관제데모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각 학교 학생대표 13명은 3월 14일 오전 9시를 기하여 부정선거 규탄데모를 감행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것도 사전에 발각되어 봉쇄되었으며 주동자 13명은 연행되어 고문을 받은 후 소명여관에 감금되었다. 연행되었던 학생들은 15일 오후 5시에 석방되었는데, 그 다음날 마산사건이 보도되고 그후 김주열의 참사사건이 보도되자 학생들은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청주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은 4월 16일 청주지방의 장정징집일을 기하여 청주공업고등학교 교정에서 데모를 일으키려 하다가, 경찰의 방해로 여의치 못하자 장정환송을 위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던 청주역으로 분산 이동하였다. 그러나 선언문을 낭독하려 할 때 경찰이 몰려와 데모대는 해산당했는데, 이때 학생 40여 명이 연행되었다.
4월 18일 서울에서는 고려대생의 시위가 있었는데, 이 날 청주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은 오전 9시 교문 진출을 시도했으나 경찰에 의해 봉쇄되자, 교내에 들떠 있었고 수업시간에는 삐라를 만들기에 바빴다. 그러나 11시경 천여 명의 학생들은 교문 진출에 성공했고 내덕동 방면으로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청주상고생 천여 명과 청주고생 9백여 명이 합세하여 시위대는 순식간에 불어났다. 경찰은 백차로 길을 막고 기마대로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했으나, 시위대는 전진하여 청주여고 앞에 이르렀고 청주여고생 300명이 합세하게 되어 시위대는 3천여 명이 넘었다.
시위대는 도청앞에 이르러 증원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야 했다. 이때 230여 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는데, 그 중 주모자로 몰린 오성섭, 신광호, 이용희, 이세현, 임병준 등 5명은 구류 처분을 받았다. 30여 명의 부상자를 낸 시위대는 경찰의 공포발사로 2시경 일단 해산하였으나, 대다수의 학생들은 우암산 계곡으로 피하였다가 다시 청주여고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내는 오후 4시경이 되어서야 잠잠해졌으나, 다시 8시경 5백여 명의 학부모들이 자녀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4월 19일 오전 9시경, 청주농고 학생 5백여 명은 괭이, 삽 등 농기구를 가지고 내덕지서 앞을 통과하여 대성중학교 부근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경찰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또한 청주대학, 세광고등학교, 청주공고 학생들이 부정선거 규탄과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했는데 경찰은 소방차를 동원하여 제지하였다. 충북대학은 20일을 시위일로 예정했다가 19일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 후 질서회복과 희생학생을 위한 모금운동에 주력했다.
이외에 당시 재야인사 홍원길, 25일 서울의 교수단 시위에서 연락사무를 맡았던 청주대학의 이정규학장 등이 학생들의 시위와는 별도로 4․19 운동 상황에 참여했다.
4․19 운동이 폭발한 직접적인 동기는 대통령 선거에서의 자유당의 파렴치한 선거부정에 있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부정선거 규탄운동이 아니라 국민주권주의를 회복하려는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미국의 경제원조의 감소로 산업이 침체하고 실업률이 높아져서 6․25 전쟁 중의 독재체제 및 반공체제 강화에 눌려있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활성화되고, 이승만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마저 약화되어 4․19 민주화운동은 독재정권 타도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4․19 민주화운동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위에 성취된 민주주의는 5․16 군사쿠테타로 인해 그 발전의 진로가 또다시 불투명하게 되었다.
청주지역에 있던 학교들의 옛 모습
<옛 청주고>
<청주농고>
<청주상고-현 대성고>
<옛 청주여고>
위에 있는 글을 보면 청주공고, 청주상고, 청주고 학생들로 늘어난 시위대가 도청으로 향하기 전에 청주여고에 집결하는 모습이 있는데 현재의 청주여고를 생각하면 움직이는 동선이 헷갈리죠...당시에 청주여고는 지금의 상당공원 옆에 있었기 때문이죠...아래 지도는 1971년도에 제작된 것인데 자세히 보시면 도청과 상당공원 근처에 중앙여고와 청주여고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19혁명을 흔히 미완의 혁명이라고도 합니다. 5.16군사 쿠테타에 의해 많은 것들이 좌절되었기 때문이죠. 4.19와 5.16이후 정권에서는 학생들을 동원해 4.19를 상기하고 5.16을 계승하자는 각종 대회도 많이 열었죠...지금은 쿠테타로 규정된 5.16을 계승하자고 했으니 역사란 참...^^
첫댓글 울 아버지 생전에 <나도 4.19의거때 나가 데모했다.>라는 야그 들은 적 있어요.ㅎㅎ
청주공고가 청주기계공고를 말하는군요.. 청주여고, 중앙여고도 시내에 있고.. 유익한 자료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