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의 안산
안산 지역은 덕종, 정종, 문종 등의 세 왕이 태어난 명예롭고 상서로운 곳으로 추앙 받았다. 이러한 연유로 안산은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게 되었으며, 지군사가 중앙에서 파견되게 되었다. 고려 최고의 문벌 귀족인 안산 김씨 김은부의 세력 근거지이기도 하였던 안산은 덕종ㆍ정종ㆍ문종의 탄신일과 같은 행사에는 안산의 토착세력이 참석하는 등 궁중 문화와 긴밀히 접촉하여 일찍이 귀족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었다.
몽고의 침입 시에 고려의 무인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결사적으로 항전하였다. 고종 43년(1256)에는 대부도 별초군(別抄軍)이 인주(현재의 인천)의 소래산(蘇萊山)에서 몽고군 100여인을 격퇴한 바 있다. 그러나 원종 11년(1270), 몽고와 결탁한 조정이 환도를 결정하였고, 이에 대부도민들은 민병을 조직하여 항쟁하였다. 대부도민들은 몽고인 6명을 살해하고, 삼별초에 호응하여 합세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수주 부사(水州 府使) 안열(岸悅)이 이끄는 정부군에 의해 토벌되었다.
고려 시대 안산은 중국으로 가는 중요한 뱃길의 출발지이자 교역의 중심지였다. 잿머리포구는 큰 배들이 오갈 수 있는 외항으로 축조되었으며 무역에 종사하기 위해 체류하는 당인들이 점차 늘어나 촌락을 형성할 정도였다.
1. 지명 ‘안산’의 등장
태조 19년(936)에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王建)은 940년에 전국의 행정 구역의 명칭을 변경하였다. 안산 지역 역시 고려 초기에 장구군에서 안산군(安山郡)으로 개칭된다.
2. 통치 조직의 변화와 안산
고려 시대 초기, 안산 지역은 통일 신라 시대에는 파견되었던 중앙관이 파견되지 않았다. 고려의 중앙 행정력이 지방에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광종(光宗) 대에 이르러서이다.
고려 왕권의 지속적인 중앙집권체제는 점차 호족 세력을 약화시켜 나갔으며, 성종 2년(983)에 들어서는 지방관제를 실시하는 등 실질적인 지방 제도를 정비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일부 지방 호족은 중앙관리화 되었고, 그러지 못한 호족은 향리로 전락하게 된다. 983년 성종은 전국에 12목(양주, 광주, 충주, 청주, 공주, 진주, 상주, 전주, 나주, 승주, 해주, 황주 등)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 때, 안산은 양주목(楊洲牧)에 속해있었다.
그 후 수주(水州, 현재의 수원)에 속하는 속현(안산현, 용성현, 정송현, 진위현, 양성현, 쌍부현, 영신현 등 7개 현)이 되었다. 당시 수주에는 지주사(知州事)가 파견되어 있었으며, 안산현은 수주를 거쳐 중앙정부와 통하게 된다.
안산현은 수주의 속현으로 지수주사(知水州事)의 지휘를 받았으나, 실제 행정을 맡고 있던 것은 향리로 특히 안산과 같이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지역에서의 향리의 비중은 ‘실질적인 통치자’라 할 정도로 매우 컸다.
문종 23년(1069)에 개성 중심의 경기 지역이 양광도ㆍ교주도ㆍ서해도의 39개 주현을 새로이 포함하여 52개 주현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고려사》〈지리지〉왕경 개성부조에 따르면, “문종 16년에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를 부활시켜 도성(都城)에서 관장하고 있던 11현을 여기에 예속케 하였다. ……문종 23년 정월에 양광도의……과주ㆍ인주ㆍ안산ㆍ금주……등의 주ㆍ현을 경기에 속하게 하였다. 양광도의……안산ㆍ교하ㆍ양천ㆍ금주ㆍ과주……를 좌도에 속하게 하고,……각각에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士)를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종 16년(1062)에 재설치된 개성부는 경기에 속한 지역을 다스렸으며, 안산이 문종 23년 경기에 예속되면서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의 지휘를 받게 된다.
충렬왕 34년에는 안산현은 문종이 태어난 곳임을 인정받아, 지군사(知郡事)가 파견되는 ‘군(郡)’으로 승격된다. 안산에는 이미 예종 3년을 전후로 하여 속현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감무(監務)’라는 지방관이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감무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작은 규모의 속현에 두는 것으로 충렬왕 때에 안산군으로 승격되면서 지군사가 파견될 때까지 안산은 감무의 지휘를 받았을 것이다. 경기는 차츰 좌우도로 구분되면서 하나의 도(道)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공양왕 2년(1390)에 문종 때의 옛 제도에 따라 경기를 확장하여 좌도와 우도로 나누고, 여기에 각각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士)를 설치하면서, 안산은 다시금 경기에 편입된다. 안산은 과주ㆍ인주ㆍ금주 등과 함께 경기의 좌우도 중 좌도에 속하게 된다.
3. 문벌귀족사회의 형성과 안산김씨
문벌귀족들은 개경(開京)에 거주하면서 관직에 진출하여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같은 귀족 계급과의 혼인을 통해 견고히 해나갔다.
그러기에 문벌귀족들은 무엇보다도 고려 최고의 귀족인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기를 희망했다. 왕실과의 혼인은 명예로운 일이었을 뿐 아니라, 세력 장악의 가장 손쉽고도 확실한 수단이었다. 안산 김씨(安山 金氏)는 왕실의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한 가장 유명한 세력의 하나이다.
안산 지역의 호족 출신인 김은부(金殷傅)은 거란의 침입으로 남쪽으로 피난 오게 된 현종을 잘 받든 인연으로 세 딸(현종의 제3비 원성태후, 제4비 원혜태후, 제7비 원평왕후)을 모두 현종의 왕비로 들여보내 일약 당대 제일의 외척이 되었다.
현종의 장인이 된 김은부는 공주절도사에서 중앙관으로 전임되고 정4품 형부시랑(刑部侍郞)ㆍ종2품 중추사(中樞使) 등으로 재상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김은부의 첫째 딸인 현종의 제3비 원성왕후(元成王后)는 현종 2년(1012)에 혼인하여 덕종(德宗, 고려 9대 왕)과 정종(靖宗, 고려 10대 왕) 등 두 왕과 인평왕후ㆍ경숙공주 등 두 공주를 낳는다. 둘째 딸인 원혜왕후(元惠王后)는 11대 문종(文宗)과 평양공(平壤公) 기(基)의 두명의 왕자와 효사왕후를 낳았다. 또한 셋째 딸인 원평왕후도 효경공주를 두어 김은부의 왕실 외손만도 4남 4녀에 이르며, 덕종ㆍ정종ㆍ문종 등 세 명은 왕위에 올랐고 인평ㆍ효사 등 두 명의 공주는 왕후가 되었다. 외손자들이 왕위에 올라 있었던 기간만 1032년부터 1083년으로 51년에 이른다. 안산 김씨 가문은 왕실의 처가 혹은 외가의 위치에서 4대, 근 70년에 걸쳐 정권을 독차지 하였다.
이와 같은 안산 김씨의 정치적 입지는 김은부의 아들 대에까지 이어지게 되어, 첫째 아들인 김충찬(金忠贊)은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고, 둘째 아들인 난원(爛圓)은 승려로서는 최고위인 대각국사(大覺國師)에 봉해졌다.
4. 외적의 침입과 안산민의 대몽항쟁
몽고 쟈랄타이에 의한 6차 침입의 제2시기(고종 42년 8월~43년 10월)에는 그간 몽골이 취해왔던 전략 즉, 정부가 있는 강화도가 아닌 내륙지역을 공격하는 방법 외에 서해안 도서지역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고려의 끈질긴 항전으로 전쟁이 장기화되자 몽골은 전략 수정의 필요성을 인식하였으며, 직접적으로 강화도 정부에 위협을 가할 방법을 강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종 43년(1256)에 있었던 대부별초의 활약은 중요하다. 서해 조운로를 따라 강화도 앞바다에 이르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대부도(大阜島)에는 별초(別抄)가 있었다. 몽골군이 강화 대안 착량(窄梁)에 진출하자 대부별초가 출동하여 인주(仁州;현재의 인천)에 몽골군 1백여 명을 격파하였다. 이는 몽골군이 비록 주력부대는 아니었으나 대부별초 또한 그리 약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경진(庚辰)에 대부도(大府島) 별초(別抄)가 밤에 인주(仁州) 근처의 소래산(蘇來山) 아래에 나가 몽골 병사 1백여 인을 격파하여 도망가게 했다.(《고려사》권 24, 세가 24 고종 43년 4월)
소래산은 지금 경기도 시흥시와 인천광역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대부별초는 안산의 초지량쪽으로 상륙하여 북상하다가 소래산 밑에서 몽골군을 격퇴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정부는 결국 몽골에 항복하고 원종 11년(1270)개경 환도를 결정하게 된다. 이에 삼별초는 환도를 반대하여 새 정부를 수립하고, 강화도를 근거지로 하여 대몽항쟁을 계속하였으며, 후에 강화도의 사정이 악화되자 삼별초는 진도로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삼별초가 진도로 남하하면서 처음 정박했던 곳이 대부도 옆의 영흥도였다.
원종 12년(1271) 강화의 대안 착량을 지키던 몽골군이 대거 대부도로 침입하여 백성들을 침탈하자 대부도민들은 몽골군 6명을 살해하고 진도의 삼별초 관부에 합세하고자 하였다. 허나 이는 개경에서 봉기하였던 숭겸(崇謙) 등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들린 직후로 대부도민의 항몽정신의 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부도민의 반란은 수주부사 안열(安悅)에 의해 평정되었으나, 앞서 말한 일련의 대부도민의 대몽 항쟁은 이렇다할 전투 기록도 남아있지 않을 뿐 아니라 되려 반역 행위도 서슴치 않았던 몽골 침략 후반기에 들어선 것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있다.
왜구가 안산 지역에 침입한 기록을 살펴보면 1378년(우왕 4)과 그 이듬해의 두 차례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왜적들은 그에 앞서 1351년(충정왕 3) 남양부(南陽府: 화성)와 쌍부현(雙阜縣: 화성 우정면)을 침입한 바 있고, 1360년(공민왕 9)에는 남양부 서쪽의 화지량(花之梁: 화성 송산면)을 불에 태웠으며, 또 평택∙용성∙강화도를 침입하였다. 이후에도 수안(守安: 김포 대곶면)∙통진∙김포 등지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한 기록들이 있는 것을 볼 때, 안산 지역이 침탈당 한 것은 두 차례뿐만 아니라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