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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BBC 방송이 얼마전 24세의 청년 앤드류가 고교시절 광우병에 노출된 쇠고기를 먹고 병에 걸려서 작년 12월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다시 방송을 했다고 한다.
인간 광우병이라는 치료약이 없는 신종 바이러스 때문에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면서 지금 이런 사실들이 광우병이 처음 시작된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고 동물성 사료를 먹은 미국 늙은 소들이 한국에 유통되면 우리 나라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면서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고 한다.
작년 10월 울산에서 인간 광우병으로 의심되는 질병에 시달리다가 사망한 사건이 이제야 알려져서 더욱 두려움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다시 방영한 이유는 한국이 미국의 쇠고기를 전면 개방하는 것에 합의한 것을 겨냥해서 보도를 한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에 걸렸는데 거의 5년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하다니..
정말 끔찍한 것 같다.
어린 시절 앤드류
더 확실하고 정확한 정보를 위해서 위에 "물빛그림자"님께서 올려주신 글을 퍼서 수정했습니다.
* 며칠전 이곳에선 본 영국 BBC NEW 기사를 번역 해보았습니다. 인간 광우병으로 죽은 아들의 어머니가 직접 쓴 글을 읽으니 저같이 무덤덤한 사람도 슬퍼지더군요;;;
영국의 24세 청년인 앤드류 로드는 2007년 12월 인간 광우병으로 죽었습니다. 앤드류 로드는 2006년 말 우울증이라는 오진을 받을때까지 아무런 증상을 보이지 않았으나, 인간광우병 진단을 받은 2007년 7월에는 이미 제대로 걷거나 물건을 쥐는 단순한 일도 할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 크리스틴 로드는 앤드류가 학교 급식에 의하여 인간광우병에 걸렸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녀는 전 영국 농림부 장관인 존 거머 (John Gummer, 딸과 함께 방송에서 쇠고기햄버거를 먹는 쇼를 보여주며 쇠고기가 안전하다고 주장하였으나 작년 그의 절친한 친구의 딸이 인간 광우병으로 숨지는등 영국의 인간 광우병 환자가 늘어나자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음.)를 비난하며 그의 책임을 묻고 있으나 아무도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녀는 현재 인간광우병 관련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래는 이틀전 5월 3일에 영국 BBC NEWS에 실린 그녀와 그녀의 아들에 관한 "My lost boy" 라는 기사입니다.
* 참고기사 - BBC NEWS, "Bid for answers over son's death"
http://news.bbc.co.uk/2/hi/uk_news/england/hampshire/7380593.s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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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ost boy
Christine Lord, the mother of Andrew, who died of variant CJd, reveals how her son fought the illness with courage and dignity in this personal and moving account of his death and its impact on her family.
인간 광우병 (vCJD)으로 죽은 앤드류의 어머니 크리스틴 로드는 아들의 죽음과 그 죽음이 그녀의 가족에게 가져온 충격에 대하여 직접 쓴 감동적인 글에서 어떻게 그녀의 아들이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품위를 지키며 용기있게 병마와 싸웠는지 보여준다.
I was asked to write some words about Andrew and words are my profession. They usually fall seamlessly from my fingers to the keyboard.
앤드류에 대하여 무언가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글쓰는 것은 나의 직업이다. 대개 글을 쓰게 되면 내 손가락에서 단어들이 키보드로 끊임없이 솟아나온다.
But how does a mum write about her on-ly son who has died at just 24-years-of-age of vCJd?
그러나 하나뿐인 스물 네살된 아들을 인간광우병으로 잃은 엄마가 무엇을 어떻게 쓸수 있을까?
From the age of four Andrew told me he wanted to work in television and radio, and he never wavered from that career path.
4살때부터 텔레비젼이나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던 앤드류는 자신의 꿈을 한번도 바꾸지 않았었다.
At 14 he started spending every school holiday and weekend at Talk Radio in London.
14살때 앤드류는 방학과 주말마다 런던의 토크 라디오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He even sneaked up to work at the studios in Oxford Street when he should have been at school.
학교에 가야할 시간까지 옥스포드 스트리트에 있는 스튜디오에 일하러 몰래 다니기도 했었다.
Andrew, who had been shy and determined as a small boy, had blossomed into a teenager who was holding his own in the fast paced environment of a radio newsroom.
수줍지만 단호한 성격의 소년이었던 앤드류는 빠르게 움직이는 라디오 뉴스룸의 환경에 적응 하며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청소년으로 자라났다.
He was offered work alongside some of the best professionals in the business.
그는 방송계의 몇몇 최고의 프로들과 함께 일하는 자리를 얻게 되었다.
Fresh-faced and young, he was refused entrance to the Café de Paris during an outside broadcast.
새로 들어온 젊은 앤드류는 외부취재를 위해 카페 드 파리스 클럽에 들어가려다 (미성년자처럼 보여) 입장이 거부되기도 했었다.
It was on-ly when the founder of talkSPORT, Kelvin Mackenzie, intervened that Andrew was allowed to enter the club.
talkSPORT의 창립자인 켈빈 맥켄지가 나서 겨우 클럽에 들어갈 수 있었다.
That night Andrew wore his first suit, which never quite fitted and always looked too big.
그날 밤 앤드류는 그에게는 항상 너무 커보였던 그의 첫번째 양복을 입었다.
This is on-e of a thousand happy and joyful memories I have of Andrew. His light shone so brightly, if on-ly for a while.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앤드류에 관한 수없이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들 중 하나이다. 비록 잠시 동안이었지만 그의 재능은 정말 밝게 빛났다.
Producing shows for a long list of celebrities and making countless friends, Andrew's life was increasingly busy and fun.
많은 연예인들에 관한 쇼를 만들고 셀수 없이 많은 친구들을 만들어가며 앤드류의 삶은 점점 더 즐겁고 바빠졌다.
He worked in Manchester, London and Birmingham, and there was always a new project, programme or show.
그는 맨체스터와 런던, 버밍햄에서 일했고 항상 새로운 계획과 프로그램, 쇼가 함께 했다.
He began to branch out into television, working on quiz shows like Test the Nation, as well as working for CBBC, ITV and Sky.
앤드류는 텔리비젼까지 진출하게 되어 CBBC와 ITV, Sky에서 일했을뿐 아니라 "테스트 더 네이션" 같은 퀴즈쇼에서도 일하게 되었다.
His capacity for work was huge and, because he loved his chosen career so much, it was never a chore.
그는 그가 선택한 직업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에 단 한번도 힘들어하거나 지겨워 하지 않았고 그의 일에 대한 능력은 대단했다.
Andrew was handsome, violet-eyed, designer-dressed and, like many young men, very fussy about his hair and appearance.
잘생긴 얼굴에 보랏빛 눈동자, 옷도 멋지게 입었던 앤드류는 다른 많은 젊은 남자애들처럼 머리 모양과 외모에 매우 신경쓰곤 했다.
By the aged of 20, he had already worked in the media for six years and this experience and professional maturity had already earned him the title "legend of the desk".
스무살 무렵, 그는 이미 6년동안이나 방송언론계에서 일했고 그의 이런 많은 경험은 그에게 "편집부의 전설"이라는 별명을 가져다 주었다.
On his 21st birthday Andrew said to me: "When I am head of the BBC I'll buy you a sports car mum".
그의 스물 한살 생일날 앤드류는 내게 말했다. " 엄마, 내가 BBC의 사장이 되면 엄마에게 스포츠카를 사줄께."
Although I laughed, I believed my son had a very successful career and life ahead of him.
비록 그 당시에는 웃어 넘겼지만, 나는 내 아들이 앞으로 성공적인 직업과 삶을 가지리라 믿었었다.
So when Andrew started to work less, spend more time alone in his room and withdraw from family life, I was concerned.
그래서, 언젠가부터 앤드류가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방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기 시작했을때 나는 걱정스러웠다.
The headaches, monosyllabic conversations and dramatic weight loss led to many trips to the GP, who diagnosed depression.
두통, 한마디의 짧고 퉁명스러운 대화 그리고 엄청난 체중 감소로 병원을 향하게 되었고, 의사는 우울증이라고 진단했다.
By March 2007 Andrew could no longer work and he couldn't deal with correspondence or phone calls.
2007년 3월경이 되자 앤드류는 더 이상 일할수 없게 되었고 전화등으로 다른 사람과 대화할수 없게 되었다.
Everything just seemed too much for him.
모든 것이 그에게는 너무 힘겨워 보였다.
Andrew was not on-ly withdrawing from me, he seemed to be distancing himself from the world.
엄마인 나만 멀리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모든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The deadly disease that had been incubating in his body for many years was developing.
오랫동안 그의 몸속에서 배양되고 있던 죽음의 병이 자라나고 있었다.
Andrew was not depressed… he was dying.
앤드류는 우울증이 아니었다...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The year 2007 is a blur of hospitals, tests and invasive procedures.
2007년 한해는 병원과 검사 그리고 외과적 처치들로 얼룩져있다.
Lumbar punctures, tonsil biopsy, brain scans, blood tests.
요추천자, 편도 생검, 뇌스캔, 피검사.
The weeks of uncertainty were followed by the dreadful diagnosis.
몇주 동안의 결과를 알수 없는 불안감은 결국 끔직한 검사 결과로 마무리지어졌다.
Then there were the long months of holding his hand through the days and nights of terror, which is the reality of dying from vCJD.
그 때부터 기나긴 몇 달 동안 앤드류의 손을 잡고 인간광우병으로 죽게 된다는 현실에 대한 공포의 밤과 낮을 보내게 되었다.
I put on my most reassuring smile until it became fixed, although it hid a deep sadness.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그 뒤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있었다.
Andrew's debilitating symptoms grew hour by hour, each ticking of the clock producing another disablement, another torture, pain or fear.
앤드류의 증상은 시계 바늘이 움직일때마다 새로운 마비 증상과 고통, 아픔, 공포를 자아내여 매시간
악화되었다.
When he had to use a plastic drinking beaker for the first time, as he couldn't co-ordinate his hands, Andrew told me: "Mum I will on-ly use this in the house and until I'm better".
손을 움직일수 없게 되어 처음으로 플라스틱 음료 비이커를 사용해야만 하게 되었을때 앤드류는 내게 말했다 : "엄마, 나 이거 나을때까지 집에서만 사용할래요."
I smiled and agreed, but inside my heart was breaking.
나는 미소를 보이며 그러라고 했지만, 가슴 속은 찢어지고 있었다.
Andrew was as determined as ever.
앤드류는 언제나처럼 굳은 의지를 보여줬다.
He would say: "I must be able to walk", until he couldn't take a single step.
한 걸음도 뗄 수 없게 될때까지 앤드류는 말하곤 했다 : "나는 걸을 수 있어."
Then he would say: "I must be able to go out to do simple things like watching and hearing the sea", until he was unable to go outside.
그후 집 밖에 전혀 나갈 수 없게 될때까지 그는 말했다 : "밖에 나가 파도 소리를 듣고 바다를 바라보는 일정도는 분명히 할 수 있게 될거야."
And finally: "I must be able to talk", until he could no longer put a word together, or even move the muscles in his face.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어 한 마디 말할 수 없게 될때까지, 아니 얼굴의 근육조차 움직일 수 없게 될때까지 : " 난 말 할 수 있어."
I filled our home with his friends, music, activity and noise, pretending to be upbeat and unafraid.
즐거운척 두려워 보이지 않기 위해 앤드류의 친구들을 집에 부르고, 음악과 놀이, 왁자지껄한 풍경으로 집안을 채웠다.
Andrew looked to me for reassurance to allay his fears. He trusted me and I hope I didn't let him down.
앤드류는 내가 그의 공포를 가라앉혀주기를 바랬다. 그는 나를 믿었고 나는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When he woke in the morning, I was the first person he saw. And I was the last person he looked at before he closed his eyes at night.
앤드류가 아침에 깨면 제일 먼저 나를 볼 수 있었고, 밤에 눈을 감기전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도 나였다.
While Andrew slept, I would sit in a chair next to him reading research, scientific data and the many volumes of the BSE inquiry, looking for answers to my many questions.
앤드류가 자는 동안 나는 옆의 의자에 앉아 광우병에 대한 나의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 리서치 자료들과 과학 자료들, 그리고 많은 양의 광우병 연구서들을 읽었다.
This resulted in the Inside Out programme and my campaign for justice for Andrew.
"인사이드 아웃" 프로그램과 앤드류를 위한 정의 캠페인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My fury at watching my gentle son die so terribly has increased my tenacity and it drives me forward through the most difficult time of my life.
착한 내 아들이 공포스럽게 죽는 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던 나의 분노는 나를 더욱 집착하게 만들었고 내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며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
Andrew had a terrible, noisy and distressing death.
앤드류는 끔찍하고 소란스럽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For four days and nights, I held my son as he fought to stay alive.
4일 낮과 밤동안 내 아들이 살기위해 싸울때 나는 그를 안고 있었다.
Although Andrew's brain had been systematically destroyed by vCJD, his 24-year-old body refused to give up.
비록 앤드류의 뇌는 인간광우병에 의해 조직적으로 망가졌지만, 그의 24년된 육체는 포기하기를 거부했다.
His heart was strong.
그의 심장은 강했다.
I held him as his body continually shook the iron bed that had become his home.
앤드류가 온몸으로 그의 집이 되어버린 철제 침대를 뒤흔드는 동안 나는 그를 안고 있었다.
Despite the morphine, his rattling breaths filled my bedroom. Those last images of my Andrew are burned on my soul and broken heart.
모르핀 주사도 소용없이 거르렁거리며 거칠게 내뱉던 그의 숨소리가 내 침실을 채워버렸다. 나의 앤드류의 이 마직막 모습들이 나의 영혼과 심장에 불타고 있다.
I believe that many people are responsible for my son's avoidable death and that none of them have been held accountable.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내 아들의 피할수 있었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믿지만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Please join me in my campaign for justice for Andy.
앤디를 위한 나의 정의 켐페인에 참여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last updated: 03/05/2008 at 11:19
출처 http://www.bbc.co.uk/insideout/content/articles/2008/05/01/south_cjd_s13_w10_feature.s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