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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기원은 확실치 않지만, 다만 고대 중국에서 창시(요순(堯舜)창시설; [박물지(博物誌)])된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바둑을 두는 사람, 바둑을 말하는 사람은 전세계에 수천만 명이나 있지만 바둑이 어느 때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단정하여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바둑의 장구한 역사에 비하여 그 사실(史實)을 적은 문헌은 극히 희소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이미 3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바둑이 지금은 구미 각국으로까지 널리 보급되어 바야흐로 바둑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한 듯 발전하고 있다. 중국 역시 단편적인 고기서(古棋書)는 많이 있으나 역대의 사실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서지(書誌)는 극히 드물다. 바둑에 관한 중국의 역대의 사실을 발췌, 수록한 '역조혁사집략(歷朝奕事輯略)'이나 일본의 사실을 모아 적은 '좌은담총 (坐隱談叢)' 정도가 있을 뿐이고 일찍부터 선기국(善棋國)으로 알려져 왔던 우리 나라의 바둑 사실(史實)은 겨우 몇 줄씩 기록된 단편적인 것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니 한중일 3국의 바둑역사를 체계적으로 정확하게 집대성할 수 있는 시기는 언제쯤일는지 요원하기만 하다.
<요순(堯舜)창시절>
바둑은 중국에서 발생한 것이 확실하나 언제 누가 어디서 창안하였는지에 대하여는 탐구의 단서조차 알아내기가 어렵다. 종래의 위기사(圍棋史)는 대부분 그 기원을 고래의 전설에 의존하고 있다. 그 전설조차도 널리 알려지기는 하였으나 발생 근거가 불확실하다. 기원 전설은 어떤 정사(正史)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나 중국의 고기서에는 여러 군데 기재되어 있다.
바둑의 발생에 관하여 흥미있는 점은 중국 고대왕조의 창세기 신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중국 진대(晋代:서기 265∼420)의 장화(張華)가 저술한 '박물지(博物志)'에 '요조위기단주선지(堯造圍碁丹朱善之)'라고 적혀 있다. 또한 '중흥서(中興書)'에는 요순이교우자야(堯舜以敎愚子也)라는 원문이 있다. 우자(愚子)라 함은 요제(堯帝)의 아들 단주(丹朱)와 순제(舜帝)의 아들 상균(商均)을 가리킨다.
요순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고대중국의 전설상의 성제이다. 그런데 그 자식들은 불초로서 제위(帝位)를 계승시키기에는 부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요임금은 신하 중에서 동서남북 사제후(四諸侯)의 장(長)인 사악(四嶽)이 천거하였던 착하고 덕이 높은 순을 만나게 되었다. 요제는 자기의 두 왕녀를 순에게 시집보내서 두 부인을 어떻게 감화시키며 살아가는가를 관찰하면서 삼 년간 순의 행적과 인품을 주시하였다.순이야말로 성인군자이고 제왕위(帝王位)를 물려주기에 흡족한 인물로 마음을 굳히고 양위의 뜻을 굳혔다. 처음에 간곡히 사양하던 순은 요제가 죽은 뒤 왕자 단주를 굳이 내세웠으나 제후들의 소망을 물리치지 못하고 천명으로 받아들여 61세 되던 해에 천자(天子)에 즉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은 '사기'에 기술된 내용이다.
기원전 91년 한무제 대에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하였는데 그 내용 중 몇 군데에 바둑에 관한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으나 요순이 바둑을 창제하였다는 전설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는 사물의 기원에 관해서 요순성제와 결부시키는 일이 흔히 있는데 한 대의 문헌에는 바둑의 기원 전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요순에 의한 바둑 창시 전설은 그 후에도 좀 더 각색되었다.
오청원 기성의 수필에 기술된 내용이 재미있어 그 일부를 소개한다. 요제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에 도읍을 정하고 있었다. 오랜 치세를 누렸지만 만년에 깨달음이 있어 성현을 찾아 제위를 물려주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선인(仙人) 포이(蒲伊)를 만나 상의한 뒤에 방침을 정할 생각으로 깊은 산중에 살던 포이를 찾아갔다. 처음에는 포이에게 제왕의 자리를 양위하겠다는 뜻을 비치자 이를 완곡히 거절하고 후미진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순을 암시적으로 지목하면서 두 딸을 함께 순에게 결혼시켜 제위를 물려 주도록 권하였다. 아울러 요제의 아들 단주의 신상에 대하여도 걱정하면서 그의 성품에 적합한 혁평(奕枰), 즉 바둑을 가르치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요제가 그 이유를 물으니 선인 포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물의 수는 하나로부터 시작된다.
반면에는 361로의 눈이 있고 일이라는 수의 근원은 천원으로부터 시발하여 사방을 제한다.
360이라는 수는 하늘이 일회전하는 일수를 표현하며 네 귀로 나누어지는 것은 춘하추동 사계절을 의미한다.
외주의 합계가 72로인 것은 1년을 72절후로 구분하는 것과 같으며 360개의 기석이 흑백 반반인 것은 음과 양을 표시하는 것이다.
기반의 선을 평이라 하고 선과 선 사이를 괘라고 한다. 바둑판은 네모지고 정적이지만 바둑돌은 원형으로 동적이다.
예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바둑이 두어졌지만 동일한 국면의 바둑은 한 판도 재현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일일신의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선인 포이에게서 요제가 바둑을 배우게 되었고 이를 단주에게 전수하였던 것이 이세상에 바둑이 보급되게 된 시초였다고 하는데 선인이 좀 더 부연하기를 바둑은 발흥존망(發興存亡)의 기예(技藝)이므로 단주의 성품 기질로 보아 바둑에 몰두한다면 차츰 바둑 두는 데 흥미를 붙여 세상에서 만용을 부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하여 부정론이 없는 것도 아니다.
중국의 고전 중에 '현현기경(玄玄 經)'이라는 기서가 있다.
'현현기경'은 중국 원대의 순제 9년(1349년)에 안천장(晏天章)과 엄덕보(嚴德甫) 두 사람이 공동 편저한 기서인데 그 서문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昔者堯舜造棋以敎其子 或子 疑之以爲 丹朱商均之愚 聖人宜敎之以仁義禮智之道 豈爲倣閑之具 變허 之術 以益其愚哉.' 이 원문을 알기쉽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그 옛날 중국 고대의 황제 요순은 바둑을 창안하여 그 아들에게 이를 가르쳤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의문을 품고 요제의 아들 단주와 순제의 아들 상균이 둘 다 어리석은 자였다고 듣고 있는데 모름지기 성군으로 추앙받았던 요순 임금이 아들에게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도리를 가르쳤어야 옳은 일이지 어찌하여 파한지도구(破閑之道具)를 만들어 가르침으로써 그 어리석음을 더 조장하였겠는가. 그럴 리가 없다." 라고 부정의 논리를 기술하였다. 그러면서 '현현기경'의 편자는 바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바둑이라는 것은 그 형상으로 보아 하늘은 둥글고(天圓) 땅은 네모진 모양(地方)과 흡사하게 만들어졌고 흑백의 다툼에는 천지음양동정(天地陰陽動靜)의 도리가 작용한다. 바둑을 두어 가는 "반면의 위에는 하늘의 별과 같이 질서정연함이 있고 국면의 추이는 풍운의 변화와 같은 기운을 함축하고 있다.
살아 있던 바둑돌이 죽는 수도 있고 전 국면을 통하여 변화해 가는 흐름의 양상이 마치 산하의 표리지세(表裡之勢)를 나타내는 조화와 같으니 인간세의 도리나 부침이 하나같이 바둑의 이치와 같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본래 바둑의 기원이 신화적 불가사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신비스럽기도 하지만 '현현기경'의 기록 내용과 같이 기리 기법의 심오함이 극진하기 때문에 더욱 유현(幽玄)의 경지를 만끽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청원 기성의 견해>
일본인으로서 최초의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던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가 1953년 기성과 사흘동안 침식을 같이하면서 바둑에 관한 대담을 통하여 오청원 기성의 바둑 철학과 견해를 탐색한 다음에 '오청원 기담'을 저술했었다. 당대 굴지의 문학가와 기성과의 만남이기에 위기문화(圍棋文化)의 진수를 탐구했던 내용이 구구절절 의미심장하기만 하다.
오청원 기성의 상상이기는 하지만 그의 견해로는 바둑의 구성이 당초에는 천문학을 연구하는 도구였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요 임금이 아들 단주에게 일종의 놀이의 도구가 아니라 천문을 연구하는 도구로써 바둑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바둑을 공부하여 역(易)이나 제례에 관한 교양을 터득하라는 뜻에서 가르쳐 주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오청원 기성의 상상으로는 바둑을 요 임금이 창제하기 전에 이미 천문이나 역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바둑을 한자로 기(碁) 또는 혁(奕)이라고 쓰는데 혁(奕)·역(易)·의(醫)는 중국발음으로 '이'라고 읽으며 력(曆)은 '리'라고 발음하니 비슷하게 닮았다는 것이다. 먼 옛날 중국의 통치개념이 제정일치가 기본이었기 때문에 역이나 천문이나 천명, 즉 신의 명령이나 암시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둑판을 가지고 천문을 살피고 역을 따졌을 것이라고 보고 요 임금이 단주에게 바둑을 가르쳤다는 것도 제정(祭政) 중에서 제(祭) 쪽을 맡아 일하도록 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오청원 기성의 상상인 것이다. 전설은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바둑의 한반도 전래
바둑은 고조선 때 중국의 문물과 함께 한반도로 건너온 것으로 여겨지며, 이후 일본으로 전래되어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후 한국-일본-중국 동양 3국에서 틀이 정립되어 꽃을 피우게 되었다.바둑이 한반도에 언제 전래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므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중국에서 문물이 유입되면서 함께 들어왔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에 따라 '기자(箕子)전래설'과 '한사군(漢四郡)전래설'이 대두되고 있다.'기자전래설'은 중국 은나라 말기의 현인 기자가 난을 피해 5천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올 때 학술 기예 등 각 분야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따라왔는데, 그 가운데 바둑두는 사람도 함께 와 한반도에 바둑을 전했을 것이라는 설이다.
한편, 기원전 108년경 중국의 한무제가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 중부이북에 낙랑,임둔,현도,진번 등 4군을 설치했는데, 이때 중국의 관리와 상인들이 내왕하면서 바둑을 전했을 것이라는 설이 '한사군전래설'이다. 이중 '기자전래설'은 '기자'자체에 대한 사실성이 의문시되는 상황이므로 '한사군전래설'이 보다 유력시되고 있다. 또한 '한사군전래설'은 기존의 '삼국시대전래설'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으로 설득력이 있다.
한국바둑의 정착과 발전
한국기원 발족, 바둑의 사회적 정착
1954년 1월 한국바둑의 총본산인 사단법인 한국기원이 발족되고 승단대회가 실시된 데 이어 1955년 6월에는 정식 프로입단대회가 열린다. 이 시기 한국바둑은 바둑의 저변확대로 내실을 다지며 안정적이고 점진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바둑이 사회적으로 정착한 도약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56년 국내 최초의 프로기전인 국수제1위전(현재의 국수전, 동아일보 주최) 출범을 시작으로 1959년 5강전(패왕전의 전신, 서울신문 주최), 최고위전(부산일보 주최) 등 각종 프로기전이 잇달아 창설되며 제도적인 기틀이 마련된다.
한국바둑보급의 선구자로 꼽히는 조남철은 당시 거의 모든 기전을 석권, 실력적으로도 50 ~ 60년대 최강자로 군림한다. 조남철의 뒤를 이어 일본에서 유학한 20대 청년 김인(金寅)이 1963년 귀국하여 조남철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70년대 중반까지 약 10년 가까이 '김인시대'를 연다.
1974년 한떄 바둑계가 양분되는 '기계파동(棋界波動)의 격동을 겪은 한국바둑계는 천재기사 조훈현(曺薰鉉)의 출현으로 본격적인 도약기에 접어든다. 1962년 만 9세의 나이로 입단(세계최연소)한 조훈현은 일본에서 돌아와 1974년 제14기 최고위전을 우승하며 정상에 오른 이래 80년대 후반 이창호가 출현하기까지 15년간 '조훈현시대'를 구가한다. 조훈현은 동년배의 라이벌로 꼽히는 서봉수(徐奉洙)의 끈질긴 도전을 뿌리치며 국수전 10연패, 패왕전16연패(세계최다연패) 위업 등 대기록들을 연거푸 수립해낸다.
조남철-김인-조훈현으로 이어지는 '국수산맥' 속에 한국바둑은 실력적인 면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한국바둑의 황금기
바둑의 저변을 확대하며 꾸준히 실력을 향상시켜온 한국바둑은 1989년 이후 무대를 세계로 넓혀 바둑의 대중화 및 세계화에 성공한다.
특히 1989년 9월 천재기사 조훈현이 제1회 응씨(應氏)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에서 중국의 녜웨이핑(?衛平)을 꺾고 당당히 세계 정상에 오르며 한국바둑은 황금기를 맞는다. 바둑이 전국민적인 생활문화로 정착된 이 시기에 한국바둑은 조훈현에 이어 천재소년기사 이창호(李昌鎬)의 등장에 힘입어 형성된 폭발적인 바둑붐, 1천만을 넘어선 바둑인구, 8연속 세계대회 석권 등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팽창, '세계최강국'이라는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된다. 내적으로는 이창호가 조훈현,서봉수,유창혁(劉昌赫),이창호의 '4인방'체제를 평정하며 1인자로 우뚝 서고, 외적으로는 한국의 4인방이 차례로 세계대회를 휩쓸어 한국바둑의 위상을 한껏 드높인다.
세계최강'으로 우뚝 선 한국바둑
1989년 세계 최연소 타이틀 획득(제8기 KBS바둑왕전 우승)의 기록을 세우며 화려하게 등장한 이창호는 유창혁과 함께 조훈현,서봉수 시대를 끝내고 4인방시대를 연다. 이창호는 이후 1991년 제3회 동양증권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에서 우승(최연소 세계대회 제패)한데 이어 1994년 제18기 기왕전 우승으로 국내 16개 기전 싸이클링 히트의 위업을 달성하며 '이창호시대'를 구축한다.
특히 이창호는 스승 조훈현이 건재한 가운데서도 1989년 세계최다대국(111국), 1990년 세계최다연승(41연승), 1993년 세계최다승(90승), 1994년 세계최다관왕(13관왕) 등 각종 대기록을 세우며 바둑사를 새로 써나간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바둑은 세계무대에서 빛나는 성과를 거두는데, 1993년 국가대항 단체전인 제1회 진로배 세계바둑최강전 우승을 시작으로 서봉수의 제2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제패, 이창호의 제4회 동양증권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우승, 유창혁의 후지쓰(富士通)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정복 등 한해동안 열린 세계대회를 모조리 휩쓰는 그랜드슬램의 위업을 이루어낸다. 1994년 한국바둑은 여세를 몰아 제2회 진로배 우승에 이어 우승행진을 거듭하는 가운데 조훈현은 제5회 동양증권배와 제6회 후지쓰배를 연거푸 석권, 세계대회 싸이클링 히트라는 공전의 대기록을 세우기도 한다. 이로써 한국은 1995년 제3회 진로배 우승까지 8연속 세계대회 우승이라는 찬란한 금자탑을 쌓으며 명실상부한 세계 정상에 오른다. 바둑종주국임을 자부하는 중국과 바둑선진국임을 자처하는 일본의 틈바구니 속에서 한국은 현대바둑 반세기만에 세계최강국으로 거듭난 것이다.
1996년은 한국바둑이 세계바둑의 흐름을 주도하고 세계 최강의 자리를 굳힌 중요한 한해였다. 최대규모의 세계대회인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과 LG배 세계기왕전 등 한국이 주최하는 메머드 국제기전이 잇달아 탄생하며 세계바둑계는 보다 풍요로워진다. 유창혁이 제3회 응씨배에서 우승함으로써 한국이 이 대회 3연패를 이루는데 기여하는 한편, 이창호는 제8회 동양증권배, 제9회 후지쓰배, 제8회 TV아시아선수권대회, '96 세계바둑최강전을 연거푸 석권하며 명실상부한 '세계 1인자'의 자리에 오른다. 이와 함께 1997년 초 서봉수는 제회 진로배 최강전에서 경이로운 9연승의 대기록을 세우며 한국의 5연패를 견인한다.
1997~8년은 국내외적으로 이창호의 1인 아성이 더욱 확고해지는 시기이다. 국내에서는 대부분의 타이틀을 독차지하는 한편, 제1회 LG배 세계기왕전, 제2회 삼성화재배, 제9회 동양증권배, 제3회 삼성화재배 등에서 잇달아 우승, 단일 시즌 세계대회 전관왕까지 넘보며 세계무대를 평정한다. '세계가 이창호를 좇는 시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공고해진 이창호희 1인아성은 당분간 지속되리라는 것이 세계바둑계의 지배적인 전망이다. 이와 함께 한국바둑은 한국기원 연구생 출신을 주축으로 한 10~20대 젊은 기사들이 급격히 부상함으로써 미래를 밝게 하고 있다.
1998년 'IMF한파'로 불리는 국내 경제의 극심한 어려움 속에 일시적인 위축현상을 보였던 한국 바둑계는 이제 경기호전에 따라 보다 힘찬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1999년은 또 다른 '중흥의 한해'로 간주될 것 같다. 세계 최대기전으로 자리잡은 삼성화재배에서 이창호9단이 연속우승, 세계최강임을 확인시켰고 이어 LG배에서도 어렵지 않게 우승컵을 거머쥐어 여타의 범접을 불허했다. 1998년에 세계아마선수권대회의 우승(김찬우)컵을 차지했던 한국 아마추어는 유재성7단이 연이어 우승컵을 차지해 아마추어에서도 최강임을 내외에 과시했다. 일본에선 趙善津9단이 20년 정상 趙治勳9단에게서 본인방을 쟁취하여 세대교체를 선언했다. 이 흐름은 2000년 벽두 王立誠9단이 최대 타이틀 기성을 획득함으로써 본격화되었으며 지금도 진행중이다.
서봉수9단이 국내최대 타이틀 LG정유배를 획득하여 올드팬들을 즐겁게 했으며, 유창혁9단은 후지쓰배를 두 번째로 품에 안고 '공격수'의 위상을 더욱 빛냈다. 1999년은 성적면으로 바둑계 활성화에 만족스러웠던 한해였다.
2000년 바둑계는 한마디로 '이창호 1인천하'에서 군웅할거 시대로 자리매김한 한 해였다. 그 중심은 18세 이세돌3단이었다. 천원전과 배달왕전을 거푸 우승하면서 당당 2관왕, 태풍의 핵으로 떠올랐다. 이3단은 7개 기전 본선에 동시에 진입하는 성과와 32연승 대기록과 바둑문화상 MVP로 선정되는 쾌거도 이루었다. 최명훈9단도 국내 랭킹 1위기전인 LG정유배를 거머쥐며 한자리를 차지했고, 여류 루이나이웨이9단도 국수를 비롯하여 흥창배, 여류국수, 동방항공배까지 우승하여 여류바둑계를 평정했다. 목진석5단도 최강 이창호9단을 꺾으며 KBS바둑왕전을 차지, 신예 돌풍의 한 주축이 됐고, 최철한2단, 박영훈2단, 안영길3단, 원성진3단 등의 10대 신예들이 승률, 다승 부문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대이변을 연출, 확실한 세대교체를 선언하고 나섰다.
반면 이창호9단은 4관왕으로 내려 앉았고 상금랭킹도 3위로 떨어졌다. 아직은 정상을 내어 준것은 아니지만 예기가 많이 꺾인 모습, 다만 승률 부문에선 톱을 유지했다. 조훈현9단과 유창혁9단은 국내에선 저조하고 국제무대에서 한 몫씩을 했다. 그 덕분에 타이틀 획득에는 부진했으나 상금랭킹에서는 각각 1,2위를 점했다.
일본에서 활약하던 조치훈9단은 기성,명인,본인방을 모두 잃고 무관으로 내려 앉았다. 재기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닌가하여 안타깝다. 대신 류시훈7단이 천원을 획득했고, 조선진9단은 기성전에서 도전자로 활약했다.2000년 바둑계는 국내에선 신예돌풍, 세대교체의 거센 물결이었고, 국제무대에선 한국의 정상유지, 해외진출 가속화였고, 아마추어 바둑계에선 정상급들의 군웅할거의 한 해로 요약된다.
한국바둑 약년표
BC2300년경 | 바둑의 기원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바둑을 만들어 아들을 가르쳤다.'(博物誌) |
BC200년경 | (중국) 현존하는 최고의 바둑판 1952년 중국 망도(望都)에서 17줄 돌바둑판 발굴 |
BC108년경 | 바둑의 한국 전래 한사군(漢四郡)전래설 추정 |
서기 475년 | 국내 최초의 바둑기록 문헌상 최초의 국수(國手)기록 '고구려의 국수(國手) 도림(道琳)과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이 바둑을 두었다.'(三國史記 百濟本記) |
737년 | 최초의 바둑관련 향가(鄕歌) '신충(信忠)이 바둑으로 친분이 두터운 신라 35대 임금 효성왕(孝成王)을 그리며 원수가(怨樹歌)를 지었다.'(三國遺事) |
880년경 | 문헌상 최고의 돌바둑판 대문장가 최치원은 노년에 해인사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그 당시 둔 석국(石局·돌바둑판)이 있다. |
1000년경 | 바둑관련 고려가요 '고려 초기 중국 상인 하 두강(賀頭江)이 내기바둑으로 예성강의 한 아름다운 부인을 빼앗으니 그 남편이 예성강에서 슬피 울며 부른 노래가 예성강곡(禮成江曲)이라 한다.'(高麗史樂志) |
1010년 | 진중(陣中)대국 '고려 초기 강조(康兆)는 거란의 성종이 이끄는 40만 대군과 대치 중 진중에서 바둑을 두었다.'(高麗史) |
1090년경 | 현존하는 최초의 바둑시 박인량(朴寅亮)이 중국 금산사(金山寺)에서 스님들이 대나무 아래서 바둑두는 광경을 보고 「금산사」라는 시를 지었다. |
1104년경 | (중국) 현존하는 최고의 바둑책 중국 이일민(李逸民)이 펴낸 「망우청락집(忘憂淸樂集) |
1230년경 | 최초의 금석문 바둑기록 고려 고종 때 명신 금의(琴儀)의 묘지명 |
1280년경 | 의원바둑인 '충렬왕 때의 명의 설경성(薛景成)은 중국 원나라 세조를 치료하여 궁중을 무상출입, 황제 앞에서 바둑을 두었다.'(高麗史) |
1340년경 | 현존하는 최고의 암각(岩刻)바둑판 고려 轢殆?때의 대학자 우탁(禹倬)은 선경을 찾아 노닐었는데 충북 단양 사인암(舍人岩) 앞에 암각바둑판이 남아 있다. |
1351년경 | 최초의 바둑문장 목은 이색(李穡)이 선친 이곡의 유품 중 바둑돌을 보고 「기기(記棋)」라는 바둑글을 지었다. |
1712년경 | 최초의 순장바둑 기록 문헌 조선조 숙종 때의 학자 김창업(金昌業)이 지은 「노가재연행록(?稼齋嚥行錄)」에는 '중국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처음 배자(排子)가 없는 것이 달랐다.'는 기록이 보인다. |
1790년경 | 현존하는 최초의 바둑논문 이덕무(李德懋)의 혁기론(?棋論) |
1820년경 | 바둑돌 산지 경상도 양산군 기장읍은 차성현 기포(碁浦)라고 불리었느데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그곳의 바둑돌을 보고 「자연기석(自然碁石)」이라는 장편시를 지었다. 자연석을 바둑돌로 사용한 나라는 우리나라 뿐이다. |
1850년경 | 바둑연시(聯詩) 정원용(鄭元容)이 지은 연시 64수 |
1886년 | 현존하는 최고의 기보 고종 때의 정치가 김옥균(金玉均)이 일본 망명시절 본인방 슈에이(本因坊 秀哉)에게 여섯점 접바둑을 두었다. |
1899년 | 최초의 한일 국수급 대국 백남규(白南圭) 국수와 일본의 가리가네(?金準一) 初단이 최초의 한일 국수급 대국을 두었는데 일본바둑과 순장바둑으로 번갈아 두었다. |
1910년경 | 바둑층시(層詩) 정환직(鄭煥直)의 기국문(碁局文) 상하 두편 13층 |
1913년 | 최초의 바둑책 출판 육당 최남선(崔南善)이 펴낸 「기보(棋譜)」, 묘수풀이 수록 |
1918년 | 현존하는 최고의 한일 국수급 대국 기보 백남규(白南圭)국수와 일본의 사이토(齊?슬?賢德) 四단이 둔 기보 |
1927년 | 현존하는 최고의 순장바둑 기보 윤경문(尹敬文) 국수와 개성의 손득준이 이 순장바둑을 두었다. |
1930년 | 최초의 기원 개설 민영휘(閔永徽)의 산정별장에 당시 국수급들이 개설 |
1933년 | 최초의 바둑월간지 「신정기보(新訂碁譜)」 발간 (경성위기연구소) 순장바둑과 일본식 바둑 기보 및 정석 등 수록 |
1936년 | 최초의 바둑대회 「전조선선수권대회」<매일신보(서울신문의 전신)> 개최, 처음으로 신문 관전기 게재 <유광렬(柳光烈)> |
1937년 | 순장바둑 폐지 유진하(柳鎭河)·채극문(蔡極文) 등 순장바둑 폐지 결의 「경성기원」 개설 조남철 첫 일본 유학 기타니(木谷實) 문하에서 수업, 1943년 귀국 「전조선위기선수권대회」(동아일보) 肄?권재형(權載衡), 준우승 윤주병(尹周炳), 3위 노사초(盧史楚) |
1945년 | 한성기원 창립(11월) 조남철 현대바둑 보급, 이후 「조선기원」, 「대한기원」 등으로 개칭, 한국기원의 모태가 됨 |
1948년 | 「조선기원」 발족(4월) 제1회 전국위기선수권대회(연합신문) 조남철 우승, 이후 5연패 |
1949년 | 「대한기원」 발족(7월) |
1950년 | 최초의 단위결정시합(대한기원 주최, 6월 20일) 조남철 三단, 민중식 등 13명의 初단 탄생 |
1953년 | 최초의 도전기 실기 제3기 전국위기선수권대회에서 조남철 四단이 김명환 三단을 3대 0으로 물리치고 3연패 |
1954년 | 사단법인 한국기원 발족 윤호병 총재, 장경근 초대이사장 취임(1. 18) 제1회 승단대회 개최(4. 10) 제1회 입단대회 개최(6. 20) 김태현 입단. |
1955년 | 최초의 바둑 저서 「위기개론」(조남철 저) 발간(1월) 바둑용어 정립 월간바둑지 「기도(棋道)」 발행 (홍종선 주간, 대한기도원 발간) 최초의 공식국제대회 제1회 한중 위기교류전(3월 대만 개최) 조남철, 김봉선, 장국원, 민영현 출전 |
1956년 | 최초의 공식프로기전 제1기 국수1위전(국수전, 동아일보 주최) 조남철 四단 우승 |
1957년 | 도전기 라디오 중계 제2기 국수1위전(10. 25) 제1기 국수순위전(세계일보) 김봉선 三단 우승, 조남철 五단 준우승, 제2기까지 진행 |
1958년 | 최초의 TV바둑 한국일보사 방영, 조남철 해설 제1기 왕위전(경향신문) 조남철 五단이 김명환 四단을 2대 1로 물리치고 우승, 69년 제3기까지 진행 |
1959년 | 최하영 (사)한국기원 2대이사장 취임(7. 1) 제1기 오강전(서울신문, 패왕전의 전신) 김명환 四단 우승, 특별대국에서 조남철 六단 승리 제1기 최고위전(부산일보) 조남철 七단 우승 제1회 전국아마바둑선수권대회(한국일보) 김인 우승, 8회까지 진행. |
1961년 | 제1회 전국대학대항 위기선수권대회<서울일일신문사 주최, 2회부터 전국대학생바둑선수권으로 개칭(한국일보 주최)> 조홍제 (사)한국기원 3대이사장 취임(7. 1) |
1962년 | 세계 최연소 입단 기록 조훈현 만9세에 제16회 입단대회 통과(10월) 제1기 청소년배(국제신보) 윤기현 三단이 조상연 二단을 물리치고 우승, 제9기까지 개최 |
1963년 | 세계 최초의 국제전화대국 일본 이시다(石田芳夫) 初단이 한국의 조훈현 初단에 승리(1. 6) |
1964년 | 「TV기원」 개설(KBS-TV) |
1965년 | 최초의 TV기전 탄생 TV배 프로기전, 김인 五단 우승 제1회 동양3국바둑대회(11. 16. 서울개최) 한국 우승, 71년 제6회까지 진행. 제1회 한일 대학생바둑대항전(12. 7. 서울 개최) 한국 6승4패로 우승, 71년 제6회까지 진행 |
1966년 | 제1기 왕위전(중앙일보) 김인 五단 우승 고려청자로 만들어진 바둑판 조각이 전북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고요지(古窯地)에서 출토 |
1967년 | 이후락 (사)한국기원 4대이사장 추임(2. 24) 바둑전문잡지 「월간 기계(棋界)」창간(7. 7) 69년 8월호부터 제호를 「바둑」으로 개제 사단법인 대한기원협회 발족 김동송 회장 취임 제1회 전국아마국수전(동아일보) 우승 홍종현, 준우승 김규태 제1기 명인전(한국일보) 조남철 八단 우승 |
1968년 | 조치훈 일본기원 최연소(11세) 입단 기록(2월) 제1기 청룡배최강전(조선일보) 김인 六단이 조남철 八단을 3대1로 물리치고 우승 제1회 전국고교생바둑선수권대회(5월 중앙일보) 우승 조기연 제1회 한일 고교생친선바둑대회(8. 1. 도쿄 개최) 일본 우승, 제2회부터 중국이 참가하여 한중일 고교생친선바둑대회로 발전, 제6회까지 개최 한국기원 바둑회관 개관(8. 8) 67년 11월 5일 기공, 종로회관(관철동) 7관왕 제6기 청소년배에서 김인 六단이 김학수 四단을 2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 |
1969년 | 제1회 전국직장대항바둑대회(2월) 우승 대한교육보험, 준우승 기업은행, 3위 산업은행 이후락 한국기원 초대총재, 서정귀 5대 이사장 취임(3. 25) 최초의 국민학교 바둑특활 실시(9월), 홍익국민학교 제1회 한일 전문기사교류 (11. 27. 도쿄 개최) 한국 2승7패, 71년 제3회까지 진행 |
1970년 | 한국기원 사단법인에서 재단법인으로 등기(3. 25) 서정귀 (재)한국기원 초대이사장 취임(4. 2) |
1971년 | 제1회 어린이국수전(2월 한국기원) 우승 조대현, 준우승 서필원 |
1972년 | 윤희율 일본 제14회 전국여류아마선수권대회에서 외국인으로 첫우승 |
1973년 | 제1기 백남배(1월 대한일보) 김인 七단이 정창현 六단을 물리치고 우승, 제2기까지 개최 제1기 MBC국기전(1월 MBC-TV) 서봉수 五단 우승 제2기까지 진행 제1기 최강자전(국제신보) 조남철 八단이 김인 七단을 2대1로 물리치고 우승, 제5기까지 개최 제1기 기왕전(12월 조선일보) 정창현 七단 우승 |
1974년 | 최영근 (재)한국기원 2대 이사장 취임(2. 8) 제1회 여류국수전(한국경제신문) 김상순 우승 |
1975년 | 제1기 국수전(1월 경향신문) 조훈현 六단이 장두진 二단을 2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 대한여성기우회(한국여성바둑연맹의 전신) 발족(3월) 한국기원선수권전(3월) 고재희 五단이 홍태선 二단을 2대1로 물리치고 우승 제1기 왕좌전(7월 TBC-TV) 조훈현 六단이 김희중 四단을 물리치고 우승, 2연패 이후 중단 기사파동으로 「대한기원」 분리(3월) 월간 「기도(棋道)」 창간(10월) 이성범 (재)한국기원 3대이사장 취임(10. 8) 제1회 여류입단대회(9월 대한기원) 조영숙 윤희율 첫 여류프로 탄생 조치훈 六단 일본 최연소(18세) 타이틀 쟁취 기록 제12기 프로10걸전에서 우승 |
1976년 | 제1회 학생국수전(1월) 우승 한철균(고대), 준우승 박영찬(중앙고) 제1회 한일 아마최강친선대항전(1월) 한국 6승3패 최재형 (재)한국기원 4대이사장 취임(3. 18) 한일 국제전화바둑 실시 조치훈 七단이 서봉수 四단에 승리(4. 4) 한국기원과 대한기원 통합(12. 1) |
1977년 | 제1회 프로:아마대항전 인기 프로기사 10인과 아마10강전 입상자 간에 2점 치수로 대결, 5승5패 기록 제1회 한중고교선수권대회(8월 대만 개최) 한국 6승3연패 우승. |
1978년 | 황용주 (재)한국기원 5대이사장 취임(5. 9) 제1회 기도문화상 제정(5월) 최우수기사상 연승기록상 조훈현 七단, 최다승기록상 강훈 三단, 신예기사상 서능욱 四단, 감투상 이강일 四단 수상 제1기 전일왕좌전(전남일보 전일방송) 조훈현 七단이 서능욱 五단을 2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12. 18) 8관왕 등극. |
1979년 | 조훈현 八단 타이틀전 23연속 우승 제14기 패왕전에서 김인 七단을 3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3. 28) 제1회 세계아마바둑선수권대회(5월 도쿄 개최) 편지바둑 한국의 남백우씨와 일본의 모리야씨가 7년 4개월 동안 서신을 통해 대국(72. 6. 6 - 79. 9. 28) |
1980년 | 정수복 (재)한국기원 6대이사장 취임(1. 1) 조훈현 八단 제1차 전관왕 달성(7. 12) 제11기 명인전에서 서봉수 六단을 3대2로 물리치고 명인 쟁취 9관왕 등극 제1기 KBS바둑왕전(KBS-TV) 조훈현 八단이 노영하 七단을 2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12. 16), 10관왕 등극 이성범 (재)한국기원 7대이장 취임(11. 27) 조치훈 八단 기사 최초로 은관문화훈장 수상(12. 19) |
1981년 | 제1회 한중 바둑교류전(8월) 한국 8승4패 우승 대학바둑연맹 결성(10월) 조치훈 일본 최연소(24세) 九단 승단 기록 |
1982년 | 제1기 MBC제왕전(2월 MBC-TV) 조훈현 九단이 서봉수 七단을 2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 조훈현 국내 최초로 九단 승단(5. 4) 조훈현 九단 제2차 전관왕 달성(7. 7) 제16기 왕위전에서 서봉수 七단을 4대3으로 물리치고 왕위 쟁취 8관왕 등극 이홍식 (재)한국기원 8대이사장 취임(11. 25) |
1983년 | 조치훈 일본바둑사상 3대타이틀(기성, 명인, 본인방) 첫 석권 기록 여자실업바둑팀<고려투자금융(주)> 창설(6월) 제1회 한일 대학생바둑교류전(9월) 한국 9승1패 김우중 (재)한국기원 2대총재 취임(9. 15) 서정각 (재)한국기원 9대이사장 취임(12. 25) |
1984년 | 제1기 대왕전(대구매일신문) 조훈현 九단이 서능욱 七단을 3대1로 물리치고 우승 제1기 박카스배(동아제약 매일경제신문) 조훈현 九단이 서봉수 七단을 3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 제1회 세계청소년 바둑대회(7월) 한국 김영환 우승 한일 프로교류전 한국 1승3패 조남철 일본 대창상(大倉賞) 수상 |
1985년 | 제1기 프로신왕전(5월 스포츠서울) 정수현 五단이 강훈 六단을 2대1로 물리치고 우승 「바둑연감」 발간 |
1986년 | 조훈현 九단 제3차 전관왕 달성(6. 20) 제3기 박카스배에서 하찬석 七단을 3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 11관왕 등극 |
1987년 | 제1회 동양증권배 국제기전(10월 서울경제신문, 동양증권)양재호 六단이 장수영 八단을 3대1로 물리치고 우승, 제3회부터 세계선수권대회로 규모 확대 |
1988년 | 제1기 7·8·9단전(5월 KBS-TV) 서봉수 九단이 김인 九단을 물리치고 우승 제1회 후지쯔배(富士通杯, 4월 일본), 제1회 응씨배(應氏盃, 8월 대만) 세계바둑선수권대회 개막 장재식 (재)한국기원 10대이사장 취임(6. 30) |
1989년 | 제1기 기성전(1월 세계일보) 조훈현 九단이 유창혁 三단을 4대2로 물리치고 우승 최초의 해외도전기 실시(3. 15, 18) 제23기 왕위전 도전 2, 3국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대국 제1회 한일 여류교류전(5월) 한국 2승4패 북한 바둑협회 결성(7월) 세계 최연소 타이틀 획득 기록 이창호 三단이 14세에 제8기 KBS바둑왕전에서 김수장 八단을 2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8. 8) 제1회 응씨배(應氏盃)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에서 조훈현 九단이 녜 웨이핑(晷衛平) 九단을 3대2로 물리치고 우승(9. 5) 조남철·조훈현 九단 은관문화훈장 수상(9월) 제1기 기성전 도전 1, 2국을 캐나다 밴쿠버시에서 대국 조훈현 九단 '89 프로기사 MVP 수상 이창호 四단 111국(84승 27패)으로 연간 최다대국 기록 |
1990년 | 바둑교실 인가제, 바둑보급 지도사 제도 실시(1월) 김우중 (재)한국기원 3대총재 연임(4. 16) 제1기 비씨카드배 (5월 스포츠서울) 조훈현 九단이 김희중 八단을 2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 전국어린이바둑교실협회 결성(5월) 이용호 초대회장 취임 세계 최다연승 기록 이창호 四단 41연승 달성(8. 24) 제2기 기성전 도전 1국 백두산에서 대국(9. 16) |
1991년 | 한국바둑룰 개정(3월), 권리와 실전 해결 원칙 입각 SBS배 세계바둑최강전(11월 SBS-TV) 한국 우승 서능욱 九단 세계최다 111면기 개최(12월) |
1992년 | 최연소 세계바둑챔피언 기록 이창호 五단이 17세에 제3회 동양증권배 세계선수권대회 우승(1. 27) 최초의 컴퓨터통신대국(3월) 유창혁 六단이 이창호 六단에 승리 제1기 SBS배 연승바둑최강전(3월 SBS-TV) 이창호 六단이 장수영 九단을 2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 장재식 (재)한국기원 11대이사장 연임(4. 21) 제1회 IBM배 한일 컴퓨터통신바둑대항전(5월) 한국 3전전승 우승, 제2회까지 개최 '92데이콤배 한중 컴퓨터영상바둑대회(10월) 중국의 마샤오춘(馬曉春) 九단이 한국의 유창혁 六단에게 승리 제1회 진로배 세계바둑최강전(11월 SBS-TV 진로그룹) 한국 우승 제1기 한국이동통신배 배달왕기전(12월 한국PC통신) 이창호 六단이 조훈현 九단을 3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 |
1993년 | 현재현 (재)한국기원 12대이사장 취임(3. 10) 도전기 최다연패 기록(3월) 조훈현 九단 패왕전 16연패(77년 제13기부터 제28기까지) 충암동문기사회 1백단 돌파(7월) 한국 세계대회 그랜드슬램 달성 제6회 후지쯔배(부사통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의 유창혁 六단이 조훈현 구단을 물리치고 우승(8. 7) 아마七단 탄생(8월) 강영일·김동섭 등 8명 제1회 4도시대항 소년소녀바둑대회(9월) 우승 북경, 준우승 부산 제1기 EBS배 여류프로기전(12월 EBS-TV) 윤영선 初단이 이지현 初단을 2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 제1기 프로여류국수전(12월 한국경제신문) 윤영선 初단이 김민희 初단을 2대1로 물리치고 우승 |
1994년 | 세계최다관왕 기록 이창호 六단이 제18기 기왕전에서 우승(3. 16), 13관왕 달성, 국내기전(16개) 사이클링 히트 달성 제7회 후지쯔배(富士通杯) 세계바둑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의 조훈현 九단이 유창혁 六단을 물리치고 우승(8. 7) 제1회 롯데배 한중 바둑대항전(9월) 한국 8승6패 우승 한국기원 회관 이전(10. 5) 종로구 관철동에서 성동구 홍익동으로 제1회 한중 신예대항전(10월) 한국 7승5패로 우승 제1회 보해컵 세계여자바둑선수권대회(11월 보해양조) 중국의 루이 나이웨이(芮乃偉) 九단이 펑 윈(豊雲) 七단을 2대0으로 물리치고 우승 세계 최초의 컴퓨터통신 도전기 제2기 한국이동통신배 배달왕기전 결승 제1국(12. 30) |
1995년 | 한국 세계대회 8연속 제패 기록 제3회 진로배 우승(2. 22), 3연패 한국여성기우회 한국여성바둑연맹으로 명칭 변경 이창호 七단,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3월) 제1회 한일 아마정상대항전(4월 한겨레신문) 한국 10승4패 우승 차민수 四단, 제1회 우정배 창설(5월 중국) 류 샤오광(劉小光) 九단 6승1패 우승 한국근대바둑선구자 고균 김옥균의 바둑판 일본에서 귀환(7. 11) 제7회 TV바둑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이창호 七단이 조훈현 九단을 물리치고 우승(7. 14) 제1기 테크론배 프로기전 출범(9월 매일경제신문) 한국현대바둑50주년 기념 순장바둑 특별대국(10. 6) 이창호 七단이 조남철 九단에 승리 제6회 세계페어바둑선수권대회에서 이경보·권효진이 대만팀을 물리치고 우승(11. 12) 제1회 신사배에서 한국의 서봉수 九단이 중국의 마 샤오춘(馬曉春) 九단을 물리치고 우승(11. 21) 제1기 박카스배 천원전 출범(11월 스포츠조선) 한국바둑텔레비전(B-TV) 개국(12월) |
1996년 | 정동식 五단, 한국기원 사무국장 취임(1.3) 한국, 진로배 4연패(2.10) 이창호 七단 23연속 우승, 제7회 동양증권배 우승(3.20) 제65회 (재)한국기원 정기이사회에서 김우중 총재가 제4대 총재로 재추대 이창호, 제8회 TV바둑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5. 4) 이창호 七단, 은관문화훈장(2등급 수상)(5. 4) 세계 최대 바둑제전 삼성화재배 창설(6.17) 이창호·유창혁, 九단으로 특별승단(6.17) 조훈현 九단, 타이틀 최다연승부문(23연승)으로 기네스북에 오름(6.18) 이창호, 제9회 후지쯔배 우승(8.3) 공익근무요원인 이창호 九단, 훈련소 입소(8.26) 이창호, '96세계바둑최강결정전 우승(4전 전승, 10.18) 이창호, 제3회 응씨배 우승(11.6) 조치훈, 생애 두 번째 대삼관 달성(11.7) 명지대, 바둑지도학전공 개설(11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