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동(楊上洞)
-양상동은 법정동 이름이며 행정동으로는 월피동 관할이다-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郡內面) 양등대리(楊等垈里)라 하였다가 조선 후기에 양상리(楊上里)와 양하리(楊下里)로 분리되었고, 1912년 2월 5일 양상리(楊上里)로 통합ㆍ변경되었다. 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1914년 3월 1일 안산군이 시흥군에 통합되었고, 곧이어 4월 1일 군내면이 수암면에 통합ㆍ개칭되어 시흥군 수암면 양상리가 되었다. 그 후 법률 제3798호에 따라 1986년 1월 1일 안산시 양상동(楊上洞)이 되었다.
양상동은 자연취락이 2개 마을(아랫버대·웃버대)에 지나지 않으며, 신도시개발 이후에도 크게 변모되지 않은 지역으로 역사적인 유물과 유적이 많은 곳이다.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지석묘는 11기가 있었으나 대부분 파괴되었고, 월피동과 양상동 경계 관모봉 서쪽 능선에는 적석토광묘(積石土壙墓)와 주거지가 있고, 석곡역(石谷驛)은 시흥시 군자동에 있다가 조선 중엽에 버대마을로 이전되었으며 한양대 박물관에 의해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지석(誌石)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 아랫버대[下楊垈] -
웃버대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장하동 원뒤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 양등대리(楊等垈里 : 버대)라 하였다가 조선 후기에 버대가 웃버대와 아랫버대로 나뉘어졌다. 아랫버대[下楊垈 : 楊下里] 마을은 웃버대에 살던 진주강씨 후손들이 이곳으로 분가하면서부터 취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동쪽지역을 ‘웃말’, 서쪽지역을 ‘아랫말’이라 각각 부르고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일이면 마을 중앙에 있는 대동우물(일명 오리물)에서 정제(井祭)를 지낸다. 이곳에는 정언벽(丁彦璧 : 1612~1652, 홍문관 교리), 정시윤(丁時潤 : 1646~1713, 영월부사) 등의 묘가 있다.
• 감배
호두알 크기의 야생감인 돌감나무가 많았던 곳이다.
• 달보는산
정월대보름날 산위에 있는 넓은 바위에 올라가 불놀이를 하던 산이다. 현재 1/3정도는 깎여서 영동고속도로가 되었다.
• 독적너머
독을 만들던 곳의 너머에 있는 곳을 말한다.
• 돌무데기
마귀할멈이 앞치마에 돌을 담아 가다가 흘린 곳이라는 설화가 전해온다.
• 문산이
원래 문산포(門山浦)라 하였다 한다. 바닷물이 들어오던 시절 작은 포구가 있었다.
• 삼정[三井]
삼쟁이라고 불렀으며, 우물 세 개가 있었다고 한다.
• 서낭당
옛날에 서낭당이 있었던 곳이다.
• 석답(石畓)
돌이 많은 논이었는데 현재는 전원마을단지로 변모하였다.
• 솔안논
오리물이 흘러내려가서 물 걱정을 안 하던 작은 논인데 주위에 소나무가 많았다.
• 오리물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고 수량이 많아서 물이 흘러넘치기 때문에 우물 아래쪽으로 미꾸라지가 많았는데, 수백 마리의 야생 오리때가 날아들던 곳이라서 오리물이라고 하였다는 설과 이 물로 오리(五里)안에 있는 모든 논이 다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해서 오리물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 함작골
안산 북쪽, 봉안지골 동쪽에 있으며 예전에 함을 만들던 곳이다.
• 장자골
큰 부자가 살았던 곳이라 하여 장자골이라고 하며 옛날 기와장이 발견되기도 한다.
• 호장골[虎掌谷]
호랑이 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호장골이라고 하였다 한다. 큰호장골과 작은호장골이 있으며 큰호장골에는 정언벽선생 묘와 신도비를 비롯한 나주정씨 묘역이 있다.
• 횟돌머리
횟가루를 만드는 횟돌이 암벽형태로 돼 있으며 암벽의 끝 부분을 횟돌머리라고 한다.
- 웃버대[上楊垈] -
아랫버대 위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군내면 양등대리(楊等垈里 )라 하였다가 조선 후기에 웃버대[上楊垈 · 楊上里]와 아랫버대[下楊垈 · 楊下里]로 나뉘어졌다.
조선 중종대 예조참판을 지낸 강징姜澂(1466~1536)의 묘가 풍수로 보아 꾀꼬리가 버드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사는 형국[鶯巢柳枝形局]이므로, 마을 하천 둑에 버드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마을을 일명 ‘버들촌’이라 칭하기도 했는데, 일제 말엽까지만 해도 버드나무가 많았으나 주민들이 집을 짓거나 혹은 땔감으로 사용하여 버들촌이란 이름은 점차 퇴색되었다.
이 마을은 해주최씨가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이래 김해김씨, 진주강씨, 사천목씨, 나주정씨 등이 세거했으나, 목씨·정씨·강씨가 크게 번성했으며, 현재는 40여 호가 촌락을 이루고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 1일이면 주민들의 추렴으로 마을 중앙에 있는 큰우물과 마을 북쪽 끝에 있는 옹달물에서 정제(井祭)를 지내고 있다. 이곳에는 강징의 묘를 비롯하여 강희姜僖(1492~1539, 신창현감), 강의姜儀(적성현감), 강억姜億(1498~1554, 사옹원정), 강위姜偉(해주목사) 그리고 열녀 나주김씨(羅州金氏)의 묘가 있다.
• 가는골
골짜기가 좁고 길어서 붙은 이름이다.
• 가래재
가래나무가 많아 가래재라고 한다는 설과 갈래길이 있는 고개라는 설이 있다
• 꾀꼬리밑
꾀꼬리가 많이 날아와 앉던 곳을 말한다.
• 너빌산
화정동의 너빌마을과 경계에 있는 산이름이다.
• 당재
옛날에 당이 있었다고 하며 윗당재와 아랫당재가 있다.
• 마위
옛날에 말을 많이 기르던 곳이라고 한다.
• 매봉재
산봉우리가 매를 닮았다고 해서 매봉재라 부른다.
• 메밀골
메밀을 많이 심던 골짜기라서 메밀골이라고 한다.
• 모과나무골
모과나무가 있던 골짜기이다. 큰골안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 무당골
무당이 살던 골짜기라서 무당골이라고 하였다.
• 방화고개
시흥시 조남동 방화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꽃아 만발하는 고개라고 한다.
• 병무관
병모가지를 닮은 골짜기라서 병목안인데 병무관으로 변음되어 부른다.
• 부한장(富閑莊)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강익량(姜益亮)이 아홉 살 때 병자호란을 맞아 고향이 초토화 되자 피난을 갔다가 돌아와 파조(派祖)인 할아버지 목사공(牧使公) 강위(姜偉)의 묘 아래에 부한장(富閑莊)이라는 집을 짓고 학문에만 전념하던 곳이라고 한다,
• 상등쌀
벼가 잘 여무는 논이라고 하여 상등쌀이라고 하였다.
• 서당골
강징(姜澂)이 퇴직 후에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서당을 짓고 글을 가르치던 곳을 말한다.
• 서락골[聲鶴谷]
원래는 학 울음소리가 들린다 하여 성학골[聲鶴谷]인데 서락골로 변음되었다는 설과 서애골[西哀谷]이 서락골로 변음되었다는 설이 있다. 현재 안양공원묘원이 있는 곳이다.
• 오리골
오리나무가 많은 골짜기라 붙은 이름이다는 설과 골짜기 길이가 5리 라는 설이 있다.
• 옹달물
강징 신도비 아래 암반에서 언제나 맑은 물이 그치지 않고 솟아 붙은 이름이다. 이곳에서 해마다 정제(井祭)를 지낸다고 한다.
• 웃골
마을 위쪽의 넓은 골짜기로 수암면장을 지낸 강희태의 집이 있다.
• 지렁고개
와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질러서 가는 고개라 붙은 이름이다. 현재 4차선도로가 되었다.
• 큰골
크고 넓은 골짜기이다.
• 태봉
왕자의 태를 묻었던 산으로 현재 안산인터체인지가 들어섰다. 인터체인지 공사 때 절구모양의 태함이 발견되었으나 도난당하였다.
• 풀무골·품목골
옛날에 대장간이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품목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항아리고개
지렁고개 옆으로 있는 고개인데 현재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다. 1911년 발간된 《조선지지자료》에는 양상리의 뒤쪽에 있다고 쓰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