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벌에서 드림타임의 신화적 공간으로
서정록
김용림의 그림은 기본적으로 힐링을 위한 그림이다. 치료를 위한 그림이다. 때문에 그녀의 그림은 외면적 아름다움에 치중하는 서구미학의 잣대로는 다가갈 수 없다. 오히려 영적인 각성과 깨달음을 통해서만 그녀의 그림은 살아난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은 때로는 신화적이고, 때로는 신비적이다. 그리고 여성적이고 민중적이다.
1990년대초부터 환경과 여성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던 그녀는 90년대말 강화도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수년동안의 칩거를 끝내고 2007년부터 폭발적인 힘으로 갯벌 시리즈를 내놓고 있다. 왜 갯벌인가! 그곳에서 그녀의 여정의 비밀을 풀어줄 드림타임(Dreamtime)의 신화적 공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찬란한 노을은 지는 해의 석양빛이 아니다. 그것은 태초에 우주를 창조하고, 지구를 만들고, 생명을 창조하던 시원의 빛의 색깔이다.
그래서 그녀의 갯벌 그림에는 다채색의 물결같은 흐름, 떨림의 문양이 자주 등장한다. 아마도 태초의 그 빛이 갯벌에서 살아 꿈틀거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 빛은 고구려벽화에 나오는 흐르는 바람문양, 구름문양과 닮았다. 그리고 고구려벽화에서 바람이 구름도 되고, 빛도 되고, 물결도 되고, 넝쿨도 되고, 꽃도 되고, 불꽃도 되듯이, 그녀의 드림타임의 신화적 빛은 죽어가는 대지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기도 하고, 신화의 공간이 되기도 하고, 거친 남성들을 감싸는 어머니의 손길이 되기도 하고, 지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랑이 되기도 하고, 영적인 치료의 힘이 되기도 한다.
호주 원주민들은 몸이 아프거나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면 드림타임의 태초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아주 긴 여정을 필요로 한다. 조상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되짚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 길을 가며, 조상들의 흔적이 있는 곳마다 모여 밤새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조상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김용림의 그림에는 우리의 상처난 가슴을 치료하고, 환경파괴로 죽어가는 어머니 대지를 치료하고,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 남성과 남성적 가치를 추구하는 여성들을 구하고, 전쟁과 폭력에 찌든 문화를 사랑과 평화와 협동과 공존의 문화로 바꾸기 위한 긴 여정이 담겨있다. 그녀는 오직 드림타임의 신화적 공간으로 되돌아갈 때에만 그것이 가능함을 알고 있다. 그녀의 그림에 오색의 신비로운 빛이 출렁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녀가 고구려벽화를 발견한 것은 그 드림타임의 시간으로 푹 빠져 들어간 뒤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춤추는 산이며, 까마귀들이 앉아있는 신단수, 해님과 달님, 삼족오, 소머리를 한 신농씨 등을 만났다. 그리고 새로운 힐링의 힘을 발견한다. 그렇게 그녀가 지향하는 신화적 공간은 우리 조상들의 숨결과 맞닿아있다. 영적인 치료는 나의 뿌리를 맑히지 않고는 결코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영적인 스승들은 말한다. 네 뿌리로 되돌아가라고. 네 조상들에게 되돌아가라고. 그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그녀의 드림타임의 신화는 자연스럽게 조상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가 잊고 있던 근원적인 숨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신이 태초에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조상들의 몸에 불어넣어주었던 그 숨결, 우리의 손가락 끝에 물결의 파문처럼 남아있는 그 동심원들 말이다. 그렇게 그녀는 너와 내가 영원히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분리할 수 없음을, 내가 너이고, 네가 나임을 잊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의 몸이 태초의 창조의 빛으로 지어진 집임을 알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민족적 신화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의 태도는 칼 지브란의 책 <예언자>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그림을 자신의 그림 속에 끌어들이고 있는데서 잘 드러난다. 그것은 단순히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것이 아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하나가 되는 것을 상징한다. 그렇게 남성과 여성의 문화를 넘어, 동과 서를 넘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계급을 넘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별을 넘어, 분열과 갈등을 넘어, 단절과 왜곡을 넘어 모두가 하나되고, 더불어 행복해지는 드림타임의 꿈을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김용림의 그림은 근원적이면서도 어머니의 이야기처럼 친근하고 따뜻하다. 남성적 에너지로는 이 폭력과 파괴가 난무하는 시대를 뛰어넘을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오직 부드러운 것만이, 어머니의 포근한 가슴만이 거칠고 모나고 딱딱한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웅변이 아니라 부드러운 노래만이 가슴을 움직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렸을 적에 어머니의 무릎에 누워 듣던 그 이야기와 노래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힘들고 지칠 때면 언제나 고향의 어머니를 생각한다. 어머니야말로 영원한 안식처요, 생명의 근원이요, 영적인 깨달음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그림의 중심주제가 신화적이면서도 모성적 어머니, 대지의 어머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한다. 태초에 신이 창조했던 거룩한 이 세상을 지켜가야 한다고. 사람과 동물과 나무와 풀들과 해님과 달님과 별님, 그리고 산과 강이 모두 함께 춤추고 노래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그렇게 우리 모두 아름다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그리고 이 지구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보존하고 지켜가야 할 낙원이요, 천국이라고. 이 지구를 잃으면 모두를 잃게 된다고. 그러면 우리는 돌아갈 곳이 없게 된다고. 우리뿐 아니라 조상들조차 돌아갈 곳이 없게 된다고.
강화도 자연과의 교감-김용님
박영택 |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김용님이 도시생활을 접고 다시 자신의 고향 강화로 들어가 보낸 그간의 시간 동안 그녀가 그리고 써낸 사연은 그곳에서 새삼 느끼고 깨달은 자연과 생태에 대한 단상들이다. 아니 그곳에서 그 모든 것들과 교감하고 교류한 흔적과 결정들이다. 강화의 바다와 갯벌, 습지와 억새, 새와 나무와 태양, 그리고 일하는 여성들이 가득한 그 공간에서 경험하고 살아낸 작가 자신의 자취들이 약동하듯 꿈틀대는 붓질과 환하게 타오르는 색채로 분출되는 그런 그림이다. 환시적일 정도로 강렬한 그림은 모든 것들이 구분없이, 경계없이 유기적으로 순환하고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접속되어 있다. 풍경은 사람과 뭇생명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햇살 속에서 비늘처럼 반짝인다. 갯벌과 여자, 산과 억새, 사람과 새는 한 몸이고 그렇게 공존하고 공생한다. 작가의 그림에는 여성들만이 자연과 생명체와 함께 등장한다. 여성의 초상은 작가 자신일 수도 있고 보편적인 여자를 상징할 수도 있다. 혹은 모든 이의 어머니들이다. 작가는 강화의 갯벌에서, 산과 나무와 억새풀 속에서 혹은 노랑부리 저어새에서 무수한 어머니들을 만난다. 둥실 떠있는 강화도 주변 섬들 사이로 늙은 어머니는 등장하고 바다로 배를 들고 나가는 무수한 여자들의 뒷모습에도 어머니들은 서려있다. 그런가하면 흔들리는 억새풀을 끌어안고 있거나 새의 몸과 겹쳐있는 여자들의 초상도 등장한다. 한결같이 등장하는 이 여자들은 강화의 자연과 함께 살아온 존재들이다. 강화의 대지와 갯벌과 자연에는 그토록 무수한 여자들의 목숨이 깃들어있다. 그 자연을 보는 일은 그것과 함께 살다 죽어간 이들의 넋을 보는 일이다. 작가는 그 넋을 풍경과 함께 그리고자 한다. 짧고 단속적으로 쳐나간 붓질들이 흔들림과 속도감을 안긴다. 어질거리는 사이로 인체와 풍경이 몸을 내민다. 아득한 세월동안 바닷 바람을 맞은 강화의 모든 존재들이 그림 속에서도 마냥 흔들리고 있다. 삶을 지탱시켜준 자연과 갯벌, 오랜 시간 변함없었던 그 자연이 지금 서서히 죽어가고 있거나 황폐해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이 작가로 하여금 강화도와 여자들을 그리게 한 동인인 듯 하다. 작가는 또한 자신의 고향에 얽힌 전설과 신화, 역사적 배경과 함께 동시대의 강화도란 공간을 관심있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녀는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시와 산문과 그림을 통해 그곳에서 보내는 삶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강화도’라는 공간은 그런 의미에서 단지 작가의 작업실이 있는 곳이라기 보다는 의미있는 역사적 장소이자 현재 한국의 환경과 생태문제를 함축하고 있는 공간이다. 작가는 강화도의 갯벌에 나가 앉아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보면서 많은 상념을 길어올린다. 작가에게 갯벌은 작업의 산실이고 작업의 내용과 방향을 일러주는 스승이자 자신을 치유하는 은혜로운 곳인듯 하다. 작가가 그림 그림과 쓴 글은 모두 강화의 갯벌에서 나온 것들인 셈이다.
태양빛처럼 밝고 생명체처럼 꿈틀대는 이 그림들은 일종의 시화들이다. 글이 담지 못한 것들을 드러내고 글은 다시 그림에서 불충분한 것들을 보충한다. 그 둘은 서로가 서로에 기대고 서로가 서로를 보완한다. 그 그림과 글은 마치 환경운동가나 생태주의자의 기록같고 보고서 같으며 이른바 ‘에코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작가의 삶의 기록들이다. 그림은 그녀의 인식의 도상화 혹은 ‘일러스트’로 기능한다. 매일의 일기같고 일상의 단상들이다. 따라서 그 개별적인 그림들의 가치는 그림 안에 담겨있기 보다는 그녀가 보낸 삶과 수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과 분리되지 않는 행위인 것이다.
전시대는 모두 자연으로부터 항구한 미적 정서의 공급을 보장받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안정된 감성체계를 확보했지만 오늘날 이런 공통의 정서구조는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구조의 모태인 자연 자체가 지금 불구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날은 심미적 정서의 항구적 공급원이었던 자연 대상들이 정서체계로서의 힘과 가능성을 거의 박탈당했고 그래서 ‘자연의 궁핍화현상’ 이 심화되어 있다. 그에따라 오늘날 미술 역시 자연 생태계의 재난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에 발생한 재난은 실상 곧바로 미술/예술의 재난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미술, 예술은 궁극적으로 삶과 생명에 대한 긍정이고 이 긍정은 자연이 보장하는 생명의 큰 테두리속에 있기에 그렇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자연과의 총체적인 관여가 불가능한 시대이다. 그에 따라 인간의 정신적,예술적 삶이 궁핍해지며 내면성이 끝없이 제거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생명과 삶에 대한 진지한 사색과 논의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래서 우주와의 합일적 관계속에서 인간이란 존재를 가능하게 했던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와 정신은 어느덧 증발되고 자연의 존재는 철저하게 제거되고 있으며 그에따라 예술의 근본적인 위기가 초래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알다시피 지상에서의 삶 자체가 위협받는 시대에 미술, 예술이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은 없다. 따라서 한 시대와 현실속에서 가장 민감한 더듬이와 촉수를 지닌 예술가들에게 이러한 문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따라서 김용님은 오래전부터 환경과 생태, 페미니즘에 관한 미술운동을 실현해 왔다. 오늘날 미술이 해야할 일, 과제에 대한 작가의 인식 속에서 나온 그간의 길이었던 것 같다. 강화도로 삶의 터전을 이동한 후 작가의 환경과 생태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이전에 비해 좀더 구체적으로 심화되는 중이다. “혁명은 생명을 한없이 보듬는 것”(김지하)이란 싯구를 화두 삼아 작업하고 있는 작가의 근작은 새삼 에코페미니즘 혹은 환경과 생태주의미술의 한 가능성을 우리 눈 앞에 ‘눈 부시게’ 펼쳐놓고 있다.
출처:김달진미술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