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부터 현재까지 김은희가 사사받고 있는 이매방 선생님의 생애
전통무용가. | |||||||||||||||||||||||||||||||||||||||||||||||||||||||||||||||||||||||||||||||||||||||||||
본명은 규태(圭泰). 1935년 집안 어른인 명무(明舞) 이대조(李大祚)의 문하에서 승무를 배웠으며 1939년 화순 출신의 박영구에게 법고와 승무를 배웠다. 1943년 목포공업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임방울명인명창대회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승무를 추었다. 1957년과 1959년 부산 대영극장과 원각사에서 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1968~78년에 미국·일본·프랑스 등의 세계무용축제에 참가했다.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의 승무는 힘이 있고 선이 굵어 시원스러운 느낌을 준다. 주요작품으로는 삼현승무·보렴승무·살풀이·검무·산조 등이 있다. 1985년 문화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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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인생 칠십에 춤이 보인다 (이매방 선생님 인사말씀) |
만나는 사람마다 나의 춤 발표회를 축하한다들 한다.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왜냐면 이번 발표회가 나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춤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곱살에 춤을 배워 70년동안 그짓만 하면서 세상을 보냈으니 그럴 법도 하지 않겠는가 그러다보니 지금 나의 생각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저 "지긋지긋하다"는 말마디로 표현할수 밖에 없다. 돌이켜 생각하면 만사가 그러하다. 이슬 같고 구름같고 바람 같은 나의 70년 춤 인생은 문자 그대로 가시밭 길이요 자갈밭에 달구지 끌고가는 지경이었다. 그것도 가는곳이 정해진 것도 아니요 목적지에 닿으면 편히 쉴수 있었던 형편도 아니었다. 그저 멈출수 없는 발걸음 이라 쉴 사이도 없이 걸어나온 70년 춤 인생이니 어찌 지긋지긋하다는 말이 헛된 표현인가, 어찌 구름이요 바람이요 이슬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동안 단 한번도 춤을 그만 추어야겠다고 장삼자락을 찢은 적도, 북채를 내던진 적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멸시 당하고 천대받고 눈치밥 먹을 바에야 당차게 자리를 박하고 나와야 옳았으련만 나는 그렇게 못한채 80고개를 저만치 바라보게 되었으니 어찌 마지막 춤이라는 생각이 안들겠는가. 누가 뭐래해도 나는 춤을 추다가 쓰러질 사람이다. 그것이 운명이요 팔자요 삶 자체이다. 몹쓸 병에 의사의 집도를 받고는 체중이 헌 짚신짝만큼이나 줄었을때도 무대에 올라서면 굽은 등이 펴지고 까치걸음이 날렵해지고 어깨춤이 절고 나는 나였다. 못된 제자를 만나 피를 토하는 배신과 모욕과 울분에 사나이 눈물을 깨밀다가도 시나위 구음에 장단 소리만 나면 나는 오뉴월의 은어처럼 생기가 돌았으니 천생 나는 춤을 추다가 갈 사람이요 신이 점지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불가에 이르기를 이승은 잠시 머물다가 가는 임시의 쉼터라고 했다. 내세로 이어지는 길목이지 이곳이 결코 안주할 목적지가 아니라고했다. 그러니 그 이상의 무엇을 탐하고 욕심부리고 넘어다 볼 것인가. 사랑도 미움도 욕심도 모두가 재요,모래요,연기라 생각하며 살풀이춤의 애절함과 승무의 유연함에 취하다가 가리라는 나의 마지막 소망이 있기에 나는 오늘밤 이렇게 무대에 서있을뿐이다. 아~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준 모든 분의 정이 없었던들 어찌 내 이름 석자와 예술이 이땅에 남았겠는가. 미워도 고와도 나를 키워준 은혜일진데 그 은혜에 보답 하는 뜻에서 오늘도 춤을 출 뿐이다. 다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은 춤이 왜 있고 춤을 왜 추고 그리고 어떻게 나의 춤세계를 이어갈 것인가에 대한 후배들의 마음가짐이 걱정이다. 새로운 춤을 추구하는 그 자체를 부정하자는게 아니다. 낡은 것을 고집하자는게 아니다. 그러나 참된 예술은 구도에 있고 새로움은 온고지신에서 온다는 이치는 불변의 가르침인데 그것을 모르기에 하는 말이다. 인생은 짧아도 예술은 길다는 건 결코 묵은 잔소리가 아니다. 눈 앞의 이득이나 유행에 눈이 홀려 영원함을 잊어버리는 후학들에게 아쉬움의 말을 남기며 나는 다시 무대로 나갈 것이다. 아 그곳이 바로 우리의 꿈이 있고 만남이 있고 사랑이 있으니 어찌 그자리를 비워둘 수가 있으랴. 2004년 12월 이매방. |
처용무가 궁중 무용의 꽃이라면 승무는 민속 무용의 꽃이다. 시인 조지훈이 그의 <승무>에서 표현한 대로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을 나비처럼 곱게 쓰고 그 위에 장삼을 입고 가사를 걸치고 기다란 소매를 허공에 뿌리며 추는 승무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경건한 종교적인 품위가지 느끼게 해 준다.
부처님에게 축원하고 합장을 한 다음 긴 염불로 시작하여 북을 어른 뒤에 타령으로 바꾸어서 다시 북을 어르고, 굿거리를 춘 다음에 본격적으로 북을 두드리고 다시 굿거리로 마치는 승무를 출 때, 왜 북을 두드리는지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승무의 무형 문화재 기능 보유자였던 한영숙과 더불어 승무와 살풀이춤의 대가로 꼽히는 이매방은 자기는 북을 두드릴 때 가슴 속에 맺힌 응어리를 북에다 하소연하는 심정으로 두드린다고 한다. “남들이 어떻게 설명하는지 몰라도 나는 내 승무를 이렇게 설명해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을 하다가 그 사랑이 깨져서 중이 되었는디 수도를 하다가 문득 옛날 생각이 나고 속세가 그리워 가슴 속에 왼갖 번뇌가 떠오른단 말이지요. 그래서 그걸 참다못해 그 울분, 화, 이런 것을 춤이나 북을 두드리는 것으로 해소할라고 추는 춤이 바로 내 승무라” 불교적인 용어로 점잖게 설명하자면,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기원하는 수도승의 내면세계를 묘사한 춤이라는 말이 되겠지만 그런 어렵고 딱딱한 말보다는 그의 말이 훨씬 쉽고 현실감이 있어 보인다. 이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승무를 비롯한 전통 무용에 젖어 살아 왔고 특히 승무에서의 북춤에는 세계의 제일인자라고 누구나 인정할 만큼 그 세계에 뼛속 깊이 통달해 있는 까닭이리라.
승무를 출 때는 누구나 ‘천수북’이라고 불리는 북을 앞에 놓고 북채 두 개로 ‘구래’라고 불리는 가죽 부분과 ‘변죽’이라 불리는 북 가장자리를 두드리며 북춤을 추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의 북춤을 한 번 보고 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북 가락은 싱거워서 들을 맛이 안 난다고 할만큼 사람의 속을 울리는 묘한 힘이 있다. “소리나 춤이나 타고나야지 억지로 하면 안 돼요. 관중이 천 명이고 만 명이고 간에 그 사람들을 잡았다 놨다 험시 관중들 오장을 속속들이 후벼 놓고 울려 놔야 명창이니 명무니 하는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아무나 명창이 되고 명무가 될 수 있나요. 나는 우리나라에 명무는 딱 세 사람밖에 없다고 봐요. 김천홍 선생, 한영숙 선생, 그리고 나.” 스스로 자신의 춤이 명무라고 자부하는 것은 작년에 <북소리>라는 무용 인생 50년 특별 기념 공연을 할 때에 판소리 명창 김소희가 “앞으로 우리 나라에 이 분처럼 춤 잘추는 사람이 다시 나올까 의문이다”고 칭찬한 말이나 명무 한영숙이 “북춤에 있어서는 한국 아니 세계에서 유일한 분이다”고 칭찬한 말에 힘입은 바도 크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춤추는 머시마’로 놀림을 당하면서도 한 번도 한눈팔지 않고 춤 속에서만 살아온 자기 인생에 대한 확실한 자신감에서 우러나온 말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닌다. “세 살 때부터 누님들처럼 머리 땋고 쪽 찌고 머리 틀고 치마 저고리 입고 경대-지금 거울이라고 허는 거 말예요- 앞에서 춤을 췄다니까 말해서 뭘 해요. 자라면서 남자애들하고는 안 놀고 맨 여자애들하고 소꼽장난하고 놀았어요. 주위에서는 이씨 가문에 만고에 없는 굿쟁이가 나올랑갑다 하면서 걱정들을 했지요.” 과연 주위에서 걱정한 대로 그는 일곱 살에 아버지 몰래 전라남도 목포 권번에서 이대조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대조 선생이 사실은 우리 할아버지예요. 우리 집안이 할아버지대까지 무업을 해 오다가 아버지께서 무업을 끊고 일체 자식들에게 그 일을 못하게 했는데 내가 다시 그 업을 이어받은 거지요. 그러니 피는 못 속이나 봐요.” 할아버지에게서 춤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허튼 춤‘을 배운 뒤에 광주에 와서 국민 학교를 다니는 동안 그는 광주 권번에서 박영구에게 승무와 북을 배우고 이창조에게 검무를 배웠다. “요새 와서 알게 된 건데 승무로 치면 내가 오 대째라는 거예요. 맨 처음 승무를 창시한 분이 신방초라는 분이고 그 다음이 이정선 선생, 그 다음이 김금옥 선생이고 김금옥 선생의 제자로 한성준 선생과 박영구 선생이 있는데 한성준 선생 밑에서 한영숙씨가 나오고 박영구 선생 밑에서 내가 나왔다는 거지요.”
승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뒤인 신라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고, 그 밖에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주장이 있어 확실하게 단정을 내리기 어렵다. 게다가 신방초가 승무의 창시자라는 설은 문헌의 고증이 없어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고, 다만 여러 원로 무용인들 사이에 전해 오는 이야기를 종합하여 계보를 추적해 올라갈 때에 승무계에서 제일 ‘웃어른’으로 꼽히는 사람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는게 무난할 듯하다. 어쨌든 그러한 계보를 거쳐 전해진 승무를 그는 박영구에게 회초리를 맞아 가며 배웠다. “우리 선생님은 기가 막히게 춤을 추시고 소리북도 잘 치시는 멋쟁이였어요. 그런데 발을 약간 절어요. 그래도 춤추면 몰라. 우리 선생님이 북을 치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물레를 타다가 어깨춤을 절로 추곤 했으니께. 그 북가락을 내가 배우는디 참 배우는 방법이 옛날식이라. 선생님이 북도 내주지를 않아서 함부로 칠 수도 없고 감나무 가지 꺾어서 만든 북채를 가지고 입으로 몇 가락 배운 것을 돌담에서 혼자 돌을 두드림서 연습을 혀. 그러자니 손등이 벗겨지고 굳은 살이 박혀요. 다른 기생들은 힘들다고 다 집어치웠는데 나는 끝까지 버텼어. 선생님 눈치 봐서 기분 좋을 때 한 가락씩, 사흘에 한 번 열흘에 한 번 그렇게 동냥하다시피 가락을 배웠어요. 요새 사람들이 들으면 야만적이고 원시적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배운 거라서 그게 잊혀지지 않아요.”
그렇게 ‘야만적이고 원시적’으로 배운 그의 북은 그 가락의 다양함이나 기교가 뛰어남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박영구와 함께 서울에서 활동했던 명무 한성준은 승무나 학춤뿐만이 아니라 소리북 잘 치기로도 당대에 따를 자가 없었지만 그의 북춤 가락도 박영구에 견주면 ‘재산이 많지 않다’고 평가된다. 그것은 그의 춤을 이어 받은 한영숙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구정놀이’라고 부르는 자진모리의 여러 가락과 ‘세산조시’라고 부르는 휘모리의 여러 가락들은 물론 농악 장단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곧, 풍물의 꽹과리 가락이나 장구 가락 그리고 북 가락 등을 북채 두 개로 두드릴 수 있게 변화시킨 가락이 대부분이다. 거기에다 이매방은 ‘엇머리’장단을 새로 창작하여 ‘재산’을 늘렸다.
“북춤 추는 시간이 삼 분에서 오 분 사이인데 남이 볼 때는 시원하고 쉬운 것 같아도 거기에다 엇붙임, 잉어거리 같은 어려운 기교를 다 익히려면 십 년 공부는 해야 돼요.” 그 역시 그 어려운 공부를 국민 학교를 졸업하고 목포 공업 학교 건축과에 다닐 때까지도 계속했다. 열네 살에 명창 임방울이 주최한 명인 명창 대회에서 승무를 춘 뒤로 학교에서나 주위에서 ‘춤추는 머시마’라고 놀려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춤만 추었다. 그런 일과 함께 그의 성격은 더욱더 여성화되어 갔고 그 기질은 평생 동안 그를 따라 다녔다. 그는 “한국춤은 여자가 추어야 제 맛이 나고 남자가 추더라도 여성적인 태도가 우러나야 그 맛이 제대로 난다.”고 하며, 여성화된 춤의 미학에 대해서 확고한 지론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것은 탈춤이나 농악을 출 때의 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니 그것들과 비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승무나 살풀이를 추는 남자 춤꾼들의 거의 모두가 여성화되어 있고 여성화되지 않은 춤꾼이라도 씩씩하고 활발한 남성적 정서보다는 부드럽고 연약한 여성적 정서를 위주로 하여 춤을 추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갖고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한국의 무용계가 풀어야 할 숙제로 꼽히기도 한다. “한국 춤은 덜렁이 왈가닥은 못 춰요. 성격이 차분하고 얌전하고 어딘가 애원이 깃들어 있고, 눈에 색이 흐르고 또 그 눈에 변덕이 죽이 끓듯 하면서 왼갖 감정을 나타내어 슬프고 아름답고 어여쁘고 수심이 가득 차고, 곱게 빗은 머리에서 머리카락 한 오라기가 살짝이 흘러 내려오듯이 교태가 있어야 그 춤이 제 맛이 나는디, 덜렁이 왈가닥이 어떻게 그 춤을 추어요? 장삼을 날리면서 그늘을 지어서 한을 만들어 내고 고깔을 좌우로 놀려서 왼갖 하소연을 해야 하는디 요새 춤추는 사람들 보면 구르고 넘어지고 몸부림치고 가랭이 쩍쩍 벌리고 궁둥이 흔들어 대니 그게 춤이예요? 지랄 염병하는 것이제.”
‘욕 대장’, ‘직사포’, ‘깡패’, ‘따발총’이라는 많은 별명에 어울리게 그는 눈에 거슬리는 춤에대해 매섭고 혹독한 비평을 큰 소리로 얘기했다. 그러나 그가 남을 비판할 때 무기로 사용하는 한국춤의 여성적 아름다움에 대한 확신은 요즈음 새로운 각도에서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곧, 그러한 여성적 정서를 강조한 춤이 한국춤을 나약하고 비생산적이고 향락적이고 소비적인 기생춤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판의 말들은 그를 더욱 화나게 해서 그를 더욱 더 남성적인 욕 대장으로 만들어 주지만 이런 문제는 욕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좀더 냉정하게 이론적으로 검토되고 정리괴어야 할 문제인 듯 싶다. 문제야 어떻든지 간에 그는 더욱더 여성화되어 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을 따라 북경에 잠시 머물러 있을 때에 중국의 유명한 무용수 매란방에게 부용을 잠깐 배운 뒤로는 매란방처럼 되는 것을 평생의 소망으로 삼을 만큼 깊이 빠졌다. “매란방하면 우는 아기도 그친다던 유명한 무용가인데 남자예요. 기가 막힌 미남이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여자 역할만 맡아서 여자춤을 추면 여자고 남자고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 버린다니까요. 오죽하면 일본 천황이 반해서 자기 앞에서 춤을 추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했으니까요. 중국 평민들은 얼굴도 볼 수 없고 그 사람이 공연하면 황제 귀족들만 와요.” 해방이 된 뒤에 목포 권번의 무용 선생으로 있던 시절, 나이도 어리고 키도 작아 기생들한테 ‘뚜드려 맞기도’ 많이 하다가 악극단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창공」이라는 단체를 따라다니며 밴드 반주에 맞춰서 승무를 추기도 했다.
그 뒤 광주 국악원으로 자리를 옮기고서는 전라남도 경찰국 선무 공작반의 무용단 단장이 되어 전남 일주 순회공연을 하기도 하고, 임방울이 만든 단체를 따라다니며 춤을 추기도 했다. 6.25 직후에는 육군 군예대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부산 유지들의 권유를 받아 부산 국악원의 무용 강사 노릇을 하는 따위로 쉴 새 없이 떠돌아다니며 춤을 췄다. 그러면서 북을 하나 놓고 치는 전통적인 외고 형식을 나름대로 바꾸어 보기도 했다.
1948년에 임방울이 목포 역전 가설극장에서 명인 명창 대회를 열었을 때는 북을 셋 놓고 치는 삼고를 선보였고, 1953년에 전라북도 군산에서 국악원 주최로 명인 명창 대회가 열렸을 때에는 구고(九鼓)를 선보였다. 1954년에는 서울 계림 극장에서「심상 여성 국극단」의 창극에 특별 출연하여 칠고를 선보였으며, 1955년에는 광주 극장에서 <이매방 무용 발표회>를 열어 오고를 선보였다. “요새 사방에서 북춤들을 많이 추는데 그게 어디서 나왔는지 아는 사람이 드물어요. 그래서 작년에 <북소리>라는 발표회를 열어서 북춤이 어떻게 변해 왔는가를 정리해 보았어요. 그런데 내가 만들어 놨으니까 하는 얘긴데, 외고나 삼고는 예술적인 가치가 충분히 있어요. 허지만 오고나 칠고, 구고, 십일고로 넘어가면 예술적인 면보다는 쇼적인 변이 강해요. 손님들한테 잘 보일려고, 박수를 얻어낼려고 징그럽게 교태를 부리기도 하고요. 사실 요새 여자들이 추는 북춤은 주로 관광업소나 나이트클럽 같은 데서 술취한 사람들의 눈요기거리로 변했잖아요?” 젊어서 쇼무대에 나섰더라면 떼돈을 벌었을 터이지만 그런 유혹을 뿌리치고 본격 무대에서만 춤을 춰왔다고 자부하는 그는 그 뒤로는 서울과 부산을 왔다갔다하면서 무용 발표회를 열고 외국을 수없이 들락거리며 해외 공연을 하고 국내의 중요한 무용 공연에는 어김없이 출연하면서 그 명성을 높여 와 이제는 웬만한 춤의 문외한도 승무와 이매방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지위를 굳혔다.
“내가 관운이 없을라는지 문화재법이 생겼을 때 마침 일본에 가 있어서 지정을 못 받았어요. 거의 이십 년 전이니까 물론 나이도 아직 어려서 그랬겠지만 아직까지 질질 끌어오는 게 뭔가 관운이 없나 봐요.”(주: 이매방선생은 1987년 7월 1일자로 승무보유자로 지정을 받았다) 관운만 없는 게 아니라 재운도 신통치 않아서 평생 춤추고 살아온 결과로 마포구 아현 3동에 있는 서른 평짜리 연구실과 궁색한 살림살이밖에 남은 게 없다는 그이지만 돈과 처세에 무능한 자신의 성격을 별로 탓하는 기색도 없다. “어느 기자가 어떤 무용과 교수 집에 한 번 갔다가 뒤로 넘어지게 놀랐대요. 그 집에 대통령 집보다도 더 으리으리하고 궁궐 같았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집에 와서 보고는 또 한 번 놀랐대요. 그 집에 비해서 너무 초라하고 가난해서 그랬대요. 그래도 나는 웃어요. 어수룩한 예능계에서 남 등쳐 먹고 돈 벌어서 살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난 못해요. 그게 어디 예술가입니까? 사기꾼 날강도지.”
울분만 끓어오르면 술을 마시고 직사포처럼 거침없이 바른 말을 해대는 성격 때문에 손해도 많이 보고 몸도 많이 상한 그는 오 년 전에 그 좋아하던 술을 딱 끊어 버렸다. 술을 끊으니 성질도 변해서 남의 욕도 덜하게 되고 제자들 가르칠 때에도 예전처럼 무섭고 사납게 굴지 않고 많이 부드러워졌다. 타고난 성격 탓으로 신식 문물보다는 옛 것을 더 좋아하는 그는 노래도 판소리나 육자배기를 좋아한다. 신식 노래라고 해야 겨우 고복수, 황금심, 이미자의 노래를 들을 정도고 요새 노래에는 아예 귀를 열지 않는다. “춤도 그래요. 원형과 기본을 버려서는 안 돼요. 아무리 창작도 좋지만 어떻게 한국춤의 기본이 곡선에서 직선으로 바뀌고 자연스러운 동작이 태권도 같은 현대 무용으로 변합니까? 창작을 하더래도 원형을 지켜 가면서 조금씩 해야지. 요새 젊은 무용가들의 춤을 보면 이게 춤인지 지랄발광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예요.” 이렇듯 고지식하다 싶을 정도로 옛 것을 고수하는 그의 고집도 요새 와서는 조금씩 꺾이기 시작했다. 세상이 너무 바뀌어서 도무지 그의 고집이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도 눈치 채기 시작한 것이다.
“요새 대학생들은 승무 추면 다 졸아요. 승무에서 염불 장단이 제일 멋있고 춤도 맛이 진진한 법인데 염불 장단만 나오면 다 꾸벅꾸벅 졸다가 갑자기 북을 치면 그때야 박수가 나와요. 요새는 뭐든지 빠르고 미친놈처럼 흔들어 대야 좋아하니 원춤대로 추다가 손님 다 가버리고 나 혼자 추면 뭐 해요?” 그렇게 걱정을 하면서도 혼자서 추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는 그는 그런 걱정과 한을 오로지 북을 두드릴 때 풀어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하며 쓸쓸해 한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두드릴 때 그의 가락이 왜 그토록 격렬하고 격정적이며 때로는 가슴이 저리도록 애닳고 슬픈 울림을 주는지 조금은 알 듯도 했다. [편집자주] 이 원고는 김명곤 국립극장장이 기고했던 내용을 본인의 허락을 득하여 원문 그대로를 전문 게재하였음을 밝혀드립니다.(자료출처/전통예술신문) |
누가 뭐라해도 나는 춤을 추다가 쓰러질 사람이다.
그것이 운명이요 팔자요 삶자체다
몹쓸병에 의사의 집도를 받고는
체중이 헌 짚신짝 만큼이나 줄어들었을 때도
무대에 올라서면 굽은 등이 펴지고,
까치걸음이 날렵해지고,
어깨춤이 절로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못된 제자를 만나 피를 토하는 배신과 모욕과 울분에
사나이 눈물을 깨밀다가도
시나위 구음에 장단 소리만 나면
나는 오뉴월의 은어처럼 생기가 돌았으니
천생 나는 춤을 추다가 갈 사람이요,
신이 점지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99팔팔 나의 건강學>
“춤은 전신운동… 암도 물리쳤지”
‘영원한 춤꾼’ 이매방 (80세)
이옹은 5년 전 위암 수술을 받았다. 70대에 위를 모두 들어내는 대수술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60㎏이던 몸무게가 44㎏으로 줄었다. 그럼에도 이옹은 여전히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속 무대에 오른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자택인 빌라로 이옹을 찾았다. 빌라 2개층을 통째로 쓰고 있었는데 1층은 살림집이었고, 2층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홀로 꾸며져 있었다.
“수술후 기력이 예전만 못해. 무대에 오를 때 20분 정도 공연하던 승무는 10분, 그리고 17분여 공연하던 살풀이춤은 8분 정도로 시간을 줄였어.” 그러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딱히 몸이 불편한 곳도 없어 보였다. 특히 2층의 홀을 찾아 춤사위를 익히고 있는 제자들에게 던지는 말투는 예전의 ‘따발총’, ‘직사포’라는 별명에 걸맞게 거침이 없었다.
“요즘은 문화재 ‘이수증’에만 관심있는 것들 천지야. 너희들도 그런데만 관심있으면 아예 춤 배울 생각일랑 말아. 그런 정신으로 무슨 춤을 춰. 마음이 고와야 춤도 고운 법이여.”
이옹은 7세 때 목포 권번에서 기생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이대조 선생에게서 승무, 박영구 선생에게서 승무북, 이창조 선생에게서 검무를 배워 춤의 바탕을 닦았다. 소학교 때 잠시 중국 베이징의 경극배우인 매란방으로부터도 춤을 익혔는데 ‘매방’이란 예명은 ‘매란방’의 ‘매’와 ‘방’을 따와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옹은 빌라에서 조교 백경우(40)씨와 단둘이 기거한다. 역시 무용인인 부인 김명자(64)씨는 부산에서 무용교습소를 운영하고 있다. 주말이면 부인 김씨가 서울에 올라온다. 말하자면 ‘주말부부’인 셈이다. 그러나 살림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어 보였다. 침실이건 거실이건 옷방이건 모두 가지런히 정리가 돼 있었다. 빌라의 베란다 한편에는 ‘골동품’을 연상시키는 재봉틀이 한 대 놓여 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옹은 “1세기도 더 된 이 재봉틀로 직접 시장에서 천을 구해 무대복을 지어 입는다”고 말했다.
“무대를 준비하려면 춤만 잘 추면 되는 게 아니라 바느질부터 음악준비까지 다 잘해야지. 내가 죽으면 이런 거 직접 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옹은 23일 목포에서 열리는 ‘제2회 우봉 이매방 전통춤경연대회’에 참가하고, 이어서 현지의 ‘우봉 이매방 춤 전수관’에서 27일부터 3일간 살풀이춤 연수회를 연다. 그리고 가을에 일본 삿포로에서의 공연이 계획돼 있으며 북한 방문 공연도 준비하고 있다. 80대의 고령에 그처럼 정력적으로 살고 있는 비결이 궁금했다. “춤이여, 춤. 춤은 전신운동이지. 암 수술 후 춤 안 췄으며 오히려 몸이 더 나빠졌을지 몰라.” 역시 답은 춤이었다.
건강비결
이매방옹은 5년 전 암수술을 받은 후 좋아하던 술, 담배를 모두 끊었다고 했다. 이옹에게 아직도 “춤 이외의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술집…”이라는 말이 먼저 튀어 나올 정도로 대단한 애주가였다. 그러면서 “예술하는 사람들 다 그렇지 뭐. 그래서 요즘은 시간 나면 TV 보는 것으로 소일해”라고 조금 민망한지 토를 단다.
“몸이 다른 곳은 이상이 없는데 나이 먹은 탓인지, 허리가 조금 아파. 그래도 무대에 오르긴 하는데 아파도 참아야지.”
이옹은 아침 5시면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이부자리에서 가볍게 허리들어올리기 운동을 한다. 무대에서 보다 자연스러운 동작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음식은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지만 암 수술 후 ‘맵고 짠 것’은 삼간다고 말했다. 그리고 “의사의 권유대로 소량의 음식을 하루 6번으로 나눠 먹는다”고 덧붙였다.
약력
▲1927년 전남 목포 출생 ▲이대조·박영구·이창조 선생 등에게 승무와 법고, 검무 등 배움(35~39년) ▲목포공립고(4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예능보유자(89년) ▲제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 지정(90년) ▲인간문화재진흥회 부회장(93년) ▲용인대 무용학과 교수(96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98년) ▲21세기 문화예술진흥회 고문(99년)
이매방씨가 손수 지은 한복을 입고 살풀이 춤을 추고 있다. [프리랜서=오종찬] | |
첫댓글 좋은공부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