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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바위취
강 명 희
젊은 연예인들이 떼로 나와 중구난방으로 떠들며 얘기하다가 와르르 웃는다. 분명 한국말을 하고 있지만 무슨 말인지 잘 들어오지 않는다. 왜 저 대목에서 웃는지도 모르겠다. 순옥은 채널을 돌린다. 다른 방송에서는 목의 핏줄이 다 드러날 정도로 악을 쓰며 노래를 한다. 언제부터인지 모든 노래와 춤이 경연이다. 순옥은 경연에서 밀려난 사람 보기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아 텔레비전을 끈다.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베란다를 내다본다. 날이 추워졌는데도 들여놓지 않은 화초들이 제 색을 잃고 오그라들고 있다. 다른 해 같으면 이미 들여 놓았을 화초들인데 올해는 그대로 방치돼 있다.
어깨 탓이다. 지난번 길에서 고구마를 조금 사 들고 들어온 날부터 왼쪽 어깨가 조금씩 아프더니 밤에 누우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콕콕 쑤신다. 어깨 결림에는 백하수오가 좋다고 하여 달여 먹고 한의원에서 침도 맞고 정형외과를 다니며 물리치료도 받아보았지만, 소용이 없고 매일 그 타령이다. 낮에 배우던 볼륨 댄스도 일주일에 세 번 가던 수영도 쉬고 있다. 오가는 사람들 없이 고인 물처럼 사는 날들이 점점 많아진다. 주말이면 내려오던 자식들조차 뜸하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불면이다. 자려고 누우면 온갖 잡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산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난다. 잠을 못 자니 기운이 없고 기운이 없으니 의욕이 없고 의욕이 없으니 사는 것이 무의미해진다. 순옥은 자신이 어찌 되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은 자식들이 점점 미워지기 시작했다. 신경정신과에선 우울증 초기 증상이라고 했다. 순옥은 일단 수면제만 타왔다. 수면제란 것이 신기하다. 잠들기 한 시간 전에 먹고 나면 여덟 시간 만에 정확하게 눈이 떠졌다. 잠을 자니 자식들 미운 것이 좀 덜 해진다.
제색을 잃은 화초들 사이에 유독 이파리가 싱싱한 화초를 본다. 잎이 양배추 이파리처럼 널찍하고 두껍고 반지르르하다. 가만히 보니 포기 밑동이 임부의 배처럼 불러있다. 순옥은 그곳을 조심스럽게 들추어 보았다. 신기하게 그곳에는 진분홍 꽃송이들이 들어 있다.
이 화초는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어디선가 가져오신 후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시어머니 혼자 시아버지 병수발 하느라 애썼지 어느 자식들 하나 자기 일처럼 마음 쓰며 들여다보지 않았다. 큰며느리인 순옥 역시 직장생활 한다는 핑계로 자주 가 뵙지 않았다. 시아버지는 삼 년을 누워 지내시다가 타계하셨다. 자식들 다 출가 시키고 노후에 시어머니는 떠나버린 자식들을 기다리며 이 화초를 길렀다. 시어머니는 화초의 뿌리 옆에 돋아난 포기를 떼어내 아들딸 집에 하나하나 분양을 했다. 이름을 모르는 이 화초를 집안에서는 ‘아버님 화초’라고 불렀다. 집집이 화초를 심어놓고 일찍 가신 아버지 보듯 했다. 순옥은 날이 추워지기 전에 다른 화초들과 함께 아버님 화초를 실내로 들여다 놓았다. 귀한 화초이니 추운 베란다에서 얼어 죽을까 걱정이 되었다. 화초는 이파리만 무성할 뿐 꽃 피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느 해엔 말라 죽었다. 이 화초는 그 후 다시 분양받아온 것이다. 아버님 화초는 분양 받은 이후 한 번도 꽃을 피우지 않았다. 올해는 어깨가 아파 고생하느라 화초를 들여다 놓지 못했더니 오히려 화초는 꽃잎을 잔뜩 품고 있다. 벌어진 밑동 사이에 들어있는 꽃잎이 신기하여 순옥은 한참 들여다본다.
마트 입구에는 사과가 잔뜩 쌓여있다. 여자들이 사과 더미에 빙 둘러서서 조금이라도 큰 사과를 고르기 위해 열심히 뒤적인다. 순옥은 여자들이 사과 고르는 모습을 자세히 본다. 큰 것을 고르려고 들었다 놨다 하는 모습이 젊은 날 자신의 모습 같다. 순옥은 여자들 틈새로 손을 뻗어 손에 닿는 사과 두 개를 잡아 비닐 팩 속에 담는다.
맞은편에서 사과를 고르던 여자 하나가 아랫입술을 내밀고 휴 하고 분다. 여자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코가 약간 위로 들리고 눈은 쌍꺼풀이 크게 져서 시원한 인상을 준다. 입술은 도톰한데 입이 약간 튀어나왔다. 그렇게 예쁠 것도 그렇다고 보기 싫은 것도 아닌 인물이다. 사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의 얼굴이 어쩐지 낯익다. 여자의 옆얼굴을 본다. 귓밥이 얄팍한 것이 초년고생은 좀 했을 법한 여자다. 순옥은 카트를 옮기면서 다시 한 번 여자의 얼굴을 본다. 어디서 보았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야채 코너로 카트를 옮기며 금방 여자의 모습을 지워버린다. 순옥은 이 고장에서 거의 40년간 교단에 섰다. 모르긴 해도 열 명 건너 하나는 제자일 것이다. 교문을 빠져나간 제자들은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져 여기저기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은행이건 시장이건 백화점이건 간에 어디를 가도 제자들이 인사를 한다. 낯익은 여자의 모습도 그렇게 스쳐 지나간 제자 중의 하나일 것이다. 순옥은 야채코너를 돌아다니며 간단히 먹을 것을 찾는다. 나물 무치는 것도 귀찮다. 쌈 채소들처럼 생으로 먹는 것들은 왠지 소가 여물을 씹어 먹는 것 같아 싫다. 물을 부어 끓이기만 하면 되는 즉석 버섯전골 하나를 산다.
자잘한 가전제품이 있는 곳으로 간다. 무선 주전자들이 있는 곳에 멈춘다. 어제는 주전자를 태웠다. 손때가 묻은 멀쩡한 주전자를 버리고 무선주전자 사기가 뭐해 쓰고 있었다. 더블 클릭이 안 되어 더디어지는 컴퓨터에 들어가 손주들이 만들어 놓은 카페를 기웃거리다가 보니 가스레인지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은 것을 깜박했다. 주전자는 까맣게 타고 플라스틱 꼭지가 녹아내렸다. 순옥은 영감 먼저 가고 자식들도 기웃거리지 않는 집에서 매일매일 까맣게 타들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얼른 내다 버렸다.
무선 주전자를 하나 고르고 그 옆을 보니 프라이팬이 종류별로 모여 있다. 파스텔 톤으로 칠한 테플론 프라이팬에 눈길이 간다. 높낮이가 다르고 크기와 모양과 색상이 다른 프라이팬들이 벽에 걸려 있다. 프라이팬을 보고 있자니 사과 고를 때 보았던 여자의 얼굴이 퍼뜩 떠오른다. 그래! 그 아이야. 틀림없이 그 아이야. 순옥은 서둘러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과일 판매대 쪽에 이미 여자가 없다. 야채코너를 돌아보고 반찬 가게와 유제품이 쌓여있는 곳으로 가 본다. 매장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지만, 여자는 어디에도 없다. 어쩜 그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니 삼십여 년 전의 일이다. 느닷없이 그 아이를 떠오르다니. 할 일이라곤 없으니 이젠 헛것이 다 보이나 보다.
아들은 빈말이라도 퇴직하여 혼자 있는 어미에게 합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돈이 필요할 때는 손주들을 앞세우고 와서 갖은 아양을 다 떨었다. 아들 며느리가 순옥에게 내미는 무기는 손주들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자식은 순옥에게 막중한 일거리와 의무를 요구했다. 꿈속에서조차 자식들은 순옥을 쫓아다녔다. 여자들에게, 그것도 직장을 나가는 여자들에게 육아는 해도 해도 끝이 안 나는 일이고, 언제나 어깨에 큰 돌멩이를 등에 지고 있는 것 같이 무거운 짐이다. 그렇지만 손주는 달랐다. 작고 여린 것이 꼬물거리는 것을 보기만 해도 가슴속에 기쁨이 가득 차올랐다. 생명이 탄생해서 자라는 모습이 자식 때보다 훨씬 더 경이롭고 신기했다. 손주들 속에서 자신을 닮은 모습이라도 발견될 때는 연결된 끈 같은 것이 느껴져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그런 어미의 마음을 알고 이용하려 드는 자식들의 의도가 빤히 읽혀 소행이 괘씸하다.
강북에 사는 아들은 교육을 핑계 대며 강남으로 옮기고 싶어 한다. 아들 내외는 강남에만 가면 명문대는 저절로 들어가는 것처럼 말한다. 자신은 능력도 없으면서 어미를 믿고 그런 생각을 하는 아들 내외가 순옥은 내심 못마땅하다. 학교에 오래 있어 봤지만 어디서나 저 하기 나름인 것을 아들은 간과하고 있다. 손주 교육이라면 순옥이 아들보다 더 관심이 많다. 아들이 자랄 때 못해 준 몫까지 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평시에는 나 몰라라 하다가 필요할 때만 들락거리는 아들 부부가 영 마땅치 않다. 순옥은 아들의 성화에 미리 봐 둔 강남의 아파트를 돌아다녀 봤지만 아들의 생각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순옥은 모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했다. 최초로 맞이하는 본교 출신의 교장이라고 취임 전부터 떠들썩했다. 퇴직을 얼마 앞두고 교지 만드는 후배 기자의 인터뷰가 있었다. 까마득한 후배는 교직에서 있을 때 어떤 것이 가장 힘들었느냐는 질문을 했다. 순옥은 육아문제라고 대뜸 대답했다. 목덜미에 솜털이 뽀송뽀송하게 돋은 후배 기자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자식 키울 때 이야기를 해 달라고 말 했다.
아이들 키울 때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면 열권은 더 될 것이다. 순옥에게 교직의 역사는 곧 육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기 보던 아줌마가 동네 여자의 꼬임에 넘어가 몇 푼 더 준다는 곳으로 말없이 옮긴 일이 있다. 학교는 가야겠는데 애 볼 사람은 없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순옥은 위험한 것을 모두 치우고 먹을 것을 여기저기에 던져두었다. 그리고는 방문을 밖에서 잠그고 학교에 갔다가 노는 시간마다 내려와 아이들 상황을 살폈다. 울다가 아무렇게나 쓰러져 자면 그나마 다행이다. 똥을 싸 놓고 똥 범벅을 하고 잠들어 있기도 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아이는 자면서도 흐느꼈다. 그런 아이를 보고 사표를 써서 학교로 달려갔다. 그때마다 순옥의 달음질을 멈추게 한 것은 시동생의 등록금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간 시동생이 제대한다고 하자 동료 선생님들은 공부를 시키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가르쳐 독립시키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시동생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순옥은 시동생에게 대학 진학을 하게 했다. 일 년에 두 번 내는 등록금이지만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이 빨리 왔다. 군인 남편의 월급으로는 한 식구 사는 것도 빠듯했다.
어느 일요일 오후, 그때도 순옥은 말없이 나간 아줌마 때문에 난감해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출근을 해야 하는데 애 보는 사람은 구해지지 않았다. 순옥은 한 아이는 걸리고 한 아이는 업고 대책 없이 골목을 서성거렸다. 그때 털북숭이 엿장수 하나가 가위를 쩔렁거리며 골목을 들어섰다. 가만히 보니 엿장수 뒤로 열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하나가 겅중겅중 따라오고 있었다. 무심결에 딸이냐고 물었다. 엿장수는 여자아이를 힐긋 보며 말했다.
“ 언제부턴지 모르겠시다. 저 아이가 저렇게 졸랑졸랑 쫓아다니는 거 아닌겨? 엿 먹고 싶어서 저러나 했시다. 근데 저녁이 되어도 가지 않는겨. 그러니 어쩔껴. 집에서 재웠시다. 그랬더니 맨날 저렇게 쫓아다니는겨.”
어디서 왔는지, 나이가 몇인지, 이름이 무언지, 왜 떠돌아다니는지, 엿장수도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태어나 목욕을 한 번도 하지 않은 듯 몸과 머리에는 때가 더께로 앉았고 썩둑 썩둑 잘라놓은 머리가 눈 위를 덮었다. 그것이 거추장스러운지 아이는 자꾸 입술을 내밀어 바람을 뿜어 머리카락을 불어 올렸다. 그럴 때면 머리는 잠시 춤추듯 위로 올라갔다가 얼른 제자리로 내려왔다. 그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증을 일으키게 했다. 순옥은 엿장수에게 돈 몇 푼을 주고 아이를 데려왔다.
아이를 데려와 가장 먼저 한 것은 목욕을 시키고 거추장스러운 머리를 깎아 주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는 머리를 깎은 후에도 입술로 바람을 뿜는 버릇은 계속했다. 그럴 때마다 나무랐지만, 그 버릇은 아주 오랫동안 계속 되다가 언제부터인지는 긴장할 때만 나타나곤 했다.
아이는 전기 켜는 법도 몰랐다. 순옥은 아이에게 전등을 켜는 것이며 수도 트는 거며 연탄가는 것까지 하나하나 가르쳤다. 순옥은 몹시 어렵게 아이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알아냈다. 아이는 산에서 약초 캐는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아버지는 늘 술을 마시고 산속을 헤매고 다녀 잘 볼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모자 쓴 사람들이 와서 아버지를 데려갔다. 순옥이 아이가 말하는 정황을 살펴보면 모자 쓴 사람들은 경찰 같았다. 나무 뒤에 숨어 거칠게 반항하던 아버지가 끌려가는 것을 본 아이는 먹을 것을 찾아 산에서 내려오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엿장수를 따라다니게 된 것이라 짐작된다. 아버지가 엄마도 없는 그 아이를 데리고 왜 산속에서 살았어야 했는지, 왜 아버지가 잡혀갔는지, 그곳이 어디인지, 아이는 더는 아는 것이 없는 듯 했다.
아이의 머릿속은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백지 같았다. 처음 말을 배우는 아이에게 하는 것처럼 이것은 사과고 이것은 주전자고 또 저것은 비누고 치약이란 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해야 했다. 아이는 백지에 그림을 그리듯 하나하나 사물을 인식하더니 재미있는지 매사에 의욕적이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듯 아이의 머리는 빠르게 돌았다.
사건은 아이가 집에 오고 서너 달 때쯤 되었을 때 일어났다. 그 시절 테플론 프라이팬이란 것이 처음 나왔다. 음식이 눌러 붙지 않는 것이 신기해 동료 교사들은 경쟁적으로 프라이팬을 샀다. 그러나 순옥은 구경만 할 뿐 선뜻 사지 못하고 있었다.
그즈음 교사들에게도 보너스란 것이 나왔다. 첫 보너스 탔을 때 공돈이 생긴 것 같아 순옥은 눈을 질끈 감고 테플론 프라이팬을 샀다. 팬에 기름을 조금 두르고 감자를 볶았다. 감자는 신기하게도 눌러 붙지도 않고 노릇노릇하게 볶아졌다. 어렵게 장만해서 유독 소중히 아껴가며 쓰던 프라이팬이었다. 일은 학교에 갔다가 왔을 때 벌어졌다. 세상에! 까만 테플론 프라이팬이 말끔히 벗겨져 양은 팬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는 아줌마에게 칭찬받을 것을 생각하며 온종일 쇠 수세미로 테플론을 벗겨 냈던 것이다. 얼마나 속이 상한지 정신없이 야단을 쳤다. 하지만 순옥은 그것을 벗겨 내겠다는 아이의 생각과 하루 종일 그것을 벗긴 아이의 집념에 놀랐다.
다음 날 아침, 아이는 출근하는 순옥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밤새 울어 눈이 토끼처럼 빨개져 있었다. 순옥은 무심히 편지를 받아 가방 속에 쑤셔 넣고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학교에 왔다. 자율학습을 들어갔다가 나온 다음 직원 조례를 시작하기 직전에야 편지가 생각났다. 무심결에 편지를 뜯어본 순옥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편지지에는 솜씨 좋은 아낙이 정성스럽게 시침질해 놓은 것처럼 일정한 간격의 줄들이 끝없이 찍혀 있었다. 검은 사인펜으로 그은 줄들은 앞장과 뒷장 똑같이 메워져 있었다. 편지는 세 장이나 되었다. 어느 것은 짧은 줄 같고 어느 것은 점 같은 줄들이지만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오르내림이 없이 똑발랐다. 군데군데 종이가 오그라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사인펜 잉크가 번져 얼룩이 져 있었다. 마치 검은 수채화 물감을 흐리게 풀어 군데군데 색칠해 놓은 것 같았다. 편지는 구구절절 긴 사연을 풀어써 놓은 어느 편지보다도 순옥에게 감명을 주었다. 글씨를 전혀 읽고 쓰지 못하는 답답함과 자신의 진심을 어떻게든 전하고자 하는 절박함을 충분히 읽을 수가 있었다. 순옥은 편지에서 그 아이의 집념을 보았다. 글을 가르쳐주기로 한 것은 그때였다.
당시 순옥은 여섯 살 난 딸에게 글씨를 가르치고 있었다. 순옥은 아이에게 복희란 이름을 붙여 주고 딸과 함께 글을 가르쳤다. 복희는 프라이팬의 테플론을 벗겨 낸 끈질긴 집념과 나름대로 고집도 가지고 있었다. 열심히 글을 배울 뿐 아니라 응용력 또한 빨라 가르치는 것이 재미있었다. 딸이 한글을 깨쳤을 때 복희는 글자란 글자는 모조리 닥치는 대로 읽었다.
복희가 순옥의 집에 왔을 때를 13살이라고 가정을 하고 한 해 한 해 나이를 더해 주었다. 처음 일이 년 집안 살림에 고전하던 복희가 살림에 익숙해지자 순옥의 직장 생활은 점점 편해져 갔다. 순옥은 아침에 일어나 복희가 차려 주는 밥을 먹고, 싸 주는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다. 모든 집안일과 아이들을 챙기는 일까지 복희가 알아서 해 주었다. 저녁에 퇴근하여 차려 주는 밥을 먹고 아이들과 뒹굴며 놀다가 잠자리에 들기만 하면 되었다. 집안 살림에 신경을 쓰지 않자 순옥은 야간 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의욕적으로 논문을 발표하고 자진해서 연구수업을 했다. 순옥이 교직자로서의 발판을 다진 것이 그 시기였다. 까딱하면 사표를 낼 그런 시기를 복희 덕분에 어느 때보다도 여유 있게 보냈다.
순옥은 주전자 하나와 사과 두 알과 즉석 버섯전골을 카트에 싣고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며 마트 안을 돌아다닌다. 집에 들어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보다 마트 안에서 사람 구경하는 편이 더 좋으리라는 의중도 있었지만, 복희일 지도 모르는 그 여자를 다시 만나지 않을까 해서이다.
순옥의 기대는 빗나가지 않았다. 여자는 물건을 카트에서 계산대에 옮기고 있다. 물건은 계산원에게 저절로 흘러가고 계산원이 바코드를 찍어 바닥에 놓으면 계산된 물건은 다시 정리대로 옮겨 간다. 남자가 물건들을 박스에 담고 있다. 남자의 인상으로 봐서는 막일을 하는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순옥은 다시 한 번 여자를 훑어본다. 코끝이 약간 들리고 입이 조금 튀어나온 것이 틀림없는 복희이다. 아까 얼른 알아보지 못한 것은 굵은 쌍꺼풀 때문이다. 눈까풀이 얇고 눈이 작았지만, 쌍꺼풀이 있으니 시원스러운 것이 다른 사람의 모습이었다. 삼십 년 전에 야생 토끼처럼 거칠고 까칠했던 복희의 모습이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세련된 여자의 모습으로 변해 있다. 강산이 서너 번이나 변할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칠 년을 한솥밥을 먹으며 살았던 아이를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순옥은 여자를 자꾸 쳐다본다. 여자는 이상할 정도로 쳐다보는 순옥을 외면한다. 물건을 담던 남자가 순옥을 힐끗 보고는 아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여자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고는 순옥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외면한다. 순옥은 기어이 묻는다.
“ 혹시 복희 아니니?.”
“ 아닌데요. 잘못 보셨어요”
그때 남자가 말한다.
“ 복희가 누구야?”
“ 몰라요. 사람을 잘못 봤나 봐요.”
잠시 후 그들은 물건 담은 박스를 카트에 싣고 떠난다. 그들이 떠나간 후에도 순옥은 그 여자가 복희라는 확신이 든다. 사과를 고를 때 입으로 바람을 일으켜 머리를 추켜올리던 버릇이며 애써 외면하는 눈초리며 돼지 코며 틀림이 없는 복희이다.
“어서 물건 올려놓으셔야지요.”
계산원의 말에 정신이 돌아온다. 순옥은 몇 개 되지 않는 물건을 서둘러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다. 복희임이 틀림없지만 순옥은 여자를 쫓아가 붙들 수가 없었다.
복희는 순옥이 정해준 나이 스물, 그러니까 집에 온 지 7년 만에 장롱 속에 넣어 둔 곗돈을 갖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시절엔 일하는 아이에게 월급을 꼬박꼬박 주지 않았다. 데리고 있다가 시집갈 때 혼수 자금을 대주곤 했다. 월급을 주면 다른 곳으로 쉽게 옮길 수 있으니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도 있고 고생하면서 식모살이하는 아이에게 목돈을 마련해주겠다는 의미도 있었다. 순옥은 복희에게 좋은 혼처가 나오면 시집을 보내 줄 것을 약속하고 또 약속했다.
글자를 깨친 복희는 아이들의 초등학교 교과서나 전과 같은 것들을 자신의 방에 쌓아두고 공부를 했다. 아이들이 시험 볼 때면 시험지를 가져다가 자신도 혼자 시험을 보곤 했다. 모르는 것은 가끔 순옥에게 묻기도 했다.
큰아이가 중학교 들어갈 때 복희는 자기도 야간중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야간중학교에 다니면 공부하느라 살림을 소홀히 할 것이 빤한데 어떤 주인이 그것을 허락해 주겠는가. 마침 순옥은 야간 교육대학원에 다니고 있어 바쁘니 야간중학교는 생각도 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복희는 큰 아이가 중학교 가는 모습을 넋을 잃고 쳐다보곤 했다. 큰 아이가 학교에 가면 그 방에서 책을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더니 계 탄 다음 날 사라졌다.
복희가 사라진 후 순옥은 하루아침에 떠맡은 살림이 힘들었다. 대학원까지 다니고 있을 때라 살림하랴 공부하랴 아이들 챙기랴 학교 나가랴 정신이 없어 어떻게 그 시절을 보냈는지 모른다. 복희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남편은 군인이라 전방으로 휴전선으로 늘 이동해 다녔다. 직장 때문에 쫓아다니지 못해 남편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대신 복희에게 마음을 붙이고 진심으로 위해 주었다. 그런 복희의 배반을 하다니.....
그렇지만 두고두고 생각해 보니 교직자로서 그 아이가 공부하고 싶어 하는 것을 외면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공부하겠다는 것을 못 하게 했으니, 하지 않겠다고 해도 시켜줬어야 했을 것을 복희가 떠난 후에 차츰 깨달았다. 처음에는 배신에 대한 고통이 차츰 후회로 변하더니 나중에는 복희에 대한 그리움으로 변했다. 생각해 보니 머리도 명석하고 집념도 있어 공부하면 잘 했을 아이었다.
아버님 화초의 불룩한 밑동이 벌어지더니 그 속에서 분홍 꽃송이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꽃송이들을 꽃대가 천천히 밀고 올라왔다. 먼저 핀 꽃은 연분홍으로 변하고 새로 핀 꽃들은 진분홍으로 벌어지며 꽃은 계속해서 피고 또 피었다.
“ 야! 히말라야바위취를 여기서 또 보네요!.”
지인이 놀러 왔다가 꽃을 보고 소리쳤다. 산을 좋아하는 지인은 오로지 산에 다니기 위해 명예퇴직을 했다. 처음에는 국내에 있는 산이란 산은 모조리 찾아다니더니 중국과 일본까지 원정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지난해는 히말라야까지 갔다가 왔다.
“이 꽃 이름이 히말라야바위취야? 우리 집에서는 그냥 아버님 화초로 불러서 그런 이름이 있는지도 몰랐어.”
“ 작년 3월 히말라야 갔을 때 간드룩 마을에서 봤어요. 가파른 산간 마을이라 축대를 쌓아 계단식으로 밭을 만들고 집들을 지었어요. 제가 묵은 롯지(여행자들을 위한 숙소) 앞 축대에서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이 히말라야바위취를 보았어요. 다른 꽃들은 화단이나 길옆에 심었는데 이 꽃만은 축대 바위틈에다 심은 거예요. 축대 바위틈마다 아기 조막만 한 분홍 꽃송이들이 몽실몽실 올라와 꽃을 피우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정작 장관은 이튿날 자고 일어났을 때였어요. 밤새 꽃 시샘 눈이 내렸어요. 세상이 온통 눈으로 하얀데 축대만은 분홍 나비가 떼를 지어 내려앉은 듯 분홍 꽃밭이었어요. 그 광경이 몹시 신비로웠어요. 현지 사람들조차 드물게 보는 광경이었대요. 그런데 그 꽃을 여기서 보네요.”
지인은 꽃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 그때 이 꽃을 보고 오니까 좋을 일이 생겼어요. 여행에서 돌아오고 얼마 안 있어 노처녀 딸이 신랑감을 데리고 온 거예요. 그것도 자기보다 두 살이나 어린 펀드매니저요. 교장 선생님도 좋은 일이 생길 건가 봐요.”
정말 추위 속에 피어난 꽃송이를 보니 정말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 이 나이에 좋은 일이 있을까 싶다가도 기분이 좋아진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봄에 새로 싹이 나온 포기가 분양시킬 만큼 자랐다. 화분 하나 사다가 포기를 떼어 내 아들네로 분양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순옥은 혼자 살며 오지 않는 자식들을 기다리는 어머니 모습을 닮아 있었다.
전화가 온다.
“ 할머니! 국어시험을 봤는데 다섯 개 틀렸어요.”
아직 순옥은 사람들에게 교장 선생님으로 불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손주의 할머니란 칭호가 친근하다.
“ 저런.....다 맞은 애들도 있든?”
“ 네. 다섯 명이나 돼요.”
“ 엄마한테 혼났어?”
순옥은 은밀히 손주에게 묻는다.
“ 네.”
“ 그래? 엄마를 좀 바꿔라.”
며느리가 전화를 받는다. 순옥은 죽은 영감을 들먹이며 아이 편을 들고 있다.
“ 국어 못하는 건 꼭 즈이 할아버지다. 가끔 말귀를 못 알아들었거든. 그러면서 어떻게 직장생활은 했는지. 즈이 할아버진 버릴 건 그거 하난데 하필이면 그걸 닮을 게 뭐니.”
“ 어머니! 글쎄 길을 가다가 옛 친구를 만났는데 반가운 게 아니라 안타깝대요. 윤수는....”
“ 그거야 문제가 잘못된 거로구나. 친구도 안타까운 친구가 있을 테고 반가운 친구가 있을 텐데 말이다.”
순옥은 어떻게든 어미에게 야단맞을 윤수 편을 들고 있다. 역성을 들어주어도 손주는 언제나 즈이 어미를 먼저 찾는 것이 여간 섭섭하지 않다. 며느리는 순옥이 영감과 아들에게 느끼는 고지식함과 어휘에 대한 답답함을 아들과 손주에게 느끼고 있다.
아들에게 어휘력이 풍부하지 못한 것을 순옥은 영감 탓으로 돌렸지만, 영감은 그것을 애 보는 사람 탓으로 돌렸다. 한창 말을 배워 이것저것 물을 때 귀찮아 대답해 주지 않은 탓이라 했다. 게다가 복희는 처음 몇 년간은 오히려 아이들에게 알량한 어휘를 배웠다. 복희는 ‘뜨겁다 기쁘다 슬프다’라는 기본적인 감정 표현조차 못 하던 아이였다.
며느리는 손주의 발달하지 못한 어휘력에 대해 길게 말한다. 그것은 글짓기 학원을 보내야겠다는 시위처럼 들린다. 순옥은 초등학교 3학년인 손주에게 방과 후 학원을 뺑뺑이 돌리게 하는 것만은 단호히 못 하게 하고 있다. 영감을 빼다 놓은 것처럼 닮은 손주는 숫자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손주의 숫자에 대한 개념은 천재적이었다. 숫자를 알아 갈 때 엘리베이터 안에 박혀 있는 숫자만 보아도 더하고 빼고 곱하며 무궁무진 재미있어 했다. 그렇지만 글짓기 학원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할머니가 국어선생이었다 하더라도 타고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영감은 아들이 자기에게 물려받은 백치에 가까운 어휘력을 복희 탓으로 돌리고 며느리는 지금 아들 탓으로 돌리고 있다.
며느리는 일요일 날 순옥의 집에 오겠다고 말한다. 아들이 왔다가 가면 순옥은 연금 받은 돈에서 십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을 봉투에 넣어 준다. 보고 싶은 얼굴을 보여준 값어치를 20만 원으로 환산한 것이 순옥의 계산법이다. 그래도 아들 가족은 가끔 밖에 내려오지 않는다. 자기들만의 오붓한 시간을 즐기는 것이 이십 만원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아들 내외의 계산법이다.
지난번에는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 가족이 오지 않자 순옥이 먼저 전화를 넣었다. 손주가 받았다.
“ 할머니가 윤수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
순옥은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말했다.
“ 할머니! 난 하나도 보고 싶지 않은데......”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아들보다도 한 세대를 더 거른 손주가 할머니를 보고 싶어 할 까닭이 있겠는가. 순옥은 눈물을 꾹 참고 다시 말했다.
“ 그래도 안 본 지가 한참 된 거 같구나.”
“ 저번에도 봤잖아요. 할머니. ”
“ 그래, 저번에도 봤지만 그래도 또 보고 싶은 걸 어쩌니 윤수야.”
“ 할머닌 이상해. 왜 보고 싶을까. 난 안 보고 싶은데......”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던가. 저리 솔직히 표현하는 아이에게 어찌 어휘력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손주의 마음이 아니라 아들 내외의 마음이었다.
아들이 일요일에 내려온다는 말은 순옥에게 마음에 드는 집이 나타났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요즘 며느리는 뻔질나게 집을 비운다. 순옥은 물어보지 않아도 며느리의 집 비우는 이유를 알아챌 수 있다.
자려고 준비를 하는데 또 전화가 온다. 이번에는 딸이다. 오빠가 서울에 집 보러 다닌다는 것을 전해 들은 모양이다. 요즘은 딸도 아들과 똑같다고, 아니 아들보다 낫다고 말하는데 순옥에게는 꼭 협박처럼 들린다. 딸은 자기도 서울로 집을 옮기고 싶다고 말한다.
퇴직을 눈앞에 두었을 때 아들딸은 뻔질나게 집을 드나들었다. 퇴직금을 일시금로 탔으면 하는 의견을 은근히 내비쳤다. 순옥보다 먼저 퇴직한 동료들에게서는 계속 전화가 왔다. 그들은 열이면 열 다 연금으로 타라고 충고했다. 몇 달을 고민한 끝에 연금을 받았다.
순옥은 통장 안에 든 돈을 이렇게 저렇게 계산해 본다. 그래도 돈이 꽤 있다. 그 돈의 밑천은 복희가 버려두고 간 혼수 자금이었다. 복희가 가져간 돈은 복희의 월급일뿐이었다. 복희 앞으로 계를 부었던 돈을 계주에게 맡기고 그 이자로 계를 부어 이자에 이자가 불어났다. 지인을 따라 복희의 돈에 그만큼 더 보태어 변두리에 땅을 사 놨는데 그곳으로 공공기관이 옮겨 와 알토란같은 땅이 되었다. 통장 안에 있는 것은 그 땅을 판 돈이다.
순옥은 만원 한 장을 쓰는 것도 밤새 생각을 해서 썼다. 평생 모으기만 했지 써 보지를 못해서인지 아직은 쓰는 것이 모으는 것보다 불편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억울한 생각이 든다. 그 돈마저 없다면 그나마 가끔 오던 자식들이 아예 발길도 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니 서글퍼진다.
꽃잎이 빛바랜 종이처럼 말라붙고 꽃대마저 새들새들 말라갈 무렵 순옥은 편지 한 통을 받는다. 그림을 그린 것처럼 어여쁜 글씨체로 쓴 집 주소를 본다. 발신인은 유미진이다. 처음 보는 낯선 이름이지만 두툼한 두께와 반듯한 글씨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순옥은 가위로 봉투 끄트머리를 오려 편지를 꺼낸다.
선생님, 저 복희입니다. 편지 서두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마트에서 본 것은 정말 복희였다.
그날 선생님 댁에서 곗돈을 훔쳐 도망 나온 나왔다는 생각에 아는 체를 못 했어요.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쯤 선생님도 저를 용서해 주실 것 같아서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내가 널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데.....오히려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것이지. 순옥은 중얼거렸다.
선생님 저는 정말 공부가 하고 싶었습니다. 공부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 댁을 나와 저는 검정고시 학원으로 갔습니다. 사정 얘기를 했더니 학원에서 수강료 대신 잡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었어요. 그렇게 저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검정고사를 치고 졸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공부를 해 교육대학을 들어갔어요. 지금은 초등학교 교사로 있습니다.
저는 선생님 댁을 나오며 저도 선생님처럼 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저의 인생의 맨토셨어요.
살아오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저는 선생님께 점 글자 편지 쓸 때의 답답함을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그때 그 답답하고 망망함만큼은 아니더군요. 어쩜 오늘날 저를 만든 것은 점 글자 편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 보고 싶어요. 선생님은 제게 글을 가르쳐 주시고 저도 무언가 될 수 있다는 꿈을 주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부모조차 챙기지 않고 산속에 버려둔 제가 엿장수를 쫓아다니다가 선생님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습니다. 선생님 저를 용서해 주실 거지요? 이상해요. 세월이 갈수록 선생님 생각이 더욱더 나는 거예요. 마트에서 선생님을 뵙고 온 날부터 선생님 생각으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복희의 남편도 같은 초등학교 교사라고 했다. 시댁이 인천이라 그 마트를 들렀다는 복희는 방문 날짜와 시간을 얌전하게 적어 놓았다. 그날 모시고 나가 월미도쯤 가서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고 하였다. 순옥은 편지 겉봉을 보았다. 그곳에는 아들이 애들 교육을 위해 가고 싶다는 동네 주소가 반듯한 글씨로 적혀 있다.
눈물로 얼룩진 점 편지를 쓰던 복희가 초등학교 선생이 됐다는 사실이 대견하다. 순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켜고 베란다를 내다본다. 꽃잎이 다 말라버렸지만 히말라야바위취의 이파리는 추위 속에 싱싱하다. 가만히 보니 이파리 밑동이 불룩하다. 또 다른 꽃이 나올 기세다. 잎이 얼어 죽을까 봐 거실에 들여놓고 노심초사할 때는 꽃을 피우지 못하던 히말라야바위취가 또 꽃대를 밀고 올라오려 하고 있다. 그때야 순옥은 돌아가신 시아버님께서 이 화초를 통해 자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셨는지 알 수 있는 것 같았다.
창밖이 희뿌옇게 밝아온다. 순옥은 얼른 일어나 샤워를 한다. 복희를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다. 일주일 후에 방문하겠다는 복희를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복희는 지금 방학이라 집에 있을 것이다. 순옥은 정성 드려 화장하고 이 옷 저 옷을 입어 본다. 그래도 시간은 아직 8시를 넘지 않는다. 우두커니 앉아서 기다릴 수 없어 밖으로 나온다. 출근 시간 서울로 가는 길은 꽉 막혔지만 순옥은 개의치 않는다. 아니 더 막혀도 순옥으로서는 급할 것이 없다. 누구의 집을 방문하기에는 아홉 시도 열 시도 일렀지만, 그때까지 견딜 수가 없다. 목동을 지나니 그 많던 차들이 순식간에 어디론지 사라지고 길이 뻥 뚫린다. 순옥은 올림픽 대로를 달려 무역센터 이정표를 받고 대로를 빠져나온다. 이 길은 아들이 집을 봐 놨다고 해서 몇 번 차를 몰고 왔던 길이다. 자식들은 그곳에 살고 싶어 애쓰는데 식모살이하던 복희는 이미 그곳의 주민이 되어 있다.
산을 뚫고 만들어진 터널을 빠져나오자 복희 편지에 적힌 아파트 단지의 이름이 고층 아파트에 박혀 있다. 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아파트가 거리의 가로수와 어우러져 꼭 유럽의 여느 도시처럼 깨끗하다. 잘 된 구획정리 탓인지 순옥은 어렵지 않게 복희 아파트에 차를 댈 수가 있다. 차를 댈 수 있는 공간도 넉넉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순옥은 생각한다. 아주 오래전 힘들었던 시절 복희가 우연히 와 준 것처럼, 남편과 자식과 일까지도 다 떠난 지금, 외로움과 우울만이 익숙한 친구처럼 순옥 곁을 맴돌고 있는 지금, 어쩜 복희가 다시 찾아와 줄지 모른다고.....
딩동 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는 11층에서 문을 활짝 연다. 순옥은 망설임 없이 복도로 나와 선다. 아들네 집 앞에 서면 며느리가 싫어하지 않을까 해서 발길이 무거웠다. 복희 집 앞에 서니 꼭 보고 싶은 딸네 집에 온 것처럼 마음이 가볍고 설렌다. 현관문 앞에 서서 순옥은 숨을 고른다. 그리고 지그시 벨을 누른다.
(원고지 84장)
강명희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끌어안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