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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전통가옥 | 2000년 7월 1일 기준으로 남한의 총인구는 4,700만 8,000명이다. 이는 지난 1990년 센서스 결과에 비해 1.95% 증가한 수치이다. 인구의 자연증가율은 1960년의 3%에서 점차 낮아져, 1970년에는 2% 수준이던 것이 1990년에는 1.5%, 그리고 2000년에는 0.9%로 떨어졌다.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1세대 정도 계속되어, 2030년경총인구는 7,858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통계청, 1999). 출생률의 저하는 주로 출산력의 감소에 기인한다. 여자 1명이 가임기간 동안에 낳는 자녀 수의 평균치인 합계출산율은 1960년에 6.0명이었던 것이, 그후 급격히 감소하여 1984년부터는 대체출산력(여자 1명당 2 자녀) 수준 이하로 떨어졌다. 1998년 1.5명, 2000년 1.47명으로 선진국의 합계출산율보다 낮다. 사망률은 1960년에 1.21%였던 것이 점차 낮아져 1990년에는 0.58%, 2000년 0.52%로 떨어졌다. 앞으로 노인 인구가 많아지면서 사망률은 다소 높아질 것으로 보이는데, 통계청의 추계로는 2021년에 0.97%까지 올라갈 전망이다. 평균수명은 2000년 현재 남자 72.0세, 여자 79.5세이며, 2020년에는 남자 77세, 여자 84세로 늘어날 전망이다. 1989년부터 실시된 전국민 의료보험 제도와 의료기술의 발달 덕분에 평균수명은 기록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인구의 성별·연령별 구조를 보면, 인구 피라미드의 유형이 피라미드형에서 항아리형으로 변모되고 있음이 확연하다. 이는 인구의 발전단계가 제2단계인 다산소사의 급증형을 지나 소산감사의 증가형인 제3단계를 거치고 있으며, 머지 않아 소산소사의 제4단계 정체형에 이를 것임을 예측하게 한다. 그리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1세대 후인 2020년경에는 전형적인 서구형의 인구구조를 갖게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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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인구의 성별·연령별 구조 | 인구의 연령별 구조에는 해방 전후와 6·25전쟁의 인구손실 및 출산율 저하, 그리고 뒤이은 베이비붐이 현저하게 영향을 미쳤고, 이들 시기에 출생한 인구의 자녀 세대의 인구구조에까지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연령별 인구구조의 변동 추이를 보면, 1970년대를 기점으로 유년층(0~14세)의 비율이 낮아지는 반면, 경제활동 연령층(15~64세)의 비율은 상승하고 있다. 1960년에 총인구의 42.3%였던 유년층 인구 구성비는 1970년에는 42.5%로 미증했다. 그러나 이는 1980년에는 34.0%로 감소했고, 1990년에는 다시 25.8%로, 그리고 2000년에는 21.7%로 격감했다. 또 경제활동 연령층은 1960년에 54.8%, 1970년에 54.4%였던 것이, 1980년에는 62.2%, 1990년에는 다시 69.2%로 늘어났고, 2000년에는 71.2%로 늘어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뚜렷한 현상은 노년층(65세 이상)의 구성비가 현격하게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1960년에 2.9%에 불과했던 노년층의 구성비는 1970년에 3.1%로, 1980년에는 3.8%로, 그리고 1990년에는 5.0%, 2000년에는 7.1%로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변화의 추이, 즉 유년층의 감소와 경제활동연령층의 미증 및 노년층의 급증 추세는 출생률의 감소와 평균수명의 증가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2020년경까지 앞으로 적어도 1세대 동안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 말은 한국 사회가 노령화 사회를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경제활동인구에 대한 유년인구와 노년인구의 부양비를 보더라도, 1960년에 각각 77.3%와 5.3%였던 것이 1990년에는 33.7%와 7.2%로 변했다. 그리고 2021년에 이르면, 유년인구의 부양비는 22.2%로 줄어드는 대신 노년인구의 그것은 18.4%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인구구조의 변화가 노령화 추세를 지속하게 되면, 갖가지 사회문제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나타나게 된다. 가령 학령인구가 초·중·고등교육으로 가면서 차례로 줄어들어 교육의 양적 기회확충이라는 지금까지의 교육 부문의 주요과제는 앞으로는 질적 기회의 제고라는 새로운 과제로 대두될 것이다. 또 그동안 덮어두었거나 형식적인 겉치레에 그쳤던 노인복지의 문제가 사회보장에 관한 정책의 가장 중요한 논점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 예상된다.
당장은 크게 눈에 띄지 않으나 점차 심각성을 더해가는 문제로는 남녀 인구구성의 불균형을 지적할 수 있다. 결혼적령인구(남자 25~29세, 여자 20~24세)의 성비를 보면, 1960년에 78.6이었던 것이 1990년에는 104.7로 무려 26.1이나 높아지고 있다. 이는 신생아의 출생성비를 비교해보면 더욱 두드러진다. 1990년의 0~4세 인구의 성비는 113.1이나 되고 있다. 이는 출산력 저하현상과 전통적 남아선호 의식이 맞물려서 작용한 결과로 최근에는 출산 전 태아 성판별이 용이해지면서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비의 불균형은 앞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적잖은 문제를 야기시킬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출산행태는, 그간의 가족계획 만능의 정책에 덮혀 제대로 논의되지도 않은 채 사회적으로 정당화되어왔지만, 윤리적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산업별 인구구조의 변화는 그간의 한국의 경제발전과정을 잘 반영한다. 산업별 인구구성비의 변화를 보면, 1960년에 1차산업 66.6%, 2차산업 8.5%, 3차산업 24.0%였던 것이 1970년에는 각각 50.5%, 14.3%, 35.2%, 1980년에는 34.0%, 22.6%, 43.4%로 변했다. 즉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는 1차산업 인구가 급감하는 대신 2차산업 인구가 두드러지게 증가했다. 이것이 1990년에는 1차산업 18.3%, 2차산업 27.3%, 3차산업 54.4%로 변하여, 산업화가 성숙단계에 접어들면서 1차산업의 비중은 계속 감소하는 대신 3차산업의 비중이 커짐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당분간 더 지속되어 점차 선진국형에 접근하게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인구의 국외 이동은 조선시대 말기부터 시작되었는데, 초기에는 간도 및 연해주 지방으로 상당한 이민이 있었고, 20세기초에는 하와이로 가는 계약이민까지 있었다. 그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강제 또는 반강제적으로 많은 인구가 해외로 떠나갔다. 8·15해방 직전까지 만주와 중국에 약 220만 명, 소련의 연해주, 사할린, 중앙아시아 등지에 약 30만 명, 일본에 약 200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었다. 지금도 중국에 약 150만 명, 일본에 약 60만 명, 소련에 약 30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다. 1962년 해외이주법이 제정된 이후 현대적 의미의 이민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세계 여러 나라에 100만 명에 가까운 교민이 진출해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타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8·15해방과 6·25전쟁은 유례없는 인구의 대이동을 초래했다. 해방 직후에는 북한에서 약 180만 명의 인구가 월남했고, 일본·중국 등 해외에서 약 160만 명의 동포가 귀국하여, 모두 350만 명에 가까운 인구의 사회적 증가가 이루어졌다. 또 6·25전쟁중에 다시 100만 명 이상의 피난민이 월남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인구의 대이입은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는데, 특히 대부분의 이입인구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지역에 정착하여 도시문제를 더욱 가중시켰다.
한국의 인구밀도는 1910년에 약 60명/㎢이었으나 1935년에 100명/㎢을 넘어섰다. 남한의 인구밀도는 1949년에 200명을, 1967년에는 300명을 넘어섰고, 1990년 432명, 2000년 476명으로 세계 3위의 고밀도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구가 국토에 균등하게 분포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인구분포를 설명하기 위해 매우 단순하면서도 유용하게 사용되어온 모델은 신의주와 포항을 잇는 선을 긋고 그 대각선을 기준으로 하여 한반도를 동북부와 서남부의 2부분으로 가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주로 지형적인 조건에 따라 인구가 희박한 고원 및 산악지역과 조밀한 하천분지 및 평야지역을 대비시킨 것으로, 농경사회에서의 식량생산과 취락 발달의 관계를 토대로 인구의 분포를 설명한 것이다. 이 모델의 설명은 오늘날에도 기본적으로 틀리지 않다. 그러나 8·15해방과 6·25전쟁, 그리고 무엇보다도 1960년대 이후의 급속한 산업화·도시화와 그에 수반된 인구이동의 결과, 인구의 분포는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8·15해방 당시 14.5%에 지나지 않았던 한국의 도시화율은 1960년에는 35.8%, 1970년에는 49.8%로 늘어났다. 이어 1980년에는 57.2%로 늘어나 도시 거주인구의 수가 총인구의 절반을 넘어섰으며, 1990년 79.4%, 1996년 87.1%로 늘어나 사실상 도시 사회로의 개편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행정구역의 변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8·15해방 당시의 부(府:지금의 시에 해당하는 행정구역)로는 경성(서울)·인천·개성·대전·전주·군산·광주·목포·대구·부산·마산·진주·해주·평양·진남포·신의주·함흥·원산·청진·나진·성진의 21개 도시로, 그 중 12개(개성 포함)가 남한에, 그리고 9개가 북한에 있었다. 1996년 현재 남한에는 서울특별시와 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의 5개 광역시 및 72개 시를 합쳐 모두 77개의 시가 있다. 그에 비해 8·15해방 당시 134개였던 군은 1995년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군과 시가 통합되면서 93개로 줄어들었다. 그간의 도시화는 이처럼 도시의 수가 늘어나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기존의 도시, 특히 대도시를 향한 인구의 집중에 의해 선도되었다.
대도시의 성장은 기반 산업의 발달과 고용기회의 창출에 의해서라기보다 이농인구의 집중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전형적인 제3세계의 도시화 과정을 거쳤다. 2000년 현재 우리나라의 6대도시 인구는 2,123만 명에 이른다. 이들 도시의 인구는 1980~85년 사이의 5년간에 17.6%, 그리고 1985~90년의 5년 동안에는 12.7%가 증가함으로써, 같은 기간 동안 나머지 9개 도와 시의 인구증가율 1.2%와 3.3%를 각각 크게 웃돌고 있다.
그러나 대도시의 인구증가를 지배적으로 주도한 것은 서울과 수도권의 인구 증가이다. 서울을 향한 인구와 기능의 과도한 집중은 한국의 국토구조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크고 어려운 문제이자 한국 공간정책의 기본적인 과제이다. 2000년 현재 수도권의 인구는 총인구의 절반에 달하며, 그 중 서울의 인구가 985만 3,972명, 인천의 인구가 246만 6,338명, 경기도 인구는 928만 13명(외국인 포함)에 달한다. 8·15해방 당시 인구 90만 명에 불과했던 서울의 인구는 1960년에 240만 명에 이르렀고, 2000년 현재 1,000만 명에 가까운 거대도시가 되었다. 대체로 1970년을 기점으로 총인구에 대한 도시거주인구의 비율이 절반에 이르게 되었고, 이때부터 서울의 인구는 500만 명을 넘어섰다. 이제 서울은 거대도시의 과대·과밀 문제를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고, 국가의 지역정책 기조에도 서울의 인구분산이 주요과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로 공공기관의 지방이전, 공업입지의 분산, 서울 시내 대학 입학정원의 증원 억제 및 지방 쪽에서의 상응한 투자촉진 및 육성책이 행해졌다. 그러나 정치권력과 경제력이라는 힘의 분산을 동반하지 않는 인구와 산업입지의 분산책은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서울로의 집중은 날로 가속화되어갔고, 이 무렵부터 서울의 교외화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즉 서울의 인구증가율 자체는 다소 완화되기 시작하지만, 주변의 인천·수원·안양·의정부 등 위성도시들이 급성장하게 되고, 성남·부천·과천·광명·안산·구리·고양·시흥·군포·의왕·하남·일산·분당·평촌·산본 등이 모두 1970~90년대 이후 새로 시로 승격하거나 신도시로 건설되어 사실상 서울의 거대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서울의 성장과 수도권의 거대도시화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급속히 이루어졌다. 그것은 한국의 도시화 자체가 산업화와 함께 급속히 진전되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도 서울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점하는 지배적 위치가 공간적 집중을 가속화시켰다는 데에서 보다 직접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서울은 조선시대 이래 600년 동안 한국의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중심지였으며,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계획에 있어서도 불균형개발전략의 선두에서 혜택을 받은 개발거점이었다. 정치·경제 부문에서의 의사결정권의 집중은 필연적으로 사회 전부문에 걸쳐 기능의 공간적 집중을 불러왔다. 지방자치가 실시되고 있지만, 서울은 정치적 권력의 전부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도 기업체본사 분포, 총매출액, 금융여신, 대학생수, 연구인력, 연구개발비, 투자총액 등의 전국대비 비율로 볼 때 상당히 높은 비율을 차지하여 한국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이른바 한국 국토의 독과점적 공간구조는 서울의 종주도시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들의 이러한 급속한 도시화는 도시산업의 발달이 성숙되지 못한 데다 도시 기반시설이 미비한 상태에서 장기 도시계획의 수립을 앞질러 진행되었고, 따라서 실업·빈곤·교통혼잡·주택부족·환경오염·범죄증가 등 각종 도시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도시들의 급성장과 부산·대구·광주·대전 등 지방 대도시들의 부상, 그리고 포항·울산·마산·창원·여천·구미 등 동남권 신흥 공업도시들의 비약적 성장에 비해 나머지 지역의 중소도시들은 미미한 성장을 보이거나 정체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시의 수가 배가되기는 했으나, 전술한 수도권의 위성도시들 및 동남권의 신흥공업도시들을 제외하면, 동해·태백·나주와 같이 인접도시의 행정구역 병합에 의해 인구수를 채운 도시들, 삼척·제천·문경과 같은 광산 도시들, 송정·영천·김해·경산·밀양과 같이 지방 대도시의 외연적 팽창에 힘입은 인접 위성도시들, 그리고 아산·보령·서귀포 등 관광도시들이 그 대부분을 차지했다. 농어촌지역의 중심지로는 영주·정읍·남원·공주·상주·서산·김제 등 소수의 전통적 행정중심지들이 약간의 인구증가와 주변 행정구역의 편입으로 가까스로 시로 승격했을 뿐이다.
도시화는 농촌지역의 인구유출을 초래했다. 1970년대 중반을 고비로 한국의 농촌지역 인구는 절대감소하고 있다. 1960년 농가인구는 1,424만 2,000명으로 총인구의 56.9%였으나 1980년에는 1,082만 7,000명으로 총인구의 28.4%를 차지했으며, 그 이후 계속 감소하여 1990년666만 1,000명으로 총인구의 15.5%, 2000년 403만 2,000명으로8.7%에 불과하게 되었다. 수도권과 남동임해공업지역 및 제주도를 제외한 전지역에서, 심지어 농촌생활권의 핵심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읍까지도 대부분 인구의 절대감소를 겪고 있다.
농촌 인구의 절대감소는 농촌 인구압의 완화 및 농가당 경지규모의 확대라는 긍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크고 심각한 몇 가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지나치게 빨리 진행된 데에서 야기된 부작용이기는 하나, 그러한 결과가 도시와 농촌의 양쪽 모두에 부담을 지우는 쪽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단순한 인구이동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고 있다. 즉 대도시 쪽에는 고용과 기반시설의 측면에서 수용능력을 넘어 인구가 집중하는 데에서 과대·과밀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고, 농어촌지역에는 젊고 교육받은 인구의 선택적 유출로 발전잠재력 자체가 황폐화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특히 경제활동 연령층의 급속한 유출은 농촌인구의 노쇠화를 재촉했고, 그결과 농어촌지역의 사회경제적 활력은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다. 이는 지역의 수요밀도를 전반적으로 낮추게 되어, 정치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선거 기반과 교육, 대중교통을 비롯한 공적·사적 서비스의 입지기반을 약화시키고 마침내 그 질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버스 노선이 축소·폐쇄되고, 학교가 분교로 전락한뒤 곧 폐교되며, 마을마다 빈집이 늘어가는 등 사회적 휴경지가 증가하고 있다. 말하자면 '인구유출 → 생활환경 악화 → 인구유출의 악순환'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농어촌의 발전을 이끌어갈 젊고 의욕적인 인구집단이 결여되어 있어, 새로운 기술의 혁신을 스스로 이룩하거나 받아들일 잠재력도 고갈된 형편이다. 여기에다 최근 우루과이라운드로 상징되는 농수산물 시장의 개방추세는 전통적 농업의 생존기반마저 위협하고 있어, 사실상 한국의 농어촌 지역은 정상적 생활공간으로서의 존립 자체까지 위협받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70년대 이후 새마을운동이 농어촌 소득증대와 생활환경개선에 이바지했고, 지금은 농어촌구조개선이라는 이름 아래 농어촌정주권개발사업 등이 추진되고 있으나, 투자의 규모로 보아 대세를 바꾸어놓을 수준이 되지는 못한다.
지역간·도농간 격차를 해소하고, 균형된 발전을 이룩할 새로운 공간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은 한국의 지역정책이 당면한 최대의 과제이다. 한편으로 대도시의 과대·과밀 문제를 해소하고, 다른 한편으로 농어촌지역에 현대사회를 능동적으로 수용할 새로운 취락체계를 창출해내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 양자는 사실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서로 현상을 달리하는 같은 문제이기도 하다.
柳佑益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