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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약간 긴 편이니,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읽으십시오.)
1.
우리의 죄악성은 무한히 비참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반역한 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거룩함과 무한한 사랑을 배반한 것이기에, 인간의 죄성은 무한히 악하고 무한히 나쁩니다.
왕정시대에 임금에 대한 반역죄가 가장 큰 죄였다는 사실은,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일반계시입니다.
무엇에 대한 계시요?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에 비례해 무한히 악하고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죄악성이 어떤 실체적 피조물은 아니지만, 인간 죄악성의 깊이는 밑바닥 없는 무저갱과 같습니다.
혹시 성령님은 당신님께 당신자신의 죄악성의 무한히 비참함을 보여주셨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저 없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했습니다.
2.
그러므로 인간은 구제불능의 존재입니다.
어떻게 그 무한히 나쁜 죄악성을, 유한한 피조물 인간이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만일 그것을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면, 아마 이 세상은 유토피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선행으로써, 즉 하나님의 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되고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가 오실 필요도 없었고, 그리스도의 죽음도 헛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1.
인간이 끊임없이 자력으로 구원과 해탈에 이르려 하고, 죄의 존재자체를 부인하기도 하죠.
그러나 이 비참한 세상의 참상을 보면서도, 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은,
정신 나간 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서 구원하기에 철저히 무능한 존재들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어느 정도 거룩함과 가능성, 의로워질 희망을 두고 있는 이들은
아직 죄의 쓴맛을 보지 못한 자들이고, 인간죄성의 무한히 비참함을 깨닫지 못한 이들입니다.
이 면에서 우리는 철저히 절망해야 합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의로워지리라는 희망을 완전히 꺾어 버려야 합니다.
거룩하게 살기 위해 몸부림쳐 본 자는, 누구나 예외없이 자신에 대해 철저히 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아직 희망을 가진 자는, 거룩하게 살고자 몸부림쳐 보지 않았거나,
인간 죄성의 처절함에 대해, 아직 성령님의 깨우치심을 받지 못한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마태복음 5:3-4.
주님이 말씀하신 심령의 가난은, 찰가난, 적빈, 극빈, 아무것도 없는 거지 같은 가난 (헬라어, 프토코스)입니다.
자기 심령이 바로 이런 상태에 있음을 깨닫는 자가 복이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심령의 완전 파산상태입니다. 모든 의와 거룩함, 순결함, 겸손함, 온유함, 창조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적 부요가 완전히 파산되어 없어지고 사라진 상태, 오로지 처절한 죄악성만 남은 상태.......
(혹자들은 인간에게 양심과 도덕성이 남아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맞아요. 그 양심과 도덕성은 매우 훌륭한 것이지만, 그것이 자연인의 처절한 죄악성을 상쇄하지도 못하고 고치지도 못하며, 그 죄성을 조금이라도 개선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주장은 마치, 극악한 죄를 저지른 사형수에게도, 자기 딸을 극진히 사랑하는 선한 마음이 있으므로 그는 사형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따라서 그를 살려주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자신의 처절한 죄성과 영적 찰가난, 하나님께 대한 영적인 완전 파산상태를 깨닫는 자가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아 그것을 깨닫는 자는, 가슴을 두드리며 한량없이 애통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5:3과 4절이 이렇게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 내 속에 잠복한 그 죄악성의 비참함과 가슴아픔, 그 고통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처음 만날 때, 몸부림치며, 가슴을 치며, 땅바닥에 뒹굴며, 통곡하는 거죠.
무엇 때문에요?
자신의 처절한 죄성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는 절망적 상태 때문에.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무서운 상태 때문에.
우리 죄인에게는 전혀 실날같은 희망도, 가망도, 가능성도 아주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러나,
아, "구속 못할 죄악을 예수 홀로 속하네."
3.
그리스도는 무한히 거룩하고 아름다우십니다.
아, 창조주 하나님이신(요한복음 1:1 외)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 그 인격의 거룩하심, 그 인격의 완전하심, 그 인격의 순결하심,
그 인격의 온유하심, 그 인격의 자기비움과 겸손, 그 인격의 무한하심, 그 인격의 놀라우심,
그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피조물인 우리는 어떤 필설로도 그것을 형언할 길이 없습니다.
그 높고 높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비밀이고, 최대의 사건이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뒤집어 엎어질 일입니다 !!!
그렇게 완전하신 하나님이 아니고는, 무한히 추악한 우리 인간의 죄성과 죄악을 속죄할 수 없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천사장들 수천억조경해자양구간정재극...무량대수.... 명(名)의 능력으로도 어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죄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악을 넉넉히 속하고도 남습니다.
그 완벽히 순결하신 주님이 우리의 모든 비참한 추악함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절망 중에 빠져 몸부림치는 우리 죄인들에게 유일한 한 가닥의 희망은,
오직 그 무한히 선하시고 무한히 아름다우시며, 무한히 자비하시고, 무한히 의로우시며, 무한히 거룩하신 그 주님의 십자가 뿐입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예수 그리스도]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히브리서 7:26.
그러므로 무한히 거룩하신, 가없이 아름다우신 그분의 순결한 인격을
우리는 감히 우러러 볼 수 없지만,
그 분이 무한한 자기 비움과 낮아지심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그 분의 이름이 "예수," 죄로부터의 구원자를 의미하는 예수가 되었으니,
우리는 그 사랑스런 이름, 감미로운 이름을 한없이 부르며,
그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해,
내 죄를 숨기지 않고, 양손에 받쳐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 밖에 나를 이 무한히 비참한 죄악성에서, 한량없이 비참한 죄에서 구원할 자 없으니,
나를 받아달라고, 눈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2.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주님은 나를 위해 아버지께 중보 기도해 주시고
나를 이 비참한 죄에서 완전하게 구원해 주십니다. 히브리서 7:25.
무한히 거룩하고 아름다우신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값을 치르시고 우리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우리의 죄성은 아직 이 세상 사는 동안 우리에게 잠복해 있으나,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갈 때 영원히 사멸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앞으로 가까이 나아갈 때마다 우리 죄의 추악함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더욱 더 절감하게 되며,
그리스도의 그 인격의 완전하신 아름다움에 매혹당하고 사로잡히게 됩니다.
쉬운 말로, 예수에 반하고 미치고 환장하게 됩니다.
광신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멸망 당해 마땅한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완전하신 구속의 사랑과 아름다우심을 바르게 보고, 그 은혜에 한없이 감격하고 감읍해,
나의 창조주를 가슴 속 깊은 열정으로 바르게 사랑하며 경배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 나여!
너는 너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아름다우심과 완전하신 거룩하심에 얼마나 반해있고, 얼마나 사로잡혀 있으며,
미칠듯이 너를 사랑하셔서 널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리신 그 미친 사랑에,
너는 얼마나 미친 반응을 보이고 있느냐?
그저 맹숭맹숭하느냐?
주님은 너에게 미쳐 자기 목숨도 버리셨는데,
너는 아주 말짱하고 무감각하다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느냐?
주님의 짝사랑이 너무 가슴 아프지 않겠느냐!?
아! 나여! 너는 그 진실하고 눈물겨운 사랑을 잠시라도 잊지 말지니라.
그 사랑은 이론이 아니란다.
그 사랑은 과거 2천년 전에 흘러가 버린 한 토막의 옛 이야기가 아니란다.
그 사랑은 성경에 나오는, 그저 무난하고 훌륭한 덕담이 아니란다.
그 사랑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꾸며낸 소설이 아니란다.
그 사랑은 모든 인류를 대충 사랑하는 도매금 사랑이 아니란다.
그 사랑은, 알기는 하지만 그저 그러려니 하고, 대충 대해야 할 그런 관계가 아니란다.
아, 그 사랑은 너 혼자만을 위해서라도 목숨을 버렸을 눈물겨운 사랑이란다.
주님의 참사랑은 지금도 너를 향해 쏟아부어지고 있는, 너무나 애절하고 애틋하고, 애타고 애끓는 사랑이란다.
그 사랑은 항상 절벽에 부딪히고, 무감각에 부딪히고, 배신에 부딪히는
상처뿐인 짝사랑이란다.
아, 나여! 너는 왜 주님이 너를 짝사랑하시게 하느냐?
그 사랑이 하늘에서부터 한여름의 햇볕처럼 뜨거운 열기로 쨍쨍 내리쬐고 있는데,
너는 왜 안으로 들어가 아무일도 없는 듯이, 그저 시원한 에어컨이나 즐기며 조용히 앉아있느냐?
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의 작은 사랑을 받아주시고,
주의 그 용암처럼 분출하는 사랑에 무감각한 우리를 용서하소서.
4.
무한히 비참한 죄성에 물든 우리는, 주님의 무한히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아름다우신 완전하신 사랑의 인격과 그 완전하신 속죄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 피조물의 수준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순결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충, 적당히, 반쯤, 구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7:25.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우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흠없이 보전되기를 사도는 원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렇게 완전하게 구원하셨습니다.
죄값을 완전히 치르시고,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완전합니다.
이제 구원받은 우리는 완전히 거룩하고 완전히 아름답고 완전히 의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적당히 거룩하고 적당히 의로운 것으로는 결단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고 넘어지고, 양심에 가책을 받고,
혈기가 올라오고, 음란함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죄에서 완전히 구원받았고 완전히 거룩해졌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내버려 두라는 뜻이 아닙니다.)
쉬운 예로, 죽기 직전 침상에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자가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와 완전한 구원 때문입니다.
점차 우리가 죄를 덜 짓고 점차 성화되는 삶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사모하고 추구하며 주님과 교제하는데 있습니다.
넘어지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그 죄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갑시다.
주님의 그 큰 사랑, 그 눈물겨운 사랑을 생각한다면, 어찌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지 않고, 주님을 외면한 가운데, 적당히 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그 이름이 "예수"입니다.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자, 예수.
영국의 설교자 찰스 스펄전(1834-1892)이 고백했듯이, 그 이름이 예수라는 게
우리 같은 비참한 죄인들에게는 얼마나 감미로운지,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만일, 예수님이 아기로 태어나셨을 때에,
"만왕의 왕," "대심판주," "지존자," "온 우주의 통치자" 등의 뜻을 가진 이름을 호적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어주셨다면,
그 이름의 뜻은 백번 지당하고 옳지만,
우리 같은 죄인들은 감히 무서워서 그 앞에 나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인 이름 "예수."
"죄로부터의 구원자" (마태복음 1:21) 예수이므로,
우리는 떨지 않고, 우리 죄를 가지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스]"라는 이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예수아의 헬라어 음역이며, 그 뜻을 직역하면, "여호와 구원"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죄를 회개한 우리는,
이제 솔로몬 왕이 술람미의 여인을 묘사할 때 사용했던 아름다운 시어들로
그려질 수 있습니다.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 뿐이로구나....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아가 6:9-10.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아가 4:13-15.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술람미 여인의 입장에서 쓴 말) 아가 4:16.
이제 우리에게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거죠.
비참한 우리 죄악성은 덮어지고,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신, 무한히 완전하시고 무한히 아름다우시며 무한히 거룩하신 그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인격의 향기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이며, 나의 옛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시간마다 분초마다 그 한없이 아름다우신 그리스도,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주님을 흠모하고 사모하고 갈망할 때,
우리는 그 향기를 맛보고, 또 그 향기를 풍기게 될 것입니다.
아멘, 아멘, 아멘.
(이상은, 은혜의 복음의 7가지 복 가운데, 두번째 복, 즉 우리가 죄용서와 의로움과 거룩함을 얻었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해서는, 보다 충분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나아가, 심령의 치유와 신유의 은혜도 역시 죄용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질고를 지셨다고 성경은 말하며,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성경은 또한 말합니다. 치유와 건강도 복음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하나입니다.)
샬롬.
2016. 6. 19. 金說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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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은총을
찬양하고 또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