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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의학문과문화세계(서예를중심으로..)강원대 황재국교수
김우현 (2006-11-15 오후 11:12:49) Hit : 93 Vote : 4
本 인쇄물은 朝鮮朝부터 安東金氏家門의 書藝家들의 작품을 찾아 시대 순으로 정리하고 고찰하여
安東金氏文化硏究會 學術大會에서 發表할 要旨이다.
本 발표자는 漢文學을 전공하는 교수로서 학생 때부터 현재의 最高 大家인 安東金氏 두 분 선생(一中·如初)께
서예를 배우면서 45년 가까이 두 분의 그늘에 있어오는 동안 安東金氏 서예 來歷에 매우 관심 있어 온 터였다.
그러던 중 막상 발표 제의를 받고는 두려운 마음에 일주일간 결정할 말미를 얻어서 은사 님을 찾아뵙고 용기를
얻었으며, 한편으로 이번 기회가 나의 서예의 안목 향상과 금석학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여 應諾
하였다.
또한 大門閥로써 한국의 유학 전통을 이었고 큰 문장가들이 대거 배출되었으며,
특히 節義의 忠節志士가 많은 門中의 서예품격을 살펴서 정리해 보는 것은 의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발표 준비 중 특히 梅山 金善源 同學의 자료와 조언의 도움이 매우 컸음을 알린다.
작가 소개는 주로 汎友社 刊 韓文影 著 韓國書畵家人名事典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刊 한국인물대사전 및
예술의 전당 刊 애국지사유묵, 조선 중기·후기 서예전 등에서의 인명소개와 안동의 문화유산,
안동의 현판 책자 등에서 찾아서 연대순으로 옮겼음을 밝힌다.
먼저 歷代 安東金氏의 서예가를 아래에 기록한다.
金永銖 (積翁) 1446 - 1502 (세종 28 - 연산군 8)
金克孝 (四味堂) 1542 - 1618 (중종 37 - 광해군 10)
金尙容 (仙源) 1561 - 1637 (명종 16 - 인조 15)
金尙寯 (休菴) 1561 - 1635 (명종 16 - 인조 13)
金尙憲 (淸陰) 1570 - 1652 (선조 3 - 효종 3)
金光煜 (竹所) 1580 - 1656 (선조 13 - 효종 7)
金光炫 (水北) 1584 - 1647 (선조 17 - 인조 25)
金壽仁 (元甫) 1608 - 1660 (선조 41 - 현종 1)
金壽民 (沙浦) 1623 - 1652 (인조 1 - 효종 3)
金壽增 (谷雲) 1624 - 1701 (인조 2 - 숙종 27)
金壽興 (退憂堂) 1626 - 1690 (인조 4 - 숙종 16)
金壽恒 (文谷) 1629 - 1689 (인조 7 - 숙종 15)
金昌集 (夢窩) 1648 - 1722 (인조 26 - 경종 2)
金昌協 (農巖) 1651 - 1708 (효종 2 - 숙종 34)
金昌肅 (三古齋) 1651 - 1673 (효종 2 - 현종 14)
金昌翕 (三淵) 1653 - 1722 (효종 4 - 경종 2)
金昌業 (老稼齋) 1658 - 1721 (효종 9 - 경종 1)
金元行 (渼湖) 1702 - 1772 (숙종 28 - 영조 48)
金允謙 (眞宰) 1717 - 1775 (숙종 37 - 영조 51)
金逌根 (黃山) 1785 - 1840 (정조 9 - 헌종 6)
金履九 (自然窩) 1746 - 1812 (영조 22 - 순조 12)
金履度 (松園) 1750 - ? (영조 26 - ? )
金龍行 (石坡) 1753 - 1778 (영조 29 - 정조 2)
金羲淳 (山木) 1757 - 1821 (영조 33 - 순조 21)
金履喬 (竹里) 1764 - 1832 (영조 40 - 순조 32)
金祖淳 (楓皐) 1765 - 1831 (영조 41 - 순조 31)
金學淳 (華棲) 1767 - 1845 (영조 43 - 헌종 11)
金邁淳 (臺山) 1776 - 1840 (영조 52 - 헌종 6)
金洙根 (溪山樵老) 1798 - 1854 (정조 22 - 철종 5)
金蘭淳 (碧谷) 1781 - 1851 (정조 5 - 철종 2)
金興根 (游觀) 1796 - 1870 (정조 20 - 고종 7)
金左根 (荷屋) 1797 - 1869 (정조 21 - 고종 6)
金輔根 (三松) 1803 - 1869 (순조 3 - 고종 6)
金炳淵 (蘭皐) 1807 - 1863 (순조 7 - 철종 14)
金炳冀 (思穎) 1818 - 1875 (순조 18 - 고종 12)
金炳學 (穎樵) 1821 - 1879 (순조 21 - 고종 16)
金炳國 (穎漁) 1825 - 1904 (순조 25 - 광무 8)
金聲根 (海士) 1835 - 1918 (헌종 1 - )
金奭鎭 (梧泉) 1843 - 1930 (헌종 9 - )
金宗漢 (游霞) 1844 - 1932 (헌종 10 - )
金嘉鎭 (東農) 1846 - 1922 (헌종 12 - )
金玉均 (古筠) 1851 - 1894 (철종 2 - 고종 31)
金福漢 (志山) 1860 - 1924 (철종 11 - )
金寗漢 (東江) 1878 - 1950
金容鎭 (穎雲) 1878 - 1968
金佐鎭 (白冶) 1889 - 1930
金舜東 (蒼厓) 1898 - 1972
金文顯 (褧人) 1913 - 1974
金彰顯 (白牙) 1923 - 1992
생존작가
金忠顯 (一中) 1921 -
金膺顯 (如初) 1927 -
金晉東 (溪山)
金縉東 (釣月人)
金端喜 (景侯)
金洋東 (近園)
金珏漢 (故園)
이상으로 작가의 면모와 작품들을 화면을 통해 감상하면서 설명하였다.
사실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는 서예가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조선 선비들의 일상생활의 수단이었다.
특히 안동김씨 仙源, 淸陰 계통의 후손들은 학문뿐만 아니라 문장과 절의와 안목이 다른 문중보다 뛰어나
격 높은 금석문을 위시한 수많은 서예작품들을 남기어서 우리 조선 서예사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여 왔다.
조선조 서예계에 주류를 이룬 안동 김씨들의 서예의 장점은 높은 학문의 온축과 절개에서 우러나온
文氣가 서린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아래에 그 중 몇 분을 열거하면서 특징들을 언급해 보기로 한다.
金永銖 (積翁) 1446 - 1502 (세종 28 - 연산 8)
조선 전기의 무신. 자는 적옹(積翁). 아버지는 한성판관 계권(係權)이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숙하여 음보로 의금부도사에 제수 되었고, 성품이 민첩하고 사무에 숙달되어
옥사를 잘 다스렸다.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나서 사헌감찰에 제수 되고 상주판관이 되었다.
또,중국의사신이 왔을때 도감랑(都監郞)이 되어 잘접대하여 명예를드날리고의금부·경력·도총부사·
중추원도사가 되었다. 이어 영덕현령으로 나가 벽지와 해지(海地)의 수령들이 부지런히 다스리지 않자
이를 징계하고 엄징하게 하여 기민을 다스리고 부역을 고르게 하였다.
이어 선공첨정·장령·상의원옹·통례원봉례를 거쳐 영천군수·
금교도찰방에 임명되었다.
金克孝 (四味堂) 1542 - 1618 (중종 37 - 광해군 10)
문관. 자는 희민(希閔). 호는 사미당(四味堂). 신천군수 김생해(金生海)의 셋째 아들.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사위.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생부. 1564년(명종 19) 진사에 합격하고, 내외직을 두루 거쳐 동지돈녕부사를 지냈다.
金尙寯 (休菴) 1561 - 1635 (명종 16 - 인조 13)
문관. 자는 여수(汝秀), 소는 휴암(休菴). 군기시정(軍器寺正) 김원효(金元孝)의 아들,
우의정 김상용과 좌의정 김상헌의 4촌. 22세 때인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90년 문과에 급제, 형조참판을 지냈다.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자 이제 참여치 않아 삭직 당했으나,
1623년 인조반정 후 지난 일이 문제되어 길주·
아산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12년 만에 풀려났다.
길주에서의 유배생활 중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지도하여, 뒤에 그가 죽자 먼 길에 문상을 오는 이들이 많았다.
金尙容 (仙源) 1561 - 1637 (명종 16 - 인조 15)
문관.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
시호는 문충(文忠). 동지돈녕부사 김극효(金克孝)의 아들.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590년(선조 23) 문과에 급제. 병조좌랑·이조정랑·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광해군 때 도승지·대사헌·형조판서를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예조·이조 판서를 거쳐
1632년(인조 10) 우의정에 올랐으나, 노령을 이유로 29회나 사직을 청한 끝에 허락을 받았다.
76세 때인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묘사(廟祠)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란했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남성(南城)의 문루에 올라가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했다. 사람됨이 인정이 많고 겸손했으며,
산수를 좋아하여 만년에는 인왕산 골짜기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독서와 글쓰기를 즐겼다.
서법은 진나라의 왕희지·왕헌지를 본받았고, 특히 전서는 뭇 체를 겸했다.
「오륜가(五倫歌)」「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 등 여러 편의 시조를 남겼다.
셋째 아들 김광현(金光炫)도 전서·해서로 이름났고,
아우 김상헌(金尙憲)과 사위 장유(張維)도 글씨와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작품으로는 崇仁殿碑 전액(평양),
郡守張麒禎碑 전액(풍덕),
縣令李 墓碑 전액(용인)이 있고,
저서로는 仙源遺稿, 讀禮隨抄가 있다.
金尙憲 (淸陰) 1570 - 1652 (선조 3 - 효종 3)
문관. 사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 시호는 문정(文正),
동지돈녕부사 김극효(金克孝)의 넷째 아들로 백부 김대효(金大孝)에게 입양했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아우.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으로 21세 때인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6년 문과에 급제, 수찬·교리를 지냈으며, 1608년(광해군 1) 문과 중시에 급제, 사가독서를 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이른바 청서파(淸西派)의 영수로서 대사간·대사헌·
양관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서 비변사 당상을 겸하고 남한산성을 끝까지 고수할 것을
주장했으며, 고정의 공론이 강화로 기울자 이에 반대,
국서(國書)를 찢어버리고 통곡한 뒤 스스로 목매어 죽으려다가 실패했다.
강화가 성립되자 한동의 학가산(鶴駕山)에 은둔,
1641년 앞서 척화를 주장한 탓으로 청나라 심양에 잡혀가 그곳에서
유송평(劉松平)의 〈관련도(觀蓮圖)〉에 제시를 썼다. 이듬해 겨울 병으로 풀려나 의주로 돌아왔으나
1643년 최명길 등과 함께 다시 심양에 잡혀가 북관(北館)에 유폐,
다음해 당인(唐寅)·구영(仇英)의 〈산수도〉에 제시를 썼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석방되어 귀국, 이듬해 우의정이 되고 효종 초에 좌의정을 지냈다.
문장과 절의로써 세인의 존경을 받았으며, 글씨에도 능하여 명나라 동기창(董其昌)의 서체를 잘 썼다.
작품으로는 秀泉君貞恩墓碣이 있고,
저서로는 淸陰集,
野人談錄,
豊岳問答,
南漢紀略이 있다.
金光煜 (竹所) 1580 - 1656 (선조 13 - 효종 7)
문관. 자는 회이(晦而). 호는 죽소(竹所). 시호는 문정(文貞). 형조참판 김상준의 아들.
1606년(선조 39) 진사에 합격하고 이해 문과에도 급제, 효종 때 형조판서·한성부 판윤·
경기도 관찰사 등을 거쳐 좌참찬을 지냈다.
천성이 단아하고 곧아서 남과 사귀기를 즐기지 않았다.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강사(江舍)에 은거하여 남과 접촉하지 않았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에야 다시 벼슬에 나아갔다.
작품으로는 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 篆題(영암),
知敦寧趙存性墓碑 題額(양주),
刑曹參判金尙寯墓碑 題額(양주) 등이 있고,
저서로는 竹所集이 있다.
金光炫 (水北) 1584 - 1647 (선조 17 - 인조 25)
문관. 자는 회여(晦汝), 호는 수북(水北),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아들. 전서와 해서를 잘 썼다.
작품으로는 洪陽淸灘碑(홍성),
閔箕神道碑(통진),
領議政李鐸基碑가 있고,
저서로는 水北遺稿가 있다.
金壽仁 (元甫) 1608 - 1660 (선조 41 - 현종 1)
문관. 자는 원보(元甫). 우의정 김상용의 손자, 대사헌 김광현(金光炫)의 아들.
1634년(인조 12) 음보로 석공감 감역이 되고, 전생서(典牲暑) 및 사복시 주부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상원(祥原)현감으로서 수 백 명의 군민을 이끌고 토산(兎山) 싸움에 참전,
도원수 김자점의 선봉으로 나가 싸워 수십 명의 적을 무찔렀다. 뒤에 증산·의흥·창녕 현감을 거쳐
효종의 특명으로 양주목사가 되고, 곧 이어 수원부사에 임명되어 방어사를 겸임,
왕으로부터 갑옷과 투구를 하사 받았다.
얼마 뒤 병으로 사직, 보령의 모도(茅島)로 내려가 살다가 만년에 익산군수가 되었다.
가법을 이어 전서·예서와 팔분체(八分體)를 잘 썼다.
金壽民 (沙浦) 1623 - 1652 (인조 1 - 효종 3)
자는 요수(堯叟). 호는 사포(沙浦). 우의정 김상용의 손자. 군수 김수인(金壽仁)의 아우.
일찍이 진사에 합격, 덕산현감을 지냈다.
가법을 얻어 특히 대전(大篆)을 잘 썼으며, 당시의 편액은 대부분 그가 썼다.
효종도 그의 기예를 가상히 여겨 각 체의 글씨를 써서 바치게 했다. 평셩 교유(交遊)를 일삼지 않았으며,
재물에 욕심이 없어 고향에 밭 한 뙈기 늘리는 법이 없고, 서울에 살면서도 집 한 칸 없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었고, 끝내는 손가락의 상처가 덧나
나이 서른에 죽었다. 나라에서 그의 고향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했다.
金壽增 (谷雲) 1624 - 1701 (인조 2 - 숙종 27)
문관.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 좌의정 김상헌의 손자, 동지중추부사 김광찬(金光燦)의 아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형. 1675년(숙종 1) 성천부사로 있다가 막내 아우 김수항이 송시열과 함께
유배되자 사직하고 춘천의 곡운(谷雲)에 은거했다. 뒤에 회양부사로 재직중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우 김수항이 사사되고 김수흥(金壽興)도 유배지에서 죽자 벼슬을 버리고 다시 춘천 곡운에 은거,
전후 10여 년 동안 세상과 인연을 끊고 오직 시와 글씨쓰기만을 즐겼다.
성품이 조용하고 담박하여 독서를 즐겼으며,
문장이 웅장하고 자유분방했다. 글씨는 전서·예서·팔분체에 뛰어나 비문을 많이 썼으며,
그림은 섬세한 필치로 산수를 잘 그렸다.
작품에 글씨로는
金文谷壽恒墓表(양주), 石室書院廟庭碑(양주), 金振威光煒墓表(양주), 承旨金光爀墓碣(양주),
紫雲書院廟庭碑(파주), 諸葛亮廟碑(파주), 이조참판 趙希逸墓碑(파주), 孝子申孟慶旌閭碑(단양),
大司憲金光炫墓碑(홍주), 圃隱鄭夢周墓碑(용인), 金尙容殉義碑(강화), 贈判書宋國銓墓碣(공주),
鄭松江澈墓碑(진천), 大司成金泮墓碣(강서), 滄洲書院廟庭碑(옥천),
그림으로는
高山九曲圖, 傍花溪圖, 산수도가 있고, 저서로는 谷雲集이 있다.
金壽興 (退憂堂) 1626 - 1690 (인조 4 - 숙종 16)
문신. 자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退憂堂). 김상헌의 손자.
김수항의 형, 인조 때에 사마시를 거쳐 효종·현종 대에 도승지·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674년 제2차 예송(禮訟)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庚申大黜陟 이후 다시 영의정에 올랐고 다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유배되어 사망하였다.
金壽恒 (文谷) 1629 - 1689 (인조 7 - 숙종 15)
문관.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시호는 문충(文忠). 김상헌의 손자, 김광찬의 아들.
어려서 가학을 전수 받고 18세 때 진사에 장원했으나,
이후 수년 동안은 문과에 응시하지 않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23세 때인 1651년(효종 2) 알성문과에 장원하고 1656년 다시 문과 중시에 급제,
여러 청요직을 거쳐 현종 때 대제학·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672년(현종 13) 44세에 우의정이 되었다.
노론의 영수로써 1680년(숙종 6) 영의정이 되었으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 당했다. 특히 대전(大篆)을 잘 썼다.
작품으로는 좌참찬
左參贊金光煜墓表(양주),
判敦寧尹履之墓碑(장단),
兵判朴筵碑,
刑判李守一碑,
刑判李尙吉碑,
工判具仁墍碑,
贊成閔齊仁碑 등이 있고,
저서로는 文谷集이 있다.
金昌集 (夢窩) 1648 - 1722 (인조 26 - 경종 2)
문관.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시호는 충헌(忠獻). 영의정 김수항의 맏아들.
1672년(현종 13) 진사를 거쳐 1684년(숙종 10) 문과에 급제, 병조참의를 지내다가 1689년 기사환국으로
진도에 유배된 아버지가 사사 당하자 영평(永平 : 포천)에 은거했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이 실각한 후 예조참판·개성부유수·이조판서 등을 거쳐 1717년 영의정에 올랐다.
1720년 병약한 경종이 즉위하자 이이명·조태채·이건명 등 노론측 대신과 함께 연잉군(영조)의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주청, 이를 관철했으나 이듬해 신임사화 때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 당했다. 특히 행서에 능했다.
저서에는 夢窩集,國朝自警編이 있다.
金昌協 (農巖) 1651 - 1708 (효종 2 - 숙종 34)
문관.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삼주(三洲), 시호는 문간(文簡). 영의정 김수항의 둘째 아들.
부제학 이단상의 사위. 19세 때에 진사가 되고 1682년(숙종 8) 문과에 장원,
이조정랑·대사성 등을 거쳐 청풍군수로 나갔다. 1689년 희빈 장씨의 아들(경종)의 원자책봉 문제로
야기된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 귀양가서 사약을 받고 죽자,
영구를 모시고 돌아와 장사를 치른 뒤 어머니를 모시고 영평(永平)에 은거했다.
뒤에 대제학·예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유학의 대가로서 후학 지도에 힘썼다.
작품으로는 文貞公李端相碑,
監司李萬雄碑,
金崇謙墓表,
좌의정 金命元神道碑(고양)가 있고,
저서로는 農巖集,
農巖雜識,
朱子大全箚疑問目,
四端七情辨 등이 있다.
金昌肅 (三古齋) 1651 - 1673 (효종 2 - 현종 14)
자는 중우(仲雨), 호는 삼고재(三古齋). 참판 김수증의 아들 가학을 이어 전서·예서를 잘 썼으며,
시에도 능했다. 특히 고문과 고서화를 좋아하여 많이 수장했으나 23세로 요절했다.
金允謙 (眞宰) 1717 - 1775 (숙종 37 - 영조 51)
조선 후기의 화가. 자는 극양(克讓), 호는 진재(眞宰)·산초(山樵)·묵초(黙樵). 척화대신 김상헌의 현손이다.
정선이 이룬 진경산수화풍을 이어받아 강희언·김응환 등과 함께 겸재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금강산·한양근교·단양·영남지방 등 명승을 여행하면서 진경산수 제작에 몰두하였으며,
정선이 겸재파 화가들의 경향에서 벗어나 자신의 화풍을 갖추었다.
실경을 대담하게 생략한 근대적 화면구성이 특징적이다.
대표작으로는 東山溪亭圖(간송미술관 소장),
金剛山畵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眞景山水畵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葱秀山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嶺南名勝紀行寫景帖(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金昌翕 (三淵) 1653 - 1722 (효종 4 - 경종 2)
학자.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시호는 문강(文康). 영의정 김수항의 셋째 아들.
15세 때 이단상에게 수학하고 1673년(현종 14) 21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대과에 뜻이 없어 학문에는 전념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 당하자 영평에 은거했고,
1694년 갑술옥사로 아버지가 신원된 후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로 맏형 김창집이 유배지 거제도에서 사사 당하자 울분 끝에 지병으로 죽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둘째 형 김창협과 더불어 율곡 이이 이후의 대학자로 추앙을 받았으며,
문하에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특히 예서에 능했다. 저서로는 三淵集이 있다.
金昌業 (老稼齋) 1658 - 1721 (효종 9 - 경종 1)
학자. 화가. 자는 대유(大有), 호는 가재(稼齋)·노가재(老稼齋). 영의정 김수항의 넷째 아들.
도학과 문장으로써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특히 시에 뛰어났고,
24세 때 진사가 되었으나 집안이 너무 번창하는 것을 꺼려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성품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해 부귀공명을 멀리하고, 서울 교외 송계(松溪)에서 꽃나무를 가꾸며
전원생활을 했다.
54세 때인 1712년(숙종 38) 사은사로 청나라에 가는 맏형 김창집을 수행, 연도의 산천·관방(關防)·사관(寺觀)·
시암(市庵)·인민·속요(俗謠)·비문·서적·기용(器用)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기록하여 「燕行錄」을 남겼다.
그 뒤 맏형의 지위가 점점 높아지자 문벌이 더욱 번성해지는 것을 걱정하고,
장래가 촉망되던 막내아들 김신겸(金信謙)의 문과 응시를 말렸다.
그러던 중 1721년(경종 1) 신임사화로 맏형이 거제도에 유배되자 울분으로 병이 덧나 64세로 죽었다.
그림에 능하여 산수를 잘 그렸으며, 화격이 고결했으나 만년에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작품으로는 山水圖,
尤庵宋時烈畫像(1682) 등이 있고
저서로는 老稼齋集,
燕行錄이 있다.
金重元 (善卿) ? - 1716 ( ? - 숙종 42)
무관. 자는 선경(善卿). 어영대장 김응해(金應海)의 증손. 24세 때 무과에 급제, 3도통제사를 지냈다.
관직에 있을 때는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등 치적을 많이 올려 송덕비가 세워졌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스스로 학문에 힘써 유학에 밝았으며, 초서·예서를 잘 썼다.
金元行 (渼湖) 1702 - 1772 (숙종 28 - 영조 48)
학자.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운루(雲樓), 시호는 문경(文敬). 영의정 김창집의 손자.
김제겸의 아들로 당숙 김숭겸에게 입양했다. 일찍이 증조부인 김창흡에게 수학하여 문명이 높았다.
1719년(숙종 45) 18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사회 때 조부 김창집이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사사 당하고
생부 김제겸도 사사되는 등 당화(黨禍)가 집안에 미치자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어 문하에서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특히 행서에 능했다. 저서에는 渼湖集이 있다.
金逌根 (黃山) 1785 - 1840 (정조 9 - 헌종 6)
문관. 자는 경선(景先), 호는 황산(黃山), 시호는 문정(文貞).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의 5대손,
순조의 장인 김조순(金祖淳)의 아들. 1810년(순조 10) 문과에 급제,
대사헌·예조판서 등을 거쳐 판돈녕부사를 지냈다.
시서화에 능했다.
작품에 그림으로는 五株枯木圖,
疏林短壑圖,
墨竹圖 등이 있고,
글씨로 淸聖廟重修碑(해주)가 전하고
저서로는 黃山集이 있다.
金履九 (自然窩) 1746 - 1812 (영조 22 - 순조 12)
자는 원길(元吉), 호는 자연와(自然窩). 세자시강원 찬성(贊善) 김양행(金亮行)의 아들이다.
1778년(정조 2) 혜릉 참봉이 되고 상의원 첨정을 지냈다.
작품으로는 黃江書院廟庭碑 전액(제천)이 있다.
金羲淳 (山木) 1757 - 1821 (영조 33 - 순조 21)
문관. 사는 태초(太初), 호는 산목(山木), 시호는 문간(文簡). 김상용(金尙容)의 후손.
군수 김이인(金履仁)의 아들, 27세 때 생원이 되고 1789년(정조 13) 문과에 급제, 삼사(三司)의
요직을 거쳐 이조판서를 지냈다.
작품으로는 高麗三太師廟庭碑(안동),
桐華寺仁嶽大師碑(대구),
河南山馳馬碑(곡산) 등이 있다.
金履喬 (竹里) 1764 - 1832 (영조 40 - 순조 32)
문관. 자는 공세(公世), 호는 죽리(竹里), 시호는 문정(文貞). 부제학 김시찬(金時粲)의 손자.
이조참판 김방행(金方行)의 아들. 1789년(정조 13) 문과에 급제, 수찬·북평사·이조참의 등을 거쳐
1810년(순조 10)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뒤에 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역임,
1831년 우의정에 올라 독상(獨相)으로 국정을 도맡아 처리했다.
작품으로는 慶恩府院君金柱臣神道碑(고양 大慈山)이 있고
저서로는 竹里集이 있다.
金祖淳 (楓皐) 1765 - 1831 (영조 41 - 순조 31)
문관. 처음 이름은 낙순(洛淳),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 시호는 충문(忠文).
김창집(金昌集)의 현손, 부사 김이중(金履中)의 아들. 1785년(정조 9) 문과에 급제 이조참의·
양관 대제학 등을 거쳐 영돈녕부사를 지냈다.
1802년(순조 2) 딸이 순조의 비(순원왕후)가 되자 왕의 장인으로서의 영안(永安)부원군에 봉해졌다.
문장에 능하였고, 특히 묵죽을 잘 그렸다.
작품으로는 墨竹圖 雪夜寫竹圖 등이 있고,
저서로는 楓皐集이 있다.
金學淳 (華棲) 1767 - 1845 (영조 43 - 헌종 11)
문관. 학자. 자는 이습(而習), 호는 화서(華棲). 아버지는 목사 이석(履錫)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로 주영(疇泳)의 딸이다. 1798년(정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805년(순조 5) 증광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었다.
1808년 성균관전적·병조좌랑을 거쳐, 1809년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
그 뒤 영남어사·순천부사 등을 역임하고, 1825년 공청도관찰사, 1827년 도승지, 1832년 공조판서에 제수 되었다.
40여년 동안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왕의 자문과 정사에 깊이 관여하였고, 청렴과 근면으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는 華棲集이 있다.
金邁淳 (臺山) 1776 - 1840 (영조 52 - 헌종 6)
문관. 학자. 자는 덕수(德叟), 호는 대산(臺山), 시호는 문청(文淸). 어버지는 참봉 이수(履鏽),
어머니는 죽산 안씨(竹山 安氏) 종주(宗周)의 딸이다. 1795년(정조 1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사인을 거쳐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고, 그 뒤 에초참판을 거쳐 1821년(순조 21) 강화부유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당대의 문장가로 홍석주 등과 함께 명성이 높았으며, 여한십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또한, 성리설에 관하여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서 인물동성이론(人物性同異論)을 둘러싼
호락논쟁(湖洛論爭)에 한원전(韓元震)의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고종 때 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臺山集,
臺山公移占錄,
朱子大全箚問標補,
篆餘日錄,
洌陽歲時記 등이 있다.
金洙根 (溪山樵老) 1798 - 1854 (정조 22 - 철종 5)
문관. 자는 회부(晦夫), 호는 계산초로(溪山樵老), 시호는 정문(正文). 아버지는 목사 인순(麟淳)이다.
1828년(순조 28)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음사(蔭仕)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며,
1833년 시제에서 수석하여 전시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이듬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35년(헌종 1) 규장각대교가 된 뒤 1837년 대사성, 1840년 이조참의, 1845년 우윤, 1847년 공충도관찰사,
1850년(철종 1) 이조참판·공조판서·1851년 우참찬·대사헌, 다음해에 이조판서와 홍문관 대제학·선혜청당상,
1853년 병조판서, 1854년 형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당대 세도가의 출신으로서,
동생 문근(汶根)은 철종의 장인으로 영은부원군에 봉하여졌고 두 아들 병학과 병국은 모두 정승에 올랐다.
저서로는 三淵先生年譜가 있다.
金左根 (荷屋) 1797 - 1869 (정조 21 - 고종 6)
문관. 자는 경은(景隱), 호는 하옥(荷屋), 시호는 충익(忠翼). 아버지는 영안부원군 조순(祖淳)이며,
순조비 순원왕후는 그의 누이이다. 영의정 창집(昌集)의 5세손이다. 인품은 정량(정량)하고 공평했으나,
안동 김씨 세도 정치시기의 핵심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조선 말기 역사에 끼친 영향이 컸다.
金輔根 (三松) 1803 - 1869 (순조 3 - 고종 6)
문관. 자는 중필(仲弼), 호는 삼송(三松), 시호는 문헌(文憲). 아버지는 목사 지순(芝淳)이며,
어머니는 민종현(閔鍾懸)의 딸이다. 종숙인 홍순(홍순)에게 입양되었고 영흥부원군 조근의 동생이다.
1837년(헌종 3) 판관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복시정(司僕寺正)·대사성·부제학·직제학·경기도관찰사·이조참판을 거쳐, 형조판서·대사헌·예조판서·
함경도관찰사·판의금부사·한성부판윤·공조판서·원접사·규장각제학·병조판서·좌참찬 등을 역임했다.
1864년 예문관제학·광주유수가 되었다.
金炳淵 (蘭皐) 1807 - 1863 (순조 7 - 철종 14)
방랑시인. 자는 성심(性深), 호는 란고(蘭皐). 선천(宣川)부사 김익순(金益淳)의 손자.
세칭 김삿갓으로 유명하다.
평생 방랑생활을 하며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후세 사람들이 구전되는 그의 작품을 모아 간행했다.
시를 쓸 때에는 자획에도 시의(詩意)를 표현하려 했다.
작품으로는 金笠詩集이 있다.
金炳冀 (思穎) 1818 - 1875 (순조 18 - 고종 12)
문관. 자는 성존(聖存), 호는 사영(思穎), 시호는 문헌(文獻). 판돈녕부사 김영근(金泳根)의 아들로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에게 입양했다. 1847년(헌종 13) 문과에 급제,
훈련대장·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을 지냈다.
천성이 온화하고 명리(名利)에 담박했다.
저서로는 思穎集이 있다.
金炳學 (穎樵) 1821 - 1879 (순조 21 - 고종 16)
문관. 자는 경교(景敎), 호는 영초(穎樵), 시호는 문헌(文獻).
이조판서 김수근의 아들로 백부 김준근에게 입양했다.
1849년(헌종 15) 진사에 합격, 현감을 지내고 1853년(철종 4) 문과에 급제,
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을 역임했으며,
흥선대원군 집권 하에 안동 김씨 세력이 몰락한 가운데서도 좌의정·영의정을 거쳐 영돈녕부사를 지냈다.
특히, 행서에 능했다.
金炳國 (穎漁) 1825 - 1904 (순조 25 - 광무 8)
문관. 자는 경용(景用), 호는 영어(穎漁), 시호는 충문(忠文). 김병학의 아우.
1850년(철종 1) 문과에 급제, 훈련대장과 6조의 판서를 두루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鑄字監董諸臣題名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鑄字事實의 현판과 창덕궁의 鑄字所에 부착되었던 전서로 된 편액을 썼다.
金聲根 (海士) 1835 - 1918 (헌종 1 - )
문관. 자는 중원(仲遠), 호는 해사(海士), 공조판서 김온순(金蘊淳)의 아들.
1862년(철종 13) 문과에 급제, 예문관·홍문관의 벼슬을 거쳐 예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902년(광무 6) 탁지부대신을 지냈다. 성품이 너그럽고 청렴했으며,
필법이 웅건했는데 북송 미불(米芾)의 서체와 같았다. 그림도 잘 그렸다.
金奭鎭 (梧泉) 1843 - 1910 (헌종 9 - )
문관. 항일우국지사. 자는 경소(景召), 호는 오천(梧泉), 상헌(尙憲)의 후손이다.
1860년(철종 1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종친부(宗親府) 벼슬을 거쳐 사과(司果)·
전적(典籍) 등을 역임하였고 홍문관의 관직을 지냈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한 뒤 조선의 전직 고위관료들에게 작위 또는 은사금을 주었는데,
일제는 그에게 남작의 작위를 주어 회유하려 하였다. 이를 치욕으로 느끼고,
1910년 9월8일 간직하였던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金宗漢 (遊霞) 1844 - 1932 (헌종 10 - )
문관. 자는 조경(祖卿), 호는 유하(遊霞). 이조판서 김경진(金敬鎭)의 아들.
1876년(고종 13) 문과에 급제, 홍문관 교리와 대사성·부제학·도승지·궁내부대신 서리·
함경남도관찰사 등을 거쳐
1909년(융희 3) 비서감경·규장각 지후관(祗候官)을 지냈다.
金嘉鎭 (東農) 1846 - 1922 (헌종 12 - )
문관. 항일운동가. 자는 덕경(德卿), 호는 동농(東農). 예조판서 김응균(金應均)의 아들.
1865년(고종 2)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어 형조좌랑 겸 내무부주사를 지내고,
1886년 문과에 급제, 부수찬·동부승지 등을 거쳐 주 일본 판사대신이 되어 수년간 동경에 주재했다.
귀국 후 황해도관찰사·중추원 의장·의정부 찬정·대한협회 회장 등 요직을 지냈다.
1910년 한일합병 후 남작이 되었으나 거절, 국권 회복에 뜻을 두고 독립운동에 참가했으며,
1920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약했다.
5세 때부터 학문에 힘써 16세에 벌써 경사자집(經史子集)에 통달했으며, 서법에도 뛰어났다.
글씨는 영조 때의 명필 이광사(李匡師)의 체를 썼으나, 만년에는 중국의 미불(米芾)과 동기창(董其昌)의
서체를 즐겼으며, 또한 시문에도 능하여 이름을 떨쳤다.
金玉均 (古筠) 1851 - 1894 (철종 2 - 고종 31)
문관.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고우(古愚)·삼화두타(三和頭陀), 시호는 충달(忠達).
선공감 감역 김병태(金炳台)의 아들로 숙부인 강릉부사 김병기(金炳基)에게 입양했다.
1884년 10월 우정국 낙성식을 기화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의 거물들을 죽이고 새 내각을 조직,
실권을 잡았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혁명이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망명,
10년 동안 각지를 방랑하다가
1894년 중국 상해로 유인되어 본국 정부가 밀파한 자객 홍종우에게 살해되었다.
필법에 뛰어났으며 전각도 잘했다.
저서로는 箕和近事,
治道略論,
甲申日錄 등이 있다.
金福漢 (志山) 1860 - 1924 (철종 11 - )
문관. 의병장. 자는 원오(元五), 호는 지산(志山),
1892년(고종 29)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교리로 이듬해에는 사서(司書)에 제수 되었으며,
성균관대사성·형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894년 승정원승지에 제수 되었으나 그해 6월에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자정(자정)하기로 결심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문인 박경호를 상경시켜 유림대표들과 협의하게 하였고,
영남의 곽종석과 함께 호서의 유림을 대표하여 전국 유림 137명의 서명을 받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를 발송하였다. 뒤에 발각되어 모두 일본 경찰에 붙잡혔는데, 옥중에서 중병으로
90여 일만에 석방되었다.
1921년부터는 인지사(仁智社)를 세워 후진양성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金寗漢 (東江) 1878 - 1950
문관. 자는 기오(箕五), 호는 동강(東江). 아버지는 군수 홍진(鴻鎭),
어머니는 대구 서씨(大邱 徐氏) 민순(敏淳)의 딸이다.
9세 때에 경술(庚戌)의 국변(國變)으로 약을 먹고 순국(殉國)한 석진(奭鎭)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1894년에 17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1898년 희릉참봉(禧陵參奉)으로 출사하여 영릉참봉(寧陵參奉)·영릉참봉(英陵參奉)을 거쳐서
시강원시종관(侍講院侍從官)이 되었다가 용인군수(龍仁郡守)·양근군수(楊根郡守)를 거쳐서 비서원승
(秘書院承)에 이르렀으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세상에 뜻이 없어져 조정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양부(養父) 석진이 음독자진(飮毒自盡)하고
일본이 강원한 작위와 돈을 받는 것은 불충불효(不忠不孝)라 하여 끝내 받지 아니하였다.
문장가로 세상에 알려져서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及愚齋集이 있다.
金容鎭 (穎雲) 1878 - 1968
호는 영운(穎雲). 서울 출신. 선전(鮮展)에 입선한 것을 시작으로 1942년 조선남화연맹전에 참여했고,
1949~57년 국전심사위원과 1956년 동방연서회(東方硏書會) 회장을 지냈으며, 1964년 송수(頌壽)전을 열었다.
오창석(吳昌碩) 화법의 문인화풍을 이어받아 사군자와 기명절지에 능했다.
작품으로는 石梅圖 외에 다수가 있다.
金佐鎭 (白冶) 1889 - 1930
독립투사. 호는 백야(白冶). 충남 홍성 출신. 김형규(金衡圭)의 아들.
18세 때 고향에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여 청소년을 가르쳤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 체결 후 기호학회·청년학우회 등의 간부를 지내고,
1914년 대한광복단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7년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 총사령관이 되고
1920년 유명한 청산리 싸움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金舜東 (蒼厓) 1898 - 1972
충남대학교 교수. 총장 역임. 성균관 관장 역임. 서집에는 蒼厓集이 있다.
金文顯 (褧人) 1913 - 1974
서예가.자는 순경(純卿),호는 경인(褧人),서울출신.번계 김윤동(樊溪 金潤東)의 맏아들.어려서 천자문을 썼고,
1935년 조선서화협회전에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43년 월간 『여성』에 「우리 궁체 쓰는 법」을 연재하고,
1945년 8·15 광복이 되자 사서연역회(史書衍繹會)와 1957년 동방연서회에 참여했으며,
1972년 오산(梧山)학원 이사장에 취임했다. 글씨는 특히 행서에 능했다.
작품으로는 篆書柱聯,
木食窩記,
千字文,
司評公吏曹參判金厚謙墓碑 외 다수가 있다.
서집에는 褧人遺墨이 있다.
金彰顯 (白牙) 1923 - 1992
교육자. 서예가. 호는 백아(白牙), 사울 출신. 번계 김윤동(樊溪 金潤東)의 셋째 아들.
고려대 교육대학원 강사와 1984년 국전서예부 심사위원을 맡았고 昌文여고 교장을 지냈다. 漢詩에도 능했다.
생존작가
金忠顯 (一中) 1921 -
金膺顯 (如初) 1927 -
金晉東 (溪山)
金縉東 (釣月人)
金端喜 (景侯)
金洋東 (近園)
金珏漢 (故園)
우선 仙源의 해·행·초는 왕희지 필법을 익히기도 했지만 篆書에 특히 小篆에 大家였고 독보적인 존재였다.
선계의 전서는 사계의 신도비에서 보듯이 글자가 짧고 핵의 힘이 좋아 진나라 이사와 당나라 이양빙을 절충한 맛이 난다. 당시 전액은 仙源처럼 써야만 되는 것으로 서가, 사대부, 일반에게 알려졌다.
그래서 당시 중요 명문들도 神道碑에 仙源의 篆額을 받기를 가장 원했다고 한다.
당시 대문장가인 월사 이정구가 짓고 金玄成이 쓰고 仙源 이 篆額한 것을 최고로
여겼고 실제로 그렇게 한 비석들은 根德輿 신도비를 비롯해 沙溪先生의 비석 등 유명비석 등에 남긴 흔적을 볼 수 있다.
특히 仙源의 행초에서는 날카롭고 예리함이 충절이 서린 추상같은 군자의 기상이 보인다.
休菴 金尙寯이 사촌형 仙源에게 준 送詩인 행초서는 송설체를 닮은 아주 능숙하고도 예쁜 글씨가 귀태가 난다.
영에게 주는 송시인데도 위에 도장을 찍어 낙관 하였다.
보통의 경우 안동김씨는 四味堂부터 도서를 찍은 고로 仙源, 休菴, 淸陰 등의 후손들이 도장 찍기를 좋아했다.
이는 높은 안목과 멋을 즐기며 격식을 아는 품격 높은 사대부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淸陰의 글씨는 둥글둥글한 顔眞卿의 글씨를 닮았다. 顔眞卿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후선 안동김씨들이 顔眞卿 글씨를 많이 쓰게 되었다고 보여지며, 현재 안동김씨 제자들까지도 영향을 받아
顔眞卿 글씨를 많이 쓰고 있다. 당시 전국의 신도비 등 금석문자는 淸陰이 석권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오세창은 「근역서화징」에서 청음의 글씨가 매우 좋다고 평하기도 했다. 청음의 후손들에게 영향을 주어
예술적 감각과 서화에 안목이 높았다. 이는 학문이 싶고 돈후한 그의 성품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서예사상 꼽아야 할 인물은 谷雲 金壽增이다. 谷雲은 당시 독특한 예서로써 독보적인 존재였으며,
谷雲의 영향이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광산 김씨 西浦 댁도 수증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谷雲의 예서는 독창적인 것으로 馬蹄蠶頭를 하였다. 심지어는 谷雲 예서 스타일로 도장을 각 하기도 하였다.
그 후 農巖 昌協의 전서는 김명원의 신도비에 篆額한 것을 보아도 아주 철저하게 선원의 전법을 따랐다.
眞宰 允謙의 순 한글 편지는 고박한 맛이 그대로 풍기며 날짜와 이름만은 한자로 써서 무게를 나타내주고 있다.
渼湖 元行은 사위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초서의 유연함과 함께 뒤편 딸에게 주는 한글 편지는
궁체가 아닌 것으로 힘차게 활달하게 쓴 점이 보인다.
黃山 逌根은 글씨뿐만 아니라 괴석도와 十長生 그림으로도 유명하며
특히 조선조 최고의 서예가 추사와 교유가 깊어 황산의 전각도 추사가 직접 새겨 주었으리만치 친하였으니
교유를 통한 서법의 격조를 짐작할 만 하다.
楓皐 祖淳은 趙松雪體에 가깝게 아주 예쁘기도 하고 간혹 독필(무디어진 붓)로 쓰기도 하여 비백이 많고
더욱이 묵죽을 많이 그렸기 때문에 조형적인 표현이 보통 선비들의 글씨와 다른 점이 보인다.
蘭皐 炳淵의 행서는 약간 추사의 기미가 보이나, 방랑인 답지 않게 정제되고 아름다운 것이 特記할 만 하다.
穎雲 容鎭은文人畵의大家로서예작품에 운치를 풍기며특히 행서는顔眞卿의爭座位帖에서
우러나오는 소박한 맛이 풍긴다.
최근 작가로서 蒼厓 舜東은 海觀 尹用求의 글씨를 계승한 듯 하며 횡획은 가늘고 종핵은 굵은 것이
마치 유공현과 顔眞卿을 공부한 영향도 있으나 점획이 흐트러지지 않는 儒者의 風이 있다.
그러나 너무 海觀을 많이 닮은 것이 아쉽다. 그가 많이 남긴 비문은 방정하며 단아하고 문집에 실린
露根蘭은 군자의 기풍이 서려 있다. 농묵으로 원근처리는 잘 되었으나 좀 휘어졌으면 좋겠다.
褧人 文顯의 예서는 谷雲의 예서를 본따서 馬蹄蠶頭의 필치를 보였고 행서는 중국 劉石庵에 근거를 두어
여유가 있고 전형적인 전아한 맛을 보인다.
白牙 彰顯은 특히 한학에 깊은 조예로 행서에 문기가 있으면서도 힘차다.
생존 작가로는 한국 서예사상 너무나 우뚝한 두 거목 一中과 如初 두 분이 있으니
이 두 분의 서예 평가와 공로는 여기에서 자세히는 논할 수 없겠다.
국한문 모든 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두 분은 안동김씨의 서예를 집대성 했을 뿐만 아니라
당대는 물론 한국 서예사상 큰 획을그어 천추에 남을것이니 후대에의 영향은 오랫동안 크게 미칠 것이 분명하다.
一中은 한글 궁체를 정리하였으며 한문 예서의 예술미는 극치를 이루었다.
如初의 六朝體를 기반으로 한 行草와 古篆 廣開土大王碑에 근거한 예서의 고박함과 각 체를 구애 없이 펼칠 때
落紙煙雲과 같다 하겠다.
두 분에 대한 서법논의는 다른 기회에 언급하기로 한다.
그 외의 현역작가는 생각 외로 그리 많지 않다.
溪山 晉東은 관향인 향리 안동에서 대표적인 서예가로써 인근의 중요한 많은 편액과 금석문을 편안하고
깔끔한 글씨체로 남기고 있다.
釣月人 縉東은 경기도 포천에서 한글과 한문의 독특하고 개성 있는 글씨로 활동하고 있다.
景侯 端喜는 一中의 따님으로 일찍부터 家學을 물려받아 국한문을 두루 구사하고
특히 국한문을 혼용하여 독특한 구도로 공간 포치 와 조밀로 멋을 작품에 나타내고 있다.
또한 여성 서예계의 대표적 작가로 작품 활동과 후배양성에 이바지 하고 있다.
近園 洋東은 서예 작가이면서 또한 서예 교육자로써 대학교에 書藝科 창설에 주도적으로 공로를 세웠으며
서예의 회화적 접목을 보여 색깔을 가미한 조형미를 나타내고 있으며, 전각가이기도 하다.
故園 珏漢은 전서와 예서를 절충한 글씨를 시도하여 직접 본인이 목판에 새기는 중진 서각가이기도 하며
국가 중요기관에 刻을 통해 서예 진흥에 힘쓰고 있다.
이렇듯 안동김씨의 서예는 학문과 道統을 지닌 가문의 학문적 온축과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나타내며 전통을
이어왔으며, 당대의 서예계를 주도해왔다.
한문 서예뿐만 아니라 한글도 많이 활용하였다. 文谷의 유언도 한글로 번역하여 대소가의 안식구들에게 읽히게
했으며 炳喬 아랫대에 와서 淸陰 계통의 족보를 한글로 만들어 종친에게 널리 읽도록 한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이렇게 한글도 안동김씨 서예가들에 의해 사랑을 받아왔으며 보급, 정착, 발전 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본 발표에서는 우선 작품을 남긴 안동김씨 서예가들의 면모와 작품세계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았으나
다음 원고 정리 때에는 문필가인 서예가들의 문학 소개와 문학과 서예와의 관계,
또한 사회·문화사적 관점에서 더 깊이 고찰할 것을 과제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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