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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86년 봄
계성의 봄빛은 이미 완연했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샛노란 빛깔과 붉은 색채로 선남선녀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기쁘게 하기에 충분한 춘삼월 맑은 날이다.
이루하의 속삭임을 들은 후 무언가에 강력히 이끌린 조영은 새벽에 일어나, 말끔한 차림을 한 후 가볍게 말에 올라탔다. 유주 서남쪽 삼분산三盆山에 있다는 파사사를 향해 말을 몰았다.
고가장에서 삼분산의 파사사까지는 사백여리 길이다. 조영은 무리할 정도로 말을 몰아,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서, 파사사가 있다는 삼분산에 사흘이 지나고 나흘 째 되는 날 해가 높이 뜬 후에야 도착했다.
“파사사에 가거든 꼭 고양원 대덕님을 만나 뵙고, 다른 건 몰라도 반드시 하나님과의 교통법에 대해 자세히 묻고 오너라.”
이것은 조영이 집을 나서기 전 그의 조부 고승이 부탁한 말씀이었다.
조영도 신교神敎(우리민족 전통 하나님신앙) 전래의, 호흡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통법과, 경승들의 수행법이라는 기도법의 차이가 무엇인지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을 가장 설레게 한 것은, 아리따운 소녀 이루하가 왜 자신을 다시 만나자고 다짜고짜 요청했는가 라는 기분 좋은 의문이었다.
그가 삼분산三盆山 아래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오정 전이었다. 아름다운 산세의 맑고 울창한 숲에서 향긋한 초목 내음이 물씬 풍겨온다.
산자락에서는 한 가닥 맑은 샘물이 사시사철 끊임없이 흘러내리는데, 계곡물은 가는 도중 세 개의 작은 연못과 조우한다. 이것은 마치 한 가닥 은실이 세 개의 진주를 꿰뚫고 지나가는 것 같다고 하니, 이는 미려한 은유를 읊기 좋아하는 시인들의 말이 아니겠는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대진사의 종소리가 산울림을 짓는 것 같다. 올려다보니, 거대한 건축물이 비교적 평탄한 대지 위에 서 있었는데, 도교나 부도교의 사찰들과는 달리, 종탑의 위에 열십자 모양의 큰 장식물이 우뚝 솟아 있다.
대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처음 보는 문양이 눈에 띄었다. 커다란 물고기 두 마리가 위로 솟구치는 듯한 자세로 서로를 바라보며 그려져 있었고 두 물고기 사이에는 탑 같기도 하고 떡을 올려 쌓아놓은 것 같기도 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현판은 웅휘한 자태로 사원의 이름을 드날리고 있다.
十 字 寺 십 자 사
‘십자사?’ 불가나 도가의 사원과 달리 이름이 특이하다.
유주 서남의 이 경교 사원은 당나라 때부터 후대인 요나라 때까지 숭성원崇聖院이라 불리고, 그 후 원나라 때 황제의 칙령으로 “십자사”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고 하나, 당초唐初부터 원래 십자사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안으로 발을 들여 놓으니, 사원은 드넓은 뜰을 갖추고 웅장하게 건축되어 있었다. 그가 대진사 경내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모여드는 사람들과 한데 섞이었다. 조영은 사환에게 말을 맡긴 후, 사람들을 따라서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건물의 현관을 지나 출입문 안으로 들어서니 백여 간間은 될 듯한 드넓은 교당 안에 사람들이 많이 차 있었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남자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니, 전면 벽에 한 폭의 큰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아주 기이한 풍모를 풍기는 인물화였다. 그 좌측에는 “메시아彌施訶 경존지상景尊之像”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두리번거리는 사이 웅장한 음악성과 함께 누군가가 전면의 제단 위에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그는 사흘 전 자신의 집에 찾아왔던 대덕 고양원이었다. 그의 모습이 이전보다 한 층 더 자애롭고 평온해 보였다. 그의 집례로 경교의 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식이 거행되었다. 예식이 필한 후 경승 고양원은 문 밖으로 나와 일일이 모든 신도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조영은 문 밖에서 경승 고양원과 독대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다 흩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부 고승의 부탁으로 그에게 몇 가지 문의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루하라는 여인이 자신을 여기로 부른 이유가 무얼까라는 상념이 두뇌를 온통 지배하는 가운데, 눈길은 그녀를 찾고자 여인들의 자태를 은근히 살피고 있었지만.
그는 현관 문 밖의 뜰에서 이리저리 거닐며 그녀의 그림자를 찾고자 전후좌우 위아래를 두리번거렸다. 하늘의 밝은 태양은 중천에 빛나고, 대지의 화사한 꽃들은 지천地天에 환하다. 그는 새삼 하늘과 꽃과 봄바람의 향기를 맡아보았다.
십자사의 경내에는 무언가 포근하고 맑은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기분 좋은 어떤 평화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지, 땅에서부터 솟아오르는지 그의 가슴을 적신다.
그 때다. 그의 시선이 별안간 어느 한 방향에 고정되었다.
보라!
새하얀 고려 옷을 입고 머리에 백색 너울을 쓴 채 사뿐사뿐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한 여인의 그림이 당장 조영의 시선을 전투 매처럼 사정없이 낚아채 버렸다. 깜짝 놀란 조영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루하?’
분명히 아니었다. 그녀도 조영을 그윽이 응시하더니 사뭇 놀란 듯 잠시 발걸음을 멈칫 거리다가 이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그에게로 걸어왔다.
조영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토록 신비롭고 아름다운 분위기의 여인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루하도 절세가인이라 할 만큼 대단히 어여쁜 여인이지만, 이 백의여인은 그녀와는 색다른 향기를 풍기며 그녀와 도저히 비견할 수 없는 어떤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조영은 심호흡을 하고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여기 저기 봄꽃이 만발한 게 시야에 대충 비치고 형형색색의 의복을 입은 다양한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설마 나를 만나러 오는 것은 아니겠지?’
조영은 딴청을 피우며 은근한 곁눈질로 다시 그녀의 자태를 살펴보았다. 그녀와 자신의 거리가 약 삼십 보 밖으로 좁혀져 있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얼굴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갸름하고 새하얀 얼굴에 반듯한 눈썹과 눈, 콧날이 유달리 돋보이고 입술에는 약간의 미소가 감돌고 있었는데, 이목구비가 전반적으로 매우 아름다운 대칭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의 낯은 다소 수줍어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조영은 과거에 경국지색이니, 만세절색이니, 국색선녀國色仙女니 하는 등등 동서고금의 미녀들에 대한 얘기를 숱하게 읽거나 들어보았지만 도대체 경국지색이 무엇인지를 실감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여인을 보면서 그 낱말의 의미가 가슴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조영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속세에 이토록 아름답게 빼어난 여인도 있었던가? 그는 자신의 눈과 인식 틀을 의심했다. 혹시 이 신비로운 십자사 경내에 하늘의 선녀, 아니 하늘의 천사라는 미지의 존재가 정말로 하강한 것인가? 그의 마음을 무엇보다도 단번에 강렬히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고고하고 신비롭고 찬연하고 엄장한 기품이었다.
얼핏 보면 매우 가녀린 한 떨기 난초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환꽃(무궁화)처럼 수수하기도 하고, 달리 보면 모란마냥 마음을 한 없이 잡아끄는 부귀롭고 매혹적인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몸에서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엄숙하고 장엄한 기품이 느껴졌다. 그녀의 고고하면서도 화려 영묘한 얼굴 빛 때문에 여기저기 흐드러진 봄꽃들이 무색해 보인다.
조영은 그녀가 설마 자신을 만나러 오리라고는 믿지 않았으므로 그녀를 향해 대각선 방향으로 선 채 그녀의 동선動線을 따라서 그의 고개와 시선을 언뜻언뜻 움직이며, 그녀의 길을 남몰래 추적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조영이 서있는 곳을 지나쳐 어디론가 가려는 듯 조영이 있는 곳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조영은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고 다시 심호흡을 한 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하지만 가슴의 울림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일고경국一顧傾國, 천향국색天香國色이라는 문구로도 묘사하기 힘든 백의녀의 신비 기오한 그림자가 조영 앞으로 점점 더 다가왔다. 조영은 경황이 없는 중에도 그녀의 아름다운 의복에 시선을 주었다.
발까지 끌리는, 푸른빛이 은은히 감도는 기다란 백색 치마 위에 역시 풍성한 흰빛 상의를 걸쳤는데, 허리에는 연분홍색 띠를 두르고 있었고, 옷깃과 소매에도 연분홍색 띠가 둘려 있었다.
상의의 한쪽 가슴에는, 분홍색 환꽃 한 송이와 진분홍색 모란화 한 봉오리가 서로 의지하는 모양새로 아름답게 수 놓여 기이한 조화를 갖춘 가운데, 그녀의 기품을 은근히 드높인다.
두근거리는 조영의 가슴은 사실 그녀의 외모를 세세히 파악할 경황이 없었으나 기이하게도, 뇌리의 중앙에 새겨질 만큼 그녀의 모든 자태가 세세하게, 순식간 두 눈에 들어왔다.
조영은 옆으로 가만히 비켜서서 그녀의 길을 터주면서 그녀의 얼굴을 다시 흘끔 쳐다보았다. 아직은 시원한 기운이 감도는 이른 봄인데도 웬일인지 그녀는 이마에 약간의 땀이 밴 듯 이마가 번들거렸다. 부드러운 곡선미의 그 이마에 말할 수 없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기품이 넘쳐나 양 눈썹과 두 눈을 충만히 휘두르고 있었다.
그녀가 곁으로 다가오자 향긋한 냄새가 조영의 가슴을 저미도록 풍겨왔는데, 그토록 맑고 향기롭고 그윽한 여인의 방향芳香은 머리털 나고 처음 맡아보는 것 같았다. 어찌 회상하면, 그가 아주 어릴 적에 느낀, 곱고 아름다운 추억 속에 있는 그의 어머니의 향내와도 유사한 듯했다.
그 당시로부터 일백 여년 후인, 신라 원성왕(재위 785-798) 때의 왕족 미녀 김정란金井蘭이 나라에 둘도 없는 절세의 국색國色으로서 몸에서 향기가 났다고 하더니<삼국사기/신라본기>, 아마 이 여인도 몸에서 그와 유사한 천상적 향취를 풍기고 있었던가 보다.
조영은 그 향기로움에서 기이한 모성애 같은 향수鄕愁가 느껴져 속으로 깜짝 놀라며 마음을 평온하게 가지려 애썼다.
조영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돌이켜 그녀를 외면하며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 때다.
“나리!”
어디선가 매우 맑고 곱고 아름다운 여인의 음성이 아주 침착하면서도 약간 떨리는 듯한 고려 말로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매혹적이었든지, 그렇지 않아도 가슴이 떨리고 있던 그는,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약과에 불과했다.
누가 누구를 부르는지 몰라 두리번거리다가 조영은 대경실색하고 말았다.
방금 전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사뿐히, 천천히 걸어오던 그 백의 선녀 같은 여인이 자기 우측 대각선 방향에 약 십 척의 간격을 두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땅에 짚고 자신을 향해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닌가?
‘설마 그녀가 나에게?’
소스라치게 놀란 조영은 그녀의 절을 받는 주인공이 누구인지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주변 삼 장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목소리의 임자가 누군지도 알 수 없었으나 사위를 둘러보니 분명히 그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목소리는 바로 그녀에게서 나온 것 같았다.
조영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다시 그 음성이 들려왔다.
“나리!”
그 목소리가 땅을 한번 울리고 꽃향기를 감싼 후 가볍게 솟아올라 조영의 귀까지 도달하는 것 같은 착각이, 조영의 심령에서 일었다. 분명히 그 화용월태花容月態 백의녀에게서 나오는 목소리였다.
조영은 마침내 용기를 내어 본국어로 물었다.
“아가씨, 혹시 저를 부르셨습니까?”
그렇게 물으면서도 조영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토록 고귀하고 아름다운 여인, 일국의 황녀인 듯한 천상적인 미의 소유자가 설마 자기 종처럼 자기 앞에 엎드려 자신을 “나리!”라고 부를 리는 절대로 없을 터였기 때문이다.
“나리! 나리께서 고가장에서 오신 고조영 공자님이신지요?”
다시 한 번 혼백을 뒤흔들 듯한 아련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고려 말로 울려 나왔다.
“네, 그렇습니다만, 아가씨는 누구를 찾으시는지요?”
조영은 떨리는 가슴을 억압하며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으나, 목소리의 진동을 숨길 수 없었다.
“나리, 바로 나리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천한 종이니, 존댓말을 쓰지 마십시오.”
‘뭐라고! 아가씨께서 천한 종이라고?!!!’
조영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큰 소리를 지를 뻔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타고, 그녀의 몸에서부터 맑고 기이한 향기가 끊임없이 조영의 후각을 자극해 조영은 도취할 것 같았다. 조영은 몸을 돌리며 술 취한 사람처럼 약간 비틀거리다가 자세를 바로잡고 물었다.
“아가씨, 제가 고조영입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요?”
뜻 밖에도 그녀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살며시 웃었다. 조영은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모든 애간장이 완전히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남아 대장부로 태어나서 여태껏 어떤 여인 앞에서도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지라, 조영은 그 순간 스스로를 자책하며 헛기침을 한 차례 했다.
그가 헛기침을 할 때, 때마침 그 소녀가 무슨 말인가를 했는데, 자신의 헛기침 소리에 막혀 자세히 듣질 못했으므로 불가불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다구요?”
그녀가 입을 가리고 다시 한 차례 꽃처럼 방긋 웃더니,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저희 아씨께서 공자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아가씨의 아씨는 누구십니까?”
“나리! 제발 제게 존댓말을 쓰지 마십시오. 저의 아씨는 송막도독 이진영 대인의 금지옥엽이신 이루하 공주님이십니다.”
그녀는 이루하를 공주라 부르고 있었다. 사실 이진영은 거란 부족의 왕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공주라는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 그렇군요. 그 분이 어째서 저를 찾고 계신가요?”
조영은 이렇게 대답하며 속으로 대단히 멋쩍어 입맛을 다셨다. 그녀로부터 이곳에서 만나자는 요청을 받고 왔음에도 어째서 찾느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정확한 사유는 소녀가 잘 모르옵니다.”
이렇게 말한 후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덧붙였다.
“나리, 제가 모시겠습니다. 저의 아씨께서 어디 계신지 알지 못하실 터라 불가불 제가 앞장서겠으니, 나리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빕니다.”
소녀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한 후, 다시 한 차례 그에게 가볍게 허리 숙여 절하는데, 그녀의 그 겸손하고 사랑스런 태도는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가 앞장서서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조영은 그녀의 뒤를 멀찍이 따라 가면서 가슴이 뛰고 일면으로 황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아리따운 소녀 이루하를 만났을 때도 이렇게까지 가슴이 설레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칭 종이라고 하지 않는가? 비천한 종들 가운데, 어떻게 해서 황녀보다 더 고귀하고 아름다운 기품을 풍기는 이런 절세미녀가 있는지, 조영은 도무지 영문을 알 길이 없었다.
백의소녀가 뜰을 가로질러 다른 아담한 건물이 있는 곳으로 가더니, 현관 문 옆에 비켜서서 허리를 굽히며 조영이 들어갈 길을 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눈길이 그곳 십자사 뜰 안에 있었지만, 조영과 백의 선녀는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것 같았다.
이 집은 건축양식이 고려식이었다. 조영이 밖에서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조영의 신발을 들어 한쪽에 가지런히 놓은 후 뒤를 따라 들어왔다.
조영은 그녀가 비록 자칭 하녀라고 했지만, 그녀의 섬김에 황공하고 황송해 어쩔 줄을 몰랐다.
헛기침을 한 후 마루를 지나니 방문이 저절로 열린다. 짐작했던 대로 맨먼저 이루하의 아리따운 자태가 눈에 다가온다. 또 한 사람, 바로 경승 대덕 고양원이 책상다리를 하고 근엄한 태도로 좌정해 있었다. 그들 곁에는 두어 사람이 더 있었는데,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오, 공자. 어서 오시오.”
고양원은 조영에게 자리를 권한 후 옆에 앉은 사람들을 소개했다. 그 때 점심상이 들어왔다.
“공자님, 매우 잘 오셨습니다. 얼굴을 자세히 보니, 작고하신 어머니의 아름다운 면모가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어머니와 많이 닮으셨군요. 어머니는 신심이 꽤나 깊으셨죠.”
고양원은 조영이 묻지도 않은 것을 털어놓았는데, 자신의 신상을 매우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조영은 갑자기 어머니가 그리워져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철들기 전 아주 어릴 적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므로, 어머니의 얼굴은 아스라이 뇌리에 떠오를까 말까 했다.
“대덕님께서도 그간 평안하셨죠? 며칠 전 처음 뵈었을 때보다 한층 더 얼굴이 평온해 보입니다.”
“공자께서 격려해 주시니 고맙소. 조부님도 건강하시리라 믿습니다.”
“사원의 이름이 특이합니다. 십자사라?”
“아, 궁금하시죠? 이 사원의 건물들은 위에서 내려다 볼 때 열십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와, 그렇군요. 무슨 의미라도 있는 건가요?”
“그럼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인류의 구세주께서 지금으로부터 근 칠백년 전 머나먼 서역의 지중해변, 유태인들의 나라에 강탄하셨을 때, 삼십삼 년을 사시다가 열십자 모양의 장대 형틀에 매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인류의 구세주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형틀에서?”
“그분은 아무런 죄도 없는 순결한 분이셨습니다. 말하자면 길죠. 그러나 그 분이 오시기 칠백년 전, 그리고 일천년 전, 그 나라의 거룩한 예언자들이 그분께서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
경승 고양원은 얼굴에 발그스레한 빛을 띠고 조용하고도 열정적인 목소리로, 그리고 온화하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 예언에 따라, 구세주는 백성들의 모든 죄를 한 몸에 대신 뒤집어쓰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경승의 도도한 언설은 계속되었다. 이루하와 그녀의 시녀는 매우 숙연한 자세로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분은, 자신이 평소 예언하셨던 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분의 무덤에서 시체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시체 곁에 하늘의 사자使者가 나타나 그분이 부활하셨음을 증언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 수백 명은 부활하신 그분과 다시 만났습니다.”
조영은 크게 놀랐다.
“아니, 그게 사실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거룩한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경전은 그분의 제자들이 직접 목격한 사건들을 진실하게 기록한 책들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상에 사십일 동안 계시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를 하자면 몇날 며칠 밤을 새더라도 다 얘기할 수 없습니다. 차후로 천천히 들으셔도 됩니다.”
이어서 경승은 구세주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 복된 진리를 조영에게 좀 더 자세히 들려주었다.
“옛 전설 같은 얘기군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갔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즉 천하 인간의 철천지원수인 사망 자체를 정복하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조영 공자님도 그 분을 얼마든지 마음속에 모시고 섬길 수 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이십니다.”
“저도 지금까지 우리 신교神敎(배달겨레전통의 하나님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에 삼신일체 하나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그 삼신일체 하나님, 천일신天一神, 지일신地一神, 태일신太一神 가운데,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분이 바로 태일신 하나님이십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조상들이 섬기던 태일신太一神은 인간 하나님, 곧 장차 인간이 되실 하나님이었으므로 인일신人一神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사실은 ‘태일신’의 태太 자가 바로 사람을 형상화한 글입니다. 그 분이 바로 메시아 예수님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삼신일체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중국 후한 때 인물 허신許愼(서기 58년경-147년경)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태太’ 자는 원래, 사람이 팔과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모습으로서, 남자를 뜻한다. 생식기까지 표현한 글자란다.
그 말을 듣고 조영은 자신도 모르게 이루하와 시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들의 반응이 궁금했던 것이다. 이루하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비자婢子인 천상선녀 같은 여인은 겸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이 두 분 아가씨는 이미 오래 전 구세주를 마음에 모시고 경교신도가 되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저도 구세주를 마음에 모시고 싶습니다.”
조영은, 이루하와 선녀 같은 그녀의 여종이 있는 자리에서, 왠지 경승 고양원 대덕, 그리고 그녀들에 대해 묘한 부러움을 느끼며 그들에 대해 어떤 동지의식을 가지고 싶은 나머지, 얼떨결에 자신도 경교 신도가 되고 싶다고 요청했던 것이다.
경승 고양원은 조영이 구세주 메시아를 마음에 받아들이도록 도와주고 참회의 삶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이제부터는 거룩한 하나님의 거룩한 천손天孫이 되셨으니 모든 죄를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사는데 삶의 목표를 두셔야 합니다.”
“우리 배달겨레는 원래부터 천손이 아닌가요?”
경승 고양원이 엄숙한 그러나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가, 하늘이 내리신 단군임금의 자손이라고 해서 저절로 천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 임금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써 죄를 씻음 받고, 거룩한 영, 현풍玄風(성령)으로 거듭 태어나 하나님의 아들처럼 거룩하게 살아야 진정한 천손이 되는 것입니다.”
조영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경승이 고요히 덧붙였다.
“온갖 죄와 악에 빠져 증오심에 불타면서 자신을 천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거죠.”
경승은 조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개천성군開天聖君 환웅임금과 단군임금께서도 백성들에게 삼신일체 상제 하나님을 극진히 공경하고 서로 사랑하며, 거룩하게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상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 구세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옛 성인들의 가르침을 천만 배 능가하는, 완전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해주셨습니다.”
“저도 그 진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조영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물었다.
“그런데 그분은 그 진리를 책으로 남기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의 말씀을 책에 기록해 남겼습니다. 우리 중국에는 이 진리가 오래 전 전래되었다가, 근래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경승 고양원은 잠시 눈을 감고 회상하다가 말을 이었다.
“오십여 년 전 태종문무성太宗文武聖 황제 폐하께서는 파사국의 사신들 앞에서 파사국의 경교를 받아들이겠다고 수락하셨습니다. 이에 서역으로부터 아라본阿羅本 대덕님 일행이 이 진리의 경전들을 가지고 이 진리를 전하러 오실 때 폐하께서는 재상 방현령房玄齡 대인을 보내 그들을 영접하게 하시고, 황궁의 대전大殿에서 그 진리의 강론을 친히 들으셨습니다.”
아라본(알로펜Alopen) 선교사 일행이 당나라 장안성으로 들어오던 해가 당 태종 정관貞觀 구년 서기 635년이다. 당 태종이 네스토리우파 기독교의 교리강설을 아라본으로부터 직접 들은 후, 그 교리의 단순 심오함에 감탄하고 장안의 의녕방義寧坊(의녕동, 마을이름)에 파사사(교회당)를 세우게 하며, 조서를 내려 이를 널리 전하도록 허용했다는 것은 앞서 말했다.
의녕 마을은 장안성의 서쪽 끝에 있다. 황궁의 남궁과 북궁 사이에 있는 횡가橫街에서 서쪽으로 곧장 나아갈 때 만나게 되는 마을이다. 의녕방 곁에는 장안성 서쪽의 세 개 성문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개원문開遠門이 있었다.
어쩌면 아라본 선교사 일행이 장안성에 들어올 때 이 개원문을 통과해 왔는지도 모른다.
경승 고양원은 경교가 당나라에 들어와 퍼지게 된 경위를 간략히 설명한 후 덧붙였다.
“지난 오십 년 동안 중국에 근 일백 만 명의 경교 신자들이 생겼습니다. 이 도리야말로 나라를 구원하고 백성을 평안유복하게 하며 태평성세를 가져올 천고의 진리입니다. 고대에 환웅임금과 단군임금께서 태평성세를 이룩하실 수 있었던 것도,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완연히 계시하신, 바로 이 하나님 섬기기의 진리를 가슴 속에 담고 백성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고양원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조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릇 제왕이 되는 자는 이 사실에 유념하고 유념해야 합니다. 삼년 전에 붕어하신 고종 황제(재위 649-683)께서 아라본 대덕께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라는 칭호를 내리시고, 전국에 파사사를 세우도록 하신 것도, 이 진리를 싫어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영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경승 고양원은 조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화제를 돌렸다.
“아마 고 대인께서, 저에게 경교의 기도법祈禱法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라고 이르셨지요?”
“아니, 그걸 어떻게?”
명상에 잠겨 있던 조영이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듯,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 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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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3. 7. 1. 장마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