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인의 삶
스티브 잡스(Steave Jobs, 1955-2011)는 인류에 큰 족적을 남기는 업적의 큰 일을 해내며 엄청난 부를 소유했습니다만, 그의 부는 그의 몸에 뿌리를 내리고서 괴롭히며 생명을 위협하는 췌장암을 없애는데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췌장암을 없애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암을 떨쳐내지 못한 채,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나는 사업에서 성공의 최정점에 도달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런 나의 삶이 성공의 전형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일을 떠나서는 기쁨이라고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부라는 것이 내게는 그저 익숙한 삶의 일부일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병석에 누워 나의 지난 삶을 회상해 보면, 내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주위의 갈채와 막대한 부는 임박한 죽음 앞에서 그 빛을 잃었고 그 의미도 다 상실했습니다. 어두운 빛 안에서 생명보조장치에서 나오는 푸른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낮게 웅웅거리는 그 기계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죽음의 사자의 숨길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야 깨닫는 것은 평생 배 곪지 않을 정도의 부만 축적되면 더 이상 돈 버는 일과 상관없는 다른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건 돈버는 일보다는 더 중요한 뭔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관계가 될 수 있고, 예술일 수도 있으며, 어린 시절부터 가졌던 꿈일 수도 있습니다. 쉬지 않고 돈 버는 일에만 몰두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비뚤어진 인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불행히도 바로 나같이 말입니다.
부에 의해 조성된 환상과는 달리,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감성이란 것을 모두의 마음속에 넣어 주셨습니다. 평생에 내가 벌어들인 재산은 가져갈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가져 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직 사랑으로 점철된 추억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부이며, 그것은 우리를 따라오고, 동행하며, 우리가 나아갈 힘과 빛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사랑은 수 천마일 떨어져 있더라도 전할 수 있습니다. 삶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며 가십시오. 오르고 싶은 높은 곳이 있으면 올라가십시오. 모든 것은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렸고, 우리의 결단 속에 있습니다.
어떤 것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침대일런지요? 그것은 “병석”입니다. 우리는 운전수를 고용하여 우리 차를 운전하게 할 수 있고, 직원을 고용하여 우리를 위해 돈을 벌게 할 수도 있지만, 고용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병을 대신 앓도록 시킬 수는 없습니다. 물질은 잃어버리더라도 되찾을 수 있지만, 절대 되찾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삶”입니다. 누구라도 수술실에 들어갈 즈음이면 진작 읽지 못해 후회하는 책 한 권이 있는데, 다름 아닌 “건강한 삶 지침서”입니다. 현재 당신이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이르렀든지 상관없이 때가 되면 누구나 인생이란 무대의 막이 내리는 날을 맞게 되어 있습니다.
가족을 위한 사랑과 부부간의 사랑,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을 귀히 여기십시오. 자신을 잘 돌보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스티브 잡스는 애플 컴퓨터를 만든 애플사를 창업한 자로 매킨토시 컴퓨터 등 혁신적인 기술과 디자인의 개인용 컴퓨터를 개발해 보급했고, 아이폰을 통해 스마트폰 시대를 이끌었으며, AI 시대가 열리도록 그 기초를 연 사람으로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최고의 천재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으며 인류의 문화와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그가 병상에서 남긴 글을 대하며 사람들은 대단히 인상 깊게 대하니, 참으로 감명적이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달음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1. 스티브 잡스의 글은 회한이 뼈저리게 남는 후회의 글 속에서 자신의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는 자신과 같은 길을 가지 않고, 자신이 진심으로 충고하는 길로 갈 수 있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후회막심으로 인생을 끝맺는 길을 가는 사람이 스티브 잡스 뿐이겠는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종착지에 이르러서 부귀도 권력도 명예도, 이것들로 인한 영화도 덧없음을 토로합니다. 한줌의 재로 돌아가는 것이 사람의 실체인 것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스티브 잡스가 깨달은 그 깨달음에 같은 마음을 갖고 생각을 같이 가져나가고자 합니다. 스티브 잡스가 말한 바와 같이 평생 배 곪지 않을 정도의 부만 축적되면 더 이상 돈 버는 일과 상관없는 다른 일에 관심을 가져야겠으니, 주어진 물질에 만족하고 살아 있으며 건강하며 그래도 움직일 힘이 있을 때 하고 싶은 것을 맘껏 다해 보며 자신들과 관계한 사람들, 그리고 누군가 그래도 나의 도움이 있어야 할 사람들을 사랑과 희생으로 돌보며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2. 이렇게 사람들의 동감을 받는 회한의 후회가 남는 삶을 산 스티브 잡스를 대하며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어떤지요. 우리가 인생의 막을 내리는 시점 어느 날에 이를 때 우리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가족을 비롯한 주위의 사람들에게 글을 남겨 놓는다면 그 내용은 어떤 내용을 담을런지요. 사도 바울과, 루터, 그리고 칼빈의 경우에서 보겠습니다.
(1) 사도 바울 :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6-8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기록한 서신중에서 마지막의 것으로 바울이 로마에서의 옥중에 있을 때 썼는데, 제2차 투옥 때인 A.D. 67년경에 썼습니다. 이 서신에서 바울은,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니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2)루터 : 1546년 2월 17일, 병세에 있었던 루터의 상태는 더욱 중해졌고, 새벽 1시 쯤 그는 고통을 호소하며, 오한으로 흘리는 땀에서 자신이 죽음 앞에 있음을 깨닫고서는 기도를 끊임없이 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비로운 하나님, 당신은 나에게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셨습니다. 나는 그 예수님에 대해서 가르쳤고 예수님 안에서 믿음을 고백하고 그를 사랑하고 나의 구주와 주인으로 영화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 예수님을 대적들은 핍박하고 모욕합니다. 주님 나의 작은 영혼을 받으소서.
루터는 마지막 고통 중에 세 번에 걸쳐서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시편 31:5)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셨던 말씀을 반복하였으며, 자신의 삶과 사역의 기초가 된 말씀 요한복음 3장 16절인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새벽 2시 45분에 조용히 눈을 감아 이신칭의에 의한 구원의 복음으로 일생을 주님의 증인으로 살던 이 땅을 떠나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겼습니다. 루터의 죽음 후 그의 탁상위에는 메모 한 장이 발견되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메모 내용입니다.
5년간 목자로 살지 않았다면 버질의 목가시를 이해할 사람은 없다.
5년간 농부로 살지 않았다면 버질의 농경시를 이해할 사람은 없다.
25년간 폭넓은 교류와 국가사업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키케로의 서간집을 정확하게 이해할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만약 100년 동안 엘리야와 엘리사 같은 선지자들, 세례 요한, 예수님 그리고 사도들과 함께 교회를 섬기지 않았다면 어느 누구도 성경 말씀을 충분히 맛보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버질의 서사시 ‘아니네이스’를 분석하듯 이 거룩한 말씀을 다루지 말고 말씀 앞에 엎드리고 순복해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이다. 이것이 참이다.
(3) 칼빈 : 칼빈은 파렐의 요청으로 1537년 첫 번째에 이어 1541년 두 번째 제네바에서의 사역을 수락하게 될 때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내 자신의 주인이 아닙니다. 나는 내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해 있습니다.”라고 자기 부정의 고백을 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라고 여겼기에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러한 칼빈은 제네바를 향하며 “내 심장(마음)을 죽여서 주님께 희생 제물로 바칩니다. 내 영을 묶어서 하나님께 복종합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는 칼빈의 좌우명이 되어 그의 인장에는 “두 마음 없이 진실하게”라는 라틴어 경구와 함께 “불타는 심장을 들고 있는 손”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한 칼빈은 1558년에 걸린 열병으로 건강이 점차 악화되어 갔으며, 1564년에는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몸이 쇠약해졌습니다. 그런 그는 4월 25일, 마침내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끼며 다음의 유서의 글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네바에 있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인 나 존 칼빈은 내 몸이 여러 가지 질병에 걸려 하나님께서 곧 나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실 것이라고 생각하여 나의 유서를 다음과 같은 형태로 기록해 두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당신의 불쌍한 피조물인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나를 복음의 빛 속으로 이끄시고 그러한 자격이 전혀 없는 나를 구원의 교리를 가르치는 동참자로 만드시려고 내가 빠져있던 무서운 우상 숭배의 소굴에서 끌어내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같은 긍휼을 베푸시기를 계속하시어 여러 번 버림을 받아 마땅한 많은 죄와 허물을 참아 주셨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놀라운 자비를 나에게 베푸시어 나와 나의 능력을 하나님의 복음을 가르치고 알리는 일에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와 같은 믿음 안에서 살고 죽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은혜로 양자 삼으시는 것 이외에 다른 소원이나 위안이 없습니다. 그것만이 나의 구원의 터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주님의 죽으심과 고난의 공로를 내가 지은 모든 죄를 구속하는 수단으로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불쌍한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흘리신 우리의 위대하신 구세주의 보혈을 통해서 나를 씻어 주시고 깨끗하게 하여 주셔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또한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통해서나 저서를 통해서 가장 순수하게 가르치려고 노력했으며 성경말씀을 충실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했음을 선언합니다. 한편 내가 진리를 반대하는 자와 논쟁을 벌일 때에도 결코 못된 꾀를 쓴 적이 없으며 굳건한 믿음이 없이 처신한 적이 없습니다. 반대로 나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수호하기 위해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아아! 내가 말하는 나의 간절한 욕망과 열정은 매우 차갑고 쇠약한 것으로 나 자신과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불안전하다는 것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이 없다면 내가 느꼈던 모든 애정은 한줌의 연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는 내 죄를 더욱 크게 만들뿐이니...
나의 유일한 간구는 자비의 하나님께서 불쌍한 죄인의 아버지가 되시고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밖의 나는 내가 죽은 후에 나의 육체는 축복된 부활의 그날을 기다릴 수 있도록 관행대로 묻어 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5월 27일, 일생을 개혁교회를 세워나가는데 바침으로써 개혁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유산으로 남겼던 그는 마지막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주님의 품에 영원히 안겼습니다.
내가 죽거든 묘비를 세우지 마십시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세울 만한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한 모든 것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나는 비천한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죽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사도 바울, 루터, 그리고 칼빈, 이 세 사람의 글을 보았습니다만, 그 누구에게서도 회한이 가득 찬 후회가 담긴 내용은 없습니다. 주님의 복음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 열정과 수고로 살았으면서도, 주님의 영광에 휩싸이는 부름을 받음에는 한없이 낮춤에 있었던, 그러면서도 교회에 권면하여 주님을 향한 믿음에 순전함으로 있도록 하였습니다.
왜 그런지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스티브 잡스가 한 그런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지 않은 사람, 곧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이 스티브 잡스와 똑같은 심정에서 후회를 하죠. 호주의 간호사가 임종을 앞둔 환자를 대상으로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공통의 특징을 알았습니다. 임종을 앞둔 자는 대체적으로 세 가지를 후회하였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남을 의식하고 체면을 생각하느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남이 원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요, 둘째는 돈 벌고 성공하여 부유하게 살고자 일 밖에는 모르고 죽도록 살았는데, 죽음 앞에 이르고서야 보니 정작 삶에는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가치도 없는 것을 위해 몸을 혹사하였을 뿐이지 정작 삶에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을 위해서는 몸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요, 셋째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의 걱정 때문에 눈치를 보느라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다가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친구와의 우정에 있어가지를 못했고 대인관계의 변화를 꾀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체면과 돈과 남의 눈치만 보면서 살았을 뿐이지 삶에서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산 것을 후회를 하였습니다. 해서, 자신들이 좀 더 생명이 연장되어 살 수만 있다면 이제는 정말 사람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 중요한 것에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것이 정말 어떤 것인지는 모르고 있습니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헛될 뿐이기에(전 1:1-2), 헛되지 않은 참된 것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한 분을 얻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를 아는 것은 성령을 받음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알 수 없기에 알지 못합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주로 섬겨 따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 그리스도인은 말이죠. 위대한 업적을 남긴 스티브 잡스가 일생동안을 깨닫지 못하다가 겨우 죽음 앞에서야 깨달은 것을 벌써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주로 받은 믿음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더 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스티브 잡스는 평생 배 곪지 않을 정도의 부만 축적되면 더 이상 돈 버는 일과 상관없는 다른 일에 관심을 가져야겠으니, 주어진 물질에 만족하고 살아 있으며 건강하며 그래도 움직일 힘이 있을 때 하고 싶은 것을 맘껏 다해 보며 자신들과 관계한 사람들, 그리고 누군가 그래도 나의 도움이 있어야 할 사람들을 사랑과 희생으로 돌보며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만, 그리스도인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4:11-13에서 말씀해 주신 가진 것이 적어 가난하든 가진 것이 많아 부유하든 그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만족하여 살아가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궁핍하여 배고프거나 넉넉하여 배부르거나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힘이시며 강함이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도움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것을 다함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성령의 권능에 의해 살아감에 있는 이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하면서 “날마다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날마다 죽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서는 날마다 산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가난과 부요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난이든 부요이든 그 모두는 주님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으로 그 모두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만을 존귀히 여기며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뜻을 따라 사는 삶을 사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어떤 몸의 일부로 있든 그리스도께로부터 공급받고 있는 은혜의 자원을 온 율법을 동원하여 가르침을 주신 형제를 사랑하는 능력을 행함에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권면하기를,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빌 4:1-10)
라고 권면하면서 그 실천에 있은 자들을 칭찬하며 기쁨을 함께 하였습니다.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빌 4:14-20)
이렇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사는 삶에 자족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들이 자신들이 의지했던 주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품에 영원히 안기게 될 때 가족에게, 그리고 자신과 함께 했던 온 성도들에게 해 주며 남기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회한에 가득 찬 후회를 하며, 그 후회의 길을 가지 말고 그보다 더 나은 삶을 살 것을 남기는 말에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먼지요 티끌에 불과한 미천한 피조물을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살게 하여 주님의 영광에 참여함에 있는 부름에 있게 하신 기쁨에 의해 감사로 응하면서 주님의 품에 달려들어 안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그리스도인을 세상이 이기지 못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워낙 힘세고 강해서 세상이 어쩌지 못하여 이기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를 바울은 가장 약한 자라고 하였습니다(고후 13:9). 세상은 그들을 미련하고 모자르며 어리석은 자라고 몰아붙입니다. 그렇게 약한 자들인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들어옴으로써 세상이 그들을 이기지 못하는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 됩니다. 그들의 힘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주어져 발휘되어 세상을 이겨나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약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세상이 이기지 못하는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으로 변화됨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낙인찍혀 있는 그리스도의 소유된 사람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녔다고 표현했습니다(갈 6:17).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달려들어 그리스도를 매단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이기지 못했듯이 몸에 흔적으로 지닌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을 어느 유대인과 이방인도 이기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조상 때부터 계속되어 온 유대인의 박해와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되어 10대에 걸친 로마 황제의 박해 사건입니다.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맹수에게 찢겨 죽게 하는가 하면,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기도 하고, 콜로세움 꼭대기에 - 또는 네로 황제의 정원에 나무를 세워 - 기둥에 묶어 놓고 기름칠을 하고는 야간 경기장에 인간 횃불로 삼아 화형시킬 때 그 무서움과 두려움이 치솟는 불길 앞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늘을 우러러 그리스도를 바라보아 찬송하며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막시미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도인의 신체를 절당하고 채석장에 보내어 강제 노역을 시키기까지 하기도 하였습니다만, 그 박해의 현장인 채석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세우고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이러한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경이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1. 5:4)
해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여 준 바인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리고 디모데에게 말하여 준 바인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니라”에 있으시길 주께 구합니다. (*)
* 2021년 6월 20일 - 27일 주일예배. 본 글은 '신약성경'의 빌립보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