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10. 무태·연경동의 인천이씨 재실
글·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대구에는 예로부터 ‘일파이무(一巴二無)’ 혹은 ‘일무이파(一無二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대구에서 사람살기에 가장 좋은 곳이 파동과 무태라는 뜻이다. 이를 파동에서는 일파이무, 무태에서는 일무이파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말은 대구의 선사시대역사와도 그 궤를 같이 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대구 최고(最古)의 선사시대 유적지는 2만 년 전의 구석기 유적지인 달서구 월성동이고, 그 다음이 바로 신석기 유적지인 파동과 무태이기 때문이다. 이중 특히 무태는 대구의 문중(門中) 문화, 유가(儒家) 문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굉장히 독특한 지역이다. 대구에서 특정 지역 안에 특정 문중의 재실들이 가장 많이 산재해 있는 곳이 무태·연경이기 때문이다.
김해김씨·허씨·인천이씨
일간지에 종종 ‘가락종친회’ 광고가 실리곤 한다. 가락종친회란 김해김씨·허씨·인천이씨, 세 성씨의 통합 종친회를 말한다. 이는 세 성씨가 모두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후손이라는 보학적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김해김씨는 김수로왕의 ‘김씨’ 성을 따른 후손이요, 허씨는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許黃玉)의 ‘허씨’ 성을 따른 후손이다. 여기에 인천이씨가 더해진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인천이씨의 시조는 고려 현종 때 상서좌복야를 지낸 이허겸(李許謙)이다. 선대는 가야국 김수로왕의 둘째 아들로 본래의 성씨는 어머니인 허황옥의 성을 따라 허씨였다. 허씨에서 이씨로 처음 성씨를 획득한 득성조(得姓祖)는 신라시대 때의 인물인 이허기(李許奇)다. 그는 신라의 아찬 벼슬로 사신이 되어 당나라로 들어갔는데, 때마침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 당 현종이 촉나라로 피신을 할 때, 이허기가 위험을 무릅쓰고 호종한 공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나중에 현종으로부터 황제의 성씨인 이씨를 하사받아 ‘허기’에서 ‘이허기’가 된 것이다. 이허기가 신라로 돌아오니 왕이 공로를 치하하며 벼슬을 상서좌복야 상주국개국후(上柱國開國侯) 소성백(邵城伯)에 봉하고 식읍 1,500호를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이허기의 자손들이 소성부에 터를 잡고 인천을 본관으로 삼아 대를 이어오고 있으니, 소성은 곧 지금의 인천이다.
무태·연경의 인천이씨 공도공파
인천이씨(仁川李氏) 분파는 크게 ‘장화공파·상서공파·문간공파·문충공파·쌍명재공파(雙明齋公派)·시중공파·공도공파(恭度公派)’ 등이다. 이중 무태·연경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파는 공도공파다. 공도공파는 인천이씨 14세(世) 오천(烏川) 이문화(李文和·1358-1414)를 파조로 한다. 오천 선생의 자는 백중(伯中), 호는 오천, 시호(諡號)는 공도다. 선생은 고려 말 우왕 때 진사시에서 장원을 한 인물로 예문관대제학·대사헌·형조·예조·호조판서·좌참찬의정부사 겸 성균관지사·개성유후·경기·영남·호서·서북면의 관찰사 등을 두루 지냈다. 선생은 1414년(태종 14) 향년 57세로 졸하였는데, 이때 태종은 3일간 조회를 철폐하고 왕명으로 장례를 치루게 했으며, 선생을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증직하고 공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선생의 후손들이 지금의 무태·연경에 터를 잡은 것은 선생의 8세손인 태암(苔巖) 이주(李輈·1556-1604)로부터이다. 그의 자는 경임(景任), 호는 육휴당(六休堂) 또는 태암이다. 그는 아버지 이문성과 어머니 창원황씨 사이에서 지금의 수성구 파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팔공산 자락의 용진리(龍津里)를 거쳐 15세 때인 1570년(선조 3)에 무태에 정착, 이후 그의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였으니 이른바 인천이씨 무태 입향조다. 그는 23세 때 육휴당을, 27세 때 환성정(喚惺亭)을 건립했으며, 생원·진사 두 시험과 동당시에서 모두 장원을 하여 한때 ‘삼장원’이라 칭송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는 팔공산에서 여러 인물들과 함께 의병 창의하여 공사원 겸 대장으로 활약했다. 전란 이후에는 황폐해진 대구지역의 문풍을 일으키기 위해 대구향교와 대구 최초의 서원이었던 연경서원 재건에도 앞장섰다. 대구지역 유학 계보로 볼 때 그는 낙재 서사원·모당 손처눌 등과 함께 조선 중기 대구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무태에 연고를 두고 있는 인천이씨는 대부분이 이들의 후손이며, 서변동에 이 두 인물을 모신 서계서원(西溪書院)이 있다.
무태·연경의 인천이씨 재실현황
에필로그
지금의 무태·연경은 1990년대부터 시작된 대규모 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해 옛 전통촌락으로서의 모습은 대부분 잃어버렸다. 하지만 살펴본 것처럼 아직도 골골마다 인천이씨 문중의 재실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다가 아니다. 무태·연경에는 인천이씨 외에도 능성구씨·인천채씨·하빈이씨·달성배씨·경주이씨·동래정씨 등의 문중 재실이 10여개가 더 있다. 이런 까닭에 무태·연경을 대구의 문중문화·유가문화를 대표하는 지역이라 해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참고로 무태·연경과는 도덕산을 경계로 북쪽에 자리한 도남동[국동]에도 400년 내력의 인천이씨 한 파문중이 세거하고 있다. 쌍명재(雙明齋) 이인로(李仁老·1152-1220) 선생을 파조로 하는 쌍명재공파 후손들이다. 이곳에도 역시 남호정사·유화당·정효각과 같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서계서원 숭덕사, 오천 이문화(좌), 태암 이주(우)
첫댓글 대구향교신문에도 실렷더군요!
덕분에 공부잘합니다
네^^
송강 선생님
감사합니다. 연경동 도덕마을에 선생님 선조를 기리는 복현재가 있죠^^ 동래정씨
예 그렇읍니다
복현동에서 도시개발로 옮겼읍니다
제실 윗쪽 골지기에 임하공의 손자이신. 鄭 諱 綺 선조 (경현당14 현중한분)님과 그아래 묘소가 있읍니다
네..
역시 그랬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