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성문화원 향토역사
이서공 격양가
송은석(수성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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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공 향사’. 매년 정월대보름 수성문화원 주관으로 수성구 상동 이공제비각에서 행하는 대보름 행사다. 이서공 향사는 조선 후기 정조 때 대구 판관을 지낸 이서(李漵)를 기리는 제사다. 이서공 향사에서 빠지지 않는 퍼포먼스가 하나 있다. ‘이서공 격양가’다. 격양가(擊壤歌)는 태평성대를 노래한 것으로 고대 중국 요임금 시절 백성들 사이에서 불렸다. 이공제(李公隄)를 쌓아 신천 범람으로부터 대구를 지켜낸 판관 이서의 업적을 격양가에 빗댄 것이 바로 이서공 격양가다. 이서공 격양가가 전해진 내력은 수성문화원 소장 ‘2010년 이공제향사’ 관련 문서철에서 일부 확인할 수 있다. 당시 74세 조태조 여사(수성2가 273-5번지)가 편지지 5장에 작성한 자필 문서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72년 조태조는 꿈에서 비석 어른(이서)으로부터 “내가 동사무소 뒤 하수구에 묻혀있으니 나를 찾아 다시 제사를 모셔라”는 말을 들었다. 이후 실제로 동사무소 뒤에서 조각난 비석을 찾아냈고, 철끈으로 엮어 보수한 후 예전처럼 다시 제사를 모셨다. 이전에는 배병만 씨가 제사를 모셨고, 비석을 되찾은 이후부터는 우호영씨가 맡았다. 당시 우호영 씨가 노래했던 가사를 덕수 이씨 문중에서 일부 각색했다. 이후 어느 때인가 가사에 ‘이서공 격양가’란 제목을 붙였다.
현재 불리고 있는 이서공 격양가 가사와 함께 일부 수정할 필요가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이서공 격양가 가사는 현존하는 2기의 이공제비(1797·1808) 비문 내용이 섞여 있다. 따라서 가사는 두 비문 모두를 참고해 작사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총 603자로 구성된 짧은 가사지만 가창에서 발원해 대구를 관통하는 신천 물줄기 흐름, 대구 읍성 구조, 신천 범람 피해, 제방축조 과정, 공사관계자 명단 등이 간단명료하게 매우 잘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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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이라 보름날에 쾌지나 칭칭나네 판관이후 신위전에 격양가를 불러주세
대구젖줄 신천물이 가창정대 발원하야 용계동에 모여들어 용두방천 감아돌아
건들바위 굽이굽이 남문앞을 돌아흘러 동산앞에 부디쳐서 달성성곽 옆을따라
달서천에 달라더니 사대문안 낮은지대 비만오면 물바다라 사대문은 어디멘고
남문이층 낙서루요 동편에는 동-진문 서편에는 달-서문 북쪽에는 공-북문
성의둘레 2144보 스물네측 높은성곽 경상감영 공자사당 물에잠겨 가옥침수
물에잠겨 전답수몰 백성들에 애환속에 수천년을 지냈구나
판관이후 도임하여 백성고충 살필적에 치수공사 해야하나 관아창고 비었으니
경비염출 어이할꼬 노심초사 판관이후 손출천금 내어놓고 경시방제 설계하니
고을백성 모여들어 어기영차 가래질로 흙을파서 도랑내고 방구구불러 뚝을쌓고
물길도려 신천내니 장하고도 장하도다 장하고도 장하도다 무지개같이 굽은내를
한일자로 곧게하여 새로내어 신천이라 백성들이 감읍하야 방천이름 이공제라
항주자사 소동파가 서호에다 뚝을쌓아 소공제라 하였더니 판관이후 쌓은뚝을
이공제라 하였구나 이공제비 높이세워 자손만대 기리고자 비석돌을 세울적에
도감역에 라성휘요 도유사에 오-명복 공임에는 김치황등 도목수는 김성옥이요
석수는 김-석추 각수는 김복수라 허유면이 글을쓰고 열두살난 김학철이
전면대사 크게쓰서 무진오윌 세웠구나 군수이후 치적있어 이공제비 옆에다가
영세불망 비를세워 두분같이 모셔두고 정월이라 대보름날 제를올려 칭송하네
우리대구 무궁발전 국태민안 하여주소 쾌지나- -칭- - 칭 나 - - 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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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현존하는 이공제비는 2기(1797년, 1808년) 인데 이때 발견된 비는 1797년 조성된 비다.
2) 조태조 여사 기록에는 ‘우호영’, 덕수 이씨 문중 기록에는 ‘우호이’로 되어 있다
3)비 이름도 ‘이공제(李公隄)’, 향사 명칭도 ‘이서공(李漵公) 향사’인 만큼 ‘이후(李侯)’에서 ‘이공(李公)’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이어지는 후반부 가사에도 ‘이후’가 3번 더 나타난다.
4)‘진동문’으로 수정해야 한다. 대구읍성 동문 이름은 ‘진동문(鎭東門)’이다.
5)2,144보가 아닌 2,124보로 수정돼야 한다. ‘영영축성비’ 및 기타 사료에는 모두 2,124보로 나타난다.
6) ‘김학철’이 아닌 ‘이학철(李鶴喆)’이다. 1808년 조성된 비 뒷면에 ‘전면대자이학철십이세서(前面大字李鶴喆十二歲書)’라고 분명히 명기되어 있다. 현재 이학철이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