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찍 출발하고 싶었다. 아침에 서울을 떠나 해가 떨어지기 전에 영주瀛洲에 닿아야 하겠다는 것이 하 명진河明進의 생각이었다. 항공편을 이용하면 프로펠러기를 타더라도 두 시간대에 영주공항에 내릴 수 있겠지만, 이미 예약이 마감되어 여름이 다 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배편으로 가기로 하고, 목포에서 출항하는 페리호를 알아보았지만 그것마저 이용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운 좋게 여행사로부터 왕도에서 출항하는 배편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운임은 5천4백60원이었다.
다음날 15시 10분 발이므로 07시에 통일호에 몸을 실었다. 통일호는 잡다한 인간들을 싣고 정시에 서울역을 출발하였다.
6월의 싱그러움이 들판에 넘쳤다. 모종을 끝낸 밭작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열차가 종착지인 목포에 닿은 시간은 13시 50분이었다. 이제부터 완도까지 버스로 가야 하였다. 2시간 남짓한 거리였다. 배가 출항할 시간이 촉박해 한가로게 목포에서 점심을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는 목포역을 나와 버스로 갈아타고 영산호의 제방을 달린 끝에 목포를 벗어나게 되었다. 버스가 완도부두에 도착하니 출항 10분 전인 15시 50분이었다. 부두에 제주도로 떠날 페리호 한 척이 정박 중이었고, 그곳이 페리호 전용부두였다. 제복을 입은 선박회사 직원과 임검 경찰이 승객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사람들이 몰려오자 표를 받고 임검을 시작하였다. 승객들이 배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배가 출항신호를 뒤로 날리며 부두를 뒤로 하였다.
하 명진은 갑판에 서서 멀어져가는 완도를 바라보았다. 페리호는 느리고 쾌적하게 항진을 계속했다. 선미에 꽂힌 태극기가 바람을 받아 기운차게 펄럭거렸다. 명진은 문득 일본사람이 쓴 글을 머리에 떠올렸다. 오래 전에 영주를 떠난 조상의 후손이 쓴 글이다.
그들은 떠날 때,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 조상의 무덤이 두고 온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무덤을 중심으로 생활해 왔고, 무덤이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그들의 중심이었다. 바로 무덤 자체가 그들 마음의 고향이었다.
하 명진은 오라로 오르는 길가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그는 등산사방을 나무그늘에 세워놓고 손수건으로 이마에 솟은 땀을 닦았다. 한적한 길을 차들이 가끔 지나가고 있었다. 하 명진은 이들 차에 시선을 주었다. 산 위쪽에서 파란 승용차가 내려오다가 그의 곁에 와서 멎었다. 한 여자가 운전을 하고 다른 두 여자가 앞뒤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부유한 집안의 여자들로 보였다.
『어디로 가세요?』
운전석 옆 좌석에 앉은 여자가 물었다.
『혈거유적지穴居遺蹟地로 가고 있습니다.』
『타세요. 태워다 드릴 게요.』
운전석에 앉은 여자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하 명진은 차의 뒷문을 열고 빈 자리에 앉아 문을 닫았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차가 출발하면서 차를 운전하는 여자가 후사경으로 하 명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서울입니다.』
『혈거유적지라면 어디를 말하는 건가요?』
옆 좌석에 앉은 여자가 물었다.
『함덕해수욕장에 있는 유적지를 말합니다.』
함덕해수욕장이 북제주군 대조읍 북촌리에 있으므로 그곳으로 가려면 승용차가 필요했다. 그러나 하 명진은 구경삼아서 도보로 가기로 하였다. 산에 오르는 셈을 치기로 한 것이다. 쉬엄쉬엄 물어서 가자니 언제 함덕해수욕장에 도착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신문에 크게 난 그곳이군요.』
앞 좌석의 여자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동굴이라고 하던데 그곳엔 왜 가시지요?』
『관심이 있어서이지요.』
『고고학자이시군요.』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글감을 얻으러 가는 길입니다.』
『작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이들 세 여자에게 하면진의 신분이 확인된 셈이었다.
『운전하는 여자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저 여자가 바람기가 있으니 조심하셔야 해요.』
옆 좌석의 여자가 말했다. 여자들이 농을 걸어오기 시작하였다.
『제가 찾는 것은 영주의 바람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영주에 불어오는 바람을 영등바람이라고 하였지요.』
『이 여자가 이름이 영주이고요 바람기가 있으니 영주 바람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 여자를 영등바람이라고 부르지요. 우리끼리 만요. 영등사람이 작사선생을 만났으니 글감이 되겠군요.』
옆 좌석의 여자가 짓궂게 말하며 깔깔거렸다.
『저런 저런! 저 여자가 말을 함부로 해서 미안합니다.』
운전석의 여자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과연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글거리가 나올 것 같기도 합니다.』
하 명진이 영주라는 여자를 보니 귀에서부터 목으로 흐르는 선이 색기色氣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옆자리의 여자가 이 여자가 바람기가 있는 여자라고 한 말이 믿을 만한 말인 듯 싶었다.
『동굴 이야기나 해 주세요.』
운전석의 여자가 말했다.
『그 동굴은 제주도의 역사를 수정하도록 만든 엄청난 보물을 갖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까지 제주도의 역사가 서기 후에 시작되었다고 보아 온 것이 통설인데, 그 동굴을 발견한 후로 서기 후의 역사를 서기 전의 역사로 끌어올리게 되었단 말입니다. 발굴조사단이 조사해 보니까 네 개의 지층으로 되어 있는데, 신석기시대에서부터 3국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층에서 유물 수 백 점이 쏟아져 나왔으니 놀랄 수 밖에요. 동굴에 불을 땐 흔적이 있고, 불씨를 보관했던 자리와 잠자리로 사용했음직한 평평한 돌이 그대로 있다고 해요. 이런 동굴을 혈거유적지라고 하는데, 이 유적지가 유지를 그리워하듯 육지를 바라보고 있으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추측컨대 아마 육지에 살던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정착하여 살았을 것입니다.』
차가 시내를 벗어나 별장 같은 집들이 서있는 농장 곁을 지났다. 푸르름의 윤기가 흐르는 농장이었다.
『저 집의 여주인은 행복을 구가하며 살고 있겠군요. 보세요. 저 밀감나무들, 집안에 가득한 열대식물들, 그리고 저 바다 가까이 자라는 유채들.』
운전석의 여자가 말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비극이지요.』
그런 말을 할 때 여자에게서 고독과 불행의 냄새가 풍겨왔다. 그의 감수성이 그 여자에게서 풍겨오는 냄새를 맡고 있었다.
저 눈앞에 파란 집이 한 채 나타나자 여자가 속도를 늦추었다.
『저기 저 집이 제가 살고 있는 집이에요.』
그 여자는 지나가는 말을 하듯 말했다.
집은 아담했고, 마당이 넓었다. 완전히 이국풍의 집이었다. 파란 하늘을 그림처럼 배경에 두고 있었다.
『아름다운 집이군요.』
『쓰며 사는 데는 별 불편이 없어요.』
이 고장 사람들의 생활이 많이 향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제가 군대생활을 할 때, 이 고장출신들과 함께 있었어요. 그때 그들이 말하더군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고구마 밖에 없다. 그런 말을 하면서 암담해 하는 얼굴을 하였어요. 제대를 하고 고양에 간다고 해도 절망뿐이래요.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는 지금 제주도는 부유하고 환상적인 섬으로 변했어요. 어디를 가도 이국적인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이 넘치고 있지 않습니까.』
『요새 애들은 옛날에 암담했음을 이해하지 못해요.』
『고분이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하 명진이 대화를 바꾸었다.
『네, 보았죠. 칸느 영화제 출품작이라고 해서 특별히 관심을 갖고 보았죠.』
『그 영화가 마음에 듭니까?』
『네.』
『실은 그 고분의 원작을 내가 썼습니다.』
『아, 그러세요?』
여자는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 같았다.
2
그들이 도착한 동굴은 야트막한 야산에 북쪽으로 동굴입구를 두고 있었다. 외부사람들에게 동굴이 있다는 것이 근래에 알려졌다 뿐이지, 인근 마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거기에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동굴에서 나온 짐승의 뼈와 석기와 토기 조각이 뭐 그리 대수로울 것이냐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다.
하 명진이 언덕에 도착하여 동굴에 들어가 보니까 유물은 박물관 사람들이 ㅗ두 거두어간 뒤라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하 명진은 섭섭해 하지 않았다.
『이 혈거유적이야말로 엣 선조들의 대저택이지요.』
하 명진은 동굴 내부의 불을 땐 꺼뭇꺼뭇한 자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들은 밖으로 나와 멀리 하늘과 마주 닿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제주도의 옛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하 명진이 세 여자에게 물었다.
『탐라를 말씀하는 건가요?』
운전하던 여자가 물었다.
『그 외에 또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영주라는 이름이에요. 옛날에 발해에 삼신산이 있었습니다. 봉래 방장 영주 세 곳을 합하여 삼신산이라고 하였는데, 봉래는 육지에 붙어있고, 봉래에서 바라보이는 바다에 방장과 영주 두 섬이 있었습니다. 방장에서 마고할머니가 제관이 되어 굿을 하였는데, 신이 내린 젊은 여인들을 다른 곳으로 시집을 보냈습니다. 이들을 삼신이라고 하였어요. 그리고 그들이 시집을 간 섬을 영주의 이름을 따서 영주라고 하였습니다. 제주도에는 탐라라는 이름 이외에도 영주라는 이름이 또 있습니다.』
『제주에는 탐라 이외에 영주라는 이름이 또 있군요.』
『그렇습니다. 마고할머니가 보낸 삼신들이 매년 이 고장에 찾아오지요.』
하 명진은 바닷바람 냄새를 맡았다.
『네?』
여자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자, 바람의 냄새를 맡아 보세요. 삼신의 향기가 나지요.』
여자들은 그가 시키는 대로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였다.
『음력 2월이 되면 삼신의 냄새를 확실히 맡을 수 있어요. 그래서 나는 2월이 오면 영주에 옵니다. 삼신의 냄새를 맡으려고요.』
『삼신의 냄새란 무슨 뜻인가요?』
운전하던 여자가 물었다.
『영등바람의 냄새라는 뜻이지요.』
하 명진은 영등바람에 대하여 이 여자들에게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설명을 하기로 하였다.
『영주의 어머니 나라를 마고지나라고 합니다. 마고의 나라라는 뜻이지요. 지금으로부터 1만4천년 전에 마고는 2월에 방장산에서 굿을 하여 영등바람을 일으킵니다. 지금도 무당이 굿을 할 때 바람을 일으키는 시늉을 해요. 복을 쓸어 담는다는 시늉이 바로 영등바람을 일으키는 동작이에요. 마고할머니가 영등바람을 일으키면, 영주에서는 도당을 짓고 도당에서 도당굿을 하여 영등바람을 맞아들입니다. 도당이란 부도당집符都堂集이라는 뜻이에요. 부도는 칠성님을 모신 서울이라는 뜻이에요. 당집은 사람들이 모이는 집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서울에 칠성님을 모시는 본당집本堂集이 있고, 영주에는 본당집의 말사末寺에 해당하는 도당집이 있었던 것이지요. 집集자는 집가家자와 같은 뜻으로 쓰는 문자예요. 이러한 유습이 우리 나라의 바닷가에는 그대로 전승이 되어 오고 있습니다.』
『영등바람에 그러한 뜻이 있다니 놀랍군요.』
옆자리에 탔던 여자가 말했다.
『탐라란 무슨 뜻인가요?』
이번엔 앞자리에 탔던 여자가 물었다.
『탐라란 탐상성의 나라라는 뜻이지요. 탐랑성은 북두칠성의 첫째 별이기도 하고, 북극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북극성과 북두칠성의 나라라는 의미가 있어요.』
-우리 선조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하는 표정으로 세 여자가 감탄했다.
『우리 나라에는 별들과 관련이 되는 지명이 많습니다. 이는 우리 선조가 아득한 옛날에 천문을 처음 시작했다는 뜻이 되지요. 하늘에서 북극성이나 직녀성이나 북두칠성이나 삼태성은 하늘의 중심을 잡아주는 별들인데, 이러한 이름을 지명에 썼다면 그들 별의 주인이 아니고서는 그 이름을 쓸 수 없는 일이지요.』
여자들은 하 명진이 하는 말이 신기한 말들 뿐이라 요새 말로 뿅 가고 말았다.
그들은 동굴을 떠나 차를 세워둔 곳으로 왔다. 이제 시내로 들어가면 헤어져야 하였다.
『선생님은 어디로 가시겠어요?』
운전하는 여자가 물었다.
『제주시내에서 내려주세요.』
『그다음엔 어디로 가시게요?』
『제주호텔에서 샤워나 하고 글이나 쓸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제주호텔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제수시내로 들어왔다. 차가 제주호텔 앞에서 멎었다. 하 명진은 차에서 내려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늘 고마웠습니다.』
『선생님, 잠깐, 명함이라도 한 장 주세요. 혹시 전화를 걸 일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요.』
운전석에 앉은 여자가 말했다.
하 명진은 그 여자가 명함을 달라고 하므로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어 주었다. 그리고는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이 일이 3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는 그때의 인연으로 영등바람을 맞으려고 제주도에 내려오면 이 여자-영주를 찾았다.
3
하 명진은 제주호텔에 도착하자 우선 영주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에 있어요?』
『제주호텔』
『내가 그리로 가는 것이 낫겠죠?』
『아무렴』
하 명진은 욕조에 들어가 습관대로 몸을 씻었다. 물기를 닦고 옷을 입고 나자 벌써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문을 열어 영주를 맞아들였다.
『이번엔 어디에서 삼신의 냄새를 찾아다녔어요?』
『한강』
『한강에도 삼신의 냄새가 있던가요?』
『있고말고요.』
그는 강화도에서 시작하여 김포를 거쳐 서울로 들어가는 동안 한강 가에 있는당집에서 도당굿을 하여 영등마지를 하면 영등포의 당산堂山에서 끝이 난다고 하였다. 영등포를 한자로 永登浦라고 쓰는데, 영등마지에 맞추어 보면 瀛登浦로 써야 맞는다. 영등바람이란 은하수 위에 부는 바람이다. 한강이 은하수이므로 한강위에 부는 바람이 영등바람이 되는 것이다. 삼신산이 천문에서 천추 좌추 우추를 의미하는 산이라 천추 좌추 우추에서 중력의 바람을 일으키듯이 삼신산의 봉래 방장 영주에서 영등바람을 일으킨다. 이 바람이 방장에서 발생하므로 량풍良風이라고 하였다.
영주는 하 명진에게 감겨왔다. 그리고 영등바람의 냄새를 맡겠다고 그의 몸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이 내게 이렇게 나오면 영감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하 명진은 영주를 가볍게 안아주면서 말했다.
『나는 바람이에요. 영등바람.』
그녀가 후후 웃었다.
하 명진은 그녀가 그를 초대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날 영주의 집에 가게 되었는데 그나 영주나 취해 있었다. 그는 제주호텔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일어서자,
『가지 말아요.』
하고 영주가 소리쳤다. 그때 그녀가 심히 쓸쓸해 보였고, 무엇인가 말을 하지 않으면 미쳐나갈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서 그녀의 곁에 주저앉고 말았다.
『고독이라든가 삶의 즐거움이라는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나는 그런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
『혼자서 긴긴 밤을 잠 못 이루어 보기도 하고요?』
『없었어.』
『한 여자를 미칠 듯이 사랑해 본 적도 없고?』
『그래요.』
『맙소사, 이런 맨송맨송한 사람이…』
영주가 하 명진을 두들겨 패겠다고 조그마한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다. 하 명진은 늘 그가 찾아다니는 영등바람의 실체에 대하여 영주에게 설명해 줄 수 없었다. 그것은 설명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해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아무도 그런 것을 하 명진처럼 생각하지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므로 설명도 이해도 불가능한 것이다.
『내게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지고 볶는 이야기는 별 흥미가 없어요. 그래서 그래요.』
『당신은 바람을 쫓아다니는 사내예요. 당신이 쫓아다니는 바람이 무엇인가요? 그건 모든 사내들이 꿈꾸는 바람기예요. 다른 여자에게서 찾고 싶어 하는 바람기라는 말이에요.』
『나를 후안무치한 바람둥이로 몰아가지 말아요. 나는 한번도 결혼을 한 적도 한 여자의 가슴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리게 한 적이 없어요.』
『그것이 문제예요. 당신이 보지 못하는 그 바람기가 문제란 말이에요. 그것은 결혼하고 아무 상관이 없고, 이 여자에게서 다른 여자에게로 옮아가는 바람기와도 아무 상관이 없어요. 당신이 늘 갈증을 느끼며 살아가게 하는 갈증이 문제라는 말이에요. 당신이 일년에 한 두 번 내 앞에 훌쩍 나타나는 것은 당신에게 그런 기질이 있기 때문이에요. 』
그녀는 하 명진의 가슴 속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선 늘 방장산에서 불어와 영주에 상륙하는 그 바람에 실려 오는 삼신을 찾고 싶은 것이었다. 그는 삼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 가고 싶었다.
『나는 당신의 바람기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당신의 바람기를 잠재우게 할 수 있는 비법을 하나 생각해 냈어요.』
『비법?』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내 바람기를 잠재워서 어쩌겠다는 것이요?』
『당신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신을 생각하면 그렇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게 바람기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만약 내게 그러한 바람기가 있다고 해도 아무에게나 속박을 받고 싶지 않아요.』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러한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요. 나는 당신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에요.』
이 여자는 당당하게 나왔다.
『인연이 있다고?』
『제 이름이 영주지요?』
『그래요. 영주지.』
『나는 당신을 떠나보내고 나서 당신을 내 곁에 잡아 둘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을 만나보았어요. 제게 비법을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당신을 찾아서 뒤 쫓아가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당신이 늘 다니는 행로를 따라서 당신이 갈만한 데를 찾아가 보았어요. 내가 예상한 대로 당신은 내가 예상한 곳에 가 있더군요. 당신은 기이하게도 나무오리를 찾아다니고 있었어요. 당신은 목압木鴨이라는 마을에 갔었지요?』
목압이란 나무오리라는 뜻이다. 솟대 위에 앉은 나무오리가 목압이다.
『갔었어요.』
『오리를 깎아 장대 위에 세운 솟대가 서있는 마을에도 갔었지요?』
『갔었어요.』
『나는 당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그 후엔 더 당신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았어요. 이 곳으로 내려왔지요. 당신이 허락을 한다면 나는 이곳을 옛날의 영주로 만들겠어요. 그래서 당신의 의사를 묻는 거예요.』
하 명진은 영주가 하는 말을 듣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단 한마디의 언질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주가 그의 생각을 읽어냈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무래도 이 여자의 이름에 내 생각을 읽는 능력이 있을지 모른다.
하 명진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땅의 이름이 영주이고, 사람의 이름이 영주이니 지地와 인人이 합이 들었으므로 어찌 천天이 감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지와 인이 합이 들고 하늘이 감응하니 이를 천지인天地人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 명진은 문득 그러한 생각이 들자 영주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좋아요. 해 보아요. 당신이 내가 찾는 것을 복원해 놓는다면 당신의 의사에 따르겠어요.』
그날 영주는 자기가 일본 사람과 살고 있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는 일년에 두 세 번 제주도에 나와서 며칠이고 묵었다가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나쁘게 말해서 영주는 그 일본 사람의 현지처였다. 하 명진은 영주가 말하기 전부터 어렴풋하게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어딘가 모르게 일본인의 정취가 풍기는 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그 사람 이외에 아무도 영주를 돌보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자기의 처지를 말하면서도 하 명진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두려워하거나 겁을 먹지 않았다. 하명지는 영주가 그렇게 나오는 것이 안심이 되었다. 그녀가 그렇게 나오면 그 자신이 초연해 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해에 오시면 제가 약속한 것을 만들어 놓도록 하겠어요.
헤어지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
『좋아요. 당신이 연락을 주면 그대 올게.』
하 명진은 그 말을 남기고 영등바람이 상륙한 흔적을 찾아서 제주도를 떠났다.
4
영주로부터 자기가 꾸며놓겠다고 약속한 것을 다 꾸며 놓았다는 연락이 왔다.
그녀는 그 말에 덧붙여 하 명진이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하 명진을 돌보아주고 있다는 일본사람이었다. 그가 하 명진을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현지처의 남편이 그를 만나보고 싶어 한다니 뜻밖의 일이었다. 그는 무엇인가 가슴에 짚이는 것이 이어서 만나보기로 결심하였다.
하 명진이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벌써 영주가 나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예요! 여기!』
하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는 까만 원피스에 하얀 끝동을 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방을 갓 구워낸 듯한 건강한 살색에 두렷한 대비를 주며 잘 어울렸다. 가슴엔 굿을 할 때 제단에 올리는 시루에 꽂는 하얀 가지 꽃을 한 송이 달고 있었다.
하 명진의 시선은 그 가지 꽃에 멎었다. 그녀가 아니 하던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무슨 준비를 끝냈는지는 가지 꽃 한 송이로 증명이 되었다.
『당신의 행동이 좀 자유롭지 못할 거예요.』
그녀가 정감이 가는 말로 경고를 주었다.
『일본사람이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요?』
『무엇인가 그런 의도가 있는 것 같아요.』
영주는 확실한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들은 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타고 오라 골프장을 향하여 달렸다. 오라 골프장 주차장에 차를 대고 클럽하우스로 들어가니까 웨이터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식당으로 안내했다. 육지에서 온 골퍼들이 두 팀 창가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클럽하우스 가까운 필드에서도 여러 팀이 공을 날리고 있었다.
『저 사람이에요.』
영주가 한 쪽 구석진 자리에 앉아 이는 한 사람을 가리켰다. 나이 60여 세 되어 보이는 사람이 창밖을 보며 앉아 있다가 두 사람을 맞았다. 그에게서 의례적인 감정 이외에 다른 감정은 읽어지지 않았다.
『먼 길을 오시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그는 뜻밖에도 귀화인이었다. 모국어로 말하고 있었다.
『제 선친 때에 일본으로 귀화한 재일동포 2세입니다. 원래 한漢씨 성을 가지고 있는데, 한의 발음이 소가이므로 소가로 바꾸었습니다. 이름은 요시다(吉田)입니다. 한국식으로 해석하자면 소씨 집안의 좋은 밭이라는 뜻이지요.』
소가씨는 자신의 이름을 특이하게 풀이하였다.
『저는 하 명진河明辰이라고 합니다. 제 부친이 무슨 뜻으로 제 이름을 이렇게 지었는지 그 깊은 뜻을 알 수 없지만, 제 나름대로 해석을 해 보면, ㅏ는 은하수, 명은 밝히다, 진은 북극성이므로 은하수가 밝혀주는 북극성이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좋은 이름입니다. 앉으세요.』
그가 정중하게 말했다.
하 명진은 소가씨와 마주 앉았다. 소가씨는 나이가 하 명진보다 20여 년이나 연상으로 보였다.
『제 은사가 제게 가르쳐 주시기를 하河자와 한漢자는 은하수를 의미하는 문자라고 합니다. 의미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소가 선생님과 저는 같은 의미를 가진 성씨를 가지ㅗ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성씨에 나타나는 동질성의 문제로군요.』
『그렇습니다.』
소가씨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고 나서 말을 바꾸었다.
『저는 언젠가 하 선생을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웨이터가 차림표를 주었다.
『무엇을 드시겠어요? 식사를 드시는 게 좋을 거예요.』
영주가 하 명진에게 물었다.
『식사는 하지 않으렵니다. 차나 한 잔 마시면 되겠습니다.』
여기가 골프장이므로 흔한 커피를 주문했다.
『그러면 녹차 한 잔하고 커피 두 잔을 주세요.』
영주가 주문했다.
웨이터가 차를 가져왔다.
창 넘어 손질이 잘된 필드가 펼쳐져 있고, 그린에 그린의 숫자를 표시한 깃발이 꽂혀 펄럭거렸다. 백색의 T셔츠를 입은 사람이 그린을 밟고 서서 신중하게 홀에 백구를 굴려 넣었다. 다른 한쪽에선 몇 사람의 골퍼가 필드의 중간을 향해 걸어가고, 인코스의 출발점에서 나이 샷 고함이 들려왔다. 식당을 나서면, 통로를 따라 조사鳥舍가 있고, 조사 안에서 푸른 공작새가 이상하고 음울한 목소리로 울어대고 있다.
『맥주를 마시든가, 칵테일을 마시든가 해야 하겠어요.』
하 명진은 갑작스럽게 갈증을 느끼며 말했다.
『아, 이 사람은 술을 하지 못합니다. 위 수술을 해야 하기 때문에… 두 번째인데, 이번엔 아마 가망이 없을지 모릅니다. 위암이래요.』
소가씨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하 명진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머뭇했다. 소가씨가 마르고 기력이 떨어져 보이는 것은 그가 위암을 앓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영주를 만나는 순간부터 영주를 좋아했습니다. 숙명적이라 할까, 첫눈에 사랑을 느꼈다는 표현이 맞겠지요. 우리가 만나게 된 것은 서울의 어느 연회석에서였습니다. 그때 영주는 배우 지망생이었고, 한두 작품에 병아리 배우로 출연한 경력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큼직한 실력자들과 상담을 벌이고 있었는데, 연회석에 영주가 초대되어 제 곁에 앉게 되었습니다. 주최 측에서 상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미인계를 쓴 셈이지요. 그러니 그 자리에 굉장한 미인이 왔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연회 중에 자주 영주를 바라보았습니다. 영주는 아름답고 얌전하고 말수가 별로 없었던 갓 피어난 꽃과 같은 여자였습니다. 나를 만난 후로 많이 변했지만 그때는 그러했습니다. 저는 영주의 아름다운 눈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영주의 눈빛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더군요. 이 여자와 함께 있으면, 내게 길운이 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디다. 그것은 일종의 예지와 같은 것이었어요. 이 여자를 그냥 보내서는 아니 되겠다… 다리를 부러뜨리든가 아니면 날개를 못 쓰게 만들어야 한다… 이 여자를 잡아라. 그래야만 길운이 트일 것이다. 내 목소리가 외쳐대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제게는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부적과 같아 보였습니다. 그때 은은하게 고향의 봄이라는 곡이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웃고 말을 나누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날의 일을 성사시켜야 하는 책임자였습니다. 영주는 이 사람을 잘 접대해야 할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상냥하게 대ㅐ 주었어요. 저는 물었습니다. 당신을 만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요. 저쪽 회사의 상담자가 제게 가까이 있었습니다. 영주는 그냥 웃기만 하였습니다. 영주와 헤어진 후에 영주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소가씨는 젊은 한 여자에게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하여 안쓰러움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는 일본으로 가기 전에 영주에게 연락하여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영주는 거부하지 않고 그를 만나주었다.
『저는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아직 내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는 여인을 만난 적이 없다. 내 어두우 눈에 당신은 길상吉祥의 여신으로 보인다. 때문에 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영주는 내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요. 그러나 내가 만나고 싶다고 하면 만나 주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영주는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은 만나지 않는 듯했어요. 내가 받는 느낌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녀를 만나면서 내게는 과분한 행운이 따라왔습니다. 그것은 마치 복권을 한 장 사서 대박이 터지는 것과 같은 행운이었습니다. 나는 내 수입 명세서를 영주에게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무엇인가 크게 보답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옛날에 제 조상이 살았던 영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 영주를 여신으로 모실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로 하였습니다.』
하 명진이 보니 소가라는 사람이 대단히 진지한 사람이었다. 그는 감동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인 듯했다.
『제가 죽으면 이 고장에 돌아와서 제 몸을 태운 재를 묻을 생각입니다. 나는 영주 사람이에요. 나는 일본 사람으로도 제주 사람으로도 남고 싶지 않아요. 영주 사람으로만 남을 생각입니다. 내가 영주라는 여인을 통하여 알게 된 하 선생은 내가 찾아가고자 하는 영주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많은 생각을 해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는 영주에 대한 하 선생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하 명진은 전혀 이질적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의견의 일치를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영주씨에 대한 나의 생각을 물으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소가선생에 찾아가고 싶어 하는 영주라는 나라에 대하여 나의 생각을 물으시는 것입니까?』
『영주 그 나라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내가 이제부터 가고자 하는 나라입니다. 나의 생각과 하 선생의 생각이 일치하거나, 내 생각보다 하 선생의 생각이 위에 있다면 하 선생의 생각을 나의 생각으로 수용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소가선생을 만나기 전에 제가 늘 고민하고 생각해왔던 것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로서도 언젠가는 이러한 숙제를 해결해야 할 상대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인 것 같습니다.』
웨이터가 맥주와 마른 아주를 갖다 놓았다. 영주가 맥주를 잔에 딸아 주었다. 하 명진은 한 목음 마시고 나서 잔을 내려놓았다.
『먼저 소가선생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영주라는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주 무가巫歌 본本풀이에 “할로漢拏 영주瀛洲 삼신산三神山 상상고고上上高高리 여섯 어깨에서 3월 열사흘 날 유시酉時 아홉 성제兄弟 솟아나니”라는 사설이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아주 중요시합니다. 할로는 한라산이고, 영주는 봉래 방장 영주 세 봉우리로 구성된 삼신산의 한 부분인 영주입니다. 상상고리는 논ㅍ고 높은 꼭대기라는 뜻이지요. 여섯 어깨는 여섯 봉우리라는 뜻입니다. 여섯 봉우리는 남녀 제관 각각 여섯 명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들 삼남 삼녀 사이에서 아홉 형제가 태어납니다. 을乙丑년 3월은 땅이 열리는 때 3월이라는 뜻이고요. 열사흘 날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 선생이 질문하신 영주는 삼신산의 영주를 의미합니다. 오늘 저는 하 선생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청한 것이니 제 생각은 이 정도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좀더 자세한 것은 하 선생이 전문가로서의 생각을 말씀해 주십시오.』
소가씨는 그가 해야 할 다음 해석을 하 명진에게 넘겼다.
『알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제 나름대로 해석한 것을 섞어서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문자학과 천문학과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지요. 영주에 대한 해석이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겠군요.』
소가씨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하 명진을 바라보았다.
『먼저 한라산에 대한 해석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라산의 한자는 역시 은하수를 의미합니다. 은하수 옆에 라拏자를 놓았는데, 라자는 문자학적으로 보면 ‘여자女子의又 손手’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은하수를 여자가 만들었다는 듯이지요. 우리의 상고사를 살펴 볼 때, 여자가 은하수라는 이름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14000년 전에 살았던 마고 이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마고가 은하수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라산은 마고가 이름을 지은 은하수와 관련이 있는 산입니다. 마고는 은하수라는 이름을 짓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섬의 이름을 영주라고 하였습니다. 곧 삼신산의 한 부분이라는 뜻이지요. 이 산 꼭대기에서 남자 세 분과 여자 세 분이 제관이 되어 제사를 지냅니다. 여자 세 분은 마고가 영주로 시집 보낸 삼신三神이고, 남자 세 분은 이 고장에 뿌리를 내린 고高씨와 양梁씨와 부夫씨의 세 사람입니다. 이 분들이 제관이 되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우리의 고유한 제사 풍습입니다. 강화도의 곶창굿에도 보면 제관이 남자 여자 합하여 모두 여섯 분입니다. 마고가 보낸 삼신이 삼신산에서 제물을 가지고 와서 그 고장 선주민의 대표와 굿을 하게 되므로 제관이 여섯 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강화도도 영주로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영주에 정착한 여섯 분 사이에서 아홉 형제가 태어납니다. 이는 세 쌍의 부부가 각각 삼형제를 출산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옛날에 우리의 조상은 1을 현玄이라고 하고, 3을 방方이라고 하고, 9를 주州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27을 부部라고 하고, 81을 가家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종교에 선교仙敎가 있고, 이 선교를 현묘지도玄妙之道하고 하였습니다. 현묘지도란 1이라는 숫자가 3, 7, 9, 27, 81로 변화해 가는 이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현이 1이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교는 현묘지도를 가르치는 고도의 학술단체였던 것입니다. 또한 현묘지도를 풍류風流라고 하였는데, 풍류란 풍이風夷의 문물文物이라는 뜻입니다. 풍이가 현묘지도를 숭상하고 전승했다는 말인데, 제주 무가 본풀이에서 현묘지도가 형성되는 과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곧 마고 즉 1이 삼신 즉 3을 영주에 보내어 9 즉 부를 낳는 것입니다.
이때가 땅이 열리는 을축 년이고, 또한 열사흘 날입니다. 열사흘은 천도가 운행하는 수자를 나타내는 말로 볼 수 있는데, 1, 13을 의미하는 말로, 1이 극極하여 3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바로 인류 최고의 경전인 <천부경天符經>의 주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일석삼극一析三極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마고가 영주에 삼신을 시집보내어 을축 년 3월 열사흘 날 알홉 아들을 낳는 것은 <천부경>에서 말하는 우주의 창조 이치에 의하여 태어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하는 말이 이해가 갑니까?』
『이해가 갑니다.』
소가씨가 하 명진이 하는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놀라운 공명이 아닐 수 없었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사이클이 맞지 않는다면 이해가 불가능한 말이었던 것이다.
『하 선생은 늘 영등 바람의 실체를 찾아다니셨지 않아요? 지금 하신 말씀이 영등 바람과 어떤 관계가 있나요?』
이번엔 영주가 물었다.
『깊은 관계가 있어요. 영등 바람은 음력 2월에 삼신산에서 불어와요. 말하자면 영등 바람은 삼신 바람이에요. 삼신 바람이 영주에 불어오므로 영등 바람이라고 한 것이에요. 2월에 영등 바람이 불어오면, 3월에 곡식의 눈이 트지요. 곡식의 눈이 트게 하려고 삼신산에서 영등 바람이 불어 오는 것이에요. 영등 바람은 삼신산의 한 봉우리인 방장산에서 발생해요. 지금으로부터 14000년 전에 방장산에서 하늘의 삼신인 북두칠성과 해와 달에게 제사지내고 나면 영등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요. 아마 옛날 사람들은 바람의 신인 풍백風伯이 이 바람을 불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하 선생, 하 선생은 삼신산을 어디로 보십니까?』
소가씨가 궁금해 하였다.
『저는 발해만에 있는 묘도군도廟島群島로 보고 있습니다. 묘도군도는 봉래의 북쪽에 위치한 섬들입니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 보면 삼신산이 발해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발해에서 삼신산으로 볼 수 있는 곳은 묘도군도 뿐입니다.』
『그렇다면 묘도군도에 있는 방장산에서 영등 바람이 불어온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아까 삼신이 영주에 시집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삼신이 묘도군도에서 영주로 시집온다는 말로 해석을 해도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고가 삼신을 시집보낸 마고의 나라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마고의 나라는 인류 최초로 마고가 세운 나라입니다. 고려사 충혜왕 편에는 마고의 나라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마고의 나라를 마고지나麻姑之那라고 하였습니다. 마고는 인류 최초의 제왕이자 무당입니다. 또한 농사를 보급하고 혼인을 장려하였습니다. 영주라는 이름이 우리 국토에 남아 있다는 것은 마고지나가 있었다는 반증이 됩니다. 그런데 이 마고지나를 알지 못하여 고려사를 기술한 사람들은 벽량국碧浪國이다, 일본국이다 하고 잘못 기록하였습니다. 바다를 바ㅇ,바, 바랑, 바다로 풀고, 제주 방언에 바다를 바랑이라고 하므로, 벽랑을 바랑의 변음으로 보는 학자가 있습니다. 이러한 풀이를 설득력이 있는 풀이로 볼 수 있으나, 벽랑국이라는 문자에서 키워드가 되는 문자는 랑浪이라는 문자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면 좀더 정확한 풀이를 할 수 있습니다. 방장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량풍良風이라고 하는데, 벽량국은 바다에 둘러싸인 방장산에서 량풍이 풀어오는 나라인 마고지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벽량국은 마고지나로 풀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벽량국의 존재가 확인 되었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숙제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사를 단군왕검이 세운 조선에서부터 쓰는 것이 아니라 벽량국과 영주의 역사를 머리로 하여 다시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군조선이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마고지나 이래로 1만년 후의 일입니다.』
『내가 영주씨를 삼신으로 모시겠다고 투자한 것이 헛된 일이 아니었군요. 영주씨가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실 무제한의 지원을 해 온 것은 사실이에요.』
소가씨가 말했다.
그가 얼마나 많은 돈을 영주에게 투자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 명진이 보니까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은 없었다. 다만 이 여자가 남보다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다고 추측했을 뿐이다.
『그런 얘기는 하지 마세요.』
영주가 말했다.
『이번에 내가 제주도에 온 것은 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소망과 당신의 땅을 거닐어보고 싶다는 염원 때문이었소. 그리고 당신이 가끔 내게 전해 준 하 선생에 대한 정보가 내게 하 선생을 만나보고 싶게 한 것도 사실이었소. 하 선생, 내가 보기에 순수한 마음으로 영주씨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하 선생 한 사람 뿐이요. 만일 내가 죽게 된다면 내 뼈 가루가 영주에 묻힐 수 있게 하 선생이 도와주시오. 하 선생이 곁에 있어 준다면 하 선생의 뜻을 세상에 펼칠 수 있을 것이요.』
소가씨가 하 명진에게 손을 내어밀었다. 그의 말씨, 그의 표정, 그리고 단아한 행동이 그가 영주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우러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이 우리의 땅으로 나를 안내해 주겠소? 아니, 당신의 땅으로 말이오, 나는 내 시선이 닿는 곳을 모두 거닐어보고 싶구려.』
『무리를 하셔도 되겠어요?』
영주가 걱정했다.
『괜찮아. 마음이 가볍군.』
그들은 클럽하우스를 나와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10여 호 집들이 들어서 있는 마을에서 내렸다. 잡목 속에 듬성듬성 보이는 흙무덤이 있는 곳으로 그들은 들어섰다.
『1972년 아스카의 히쿠노마에서 발굴이 되다가 발굴이 중단된 다타마스총塚과 1985년에 발굴되다가 역시 발굴이 중단된 나라의 후지노키고분이 있지요.』
소가씨가 말을 꺼냈다.
『한국에서도 신문과 방송에서 굉장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다카마스총의 사녀도를 한국에서는 고구려 벽화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당나라 벽화라고 했지요.』
『소가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한 논쟁은 무용한 것이에요.』
『소가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발굴 중단에는 석연 않은 점이 있어요.』
『일본적인 것이 나올 가망이 없다는 것을 발굴중단이 증명하고 있는 셈이지요. 규슈에 가면 가야의 고분과 출토품이 있어요. 고대로 올라가면 한국과 일본의 구분이 거의 없어요. 이 땅의 유민이 그곳으로 건너간 것이거든요.』
그들은 소나무가 떨기나무 숲에 몸체를 우뚝 드러내고 서있는 곳에 와서 걸음을 멈추었다. 소나무의 향내가 강렬했다. 그들이 직선거리로 걸어간 땅은 거기가 끝이었다.
『여기에 불쑥 솟은 지면을 보아요. 다른 곳과 다르다는 느낌이 들지요? 』
소가씨가 하 명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세히 보니 잡초에 묻힌 그곳이 혹시 폐분廢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폐분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는 이 땅을 사면서부터 알고 있었어요.』
『만약 이 폐분이 가야의 고분과 연결이 된다면 규슈의 가야 고분과 연결이 되겠지요.』
『그런 생각이 듭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생각이 드신다면 발굴을 해 보아야 하겠군요.』
소가씨가 관심을 보였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대로 놓아 두세요. 고인이 명복을 버릴 때가 아직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문제는 영주씨와 상의해 보도록 하세요.』
『저는 무덤에 손을 대고 싶지 않습니다.』
『하 선생의 뜻이 그러하다면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 나왔다. 차가 햇볕을 받으며 서있었다.
『나는 내일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너무 급작스럽게 떠나시는 군요.』
『수술 스케줄이 잡혀 있어서요.』
하 명진은 가슴이 무거웠다. 하기야 누구나 수술을 받을 수 있고, 언젠가는 죽게 되겠지만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작별을 해야 하겠군요.』
『시내까지 함께 가십시다.』
『아닙니다. 여기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 가겠습니다.』
소가씨가 차에 올랐다. 영주가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사라지자 하 명진은 클럽 하우스로 택시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한동안을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으니 택시가 올라와서 타고 시내로 들어왔다. 숙소 앞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상의를 벗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쓸쓸하고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잠자리에 들었다가는 날밤을 새우게 될 것 같아서 몸을 씻고 밖으로 나왔다. 술에 흠벅 취하고 싶었다. 바닷물이 방파제에 장난을 걸어오고 있었다. 포장을 둘러친 횟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검은 몸을 들어낸 방파제가 바닷가의 정취에 몸을 내어 맡기고 있었다. 하 명진은 군대막사처럼 정연하게 늘어선 포장집을 사열하다가 중간의 한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의자에 앉아 해물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을 시켰다. 그가 첫 잔을 자작으로 따르고 있을 때,
『선생님은 바다가 두렵지 않습니까?』
옆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하 명진은 옆 사람을 바라보았다. 마음과 몸이 흐트러져 보이는 사람이었다. 나이가 40세 정도로 보였다.
『두렵지요. 바다 끝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공포심을 유발합니다.』
『선생은 육지에서 오셨군.』
『선생도?』
『선생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나는 1만년 전에 헤어진 한 여자를 찾아서 이 곳에 왔습니다.』
하 명진에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하 명진이 하는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이 시대 최고의 거짓말을 하시는 군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그 여자는 지금 환생하여 살아 있어요.』
상대방 남자는 술잔을 떨어뜨렸다.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하 명진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를 어쩌지… 이를 어쩌지… 』
그는 몸이 뒤틀리는 듯했다. 얼굴이 창백해져서 일어났다. 하 명진은 안절부절 하는 사내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
『앉으시오.』
사내는 하 명진의 위압에 눌려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선생 같은 분이 두렵습니다. 자신의 전생을 본다는 그런 분 말입니다. 그런 말은 믿지 않을 수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나는 이런데 선생 같은 분은 그런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거든요. 제게 그런 분들은 인간의 탈을 쓴 귀신처럼 보입니다.』
『세상을 편하게 사세요. 두려워하지 말고요.』
하 명진은 사내에게 술잔을 권했다. 사내는 술잔을 받아 마셨다. 밤은 기울어지고 별들도 기울어졌다.
5
다음 날 소가씨가 일본으로 떠나고, 하 명진은 학교에서 고고학을 강의하는 임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 웬 일인가? 전화를 다 걸고.』
한동안 종무소식이던 하 명진의 전화를 받고 임 교수가 반가워했다.
『일거리라니?』
『폐분을 하나 발견했어. 그 고장에 있어서는 아니 되는 폐분이야.』
『폐분의 위치가 어디인데?』
임 교수는 하 명진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의심하지 않았다.
『제주도지. 아니 영주야.』
『이거 기연이군 그래. 그렇지 않아도 제주도의 최남단인 마라도에서 고인돌유적을 대량으로 발견한 이래 뭐 새로운 것이 없나 하고 궁금해 하던 차란 말이야. 만일 폐분이 진짜라면 이거 왔다가 아닌가?』
『그만 좋아 해. 내가 기회가 되면 자네를 부를 께. 어치피 이 일을 해 줄 사람은 그대일 테니까.』
『그냥 영주에 머물러 있을 셈인가?』
『아니, 은하수(한강) 주변을 답사하려고 그래. 그리고 은하수라는 이름을 지었으리라고 추리가 되는 직녀(마고)의 흔적을 찾을 생각이야. 왜 엣날 사람들은 마고라는 지명이나 노고老姑라는 지명을 남겼을까? 영등바람(마고바람)은 어디를 통해서 들어오고 어디에 사서 끝이 나는 것일까? 강화도의 노고산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도당굿을 하는 마을과 마을을 돌아 영등포에 상륙하는 것은 아닐까? 서울에는 왜 노고산이 있고, 노고산에서는 무슨 일을 했을까? 이런 숙제를 다시 한 번 스크린 해 보려는 것이야.』
『실현이 불가능한 거창한 꿈을 꾸고 있군 그래.』
『언제 떠나?』
『내일』
하 명진은 서울을 떠났다. 그리고 한강 일대를 뒤지고 다녔다. 그는 영주에게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다. 소가씨가 영주를 떠난 지 6개 월이 지난 후에 영주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나고 싶으니 영주로 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영주는 예전처럼 마중을 나왔다. 하 명진은 영주를 보면서 그들 두 사람의 관계가 우정인지 남녀간의 사랑인지 명확하게 구분이 안 되는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소가씨가 떠나고 나서 수술결과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묻지 않아서인지 영주도 그 소식을 알려오지 않았다. 그가 영주에 왔으니 소가씨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소가씨에게선 무슨 연락이 없었소?』
『소가씨가 회복하기를 비나요?』
영주가 하 명진의 의중을 떠보려는 것 같았다.
『나는 흉악한 인간이 아니요.』
『회복되기를 비는 군요.』
『그렇소. 결과가 좋으니까 내게 연락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요?』
『그러나 소가씨는 돌아가셨어요.』
하 명진은 골프장 식당에서 소가씨를 대면했을 때, 그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모습이 머리에 떠올라 숙연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대 왜 연락을 하지 않았소?』
『당신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였어요.』
『당신의 마음이 편하고자 인간성이 훌륭한 소가씨를 배신한 것 같소.』
『당신은 소가씨에게 호감을 갖고 있군요.』
『그렇소.』
영주는 한동안 하 명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진심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자 차의 속도를 높였다.
『소가씨는 분골粉骨로 이 곳에 돌아와서 당신이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과 두 사람만의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해요.』
하 명진은 영주의 말을 듣자 안심이 되었다. 하늘에 뜬 직녀성이 세 별이듯 그들도 영주를 가운데에 두고 영주를 도와주는 두 별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주의 집에 도착하니 집으로 들어가는 진입로 입구에 작은 동산이 만들어졌고, 그 위에 세 마리의 오리가 앉은 솟대가 서있었다. 영등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오리들이었다. 오리솟대를 세웠다는 것은 이 곳에 삼신이 정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리는 농경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새이다. 태초에 삼신이 종자를 가지고 와서 이곳에 정착하였다는 뜻이다.
『이제 당신의 모습이 내게 제대로 보이는군.』
하 명진이 중얼거렸다.
영주는 집안으로 들어가 차를 마당에 세웠다. 당집을 하나 세웠는데, 하 명진을 그리로 데리고 갔다. 위패를 세울 수 있도록 단을 만들었는데, 단 위에 백자 항아리가 하나 놓여 있었다.
하 명진은 항아리 앞에 놓인 향로에 향을 태웠다. 그리고 목례를 보내어 그에게 인사하였다.
『소가선생! 혼백이 이 곳에 와서 게신 겁니까?』
그는 물어 보았다.
소가씨는 아무 말도 들려주지 않았다. 하기야 그가 여기에서 얼쩡거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골프장에서 하 명진을 만나 영주와의 사이를 정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 곳에서 주책을 부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