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역유행(不易流行) / 맹난자
수필 쓰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대두된다.
무엇을 쓸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
수필은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룰 수 있다. 그러나 존재론적인 주제의식이 있어야 한다. 중국의 저 소동파는 겨우 몇 백 자로서 우주 가운데 인간의 왜소함과 자연의 무궁함을 대비시키며 인간과 자연, 순간과 영원, 변화와 불변(不變)을 <<주역>>의 설리(設理)로서 풀어내고 있다. 우주의 본체와 현상을 설명하지 않고 문학적 기법을 통해 이를 아름다운 산문으로 직조해내었다. 바로 <적벽부(赤壁賦)>다.
"그대는 저 물과 달을 아는가? 흘러가는 것은 이(물)와 같다지만 그러나 일찍이 가는 것만이 아닌 것을, 가득 차고 비는(盈虛) 것이 저(달)와 같으나 마침내 소장(消長)할 수 없음이라."
사계절의 순환, 계절은 변하되(變易) 그 운행의 질서나 만물을 변하게 하는 그 이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불역(不易)인 것이다. '만물과 나는 영원한 것을, 어찌 인생이 짧다고 비탄에 잠길 필요가 있겠는가?' 라는 것이 그의 우주관이자 사생관(死生觀)이었다.
수필은 뜻글이다 위의 글과 같이 '뼈대"가 있어야 한다 앞으로 우리가 수필 쓰기에 있어 지향해야 할 바라고 생각된다. 나는 무엇보다 위의 글에서 '변역'과 '불역'을 주목한다.
고금이래로 변하지 않는 기본적인 인간의 삶과 우주의 도(道), 그러나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는 현상(變易)을 수필 작법에 접목해본다. 바뀌지 않는(不易) 도의 본체나 예술의 본질은 중심축으로 놓아두고, 표현 방식은 유행하는 시대에 따라 늘 새롭게 바뀌어야(變易)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더하게 된 것은 요즘 TV에서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를 보면서였다. 원곡보다 재창작된 편곡이 더 좋을 때가 많았다. 지금의 사람들 정서에 맞게 변주된 노래들,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거구나 하는 신선한 충격. 그것은 변주(變奏)라는 표현 방식에 따른 것이었다.
수필에 있어서도 글감에 대한 작가의 해석과 변주 능력이야말로 작품의 성패를 가름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나만의 독창적인 표현 방법으로 변주해내는 발성(發聲)과 화음, 이런 감성이 '불역유행'이 아닐까 한다.
프랑스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1915~1980)도 문학의 모든 조건을 '베리에이션(變奏)'으로 설명한 바 있다.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그의 답도 역시 '변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