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 : 33 - 42절
“그치지 아니하니라”
시기심이 얼마나 나쁜 마음인지 몇 주 전 살펴봤는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그 폐단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기심에 가득했던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가 복음을 전한 사도들에게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33절 말씀에 보면 “없이하고자 할새” “죽여 버리자”였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 사람들의 말과 판단이 법이었기 때문에 시기를 당한 사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처럼 꼼짝없이 죽게 될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바리새인 중에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의 선생님입니다. 가말리엘이 당시 영향력 있었던 사람인 것을 의심할 수 없는 것이 가말리엘이 죽자 사람들이 이렇게 평가를 했을 정도입니다. “율법의 영광은 떠났고 깨끗함과 거룩함이 죽었다.” 엄청난 찬사인데 이런 찬사를 받으면서 생을 마친 사람이니 그 시대 사람들에게 받았던 신뢰감이나 존경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평가 속에 살았던 가말리엘이 사도들의 석방을 위해서 주장했던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두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데 드다라는 사람과 유다라는 사람입니다. 드다라는 사람은 자신이 마치 제2의 엘리야인 것처럼 자신이 명령을 하면 강이 나눠지고 마른 땅을 밟으면서 강을 건널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말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니까 유대 총독이 기병부대를 보내서 목을 베었던 사건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드다는 지금 가말리엘이 말하고 있는 이 시대보다 10여 년 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름이 똑같다 보니까 혼동이 되어서 가말리엘이 말하고 있는 드다를 이 사람으로 착각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오늘 말씀 속에 나타나고 있는 드다는 이 사람이지는 않습니다.
드다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맛디야’입니다. 헤롯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을 지었는데 예수님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성전이 바로 헤롯 성전입니다. 헤롯은 성전을 건축하면서 성전 기둥에 황금 독수리상을 넣어서 만들었는데 그 황금 독수리상을 파괴하고 소동을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그런 난동을 보면서 약 사백 명 가량의 사람들이 드다를 따랐지만 곧 체포가 되어서 화형을 당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말리엘이 말하고 있는 드다는 바로 이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유다인데 37절에 보면 호적할 때라는 역사적 배경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태어나실 때 호적을 하러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내려가지 않았습니까? 37절에서 말하는 호적은 세금 정책 때문에 호적을 하라는 총독의 명령이 있었던 때입니다. 유다라는 사람의 생각에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황제나 총독에게 세금은 내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었습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민족주의 감성을 건드려서 선동을 하여 소동을 일으켰지만 결국 실패를 해서 흩어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말리엘은 이 두 사람을 언급을 하면서 “만약 사도들이 말하는 것이 거짓이면 하나님께서 드다나 유다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이 세력도 금방 멈출 것이니까 우리가 굳이 나서서 이 사람들을 죽일 필요가 무엇이 있겠느냐? 또 혹시 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그런 죄를 범할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 그냥 내버려 두면 다 해결될 문제이니까 죽이지 말자.” 이런 주장을 펼쳤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말리엘이 사도들을 변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그런 의도이지는 않습니다. 이 사람 밑에서 배웠던 바울의 태도를 보면 예수님이나 그 제자들에 대해서 얼마나 반감을 갖고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가말리엘은 율법의 상식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사도들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 당시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을 보면 가말리엘이 속해 있던 바리새인들보다 사두개인들이 더 많았습니다. 산헤드린 수장도 당연히 사두개인이었는데 언제나 만나면 옥신각신했던 사두개인들도 바리새인이었던 가말리엘의 주장을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매우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그렇다고 그냥 놔둘 수는 없고 채찍을 때려서 더 이상 예수에 대해서 증거 하지 못하도록 한 다음에 내보내자.” 이런 결론을 내리고는 아무 죄도 발견하지 못한 이 사도들을 채찍질을 해서 협박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수모와 낭패를 당한 사도들의 반응이 굉장히 이외의 반응이었습니다. 41절 말씀에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아무 죄도 없이 채찍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맞은 채찍과 모욕을 합당한 일로 여기면서, 어떻게 떠났냐면 “기뻐하면서” 그 앞에서 떠나가는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성령 충만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그 동안 해 왔던 순종 몇 가지만 하고 살면서 성령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되고 이런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면서 사는 모습이 성령님을 통해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님이 계시면 반드시 성령의 열매는 맺게 되는데 그 중에 하나가 “희락”입니다. 쉬운 말로 표현을 하면 기쁨입니다. 성령님이 계시면 기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쁨이 성령님이 함께 계시다는 아주 중요한 척도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사는 것을 결코 우습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 했던 사도들의 모습을 보세요. 그런 능욕을 버젓이 당해 놓고서도 42절 말씀에 보면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그들은 어디에 있든지 어느 곳에 가든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메시야이심을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하기를 원하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몇 가지가 되는데 일단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고 가장 많이 들었을 만한 것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입니다. 즐거울 때는 당연한 것이고 역경을 맞이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전하다가 채찍에 맞아도 항상 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기쁨이 사라진다는 것은 성령님이 계시지 않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쉬지 않고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연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선지자처럼 기도를 쉬는 것이 죄라는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기도에 대해서 그런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를 영적 호흡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호흡하지 않고 가끔 호흡하면서 살 수 있는 분들은 제외하고 나머지 분들은 쉬지 않고, 기도를 그치지 않고 하는 훈련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해야 할 것이 감사이지 좋을 때는 감사이고 안 좋을 때는 불평이면 그런 정도는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다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사람, 성령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다 한 가지를 더 추가하면 사도들처럼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 결국 ‘항상’이라는 표현이나 ‘쉬지 말고’라는 표현이나 ‘범사’라는 표현과 같는 의미이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관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상에서 보면 절대 그쳐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 하나만 손꼽으라고 한다면 지구의 자전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공전도 하고 있지만 지구 스스로 도는 자전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데 자전이 잠깐이라고 멈추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지금은 지구가 스스로 도는 것을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별 문제 없어 보이지만 지구가 자전하는 것을 잠깐이라고 그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끔찍한 일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지구의 자전 속도는 시간 당 약1600km라고 합니다. 시속 100km로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멈추었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아마도 우리가 그 버스 안에 서 있었다면 십중팔구 넘어지거나 어쩌면 차 밖으로 날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속도보다 16배가 더 빠른 속도가 지구의 자전 속도이니까 자전하던 지구가 갑자기 멈추면 그냥 날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몸이 분리가 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계속 돌지 않고 그친다는 것은 그런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급하게 멈추지 않는다고 해도 지구의 자전이 멈추게 되면 대략 6개월은 낮이 되고 6개월은 밤이 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6개월 동안 낮인 곳은 태양의 열 때문에 타버릴 것이고, 6개월 동안 밤이 되는 곳은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기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든 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지구의 자전이 쉬지 않도록 아주 섬세하게 설계를 해 놓으신 것이고, 이런 은혜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살면서 정말 그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들에 오롯이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는 삶과 예수를 그리스도라 전하고 가르치는 삶을 그치지 않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 성령님을 충만하게 부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을 때 또는 하고 싶을 때만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만족을 하면 안 됩니다. 오늘 말씀 속의 사도들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고 역경을 당하고 채찍에 맞음에도 불구하고 합당한 것으로 여기면서 살아야 그 믿음이 참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사도들처럼 기쁨으로 돌아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고 전도하는 일에 그치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건강한 믿음의 성도님들이 되시고, 그런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성령님을 충만하게 받아서 성령님과 늘 교제하며 살다가 성령님의 인침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가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