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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전의이씨 낙남조落南祖 예산현감 이필
프롤로그
지금까지 대구 달성의 보물이자 대한민국 보물인 하목정에 대해 알아보았다. 필자는 평소 이런 비유를 자주 든다. 재실은 하드웨어요, 문중은 소프트웨어라고. 현재 대구에는 약 400개의 문중 재실이 산재해 있다. 이중 절반이 달성군에 있다. 그래서 달성군은 대구지역 재실문화·문중문화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재실은 문중을 담는 그릇이고, 문중은 재실이란 그릇에 담기는 내용물이다. 그래서 이 둘은 때려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문중 없는 재실 없고, 재실 없는 문중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재실문화라는 측면에서 하목정을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방향을 조금 바꿔 문중문화라는 측면에서 하목정을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순서는 전의이씨 시조로부터 시작해, 낙남조落南祖 이필, 하목정 창건주 이종문과 그의 형제들, 이종문의 네 아들, 전양군 이익필, 기타 인물 순이며, 인물과 관련 있는 문중 재실 및 유적도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전의이씨 시조 고려 태사공 이도李棹
현재 우리나라 이씨 본관 수는 어림잡아 100여개가 훨씬 넘는다고 한다. 일부 옛 문헌에 의하면 이씨 본관은 451본[증보문헌비고], 546본[조선씨족통보] 등으로 나타난다. 그 중 지금의 세종시 전의면全義面을 본관으로 하는 이씨가 있으니 ‘전의全義 이씨’다. 전의이씨 시조는 고려개국 공신인 ‘이도李棹’라는 인물. 그는 본래 공주 금강 일대 대호족장이었다. 당시 교통과 물산의 중심지였던 금강 일대는 지리적으로 고려와 백제 사이에 있으면서 힘의 균형추 역할을 하는 완충지역이었다.
동국여지승람 등 기록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금강 물이 범람해 어려움을 겪을 때, 금강유역 지리에 밝은 이도가 나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도의 본래 성명은 ‘이치李齒’였는데, 이때의 공으로 태조로부터 ‘도’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응양군대장군鷹揚軍大將軍을 거쳐 벼슬이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다. 이후 통합삼한개국익찬이등공신統合三韓開國翊贊二等功臣에 오르고, 전산후全山侯에 봉작되었으며, 사후 성절聖節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도는 나중에 근거지를 전의 지역 ‘이성李城’으로 옮겨 누대의 세거지로 삼았는데, ‘전의’라는 본관은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전의이씨 시조 이도의 풀네임은 ‘고려통합 삼한개국 익찬공신 삼중대광태사 전산후 성절공 이도’다. 지금 세종시 전의면 유천리에 시조 이도의 묘소, 사우祠宇 경원사景遠祠, 재실 영사재永思齋가 있다.
금강 뱃사공과 전의이씨 발복發福 전설
전의이씨 종중에는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흥미로운 전설이 하나 있다. 세상에는 ‘태사공太師公 선산先山에 얽힌 전설’로 알려져 있다. 이 전설은 선을 많이 쌓은 집은 반드시 경사가 있다는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형 전설이다.
통일신라가 무너지고 신라·후백제·후고구려 세 나라가 각축을 벌이던 후삼국시대. 충남 공주 금강 어느 나루에 한 뱃사공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삿갓을 깊게 눌러 쓴 한 스님이 배에 올랐다. 뱃사공은 스님을 강 건너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런데 스님은 두고 온 물건이 있다며 다시 출발했던 나루로 돌아가자고 했다. 뱃사공은 아무런 불평 없이 스님의 말대로 처음 자리로 스님을 데려다 주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스님은 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다시 강 건너 편에 내려달라고 했다. 하루 종일 이렇게 하기를 여덟 번. 게다가 스님은 뱃삯조차 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뱃사공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스님이 뱃사공에게 물었다. “처사處士께서는 어찌하여 뱃삯도 요구하지 않고, 소승의 요구에 불평도 하지 않으십니까?” 뱃사공은 “스님께서 뱃삯을 내지 않는 걸 보니 돈이 없는 게 분명한데 제가 어찌 뱃삯을 달라고 하겠습니까? 또 스님께서 뜻이 있어 반대편으로 건네 달라고 하시는데 제가 어찌 스님의 뜻을 마음대로 헤아려 거스를 수가 있겠습니까?”라며 답했다. 뱃사공의 얼굴을 잠시 살피던 스님이 다시 말을 건넸다. “관상을 보니 상중喪中인 것 같은데 장례는 지냈습니까?” 이에 뱃사공은 근심어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며칠이 지났지만 장례 치를 돈도 없고, 모실만한 자리도 못 구해 아직도 집안에 시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뱃사공의 말이 끝나자마자 스님은 뱃사공을 데리고 인근 산으로 올라가, 묏자리 하나를 잡아주고 장사를 치러주었다.
세월이 흘러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정벌을 위해 금강에 이르렀을 때였다. 때마침 금강 일대는 홍수로 강물이 불어 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금강 일대 수운水運을 장악한 호족豪族 이치李齒가 나서 왕건 군대가 금강을 건널 수 있게 도와주었다. 왕건은 이치의 공로를 치하하며 그에게 ‘도棹’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후 이도는 왕건을 도와 고려 창업공신이 되었으며, 훗날 태사 벼슬에 올랐다. 이도가 바로 그 옛날 뱃사공의 후손이었다.
이 전설, 어디서 많이 접해본 전설 같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전설이나 신화 중에는 유독 강물을 건네주거나 강물 주변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가 많다. 대표적으로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이올코스의 왕이 된 이아손 이야기’가 있다.
이올코스의 왕자로 태어났지만 숙부에 의해 쫓겨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아손. 성인이 되어 다시 이올코스로 돌아오는 길. 그는 강가에서 만난 한 노파를 등에 업고 강을 건너게 됐다. 그런데 어찌된 것인지 등에 업은 노파의 몸무게가 시간이 갈수록 무거워져 나중에는 바위덩이보다 더 무거워졌다. 이상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한참을 건넜는데도 강 반대쪽이 나타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강돌에 미끄러져 이아손의 신발 한 짝이 떠내려갔다. 이아손이 손을 뻗어 떠내려가는 신발을 잡으려 하니 등에 업힌 노파가 호통을 쳤다. “신발 한 짝 때문에 나이든 사람을 물에 빠뜨리려 하느냐” 우여곡절 끝에 노파를 업고 강 반대편에 도착한 이아손. 잠시 숨을 돌리고 나니 노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외짝 신발로 이올코스에 도착한 이아손은 결국 이올코스의 왕이 됐다. 후에 알고 보니 이아손 등에 업혔던 노파는 할머니로 변신한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의 부인 해라 여신이었다.
이처럼 강물과 신발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그 유명한 초한지에도 나온다.
한고조 유방의 책사였던 장량. 젊은 시절 장량은 어느 다리를 건너다가 낯선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다짜고짜 자신이 신고 있던 신발 한 짝을 물에 던지고는 장량에게 주워오라고 했다. 황당했지만 나이 많은 어른의 부탁이라 장량은 물에 뛰어들어 신발을 주워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노인이 장량에게 신발을 신겨달라고 했다. 장량은 그 부탁도 들어주었다. 이후 며칠에 걸쳐 이 다리에서 몇 번의 황당(?)한 만남을 가진 후, 노인은 장량에게 책 한 권을 전해주었다. 그 유명한 강태공의 병법서인 태공병법이었다. 노인은 장량에게 말했다. “이 책으로 열심히 공부하면 10년 후에 자네는 제왕의 스승이 될 수 있다. 또 13년 후에는 곡성산 아래에서 황색 빛을 띤 돌을 만나게 될 것인데 그 돌이 바로 나다” 세상 사람들은 그 노인을 황석공黃石公이라 칭했다.
‘전의이씨 부정공파’ 홈페이지에는 ‘태사공 선산에 관한 전설’이란 제목의 글이 등재되어 있다. 글 중에서 일부분만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다.
··· 형국은 목마른 용龍이 물을 마시는 형形이고 산 이름은 석방현石傍峴[돌곁재]이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전의이태사全義李太師의 선대先代가 살면서 행여인行旅人을 접대구제接待救濟하여 크게 은혜를 베풀었더니 어느 날 괴이한 중이 금강錦江 가에 이르러 적덕한 사람을 알아보고 좋은 묘자리를 잡아 주면서 말하기를, “이곳에 장사지내면 자손이 매우 번성하여 금강錦江 물이 마르지 않는 한 이씨李氏는 끊어지지 않으리라”라고 말하였다는 것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년千年에 가까운 데도 그 고장 사람들은 이 묘를 가리켜 이태사李太師의 선산先山이라고 지칭하지 않는 이가 없다···
전의이씨 중시조 동암수東巖叟 이천李仟
중시조中始祖란 말은 한 씨족을 세상에 크게 드러낸 조상, 혹은 시조 이후 종중·문중을 크게 일으켜 세운 조상을 말한다. 전의이씨 종중에서 중시조로 존숭되는 이는 ‘이천李仟’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전의이씨 7세世로 자字는 수덕修德, 호는 동암수東巖叟로 응양군대장군지례부사鷹揚軍大將軍知禮部事, 중서시중문하평장사中書侍中門下平章事를 지냈다. 그는 고려시대 몽고 침입 때 고려 수군을 이끌고 항몽전을 펼쳐 큰 공을 세웠는데 그 사실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지난 1994년 우리 해군 최초 국산 잠수함 1호 ‘이천함’이 취역했다. 이 잠수함 이름 ‘이천’이 바로 전의이씨 중시조 이천의 성과 이름을 취한 것이다.
이천은 슬하에 ‘이자원李子蒝[대사성공파]·이혼李混[문장공파]·이자화李子華[전서공파]’ 3형제를 두었다. 전의이씨는 이들 3형제로부터 비로소 3개 파로 나눠져, 이후 많은 지파를 형성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자화의 손자 이구직李丘直은 개성윤, 삼사 좌윤, 형조 전서, 공주목사를 지내고, 가정대부 호조전서, 자헌대부 참찬의정부사 및 조선 개국원종공신에 오른 인물이다.
이구직은 부인 낙안김씨樂安金氏와의 사이에서 아들 넷을 두었다. 이정간李貞幹·이진간李珍幹·이양간李良幹·이문간李文幹이다. 이들 4형제는 어머니 낙안김씨[1342-1441]를 지극정성으로 모셔 백세百歲 장수케 했다. 이에 세종대왕은 장남 이정간에게 자헌대부 중추원사의 벼슬을 하사하고, 낙안김씨를 정대부인貞大夫人에 봉했으며,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가문에 충과 효를 전하고, 대대로 인과 경을 지킴] 여덟 글자를 친히 써서 하사했다.[이 여덟 글자는 하빈 전의이씨 종중 모든 재실에 액자로 제작되어 걸려 있다] 이와 관련해 전의이씨 부정공파 족보 이정간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강원도관찰사를 사직하고 서원[청주] 송천별서松泉別墅로 물러나와 노모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때로는 색동옷에 참새와 병아리를 품어 옛날 큰 효자인 노래자老萊子의 어리광으로 즐거움을 도왔다고 한다. 세종대왕께서 이 지극한 효행을 들으시고 특명으로 벼슬의 품계를 자헌대부 중추원사로 높이시고, 궤장几杖과 겸하여 주악酒樂을 하사 하시어 잔치를 베풀어 주시는 한편,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 여덟 자를 친히 써 주시고 또 정부인 낙안김씨를 정대부인으로 봉하시니, 당시의 명공거경名公巨卿들이 모여 시와 노래로써 송축하였는데, 이 글을 모은 경수시집慶壽詩集과 자손보子孫譜가 간행되어 전해오고 있으며, 이후 국역본으로도 여러 번 발간되었다
또한 미수 허목이 찬한 수월당 이지영 묘갈명에 정대부인께서 생전에 하셨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녀가 얼마나 건강하게 100세 장수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부인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평생 동안 하늘을 향하여 대소변을 본 일이 없었다”
전의이씨 예산공파禮山公派로 불리는 하빈 전의이씨는 정대부인의 네 아들 중 막내인 부정공 이문간의 후손이다. 이문간은 조선 태종과 세종 조에서 호조 좌랑, 의금부 도사, 풍저창사, 중훈대부 군기시부정을 지냈다.
낙남落南과 낙향落鄕
전의이씨가 대구 달성 하빈에 터를 잡은 것은 이문간[11世]의 현손인 15세世 ‘이필李佖’에 의해서다. 이필은 본래 지금의 경기도 부평 사람으로 예산현감을 지냈다. 정확한 연도까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조선 중기 명종 조 이전에 연고지인 부평을 떠나 잠시 성주를 거쳐 최종적으로 대구 하빈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왜 선대의 오랜 연고지였던 경기도를 떠나 하빈으로 낙남落南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없다. 다만 그의 아들 이경두와 손자 이종문의 사적을 통해 어느 정도 추측을 할 뿐이다. 이필이 생존해 활동하던 때는 조선시대 4대 사화 중 기묘사화[1519]와 을사사화[1545]의 여파와 광풍이 휘몰아치던 시기로, 뜻있는 선비들이 벼슬을 내려놓고 시골에 은거하는 풍조가 만연한 때였다. 이필의 낙남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후손들의 생각이다.
하빈 전의이씨를 예산공파라 칭하는 것은 이필이 예산현감을 지낸 것에 유래한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파조에 해당하는 예산공 이필을 특별히 ‘낙남조落南祖’라 칭한다. ‘낙남’과 ‘낙향’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표현이다.
서울에 사는 선비가 수도의 난을 피해 남쪽 지방으로 피신하는 것을 낙남, 서울에서 관리 생활을 마치고 혹은 물러설 때를 알아 관리 생활을 그만두고 주로 남쪽에 있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낙향이라 풀이한다. [‘영남좌도 역사 산책’, 이도국, 17쪽]
낙남공 예산현감 이필李佖
전의이씨 예산공파 파조이자 낙남공으로 알려진 이필李佖[1521-?·자字 홍중洪仲]. 그는 전의이씨 15세世로 앞서 어머니 낙안김씨가 백수 장수를 누려 세종대왕으로부터 “가전충효세수인경” 여덟 글자를 하사받은 4형제 중 막내인 이문간의 현손이다. 이필의 증조부인 이계손李季孫[1419-1484]은 세종 때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감찰, 상서원 주부, 남해현감, 철산군수, 사재감 부정, 순천부사, 통훈대부 영해부사를 지내고 가선대부 병조 참판에 증직된 인물이다. 조부 이세분李世芬[1438-1500]은 세조 때 무과급제, 성종 때 좌리원종공신에 오르고, 도총부 경력, 철산군수, 장악원 첨정, 고양군수, 덕원부사, 제용감 부정, 예빈시정 등을 지내고 통훈대부 사복시정 겸 내승에 올랐다. 아버지는 통훈대부 행 형조 정랑인 이광원李光元이다.
이필은 아버지 이광원과 어머니 숙부인 평산신씨의 3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음사蔭仕[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으로 맡은 벼슬. 음관]로 예산현감을 지냈다. 부인은 모두 세 분을 두었는데, 초배初配[첫 번째 부인] 진주강씨와 삼배三配[세 번째 부인] 밀양박씨는 자식을 두지 못했고, 후배后配[두 번째 부인] 남양홍씨가 아들 한 분을 두었으니 참판공 이경두李慶斗[1541-1610]다.
이경두는 자字가 국추國樞, 병절교위 용양위 좌부장을 지냈다. 이후 임진왜란 때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함께 화왕산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증직으로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올랐다. 이경두는 두 분의 부인을 두었는데 초배인 증정부인 파평윤씨와의 사이에서 2남3녀, 후배인 증정부인 진주강씨와의 사이에서 5남1녀를 두었다. 이종문·이종택 형제는 파평윤씨 소생이고, 이종무·이종선·이종효·이종언·이종도는 진주강씨 소생이다.
문중門中과 종중宗中
문중門中은 성姓과 본本이 같은 일가 모임을 말한다. 문중과 비슷한 것으로는 ‘종중宗中’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 둘은 사전적 의미로는 큰 차이가 없어 통용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구분하면 차이가 있다. 제일 큰 차이는 적용되는 공간의 차이다. 문중은 같은 골짜기에 사는 소규모 동성촌락同姓村落, 집성촌 등에 적용되는 협의의 개념이고, 종중은 이러한 개별 문중의 연합체라는 광의의 개념이다. ‘예산공 종중의 수월당 문중’이라는 표현이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문중, 종중 외에 ‘종친회’도 있다. 도시생활을 하는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문중·종중보다는 종친회가 더 친숙하다. 어쨌든 종중·문중과 종친회는 둘 다 성과 본이 같은 일가들이 모여, 조상을 선양하고 종족의 대동화합을 추구하는 모임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하지만 이 둘 역시 성격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크게 구분하면 문중·종중은 전통적 촌락 관점의 동성·동족 개념이라 할 수 있고, 종친회는 현대적 도시 관점의 동성·동족 개념이라는 것. 최재석 교수는 한국농촌사회연구(1975)에서 ‘문중·종중’과 ‘종친회’의 차이를 요약한 바가 있는데 이를 조금 수정해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다.
| 문중·종중 | 종친회 |
| 좁은 지역사회 거주 | 전국(도시)에 산재 |
| 근친자近親者로 구성 | 원친자遠親者로 구성 |
| 자연적 조직 | 인위적 조직 |
| 종손이 결합의 중심 | 회원 결의에 의한 대표자 중심 |
| 주요 기능 : 제사 | 주요기능 : 친목,제사,족보,정치 |
| 규약 : 불문율 | 규약 : 공식적인 규약·정관 |
| 가입·탈퇴가 운명적 | 가입·탈퇴가 자유 |
이 둘의 차이점을 간명하게 표현하면 대도시는 동성·동족모임으로 ‘종친회’가 대표성을 가지고, 지방 농촌사회는 ‘문중’이 대표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대구는 현대적 개념의 ‘종친회’와 전통적 개념의 ‘종중·문중’이 둘 다 활성화 되어 있다. 하지만 달성군은 아직까지는 종친회보다는 문중 쪽에 좀 더 무게중심을 두는 것 같다.
할머니가 많은 이유, 오해하면 안 된다
출산에 따른 여성의 높은 사망률과 아들 선호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전의이씨 예산공파 낙남조 이필은 부인이 세 분이다. 그의 외아들 이경두와 손자 이종문, 이종택도 각각 부인이 두 분이다. 증손자 중에서도 이지영, 이지화, 이지발, 이지란이 부인이 두 분이며, 이지시는 세 분이다. 어쨌든 요즘 시각으로 보면 이해가 잘 안되고 좀 이상하다. 하지만 사연을 알고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이런 일이 하빈 전의이씨에만 있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언젠가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한 명문가의 젊은 주손胄孫이 집안 아저씨에게 “우리 집안은 예전에 가난했다는데 어째서 할머니를 여러 분 둔 할아버지들이 그렇게 많습니까?”라고 질문을 하더라는 것. 일반인도 아닌 명문가 주손조차 인식이 이러하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이 문제는 정확히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지금부터 한 동안 이어지는 ‘하목정 사람들 이야기’를 자칫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익히 잘 알다시피 조선시대를 살다간 우리 선조들 중에는 할머니를 두 분, 세 분 둔 할아버지들이 많았다. 이는 옛 문화에 익숙한 세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옛 문화에 익숙치 않은 현대인들에게는 오해 소지가 다분하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출산 도중 혹은 출산후유증 등으로 단명했던 당시 여성의 높은 사망률과 아들을 선호하는 종자종법宗子宗法에 대한 이해가 먼저 있어야 한다.
유교문화가 사회전반에 통용됐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자식을 많이 두는 것이 미덕이요, 하늘이 주신 복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전통시대엔 노동력을 상징하는 인구수가 한 나라의 국력을 좌지우지했다. 또 전통시대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의료보건환경이 취약했고, 자연재해나 전쟁 등으로 인한 기아, 죽음 등이 만연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다 우리나라는 유교국가의 특성상 대代를 이어야 했고, 조상제사를 받들어야 했다. 노동력도 노동력이지만 대를 잇기 위해서라도 자식, 그것도 아들이 꼭 있어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요즘과는 달리 당시 여성들은 출산을 하다가, 혹은 출산 이후 후유증 등으로 사망하는 일이 잦았다는 점이다.[물론 어린이 사망률도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요즘은 산모나 태아의 건강에 이상이 있어도 큰 문제가 없다. 의학의 도움으로 산모도 살리고 태아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엔 그렇지 않았다. 산모나 태아에게 발생한 작은 이상이 그들의 생명까지 앗아갔기 때문이다. 이처럼 출산과정에서 부인을 잃은 남편, 또는 부인과의 사이에서 대를 이을 자식을 두지 못한 남편은 어찌해야 했을까? 결국 대를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해 또 다른 부인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이쯤에서 꼭 하나는 짚고 넘어가야겠다. 전통시대엔 왜 그렇게 ‘아들’과 ‘제사’에 목을 매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는 유교의 독특한 내생관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에는 반드시 내생관이 있다. 기독교·불교 등에서 말하는 천당·지옥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유교에서는 이런 내생관이 없다. 유교 경전 어디에도 죽음 이후 저승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교에서는 죽음 이후를 어떻게 설명할까?
유교에서는 죽은 조상은 일정 상기가 지나고 나면 다시 후손들이 사는 집 사당이나 감실龕室[신주나 위패를 봉안하는 수납장]로 돌아와 후손들과 함께 살아간다고 본다. 다시 말해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저승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집 사당·감실에 계신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살아계실 때처럼 음식을 차려 제사를 받드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만약 아들을 얻지 못해 제사가 끊어지면 어떻게 될까? 자자손손 영속되어 온 그 집 조상은 이제 영원히 세상에서 소멸되는 수밖에 없다. 지금의 시각이 아닌 유교사상이 지배했던 당시 시각으로는 세상에 이 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었다.
처妻와 첩妾은 다르다
처와 첩이란 말이 있다. 처는 ‘육례六禮’5)라는 정상적인 혼례 절차를 거쳐 맞이한 합법적(?)인 부인이요, 첩은 그러한 과정 없이 맞이한 불법적(?)인 부인이다. 앞서 언급한 “할머니가 왜 그렇게 많냐”는 의문은 이러한 처와 첩의 차이를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데서 시작된 것이다. 다음은 전통예학용어해설사전에 나오는 처와 첩에 대한 내용이다.
○ 처妻 : 아내. 가장의 정식 배우자. 백호통의 「혼취」에 “처는 ‘나란하다’는 말로, 남편과 예를 나란히 한다는 뜻이다”고 하였다. 원배元配·정실正室·정방正房·정궁正宮·적배嫡配·적처嫡妻·본처本妻·적嫡이라고도 한다.
5) 전통혼례의 여섯 가지 예법. 납채納采·문명問名·납길納吉·납폐納幣·청기請期·친영親迎.
○ 첩妾 : 정식 아내[정실] 외에 데리고 사는 여자. 부실副室·소실小室·외부外婦·외처外妻·측녀側女·측실側室이라고도 한다. 첩의 본래 뜻은 여자 전쟁 포로로서 여자 노예였다. ···(중략)··· 소학집해에 “아내란 말은 가지런하다는 것이니, 예를 갖추어 서로 찾아가서 남편과 대등한 몸이 되는 것이다. 분奔은 따라감이다. 첩이란 말은 접한다는 뜻이니, 남편을 접견은 할 수 있으나, 짝은 될 수가 없다. ···(중략)··· 조선시대의 첩에는 양첩良妾과 천첩賤妾으로 구분하였는데, 양첩은 양인 신분의 첩이고, 천첩은 천인 신분의 첩이다. 조선시대에는 죄를 지어 형벌로 첩이 된 경우도 있었다. 양첩의 자식은 서庶, 천첩의 자식은 얼孼이라 하였다.
전통예학용어해설사전, 이원균·송은석
요약하자면 이렇다. 유교에서는 처와 첩을 ‘빙즉위처聘則爲妻 분즉위첩奔則爲妾’으로 구분한다. 예를 갖춰 맞이하면 아내가 되고, 예를 갖추지 못하고 맞이하면 첩이 된다는 것. 우리나라에서는 원칙적으로 족보에는 처만 올리고 첩은 올리지 않았다. 따라서 족보에 올라 있는 할머니는 기본적으로 첩이 아닌 처로 보면 된다. 물론 이 경우에도 일부 예외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원칙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족보에 올라 있는 할머니는 분명 첩이 아닌 ‘처’다.
초배初配·초취初娶, 후배后配·계배繼配·재배再配, 삼배三配
족보를 보다보면 좀 헷갈리는 용어가 있다. ‘초배·초취·후배·계배·재배·재취·삼배’ 같은 용어다. 초배와 초취初娶는 첫 번째 부인을 말한다. 다른 말로는 초실初室, 원배元配라고도 한다. 후배·계배·재배·재취는 다시 장가들어 맞이한 두 번째 부인, 삼배는 세 번째 부인이다. 초배·후배·삼배는 꼭 전통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혼과 재혼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현대에 와서 더 많아졌을 수도 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 시각이 아닌 당시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전통시대에는 예를 갖춰 정식으로 맞이한 처가 아닌 첩은 공식적으로 족보에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6·25한국전쟁, 근대기라는 불과 50-60년이라는 짧지만 엄청난 사회적 격동기를 거치면서, 미풍양속이었던 전통문화는 문란해지고 와해되고 말았다.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주변에는 이른바 작은집, 작은엄마라 불리는 여인들과 그녀들이 낳은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대부분 초배가 먼저 사망했거나 아니면 초배가 있어도 아들을 두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작은집을 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축첩蓄妾’이라는 한때 유행한 못된 사회적 폐습 때문에 생겨난 작은집이 많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어쩌면 이때부터 우리는 처와 첩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로 들어섰던 것 같다. 어쨌든 후손들로부터 제사를 받고, 족보에 올라 있는 할머니는 초배든 재배든 삼배든 모두 육례를 갖춘 정식 부인이다.
선조를 추모하는 집, 이유재履有齋
이유재履有齋6)는 달성군 하빈면 기곡리基谷里 터실에 있다. 기곡리에는 장승리·터실·터개울·못안·모개울·상당[성당]·연지골 등 여러 자연마을이 있다. 이중 터실은 ‘터가 좋다’, 혹은 ‘예전부터 있어온 터’라는 지명유래를 지닌 마을이다. 터실 이유재 바로 뒷산에 전의이씨 예산공파 선영이 있다. 이곳 선영은 본래 전의이씨 예산공파 대구 입향조 이필, 그의 아들 이경두, 손자 이종문·이종택, 증손자 이지영, 현손인 이전·이유·이구까지 5대에 걸친 선대 묘소가 있었다. 그런데 2005년 서울 구로구 궁동 선영이 택지개발이 되자 이필의 조부 이세분李世芬과 부 이광원李光元의 묘도 이곳 옆 능선으로 옮겨왔다. 이런 까닭에 터실은 대구 달성과 인근 고령을 연고로 하는 모든 전의이씨의 혈연적 뿌리이자 정신적 고향이라 할 만하다. 이 터실 선영을 수호하고 묘제를 받들기 위해 건립한 재실이 이유재다.
6) 대구 달성군 하빈면 기곡리 742[터실길30]
이유재라는 재실 이름에 담긴 의미부터 한 번 알아보자. ‘이履’는 ‘첨瞻·모慕·추追·원遠·보報·본本’ 등과 더불어 재실 이름에 많이 사용하는 글자로 출전은 예기 「제의」다. “군자는 봄과 가을에 이슬과 서리를 밟으면[履] 두렵고 슬픈 마음이 드는데[有], 이는 추위 때문이 아니라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
이유재가 언제 처음 건립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인이 어렵다. 다만 중수연도는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만구 이종기 선생이 지은 ‘이유재기문’에 나오는 ‘1897년’과 2012년 이유재 중건을 위해 옛 건물을 해체할 때 발견된 상량문의 ‘1917년’이다. 문중에서는 1897년과 1917년 중 1917년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선영 아래에서 오랜 세월 종중 일을 보았던 문중 원로[이종석]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기존 옛 재실이 있었고, 그 재실을 1917년 중건했다는 것.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1967년 또 한 번의 중수가 있었으며, 현재의 이유재는 2014년 봄 낙성을 했다.
이유재는 제법 넓은 뜰을 앞에 두고 주변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해 있다. 계단을 올라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이유재 편액을 단 정당이 있다. 정당은 정면 5칸, 측면 1.5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으로 반 칸 퇴 칸을 두고 5칸 모두 유리창호를 설치했다. 평면구성은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서 2칸 방, 2칸 대청, 1칸 방이다. 대청에는 ‘이유재기’와 ‘이유재중수기’가 걸려 있으며, 대청 종도리에는 다음과 같은 상량문이 묵서로 남아 있다.
“1997년 5월 18일 오시[11-13시], 계좌정향[남향]터에 기둥을 세우고 상량. 상량 이후 하늘의 삼광三光[일日·월月·성星]에 응하고 인간의 오복이 갖추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솟을대문 바깥에는 ‘전의이씨낙남대구입향시조통덕랑행예산현감공사적비’를 비롯한 몇 기의 추모비와 이유재의 내력을 새긴 공적기·중건기 등이 서 있다.
전의이씨의관지장全義李氏衣冠之藏
이유재로 가는 기곡리 터실 입구 길가에 ‘전의이씨의관지장全義李氏衣冠之藏’이라 새긴 오래된 표지석이 하나 서 있다.7)[높이 160cm, 너비 67cm, 두께 12cm] 이는 이 지역이 전의이씨 선대 선영이 있는 곳임을 나타내는 표지석이다. 표지석에는 전면 중앙에 세로로 ‘전의이씨의관지장’, 그 좌우에 ‘숭정기원후삼갑오이월일입崇禎紀元後三甲午二月日立’이라 새겨져 있다. 이는 숭정 기원후 세 번째 돌아오는 갑오년 2월에 표지석을 세웠다는 뜻. 서기로 환산하면 지금으로부터 247년 전인 1774년(영조 50)이 된다.
7) 대구 달성군 하빈면 기곡리 779
‘전의이씨의관지장’ 표지석을 참고하면 이유재의 초창 연대는 1897년이나 1917년 보다 훨씬 더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 1774년이면 전양군 이익필이 사망한 지 23년 후다. 뒤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전양군 이익필은 전의이씨 예산공파를 세상에 뚜렷하게 각인시킨 주역이다. 그로 인해 하빈 전의이씨는 영남이 아닌 전국구 사대부가 반열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낙남조를 비롯한 여러 선조를 모신 선영 아래에다 재실 하나쯤 건립하지 못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라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 아닐까?
에필로그
대구 달성 하빈과 낙동강 건너 고령 다산 땅에 세거한 전의이씨 예산공파. 예산공파 종중은 파조이자 낙남조인 이필, 그의 아들 이경두, 손자 이종문·이종택·이종무·이종선·이종효·이종언·이종도, 증손자 이지영·이지화·이지발·이지시 등을 거쳐, 이필의 6세손 전양군 이익필에 와서 비로소 영남을 넘어 전국적으로 인정받는 사대부가 반열에 올랐다.
전의이씨 예산공파는 낙남조 이필의 증손자 대에 와서 크게 세 파로 분파됐다. 수월당 이지영을 파조로 하는 수월당 문중은 하빈면 하산·동곡·기곡, 다포 이지화의 다포공 문중은 낙동강 건너 고령 다산면 상곡·차남, 부용당 이지발과 임하처사 이지시의 부림정 문중은 다사읍 부곡리에 터를 잡아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다. 이처럼 달성군·고령군을 연고로 번창한 이 지역 전의이씨 여러 문중에 있어, 혈연적 고향이자 정신적 귀의처 한 곳 꼽으라면 기곡리 터실 선영과 이유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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