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영자에게
姜 中 九
영자야, 참으로 오랜만에 불러보는 너의 이름이다. 그동안 잘 있었지?
오늘 사범학교 동기생들이 지리산으로 단풍놀이를 다녀왔단다. 오랜만에 나들이에 나선 친구들은 백발이 성성한데도 마음은 진주 남강 가에서 뛰놀던 학생시절로 돌아가 짱구야, 새침아, 할배야를 불러대며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웃음꽃을 피웠다.
동기생들이 어울려 놀다보니 멀리 떠나버린 네 생각이 간절하더구나. 네가 있었으면 오늘의 나들이가 얼마나 더 즐거웠을까. 너의 간드러진 노래에다 춤 솜씨가 눈에 선해서 집에 오던 길로 펜을 잡고 이 편지를 쓴다.
영자야, 우리는 6·25 전쟁이 나던 다음해 병설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만났지. 그때 우리학교는 전쟁으로 불타버려서 진주여고 강당에서 갑,을,병,정반이 동서남북 벽을 보고 공부를 했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나면 오후에는 대총을 메고 제식훈련을 했고 도동에 가서 군용비행장을 닦기도 했다. 3학년 때에는 군용트럭을 타고 남해로 수학여행을 다녀왔고.
우리는 함께 사범학교로 진학하여 ‘스승이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자’라는 교시탑을 바라보며 청운의 꿈을 키워갔다. 네잎클로버를 찾기도 하고 울긋불긋 코스모스 꽃이 피는 가을이면 그 집 앞, 가고파 등을 소리 높여 불렀지. 그러다가 어느 해 3월 졸업장과 초등교사 발령장을 받아들고 각자의 임지로 뿔뿔이 헤어져갔다.
그리고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우리는 부산에서 다시 만났지. 옛날의 수줍음은 흘러버린 세월에 실어 보내고 그때부터 우리는 영자야, 중구야를 스스럼없이 불렀다.
그러던 어느 해 봄날, 네 아들이 우리학교에 입학을 했으니 참으로 묘한 인연이지? 너와 나는 동기생인데 너의 아들과는 사제지간이 되었으니 이제는 교사와 학부형사이가 아니더냐.
그 다음해 전국동기회의 시초가 된 서울동기생 초청행사 때 회장을 맡고 있던 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네가 발 벗고 도와주워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아니, 너는 동기생 일이라면 언제나 발 벗고 나섰지.
그 무렵 무슨 일로 너의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전화를 받은 네가 너의 남편을 바꾸어 주는 바람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니? 다행히 너의 남편과는 아는 사이여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어쩔번 했느냐고 나무랐더니 감기든 내 목소리가 남편 친구인줄 알았다고 했었지.
그리고 어느 해 가을, 독립기념관 구경을 갔을 때 너랑 나랑 손잡고 거니는 모습이 부럽다면서 촬영해준 문군의 사진은 참으로 멋이 있었지. 그 사진을 본 친구들이 시샘을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언제였던가, 여학생들끼리 괌으로 여행을 갈 때 나는 너와 단짝인 정자편에 선물을 보냈다. 괌에 가거든 함께 풀어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나누어 가지라면서. 여행을 다녀온 너희들은 박장대소를 하면서 빨간 팬티는 네가 입고 정자는 브래지어를 착용했노라고 했었지.
노래방이 처음 생겼을 무렵 가까운 동기들끼리 노래방에 갔을 때 노래를 잘 하는 너는 립스틱 짙게 바르고를 열창했고 음치인 나는 개구리 노래를 불렀다. 정자는 명창답게 우리가곡을 불렀고. 그 노래들을 녹음해두어서 지금도 네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영자야, 네가 가장 행복해하던 때는 아무래도 동기생끼리 사돈을 맺을 무렵이 아니었던가 한다. 결혼식 전날 밤에 덩달아 흥이 난 동기생들이 사돈 결연식을 한다고 부산을 떨었지. 그 때 너의 사돈끼리는 참으로 행복해보여서 친구들은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네가 아프다고 했을 때 나는 모든 것 다 잊고 공기 좋은 시골에 가서 휴양을 하라고 권했다. 그런데도 너는 학원에 기숙하며 공부하는 학생들을 잘 먹여야 한다면서 밤에까지 일을 하더구나.
그러다가 병이 깊어지자 지리산 속에 있는 칠불암 아래다 숙소를 정하고 휴양을 했었지. 그 때 동무들이 찾아가서 하루를 지내면서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맑은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놀면서 칠불암 계곡이 좋으니 언제쯤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했었지.
그것이 너의 유언이 될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는가. 어느 날 네 부음을 받고 장지로 달려갔더니, 너의 커다란 영정사진이 나를 보며 웃고 있더구나. 너의 아들은 나의 옷소매를 잡고 통곡을 하는데도 말이다. 그날 우리 동기생들은 네 장례술을 축배인양 마셨지만 나는 속으로 울었다.
영자야, 네가 유명을 달리하고 난 그 다음해 우리 동기생 10명은 배낭을 짊어지고 남아메리카 여행을 31일 동안 했단다. 그 다음에는 인도와 아프리카를 32일 동안이나 헤매고 다니면서 네 이야기를 얼마나 했는지 아니? 네 짝인 정자는 네 이야기만 나오면 안타까워서 말도 못하다가 빅토리아폭포 부근에서 뱃놀이를 할 때에는 네가 그리워서 ‘친구여’를 불렀다.
영자야, 이제는 우리 동기생들도 원만큼 나이가 들고 보니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 좋아하던 여행도 함께 갈 친구가 없단다. 이런 때 네가 살아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니.
영자야, 언젠가 네가 걸어온 길을 책으로 남기고 싶다고 그랬지. 남들은 부모님 유산으로 쉽게 학원을 운영하는 줄 알지만 참으로 많은 고생을 했노라면서. 아들을 임신한 만삭의 몸으로 마산까지 가서 전신주에 학생모집 광고를 붙이다가 경찰서에 잡혀가서 당했던 수난은 잊을 수가 없노라고 했었지. 그래서 너의 인생길을 자서전으로 남기고 싶다고 하더니 시작도 하지 못하고 가버렸으니, 그때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지 못한 내가 한이 되는구나.
영자야, 저승에서는 부디 건강하게 살아라. 이승에서 누리지 못한 천수를 누려야지, 그리하여 언젠가 내가 가거든 활짝 웃는 얼굴로 반겨주렴.
영자야, 네가 생각날 때마다 소식을 전하고 싶었지만 하늘나라에 있으니 전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보니 중앙동 40계단 길가에 ‘하늘로 가는 우체통’이 있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이 편지는 내일 그 우체통에 넣을 테니 받아보는 대로 답장해주기 바란다. 기다릴게. 너의 동기생 친구, 中九가.
姜 中 九
부산부흥중학교 교장 역임. 제1회 교원학예술상 수필부문 수상.《수필공원(현 에세이문학)》 추천완료,
·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에세이문학회, 부산수필문인협회, 에세이부산문학회 회원, 부산문인협회, 부산수필문인협회 이사, 수필부산문학회 고문,
· 수필집《가을에 그린 초상화》《징검다리가 있는 마을》《산이 있기에 물이 있기에》《몽블랑을 찾아서》
· 국제문화예술상 수필 본상 수상
607-751 부산시 동래구 동래구 옥샘길 34번지, 우성베스토피아 APT 111-606호
전화 051-554-8289, H.P 010-4463-8289, E-mail : sanha38@hanmail.net
첫댓글 잊지못할 좋은 이성 친구였던 것 같습니다.
진주고는 여학생이 없어서 좀....심심했었습니다
산하, 고인이 된 영자(진주사범 13기 동기, 전 부산학원 이사장)를 추모하는 이 글 읽고 종일 가슴이 짜안하다네. 나도 영자와는 추억거리가 많은데 아렇게 悔恨으로 엮어진 글 읽고는 남은 우리의 시간 좀더 오순도순 가꾸어 가야겠다고 다짐한다네. 좋은 글 고맙네.
그 영자라는분 참 행복하네요 챙겨주는 남학생들이 아직도 많이 있으니 ...저도 명복을 빕니다 안병남
하늘나라에 가 있는 영자씨께 보내는 편지글. 다 읽고 나니 내 마음이 그렇네. 친구로 살다간 흔적 편지로 남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