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부터 시작된 자전거 통학은 고등학교 이학년 중반까지 계속 이어졌다. 매일 12km 거리를 아침저녁으로 자전거 통학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자갈과 모래로 뒤덮인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보면 잔돌에 걸려 넘어지는 건 다반사였다. 자갈보다 더 무서운 건 모래다. 차가 다녀서 도로면은 어지간히 단단하게 다져졌기 때문에 그런대로 괜찮다. 먼 거리를 자전거로 달리다 보면 학교에 도착하기도 전에 체력이 고갈되어 버린다. 그래서 도중에 몇 군데를 지정해 놓고 쉬어가곤 하였다. 콘크리트 다리와 도로를 관통하는 구거용 구조물이 그곳이다. 다리의 양쪽은 도로보다 약간 높여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게 만들어서 그 턱에 발을 짚고 자전거에 걸터앉은 자세에서 쉬기에 안성맞춤이다. 구거 구조물은 다리보단 못했지만 양쪽 끝에 약 30cm 정도 높이의 난간 턱이 있어서 그 위에 발을 짚고 쉴 수가 있다.
초여름이 시작될 무렵 평상시보다 일찍 집을 나셨다. 뜨거운 태양이 머리 위로 떠오르면 더위에 금방 지치기 때문이다. 집에서 한 20분쯤 가다가 나의 첫 쉼터에 도착하였다. 평소처럼 구거 난간에 발을 짚었는데 발이 주르륵 미끄러지면서 그만 자전거와 함께 도랑 바닥으로 뒤집어지며 추락하고 말았다. 모래가 바람에 실려 왔는지 아니면 지나가는 버스 바퀴에서 튀었는지 난간 윗면에 모래가 미끄러지기 좋을 만큼 깔려 있었던 것이다. 오른손잡이의 브레이크를 서서히 죄면서 발을 딛는 순간 모래알이 구르면서 오던 관성까지 더해 자전거와 함께 순식간에 다리 밑으로 추락한 것이다. 그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사람들이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정거장이다.
추락한 곳은 말이 구거지 집에서 흘러나온 하수와 오수가 뒤섞여 빠져나가는 하수구다. 시궁창 냄새가 머리맡에서 시큼하게 풍겨왔다. 얼른 일어나야 하는데 몸이 생가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정신은 있는데 사지가 말을 듣질 않았다. 추락하며 뇌진탕이라도 당한 게 아닐까 이러다 나 죽는 건 아닐까 짧은 시간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쉼 호흡을 크게 하고서 있는 힘껏 소릴 질렀다. “저기요, 여기 사람이 떨어졌어요. 살려주세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추락하면서 아마 순간적으로 졸도를 했던 모양이다. 갑자기 당한 큰 충격에 몸이 그만 굳어버린 게 아닐까 싶다. 높은 곳에서 투신자살하는 사람이 땅에 몸이 닿기도 전해 졸도한다고 한다. 이는 몸이 당할 충격을 미리 알아채고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느끼기 위한 방어기지라고 한다. 내가 그 짝인가 싶었다. 암튼 그곳에서 자전거에 눌린 채 몇 분을 꼼짝없이 누워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어른으로 보이는 사람 몇이 내가 누워있는 도랑으로 뛰어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모습이 다 보이는데 난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자전거가 치워졌다. 그리고 내 머리와 등을 받쳐 들고 일으켜 주었다. 신기하게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그제야 비로소 목소리가 튀어나왔고 사지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아저씨로 보이는 어른 한 사람과 장정 두 분이 나를 번쩍 들어서 도로 위로 올려주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시며 어디 다친 곳 없는지 어루만져 주셨다. 그분들의 손길이 얼마나 따듯한 지 울컥하고 눈물이 나왔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면서 한편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교복에서 시궁창 냄새가 나는 게 좀 불편하긴 하였지만 속으로 다행이란 생각을 하였다. 잠시 후 버스가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나를 도와주신 분들은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버스 정거장으로 뛰어가셨다.
멀어져 가는 버스를 바라보며 지금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 지 아직도 뭐가 뭔지 그저 정신이 벙벙할 뿐이었다. 학교를 가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 듯 떠올랐다. 다시 자전거에 몸을 싣고 신작로를 벗어나 개울이 있는 둑길로 방향을 틀었다. 우선 냄새부터 없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둑길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풀이 무성한 경사지를 더듬더듬 내려갔다. 맑은 시냇물엔 피리와 송사리들이 떼를 지어 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교복을 벗었다. 시커먼 시궁창 진흙이 축축한 물기를 머금은 채 등과 엉덩이 쪽에 묻어있었다. 우선 물로 진흙을 대충 씻어내고 맑은 물로 한 번 더 씻었다. 훨씬 좋아졌다. 이러다 지각이다. 마냥 옷이 마르길 기다릴 수가 없었다. 축축한 옷을 다시 입고 학교를 향해 페달을 밟았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도 흙먼지가 싫어 둑길로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었다. 머리 위론 뜨거운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겨드랑이와 허벅지 사이로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런 일은 늘 있는 거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비록 덥기는 하여도 얼굴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 때문에 견딜만하였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풀 냄새 피어나는 잔디에~ 누워 새 파란 하늘가 흰~구름 보면~ 가슴이 저절로 부~풀어 올라...”
고등학생이 기분 좋으면 동요를 부른다. 어른이 된 지금도 동요가 좋아서 가끔 흥얼댄다. 싱그러운 초원을 달리는 마음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몸이 힘들어도 이 맛에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외마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좁은 둑길을 달려가야 하는 나로선 한눈을 팔 여지가 없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젖히는 순간 바로 내 뒤로 ‘쿵’ 하는 엄청난 굉음과 함께 미루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는 게 아닌가. 그야말로 놀라 자빠질 노릇이었다. 난 너무도 놀라 얼른 자전거를 세웠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이 떨렸다. 멀리서 어른 한 분이 내 쪽을 향해 뛰어오셨다. 오른손엔 낫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머리엔 빛바랜 새마을 모자를 쓰고 계셨다. 얼마나 급하게 뛰어오셨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후 쏟아지는 땀을 손바닥으로 훔치고 어디 다친 덴 없냐며 나를 살펴보셨다. 난 괜찮다고 말씀을 드렸다.
박정희 정부 때 산림녹화 사업을 전국적으로 진행하였다. 한꺼번에 많은 묘목을 심어야 할 민둥산은 온 동네 사람도 모자라 학생과 예비군까지 동원해 심었다. 산뿐만 아니라 집집마다 유실수와 속성수를 할당량으로 나누어 주며 반 강제적으로 심게 하였다. 그 중에 일명 ‘미루나무’라 불리는 populus(포풀러) 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매우 빠르게 자라는 속성수로 키가 30m까지 자라며 직경 1m까지 굵어진다. 산이 없는 사람이 나무 심을 곳이라곤 자신이 소유한 논이나 밭 밖에 없다. 그렇다고 작물을 심어야 할 밭 가운데나 논 가운데에 심을 수는 더군다나 없다. 어쨌든 심는다는 것이 밭둑이나 논둑이 적당했을 것이다. 미루나무는 어지간한 땅에 꽂아 놓기만 해도 쑥쑥 잘 자랐다. 네 땅 내 땅도 아닌 들판 공지나 개울가엔 어김없이 미루나무가 군락을 이루었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면 어렵지 않게 논두렁이나 밭둑에 홀로 떨어져 이파리를 파르르 떨고 있는 미류나무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재목감 하나 구하기가 어렵던 시절에 적당히 자란 미루나무는 각재로 켜서 요긴하게 썼다.
미루나무의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는데 바람에 잘 넘어진다. 워낙 빠른 기간 동안 높이 자라기도 했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잔가지가 많다 그만큼 잎을 많이 달고 있는 바람에 아래보다 위쪽이 훨씬 무겁다. 게다가 다른 나무보다 수분을 많이 머금고 있어서 무겁다. 상대적으로 뿌리가 깊게 뻗질 않는 점도 단점이다. 걸핏하면 태풍에 잘 넘어졌다. 나무가 뽑혀나가면서 동시에 멀쩡했던 논둑이 무너져 내리곤 하였다. 우리 집과 가까운 밭둑에도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아주 위풍당당해 보였다. 약한 바람에도 이파리가 한꺼번에 파르르 떨면서 파도 같은 소릴 냈다. 이파리가 떨 때마다 하얀색 뒷면이 반짝반짝 보석처럼 빛났다. 봄이 오면 미루나무 껍질을 칼로 네모나게 도려내어 말렸다가 뱃놀이하며 놀았다. 수액이 풍부한 미루나무껍질은 손쉽게 벗겨졌다. 그러던 어느 가을 아침에 태풍으로 뿌리째 뽑히면서 우리 집 창고를 덮쳤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블록으로 지은 창고의 벽이 위에서 아래로 쫙 갈라져버렸다. 결국 창고를 헐고 조립식으로 다시 지어야 했다.
그 시절에 심은 미루나무를 오늘 아침 등굣길에 아저씨가 벤 것이다. 톱질에 신경 쓰느라 둑길로 사람이 지나갈 것이라곤 생가도 못하였을 것이다. 나무가 막 쓰러지는 방향이 하필이면 나 있는 곳을 향했고 난 그것도 모른 채 콧노래까지 부르며 태평스럽게 자전거를 타고 갔다. 절제절명의 순간에 아저씨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나를 향해 있는 힘껏 소릴 지르는 것 밖에 없었다. 어렴풋이 내가 그 소릴 듣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엄청난 굉음을 내며 바로 뒤에서 나무가 쓰러졌다. 그러니 아저씨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더군다나 나뭇가지에 가려 내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 분명 일이 나도 큰 사단이 났을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다행히 난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았다. 다만 놀란 가슴에 뻣뻣이 서서 멍하니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만다행이다” 하시며 아저씬 제자리로 돌아갔다. 자전거를 타려고 했지만 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도저히 타고 갈 자신이 없었다. 손에 땀이 흥건했다. 자전거를 끌고 삼십 여분 걸어가자 몸이 차츰차츰 진정되었다.
여기까진 예행연습에 불과하다. 진짜 무서운 사고는 따로 있었다.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사고였다. 그날은 자전거로 읍내를 막 통과하고 있었다. 저 멀리서 오토바이 한 대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좁은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난 느긋하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그런데 오토바이가 점점 나 있는 곳으로 오고 있었다. 오십 미터 삼십 미터 점점 내게로 오자 나는 얼른 본능적으로 핸들을 꺾었다. 그 순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오토바이와 난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다. 내 몸은 보도블록 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보도엔 등교하는 학생들과 장보러 나오신 어른들이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누군가 내 뒤에서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붙잡고 엉거주춤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그리고 난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왜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지’ 서서히 정신이 들면서 방금 전에 뭔가에 크게 부딪힌 것이 생각났다. 헬멧을 쓴 젊은 청년이 나를 부축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오토바이 주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를 흔들며 괜찮으냐며 계속 물었다. 얼떨결에 난 괜찮다고 대답을 하였다. 청년은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지폐 몇 장과 잔돈 몇 개를 내 손에 쥐어 주면서 우선 이거로 치료하라고 말하곤 자릴 떠났다. 사람들도 하나 둘 가던 길을 재촉하자 나 혼자 남게 되었다. 그 상황에도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자전거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자전거가 마치 엿가락처럼 찌그러졌다. 핸들은 180 도 방향으로 돌아갔고 앞뒤바퀴 모두 심하게 뒤틀리면서 바퀴를 지탱해 주는 철재가 너덜너덜 튀어나왔다. 자전거를 들다시피 하여 수리 점에 우선 맡겼다. 버스터미널로 가서 버스를 타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곤 터미널까지 간신히 걸어갔다. 대합실에 우두커니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데 점점 시야가 흐려졌다. 왜 이러지 속으로 생각하며 눈두덩일 만져 보았다. 오른쪽 눈두덩이 위에 호두알만 한 것이 만져졌다. 깜짝 놀랐다. 대합실 벽에 걸린 거울로 가서 내 얼굴을 보았다. 비로소 나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걸 알았다. 급하게 학교 교무실로 공중전활 걸었다. 이차 저차 하니 우리 동네에 사는 친구를 급히 터미널로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동네 친구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으로 나중에 자취를 함께 한 사이다. 지금은 하남시청 공무원으로 은퇴를 코앞에 두고 있다. 친구가 내 몰골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사물이 두 개 세 개로 겹쳐 보였다. 속이 메스껍고 구토가 올라왔다. 화장실로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하여 토하고 잠시 의자에 앉아있으니까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청년이 준 돈을 친구에게 건네주고 약국에서 놀란데 먹는 약과 타박상에 바르는 약을 사다 달라고 하였다. 친구는 뛰다시피 약국으로 달려가 주문한 약을 사들고 왔다. 그 경황에도 친군 날 안심시키려고 농담을 하였다. “야 네 얼굴 꼭 외계인 같다” 나도 따라 웃었다. 그때의 사고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몇 년 동안 고질적인 무릎 통증에 시달렸다.
자전거와 오토바이라는 것이 타는 사람은 막상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잘 인식을 못한다. 마치 자신이 운전하는 자동차는 사고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다 단 한 번의 사고에 치명상을 입는다. 특히 오토바인 한 번 사고를 당하면 최소 중상 아니면 사망이란 말이 돌 정도다. 자전거도 만만치 않다. 둘 다 맨몸을 그대로 노출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여전히 최소한의 보호구도 착용하지 않고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이 많다. 결국 사고를 당하고 나서야 정신 차린다.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모른다. 특히 철없는 청소년들이 이런 우를 잘 범한다. 주변에서 오토바이를 즐겨 타던 청소년들이 큰 사고를 당했다는 소릴 여러 번 들었다. 개중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친구들도 있다. 평생을 장애자로 살아가는 친구도 있다.
암튼 타고나길 약골로 태어나서 그런지 난 사고를 자주 겪으며 살아온 것 같다. 따지면 누구나 다 한 두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말한다. 그런 사고는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라 쳐도 어지간하면 피할 수 있는 것들까지 어처구니없이 사고를 당하고 나면 할 말이 없다. 누군 사고 당하고 싶어서 당하나 하겠지만 유난히 사고를 자주 당하는 몸치가 있다.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나다. 오죽하면 화장실 바닥 타일에 신발이 걸려 넘어질까 잘 일어나다가도 탁자 다리에 발가락을 찧고 문 닫으면서 발뒤꿈치가 문틈에 낀다. 어느 날 가만히 보니 딸이 나랑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가면서 무릎을 부딪고 칫솔질하다 볼을 씹고 소파에서 일어서며 발이 소파에 끼이고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런 것도 유전이라면 혹시 우리 엄마 아버지 중에 한 분이 나와 같은 일을 겪으신 건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